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 전통에서의 신화(theosis) / John Meyendorff

이 글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를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교회 전통에 대해 관심을 둔다. 저자의 말처럼 동방교회 전통이 오히려 교회사의 첫 천 년간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도 주도적 역할을 해왔고, 오늘날 서구의 세계관들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맥락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저자는 그 동방교회 전통 중에서 神化라는 독특한 신학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론, 구원론, 죄론, 성령론, 그리고 삼위일체 신론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규명하고 또한 神化에 대한 오해를 제거한다.


저자는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표현을 통해 첫 부분을 시작한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바로 이 표현이 받았던 오해처럼 神化라는 개념이 신플라톤 철학의 언어이기 때문에 범신론, 혹은 철학적 사변의 산물인 것처럼 오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神化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함은 神化라는 개념이 "그리스도가 말씀(Logos)이면서 모든 피조된 인간의 본보기"(p.324)라는, 동방교회 전통의 독특한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완전한 인간"(p. 324)이라고 한다. 바로 神化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연합이 본보기로 제시된 것처럼 인간은 神化를 통해서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神化의 모범인 그리스도론은 서방교회와는 다른 동방교회 전통의 죄론과 구원론에 근거한다. 동방전통에서 죄는 아담의 죄에서 시작된 원죄와는 달리 아담의 죄에 의해 피조세계가 사탄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이 된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해결된다. 이때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운명-"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을 회복하는 것"(323)이다. 동방전통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부정인 원죄 개념을 거부하고 동시에 구원을 출발점(from)만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to) 지향성으로 꼴짓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神化의 가능성이자 토대로 제시되는 나머지 한 축은 보혜사 성령이다. 저자는 성령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는 부분에서 성령을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앙이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성령의 개인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제한될 수 없다. 특히 성령은 교회론의 절대적 근거로서 분별과 판단의 기준이 된다. 교회의 성직구조나 체제를 거부하지 않지만 판단과 분별의 최종적 권위는 성령에게만 속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령의 신적 임재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세상을 구원하는"(p. 327) 神化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하여 성령론으로 이어지는 神化에 대한 설명은 "하나와 셋"이라는 부분에서 결국 삼위일체론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보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인격으로 관계맺는 위격들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위격적 삼위일체론에서 神化는 "신적 생명 안에 인간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이미 자기들의 상호관계 안에 인간을 영접하시는 세 개의 영원하신 위격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p. 328)라고 본다. 결국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神化된다는 것은 신적 생명 안에서 나누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를 의미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모범이기에 神化는 인간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유지하고 상호 보완성과 사랑 안에서 이뤄진다.

저자는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神化)이 범신론도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융화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기에 부정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고-부정의 신학, apophatic),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본질의 융합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되는 神化는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인격적 융화를 거부하면서 본질과 에너지를 구분하고, 신적 교제의 실체성을 위해 위격적 삼위일체론으로 개념화하였다.

결국 神化는 그리스도의 모범를 따라 성령의 힘으로 완전한 인간을 이뤄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서방 개신교 전통이 칭의로서의 믿음을 강조하면서 성화의 과정이 약화되었던 한계성에 대해 보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 진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과 삼위일체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하면서도 서방기독교 전통에서 볼 때 새로운 차원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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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에서 깊이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하나님 됨으로

서평;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 하워드 라이스 저, 최대영 역(은성 출판사, 2000)

 

들어가면서


오늘날 급속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한국 개신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문제의식은 이제 일반화되고 있다. 교인수의 감소추세1), 사회적 공신력 상실, 사회갈등의 원인이라는 비판, 개신교가 타종교나 비종교인으로의 유입이 가장 높은 종교라는 현실, 특히 젊은층과 고학력층의 이탈률이 높아지는 문제 등의 현실2)이 그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문제 상황을 돌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면서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방식에서부터 콘서트 형식을 빌은 열린 예배, 스포츠 교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이 혼재해 있다는 것이다.

