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당신에게
5년 전이었나. 당시에 내 친구는 해외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헬조선에서 사무직 노동자로 사느니 차라리 천국 같은 곳에서 육체노동자로 사는 게 백 번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결심을 하면 실행은 신속하게 진행하는 편이라 다음해 친구의 이민 소식이 들렸다. 내가 어느 나라로 이민을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방긋 웃으면 하늘을 가리키며 천국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며칠 뒤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기사 제목은 생활고 끝에 일가족 동반 자살이었다.
그 친구가 돌아왔다. 천국에 사는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행 목적으로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살기 위해서 다시 왔노라고 말했다. 천국은 살 곳이 아니더군. 따분한 곳이야. 천국에는 불행한 사람은 없는데 행복한 사람도 없어. 행복이 뭐야 ? 불행의 상대적 개념이잖아. 이승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인간이라는 게 말이야...... 타인의 불행에 기생해서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족속이더군. 잘 생각해 보라고. 그렇잖아. 이웃이 행복하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기는커녕 질투가 먼저 나. 반면에 이웃이 불행에 빠지면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삶에 만족을 해.
그게 인간이라니까. 우리가 문학이나 드라마 따위를 왜 보겠어 ? 그 이야기 속에서 불행을 엿보기 위해서 보는 거야. 문학 속 주인공치고 제대로 행복한 놈 봤어 ? 아, 난 천국에서는 못 살겠더군. 시바..... 죄다 행복한 놈뿐이야. 그곳에서 불행의 스펙터클을 구경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지.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왔다네. 그때는 몰랐는데 나는 페루애가 참 좋아. 넌 좋은 놈이었어. 너를 보면서 나는 꽤나 행복했거든. 너의 불행이 다수에게는 행복을 주니까. 고마운 녀석, 내가 한 턱 쏜다아 ~
농담처럼 시작한 글이지만 : 나는 불행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가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은 불행을 먹고 자라나는 기쁨이니깐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괴수 영화에 나오는 괴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불행을 자처한 예수처럼 가난한 예술가는 자신의 불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그것은 휴머니티를 위해 쓰러지는 괴수영화의 괴물과 같다. 영화 속 괴물은 도시를 파괴하며 대나무도 아니면서 우후죽순처럼 솟은 도시를 쑥도 아니면서 쑥대밭으로 만들지만, 괴물의 위악은 붕괴된 가족을 복원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내가 니체에게 홀딱 반했던 데에는 그가 쓴 위대한 잠언 때문이 아니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신이 길렀던) 병든 말을 부여잡고 통곡했던, 학대받아 숨진 말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연민 때문에 미쳐 버린 불행에 있었다. 하물며 고흐는 말해서 무엇하랴. 그래서 나는 불행한 자가 성스럽다. 우리가 들장미 소녀 캔디를 좋아하는 이유도 캔디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하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나애리가 아닌 하니를 응원하는 까닭은 하니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박근혜가 조금 더 불행해졌으면 한다. 무기징역보다는 사형을 원한다. 그래야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좐인한 인간이라 욕하지 마라. 그동안 그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삶은 불행해졌으니까. 잔을 높이 들자. 너의 검은 불행에 앞에서 건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