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음식일기 - 매일매일 특별한, 싱그러운 제철 식탁 이야기
김연미 지음 / 이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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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도 맘씨도 참 고운이의 음식일기, 365일 음식일기

제과제빵에서 출발 해 지금은 요리 혹은 식재료를 촬영하고 있는 저자 김연미님. 회화전공 포토그래퍼인 남편분의 순수함과 자신의 용기가 더해져 뜻밖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만 들으면 꽤나 강단있고 조금은 고집센 얼굴일 듯 싶지만 표지와 마지막 엔딩 부분에 다시금 등장하는 저자분의 얼굴을 보면 그야말로 모든 다 들어줄 것 같은 참 예쁘고 고운 얼굴이라 자꾸자꾸 표지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제과제빵이 전공이기 때문에 다양한 식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빵, 케이크, 떡 등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쉽게 따라 만들 수 있도록 레시피와 함께 기본적인 찬과 국, 단품요리등도 자주 등장한다. 365일 음식 일기라는 타이틀에 얽매이기 보다는 가족, 이웃 혹은 자주 들르는 시장 상인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들도 있어 읽다보면 그야말로 누군가의 '일기'를 읽고 있구나하는 마음이 든다. 블로그를 하는 저자라서 굳이 책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사기의 아침시간>리뷰에서도 적었을 것 같은데 PC 혹은 휴대폰으로 보는 것과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 재미는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맛이 다르다. 우사기님의 책이 아침 혹은 브런치를 즐길 때 함께 하고 싶은 책이었다면 김연미님의 <365일 음식일기>는 저녁 혹은 새벽이다. 물론 책을 읽다보니 도저히 멈출수가 없어서 늦은 오후에 다 읽어버렸지만 종종 꺼내읽게 될 시간대는 분명 저녁 이후즘일 것이다.  ​

읽다보면 남편 '태영'님께서 자주 등장하시는 데 피곤한 아내분을 위한 상차림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회화전공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에 알게 되었지만 남편분의 사진책도 은근 기대가 될 정도로 저자가 담긴 페이지의 사진도 보기 참 좋았다. 그런 남편을 위해 정성껏 구웠다는 삼겹살 상차림 사진.


 

 

 

엄마의 살림솜씨를 자랑하는 것은 과하다기 보다는 참 부럽고 예뻐보였다. 세상의 거의 모든 엄마는 자식들의 자랑이며 롤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철들기 전에야 엄마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이고 닮고 싶지 않다고 투정부리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엄마처럼'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어머니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에 정성을 쏟았던 것이 좋은 습관이 되어 저자에게 남아있는 것처럼 나도 혹은 다른 누군가의 딸들도 그렇게 각자의 엄마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열 두살 터울의 언니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는 데 언니가 있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공감이 많이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들었던 생각은 난 저자처럼 친근한 이웃이 있을까? 혹은 이와 반대로 부족하고 모자르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고는 있는가 하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었다. 그래서 더 이 책이 참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이웃과 마음을 나누고 정성을 나누면서도 받은 것만 기억하고 준 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저자처럼 나도 주는 기쁨을 배워야지, 더 많이 느껴봐야지 하는 목표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고 주고 싶은 이에게 이 책 부터 한 권 선물해주고 싶다. 요리도 잘 못하고 글도 잘 못쓰는 내게 그야말로 '책'은 고마운 존재다. 이 책이 그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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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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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부터 여러매체에 기사가 실려 독서리스트 1순위에 올려두었던 미야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 기사를 읽고서는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진 잇시키 마코토의 <피아노의 숲>을 떠올렸다. 둘다 피아노를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양과 강철의 숲>이 이전의 피아노를 소재로 한 작품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피아니스트가 아닌 조율사가 주인공이라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않았던 조율사분들의 이야기를 도무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어 저자 뿐 아니라 독자인 나조차도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소재도 좋았고 도무라가 조율사로서 한 발 한 발 내딛어 가며 성장하는 과정도 좋았다. 이 작품을 보다 더 매력적이게 만든 것은 본문에서도 총 세번이나 언급되었던 '하라 다마키'의 다음의 문장이다.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처음 저 문장을 접하고 책을 읽는 도중에 하라 다마키의 단편집을 찾아 읽게 될 만큼 정말 멋진 문장. SNS에도 저 문장을 맘에 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함께'읽고 있구나 하는 묘한 기분을 들게 해준 문장.