위기와 문제 상황의 심화 그리고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대응 방식의 중심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회자가 홀로 서있다. 교회 전체가 즉 신앙인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급속히 변하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토대로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방식을 결정하는 지도력의 책임은 주로 목회자에게 지워져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목회자들은 소위 부흥된 교회들의 방법들, 주목받고 인기 있는 목회방식들을 쫓게 되기 쉽다. 그러나 각기 다른 독특한 상황 속에서 적용된 목회 방식은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만의 또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 결과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게 되고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게 되는 양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게 된다. 목회자들은 뒤에는 이집트의 대군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힌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모세의 상황처럼 절망적인 위기에 직면한 형국이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과연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런 절박한 질문에 대해 하워드 라이스는 목회자이자 목회학 교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라는 책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유행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하나라기 보다는 그 모든 방법들의 토대가 될 근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영적 성장을 돕는 섬김의 사역으로서의 목회를 제안한다. 목회란 그 무엇보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동감 넘치는 임재를 체험케 하고 그 관계가 내면적인 측면으로부터 실천적인 측면으로까지 깊어지고 확장되도록 돕는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제안하는 ”영적 인도로서의 목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는 지,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몸 글


저자는 오늘날의 목회 현장이 심각한 혼란과 혼동 상태에 있다(p.13)3)고 진단한다. 그가 제시하는 난제들은 복잡해지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상실해 가고 교인들은 줄어가는 현실과 목회자들이 너무나 다양한 신자들의 요구들에 부응해야 하는 현실이다. 결국 목회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권위를 상실하며 혼란과 자책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해 저자는 교회와 목회의 정체성, 무엇보다 소명을 재확립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 한다.

그는 소명을 재확립하기위해 우선 교회사에 나타난 다양한 목회상과 현대교회에 나타난 목회 이미지를 비판적으로서 검토한다. 현대교회의 목회상인 교육, 상담, 사회 변화 그리고 경영으로서의 목회가 나름대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줬지만, 세속적인 훈련에 의존하고 적장 신학적 기초 위에 세우지 못한 한계로 인해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근본적인 목사 상으로 회귀할 필요성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곧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영성이 성장하게 돕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회’가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해결책을 토대로 소명과 교회의 정체성의 근본이 될 영적 지도 방법을 영적 돌봄, 예배, 교육, 사회 참여, 교회 관리 및 경영의 구체적인 영역에 적용하고, 그 근본적인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영적 지도라는 목회자 상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고 해결책으로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지, 무엇보다 목회의 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창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지도자인 목회자가 자신의 영성을 생동감있고 깊이 있게 유지할 수 있고 진정한 권위를 확립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한다. 

이 모든 내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먼저 현대의 세속화 상황에 직면한 교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관점이다. 문제 상황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 문제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해결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그리고 현실적 문제에 대해 무조건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방식보다 오히려 문제 상황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야한다는 도전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에는 사회 변화 곧 세속화의 거센 흐름에 대한 목회자의 피해의식이 반영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사회가 변했고 신자들의 다양화된 요구가 목회자를 궁지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그 상황을 분석한다. 그리고 목회자의 설교가 지배력을 상실하고 권위도 상실되면서 신분저하감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문제 상황은 사회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신자들의 다양한 요구들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아픔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안일함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섬기는 자로서의 자리를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권위적 지배자의 자리에 안주한 것은 아닌가? 이단, 신흥종교, 종파나 제의(cult) 종교라고 폄하하곤 하는 종교들은 오히려 세속화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아픔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교세를 넓혀가고 있다. 이런 대조적 상황과 비교할 때 이런 반문은 부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런 냉정하고 치열하며 정확한 자성이 토대를 이룰 때 문제의 해결이 보다 확실한 토대에 설 것이다.

저자가 개신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다양한 전통으로부터 영성 훈련의 방법들을 자유롭고 폭넓게 가져와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 개신교 영성의 한계를 극복기 위한 중요한 통찰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는 전통적으로 해오던 부흥집회나 성경 묵상, 통성 기도 등에 영성이라는 이름만 붙여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그 궁극적 가치와 목적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바로 이런 상황이 역자가 말하는 것처럼 영성 목회가 무엇인지 막연하기만 했던 문제점을 극복하게 하는 측면이다. 저자가 피정, 침묵 기도, 향심 기도 혹은 관상 기도, 영적 독서 등의 기독교 오랜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오는 다양한 영성 훈련의 방식들을 제안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이 된다.

