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세상사에서도 이름은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름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자신의 성을 상으로 내리듯이
이름은 귀한 것입니다.

'육룡이 나르샤'란 드라마에 이지란이란 장수가 나옵니다.
이성계의 의형제이지요. 이지란 여진족 사람이긴 하지만
이성계와의 관계가 돈독하여 '이씨' 성을 지니는 영광을
누립니다. '이방지'라는 삼한제일검의 칭호를 사용하는 이가
있습니다. 얼마전 정도전을 구하는 공을 세우자, 이성계가
직접 성과 이름을 하사합니다. 감격이지요, 그에게는.

반면 어느덧 세월은 흘러 지금은 이름이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부모님의 이름조차도 그렇습니다. 책에도 언급되는 목사님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요즘은 특히나요.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살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일침이지요. 자원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야말로 사랑을 나누는 삶 말이지요. 
한숨에 섞어서, 
원망의 말에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말하는 것 말고요.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인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삶이나
이름이 높여지는 삶이나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모두 '사랑하는 삶'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사랑의 징검다리가 많이 생기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다시피 십계명의 제2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나무나 돌이나 금속이나 어떠한 것으로도, 짐승이나 물고기나

신령하게 생긴 바위나 나무나 어떤 것도, 심지어 하나님

당신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십니다. 요즘에는 무엇보다도 '돈'이

최고의 가치를 자랑합니다. 하긴 옛날에도 돈은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권력을 누렸긴 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돈의 매력은 커집니다. 돈의 노예가 될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지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저도 조심해야겠네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언제나 살아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시공간을 창조하셨으니 당연합니다. 집, 회사, 차 안, 길거리,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카페에도, 과거에도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그런 분을 어떤 형상으로 빗어서,

깎아서, 주조해서 만들어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되버립니다.

그냥 흙이나 나무나 금속 덩어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가두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제대로 섬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질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

히브리어에서 질투라는 단어에는 '정열' '열정'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열과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가둘 수 없는 분입니다. 만들어지지 않는 분입니다.

가두고 만드는 순간, 그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적도 없고, 만지지도 못하고, 마음이 없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음성.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섬깁니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아닐까요.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듣고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스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제국 바사(페르시아)의 왕후입니다. 

유대인이지요. 남편은 영화 300으로 유명한

크세르크세스입니다. 성경의 아하수에로 왕.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친딸처럼 아끼며

키워준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제국의 2인자의

계략에 걸려 모르드개는 물론 유다 민족 모두가

몰살당하게 된 사건입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처음에 에스더는 주저합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로 나아가면 '죽는다'는 그 때의 법 때문입니다.

이전의 왕후는 반대로 왕이 부르는데 나가지 않은 일로

폐위되었습니다. 그 일로 '죽음'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죠.

어쨌든 모르드개의 설득으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왕 앞에 설 것을 결심합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에게 3일 밤낮 금식하고 기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물론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때 모르드개의 설득의 요지는 하나님입니다. 일개 천한 소수민족의 고아 여자 아이가 

왕후가 된 이유,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환란이 닥친 것도

어떤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은 아닌가? 그분의 '사랑하심'을 믿고 이 환란을 헤쳐보자.


결과는 예측하셨다시피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음모 세력들은 몰락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유다 민족은 마음 놓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숨만 부지할 수 있기를 원했는데, 그 위에 더 쏟아부어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십계명이 그 증거이고, 십계명을 담고있는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 인물 중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 확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실패한 듯 보입니다. 복음의 전파를 위해

끊임 없이 노력했지만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몸에 지병을 달고 살아야 했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했고,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고, 서로 사랑하라 했습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닌 실제 스스로의 삶도 사랑을 향한

삶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율법이 몸에 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원고를 읽으며 든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생각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참 다르게 보시는 구나. 

십계명을 주실 정도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실 정도로.

그것은 '사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