 

 

가즈네를 통해 가정용 피아노만 조율하는 수준에서 멈춰져 있던 도무라의 목표가 콘서트홀 피아노까지 확장되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싶었다. 그러나 맨처음 혼자서도 숲에서 길을 잃지 않던 도무라가 이타도리, 야나기 등의 선배조율사들과 함께 그리고 고객인 가즈네에 이어지는 과정이 비단 양과 강철의 숲 뿐 아니라 저마다의 숲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람, 혹은 관계'의 중요성과 필연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아 결말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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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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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부터 다시 한국문학, 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는데 그 중 최은영의<쇼코의 미소>는 우왓! 하는 감탄이 나올만큼 맘에 들었다. 맘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다소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저 좋았다라는 정도로는 뭔가 아쉬운 것 같아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맘에 들었다'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마치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선 표제작 <쇼코의 미소>부터 감상을 적자면 타인의 불행이 별볼일 없는, 그나마 불행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단조로움 삶이 행복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우월감마저 느끼게 할 때가 있다. 작품 속 소유와 소코는 서로에게 있어 일정 기간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안도하고 좀 더 힘차게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는 그런 존재.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20여년 전(이렇게 적고 흠칫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벌써 그렇게 되다니!)한일 교류가 분명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못해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두살 위의 언니는 당일로 마무리되긴 했어도 짝을 이루었던 일본인 친구와 편지를 한동안 주고 받았고 선물로 직접 만든 테디제어를 받았던 것도 기억한다. 아마 이 인형을 부모님 댁 창고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암튼 그런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기분좋게 읽어가다가 쇼코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멈칫하게되었고, 소유가 대학생이 되어 쇼코를 방문했을 때 또 한번 멈칫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방문, 기왕이면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이에게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때는 평소에 제정신이었던 사람도 정신을 놓고 싶어질텐데 쇼코의 상실감과 부끄러움과 절망이 어느정도 였을지, 또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한 우월감에 사로잡혔을 소유의 마음은 왜 또 납득이 되는지에 대한 좌절감이 동시에 느껴져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러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집에 내려오지 않는 소유를 찾아 아픈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 소유 할아버지의 모습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라 사람들이 많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참 맘에 들었다. 소설을 읽고 울 수 있는 내 닫히지 않은 감성이 좋았고, 이런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소설을 써준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어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 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쇼코의 미소] 중에서-



수록된 모든 작품이 다 이야기 나누고 싶을만큼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지만 혼자 고민끝에 한 편만 더 이야기 하자면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이어야 할 것 같다. 서두에 공선옥 작가의 소설이라고 언뜻 내비친것처럼 한국 현대사에 아픈 사건들이 참 많았다. 아니 많다. 과거형으로 끝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곳에서도 사건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내용은 인혁당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결혼 후 겨우 행복한 가정을 꾸리나 했는데 그마저도 참 쉽지 않다. <쇼코의 미소>가 타인의 불행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참 못난 내 모습을 마주했다면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순애언니의 고통을 차마 곁에서 제대로 바라봐주지 못하고 모른척 살기로 결심한 비겁한 혹은 나약한 나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읽고 났을 때 절망이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겠다'라는 힘을 얻게 한다는 점이 최은영 작가의 놀라운 필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못나고 비겁한 나이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며, 그래서 다시 제대로 살아보지 않겠냐고 이끌어주는 작가의 손길이 글에 묻어났다. 내용은 참 아프고 먹먹한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참 따스했다.


수선집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오 분 거리였지만 엄마와 이모는 일부러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이모는 하교하는 여고생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고, 문방구 앞에 멈춰 서기도 했고, 전봇대에 묶여 있는 개를 오래 쓰다듬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이모의 머리 위에 내리비치는 햇빛을 바라봤다. 그럴 때면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갔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리라는 이상한 낙관이 마음에 배어들었다.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중에서-




이렇듯 좋았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출간된지 수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 까닭은 표지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적지 않을 수 없다. 여인의 뒷모습, 그것도 완벽하게 뒷모습도 아니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옆모습이 보이는 표지가 난 무서웠다. 찰랑거리지 않은 머리결이라 무서웠고 주머니에 넣은 손에 무엇을 쥐었을지 몰라 무서웠고 조금만 돌려도 눈빛이 보일텐데 그 눈빛이 어떨지 몰라 무서웠다. 지은 죄가 많아 그런 모양이다. 결코 핑계가 아님을 꼭 적고 싶다. 그래서 책 사진은 책등으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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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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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고향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돌아오는것이라고... - 에필로그-


다니구치 지로의 [아버지]가 내 마음속의 고향이 돌아오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결론부터 미리 밝혀두는 것은 어쩌면 이 리뷰가 이 책의 줄거리나 작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내 과거와 내 고향, 그리고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부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맘에 들지 않는 분들은 살포시 지나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름의 배려랄까.