그리고 ‘제8장 영적 지도자로서의 관리’에서 교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임들을 통해서도 영적 성숙을 추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 것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는 회의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석한다. 일반적인 회의 절차가 찬성자와 반대자를 갈라놓고 그 중에 소수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무감, 불만,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교회의 현실 속에서 많이 접했으면서도 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드러내줬다.

그리고 그에서 그치지 않고 회의의 형식으로서 ‘서로를 위한 나눔의 기도’, ‘개인의 성장력 나누기’, ‘침묵’, ‘선물 나눔; 각자가 모임에서 얻은 것’ 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안은 구체적인 적용에서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개신교 상황은 너무나 많은 교회 내부 활동이 신자들의 영적 힘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런데 회의 시간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활동들을 더 첨가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적이고 경영적인 측면까지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영적 나눔과 성장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자세 자체는 중요한 통찰력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제9장 인격자인 목사: 영혼을 살리는 자’에서는 목회자가 영혼을 살리는 자로서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사실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은 학문적 접근에 치중하게 되는 환경적 요인에 처해 있다. 이로 인해 구체적으로 목회를 해나가면서 닥치는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면에서 부족하기 쉽다. 특히 목회 현장에서 자신의 영적 깊이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가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부족하고, 단순히 기도와 말씀을 통해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머물기 쉽다. 저자가 성직자들에게 무의미해지는 예배와 설교 문제, 성직자 킬러 문제, 자신의 영적․개인적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을 찾기 어려운 문제 등 구체적으로 목회자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제안하는 것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에 제시되고 있는 영성 목회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적지않은 부분에서 너무 원론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현장에서 과연 적용될 수 있을 지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측면들도 있다. 예를 들어 화석화된 예배를 갱신해야 하고 예배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거나 모든 학습 순간은 학습자의 신앙 성장을 위한 기회라거나 하는 등의 제안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리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의 다양한 변수들 속에서 쉽게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의 제안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제안의 원론적 측면이 정당하다면 오히려 그것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킬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할 것이다.



나가는 글 : 하나님됨을 향한 돌파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찰력과 그 의미 그리고 보완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나가는 글을 대신하려 한다. 그것은 교회가 처한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유행하는 방법론들보다는 근본적인 토대로부터 대안을 구성하려 한 토대로부터의 갱신이다. 저자는 계몽주의 이후 다양한 인문학의 발전을 교회 내적으로 수용하면서 목회를 교육, 상담, 사회 변화 그리고 경영으로 개혁한 과정을 분석했다. 그는 이런 적극적 수용이 이전의 목회가 지닌 문제점들을 극복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각각의 방법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 현실을 제시하면서 한계를 지니게 된 것은 세속적인 방법에 치우친 나머지 목회의 근본을 신학적 기초에 세우진 못한 문제점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뛰어난 교수, 상담자, 자신의 삶을 다 바치는 혁명가, 치밀한 경영자 그 모두가 줄 수 없는 것, 곧 영적 목마름과 궁핍함의 문제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회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을 토대로 교육, 상담, 경영 그리고 사회 변혁의 각 차원이 영적 지도로서의 목회를 통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 지를 이어지는 각각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근본적인 기초를 적확하게 재확립할 때 너무나 다양하게 유행하는 방법들에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교회에 필요한 목회를 창조적으로 구성해갈 수 있다. 근본 토대으로부터 급진적이고 확고한 해결의 길이 생겨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너무나 중요한 통찰력이다.

그러나 저자가 재구성하려는 영적 목회에는 중요한 통찰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다. 그가 정의하는 영성 개념은 이원론적이고 개인적이며 수직적인 차원에 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p.48)이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p.43)하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는 것으로 전제하면서 바로 그런 영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영성 목회로 봤다. 물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한 영성의 요소이자 근본적인 뿌리임에 틀림없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영성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차원과 동시에 고통받는 모든 존재자들-사람과 동물 및 무생물 모두를 포함하는-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영성의 수평적 차원도 존재한다.

물론 저자 역시 이런 수평적 차원을 7장 영적 지도로서의 사회 참여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6장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직적 차원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영혼의 돌봄, 예배, 교육, 영적 지도라는 핵심적 개념들에서 하나님과 신앙인 개인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영성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영성은 개인이 겪는 실존적 허무감을 채워주는 하나님의 임재에 기초한다. 그것은 비우고 내어주는 영성보다는 자신을 채우는 영성에 근거한다. 그 결과 아무리 수평적 차원을 다시 강조한다고 해도 그 두 차원의 이분화를 막기 어렵다. 즉, 수직적 차원이 근원이 되고 수평적 차원은 그 결과 중에 하나가 되는 구조로 틀지기 쉽다는 것이다. 적어도 위계적 선후관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화는 공동체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적인 것을, 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을, 일상의 모든 영역보다는 예배나 기도 등의 성스러운 시공간을 우선시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자가 아무리 수평적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이웃과 모든 존재의 고통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쫓아 자신을 비우는 것보다는 우선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나님을 찾게 되고, 모든 일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예배와 찬양, 기도와 묵상에 무게를 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은 그가 공동체적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향한 실천적 참여와 연대의 영성은 간과하고 단지 개인의 영성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이웃의 개념에 머무는 것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또한 상처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성육신의 영성이 영적 감수성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의 차원에서만 논의되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p.155) 그리고 영성이 정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세계와의 연속성을 지녔다고 강조하면서도 생물과 무생물까지 포괄하는 우주적 영성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 역시 나타난다. 특히 이런 한계는 믿음과 행위의 이분적 구조 속에서 신앙의 실천적 영역 곧 성화 영역이 등한시 되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어렵다.

기독교 영성은 성과 속, 안과 밖, 너와 나의 구분을 허물고 모든 시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나고 그 결과 자신을 비워 모든 존재자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4) 이런 영성은 이원론적이고 개인적이며 수직적인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써의 ‘뿌리-은유’(root-metaphor)5)를 재구성하는 근본적 개혁을 통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뿌리-은유’가 내포하고 있는 이원론적 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은유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개인의 수직적 관계를 근원에 두는 영성에 기초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 두 차원 자체의 이분적 구조가 전제되지 않은 영성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은유의 재구성을 위한 영성 모델은 중세 신비가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중요한 모범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영성에 대해 길희성 박사는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6)고 평한다. 엑카르트의 영성이 그 절정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영혼의 근저에 태어난 하느님에 근거하여 '하느님 없이' 자기 충일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안과 밖, 내면과 실천, 종교적 삶과 일상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느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느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남아있는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하나됨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닌 영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나와 하나되지 않고 나의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이유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되는 절대긍정인 것이다.7)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성의 궁극적 단계를 표현하는 “하나님 아들의 삶”이라는 뿌리-은유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안과 밖,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내안에서 샘솟는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 밖으로 확장해가는 영성을 표현해 준다. 여기서 수직적 차원인 임재의 은유는 깊이의 차원인 근저의 은유로 변이되고 있다. 하워드 라이스가 제시하는 영성은 에크하르트의 영성처럼 통전적인 영성 모델과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는 뿌리-은유를 재구성함으로써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하워드 라이스 저,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 최대형 역 (은성출판사, 2000)

김진 저, 기독교의 총체적 영성을 향하여, ‘말씀과 신학’(한국 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997/12 제17호), pp. 92-106.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맥페이그 저, 은유신학-종교 언어와 하느님 모델, 정애성 역 (다산글방, 2001)

이원규 저, 한국교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한기독교서회, 2000)

한인철 저, 선교의 또 다른 문지방을 넘어서, “새길 이야기” (도서출판 새길, 2000 여름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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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非常의 비상飛上"


오랜만에 교정을 거닐고
오정못 가에 앉아 가만히 바라봤다.
쉼....

"비상飛上"이란 제목의 저 조형물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곤 한다.

물방을 떨어지는 모습같았는데
어느날 녀석의 이름이
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음이 하나 떠올랐다.
" 왜 비상일까?..."

그 물음을 쫓아
오정못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존재의 거대한 날개짓"이 보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인 비춤인가?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가?
그 경계의 일렁임이 숨죽이고 부드러워질 때
존재의 소리없는 음성이 탈은폐된다.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
모든 존재는 이 세계의 날개이고 깃털인 것을...

나무도 돌맹이도 나도 그득한 "빔空"임을 깨칠 때
"나"란 내 안의 "또 다른 나",
그 노래의 "울림"이자 "공명共鳴"이고
모든 것을 맛보는 "비춤"이자 "잔영殘影"임을 깨칠 때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나" 위로
모든 존재의 추락이 비상飛上으로
일상이 비상非常으로 탈각脫却된다.