15년. 작품 속 주인공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은 기간이 15년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음 부음을 듣고서야 고향에 내려간다. 이때도 그저 발인에만 맞추어 가면 될일이라 생각한 것을 아내의 강한 권유에 등떠밀리듯 먼저 내려가게 되고, 그 덕에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와의 일들을 전해 듣게 된다. 늘 이발소 일로 바빴던 아버지,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어 이혼까지 이르게 만들었고 그리해서 자신에게서 어머니와의 사랑을 상실하게 만든 아버지였다. 분명 그렇게 냉정하고 모른 척 살아도 될 것 같은 아버지가 알고보니 늘 자신을 마음에 두고 염려했으며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어찌보면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와 내 마음속 고향을 되돌려 놓는 순간 큰 의미를 갖게 만들었다.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어떤가. 아들을 염원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낳고보니 '딸'이었던 나를 엄마는 며칠 간 부정했다고 했다. 그럴리 없다고. 그렇다고 사랑을 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런저런 이유로 늘 짧은 커트머리로 유년기를 보내야했고 신기하게도 언니와는 달리 반바지차림을 좋아했던 내 모습은 사진만 봐서는 영락없는 남자아이다. 그런 내게 아빠는 늘 귀한 공주님 대접을 해주느라 풀밭에 앉을 때면 늘 손수건을 깔아주거나 무릎위에 앉혔고, 아저씨들이 많은 장소에 갈 때면 손을 꼭 잡고서는 놓치 않으셨다. 언제나 나를 보호해주셨던 그런 아빠를 나역시 작품 속 주인공처럼 어떤 계기로 인해 조금씩 멀리하다가 스무살 무렵에는 거의 안보고 살다시피 했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주인공처럼 공부를 잘했다던가 결심을 완고하게 지켜내는 타입이 아닌터라 다시금 아빠에게 새로운 기대를 하고 또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지나치게 오랜기간 멀어져 지내지 않았다는 것, 그 덕에 다시금 이전처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이 만화가 고향을 되돌려주었냐 하고 묻는다면 역시나 미처 사라지지 못한 조금의 앙금마저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 외삼촌이 주인공에게 '넌 너밖에 모른다'라고 꾸짖는 말들 모두가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주인공이 가족사진을 찍었던 카메라 브랜드'YASHICA'는 아버지가 내게 처음으로 주신 카메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그 카메라로 우리 가족을 찍어본 적이 없다. 들판에 꽃, 친구들 그리고 책 사진 혹은 여행중에 기념이 될 만한 피사체를 찍느라 정작 카메라를 주신 아버지는, 내 가족은 내 첫 필름에 담기지 못했다.


15년. 어떻게 그 긴 시간동안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나 나중에서야 후회하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며 나보다 덜하다, 더 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모님의 시계에는 15년이나 15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식을 기다리는 그 시간 내내 늘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하는 그들의 시계는 늘 같은 크기와 부담으로 흐르고 있다. 15일 만에 만나도 마치 15년만에 만난 것처럼 기쁠테고, 15일을 못봐도 15년을 못본 것처럼 아쉬워 할 그 분들. 아, 다음주면 어버이날. 아버지, 아니 아빠가 주신 그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야지, 그리고 요이치처럼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요이치처럼 찍되 요이치와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그렇게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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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여자들
캐롤라인 무어헤드 지음, 한우리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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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한 후 그녀의 작품 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전쟁속에서 늘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당하기만하는 약한 존재가 아니라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주체적으로 참전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캐롤라인 무어헤드의 이 책 <아우슈비츠의 여자들>를 만나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프롤로그만 읽은 뒤 해를 넘겼고 이제는 계절마저 지나 영화<나는 부정한다>관람을 계기로 이제서야 다 읽어냈다. 읽었다가 아니라 읽어냈다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겨우 진정된 가슴이 다시금 먹먹해졌기에 특히 어느 독자의 말처럼 페이지를 넘길수록 '여자들'의 시련도 커졌기에 소설을 읽듯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유령들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죠?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 설명하지는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17쪽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출판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유대인도 아닌데다 남성도 아니었던 제 의지로 독일 나치에 대항했던 여성들 중 생존자들 혹은 그들의 유족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과 관련 문헌을 정리했다. 초반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개별적인 사연과 함께 들려주고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참상 또한 함께 이야기 한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목격된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그저 '연기가 되었다'라는 표현처럼 사망했음을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프랑스 여자들을 떠올릴 때 '파리지엔'을 떠올릴 뿐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그 뒷전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고민이되었던 부분이 제국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같지도 않지만 서로 대립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나고 자란 내게 공산주의는 부정되는 것이고 제국주의역시 부정되는 것이며 동시에 반유대주의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고 어느 순간 무엇이 과연 옳은것인지 그 판단을 명확하게 내리기가 애매해졌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이 결코 옳지 않다라는 사실이었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여성들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웃나라 혹은 이웃에게 가해지는 납득될 수 없는 폭력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안위마저 내놓고 투신하는 여성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살아 있지 않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482쪽


결국 자신들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말처럼 어느 누구하나 '혼자'서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닌 '함께'살고자 했던 그 마음이 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끌었으나 같은 이유가 역시나 그들을 그 지옥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위의 발췌된 생존자 샤를로트의 '나는 살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녀를 살아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과연 나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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