비상非常은 일상이, 일상은 비상이 되고
하늘로 떨어지고
심연으로 날아오른다飛上.

내 근저로부터
비상飛上과 탈각脫却의 침묵이 울려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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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4 0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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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4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사진이 뭔가 묘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셨군요. 누군가가 찍어놓은 사진을 퍼왔습니다. 제가 오정못을 보면서 묵상한 것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또한 그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사진이었습니다. 합성한 것은 아니고요. 잘 보시면 그 사진이 뒤집어 진 것임을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거울처럼 잔잔한 연못에 비친 세상이 오히려 더 진실해보이는 묘한 사진이죠.

이곳의 다른 사진들도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제 동생이나 아는 지인들, 혹은 여기 저기서 퍼온 것이죠. 저도 요즘들어 디카에 대한 소유욕이 가득해집니다. 특히 이곳 서재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필요성을 절감했죠. 님의 말씀처럼 오래 고민해서 진득하게 우려낸 글보다는 순간 순간의 영상과 반짝이는 상념을 담은 글들이 요즘은 더욱 주목을 받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호들이 나름대로 의미와 호소력을 전해주더군요. 저 역시도 일상 속을 급히 내달리다 문득 문득 잡아두고 싶은 장면과 상념이 그냐 쓰러져 갈 때 참 안타까운 때가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그냥 그렇게 자연스레 붙들지 않아도 되는, 아니 붙들지 말아야 되는 것들에 대한 어리석은 욕망을 새로운 소비재가 자극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님의 말씀처럼 거대한 교회들이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포착하고 이용하는 모습들에서는 성육신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배울점이 참 많죠. 하지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늘 천대받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면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것은 아닐까하는 혐의을 거두기 어렵네요. 가장 큰 실패의 순간 속에서 하느님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셨던 예수님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은 너무 많이 앞서 가신 분이셨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죠. 우리 시대의 교회가 현실에 대한 적응이라는 명분으로 조금만 앞서 가는 것은 아닌지....

그 책 저도 참 읽기 싫더군요. 서울이면 당장에 달려가서 돈을 환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이제 처음 부분만 읽은 것이라 평하기는 이르지만 아까운 나무들만 죽어나간 게 아닌가 싶군요...그 책 저도 이제 3장 읽을 차례입니다. 이놈의 게으름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힘내서 남은 시간 잘 활용해봐야겠네요... 


2004-05-25 0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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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께 오랜 기도의 저력이 있으시군요. 저 역시 에크하르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제가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말로 설명되기는 어렵다시면서도 그렇게 직관적으로 느끼시는 분들이 그져 대단하다 느낄 따름입니다. 하여튼 저도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정배 교수님이나 이경재 교수님 같은 분들의 글과 가르침에는 저 역시 고개가 숙여집니다. 학문적 깊이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회의가 들다가도 그런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어쩌면 또다른 욕심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중요성은 부정되지 않으니까요.

오늘은 송교수님과 김교수님의 논쟁적인 세미나를 참관했습니다. 무척 흥미진진한 논쟁이었습니다. 역시 구경 중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이라더니....그 세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에 직접 중계해 드릴께요. 이제 대전으로 돌아가서 살림의 신학 늦었지만 계속 봐야겠습니다. ^^::

2004-05-27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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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얼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이곳에 있는게 중요한거야" 제가 듣기에도 무척 괜찮군요...감동입니다^^

남이섬의 기억 이야기, 인상적입니다. 뭔가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억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느낀 그 무엇인가가 더 깊은 흔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초등학교 저학년즈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의 화단에 물을 주고 그 앞에 앉아서 집에서 함께 살던 개 쫑을 쓰다듬으며 앉아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고요함, 그 잔잔한 평화의 느낌이 제겐 참 소중하군요...그런 화단을 봄이면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의 손길도....

학술 세미나의 분위기가 제게는 좀 아쉬웠습니다. 지난번의 그 웨슬리 세미나도 그랬군요. 좀더 진지하고 냉정하게 논의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기독교 초기의 종교회의들에서 벌어진 그 냉혹할만치 치열한 논쟁들을 통해서 신앙이 형성되고 전해진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목숨을 걸지는 않더라도 보다 진지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님 말고....혹은 둘다 일리가 있네...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은 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주관성이 지닌 위험성을 견제해주고 보다 발전하고 깊어질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죌레가 이야기했었죠. 저 역시 그런 의견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정배 교수님의 질문을 들으면서 "역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천지비괘, 지천태괘 등의 명칭을 정확하게 사용하시는 걸 보니 님께서도 주역을 좀 아시는 가 봅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학부때 주역을 공부한 적이 있어서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감을 잡았었죠. 주역에서는 각 괘에 위와 아래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天地否: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있는 비괘는 안정적인 위치를 보여주지만 이미 굳은 안정성 때문에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地天泰: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 있으면 땅이 쏟아지고 무너지면서 엄청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그 위치가 거꾸로 되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괘의 위치를 역위逆位라고 합니다. 물이 아래 있고 땅이 위에 있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물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있어야 비가 내리고 싹이 돋는다고 보는 식이죠. 만일 비괘를 중심으로한 정치신학을 구상하면 질서, 안정, 조화로운 체계를 중시하게 합니다. 어떤 혁명도 일어날 수 없고 지배체계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게 되기 쉽죠. 하지만 태괘를 중시하면 혁명이 가능합니다. 사실 성육신은 하느님이 낮아져서 인간이 되는 역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괘로 본다면 지천태괘가 되겠죠. 이렇게 보면 서창원 교수님이 말씀하듯이 그리스도가 역의 완전한 실현인 것 만이 아니라 태괘의 실현이 될 것입니다.  

사실 주역은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입니다. 그것을 역전시키고 오히려 땅을 중시하는 역이 정역이라는 우리 고유의 역이죠. 바로 그 정역에서 후천개벽의 혁명사상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후천개벽은 기독교 식으로 하면 종말사상과 유사하죠. 그래서 이정배 교수님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 있는 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신학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할게 정말 많이 밀려있습니다. 다음주에 발제 세 개, 과제 두개, 길희성 교수님과의 만남 준비, 그리고 시험에 그 후에나 에크하르트는 생각해야할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이렇게 집중이 않되는지....^^:: 그래도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큰 복이죠^^ 님도 화이팅^^

 


 


2004-05-28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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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세미나의 내용을 훨씬 정확하게 파악하신 것 같군요. 괜히 아는 척 했나봐요^^:: 사실 전 그 괘 상의 의미와 이정배 교수님의 관점은 이해했지만, 서창원 교수님께서 뭔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었거든요. 그 대화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상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주역이 체제 전복적인 사상의 기반이었다고 배우셨다는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전 오히려 반대로 된 관점의 책을 본 적이 있어서....사실 좀 이상했거든요. 역위를 중시하는 관점이 주역에 나타나는데 왜 체제 옹호적인 관점일까 하고요....그런데 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 생각과 비슷해서...
두개는 저희 수업이고 하나는 학회의 것입니다. 시간은 없는데 게을러서....그냥 대충해야할 것 같습니다....
 

Ⅷ. 하느님 아들의 삶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pp. 271-294.

들어가면서

앞선 장들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단계는 인간 영혼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 자신 근저에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이루는 것이다. 본 장에서 길희성은 바로 그 탄생을 통해 이뤄진 '하느님 아들의 삶'을 엑카르트의 설교나 가르침들을 통해서 살펴본다.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은 하느님 아들의 삶이 지닌 전반적 특성과 함께 '윤리적 함의'와 '활동적 삶을 향한 지향성' 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우선 책의 순서보다는 논리적 흐름을 따라 내용을 정리하여 보다 분명하게 내용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하느님 아들의 삶이란?]
영혼의 근저로 돌파해 들어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은 무엇보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272)만 살아가는 하느님의 삶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안에 이미 하느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하나된 하느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에 하느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외부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할 필요가 없고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하느님 아들은 자기 밖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갈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고 본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은 물론이고 봉사처럼 선한 뜻을 담은 행동들조차도 외적인 목적이라면 안 된다. 자신 밖에서 기인한 외적 원인들에 의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죽은 것이고 심지어 하느님께 무엇이라도 받는 것조차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것이며 영생의 삶에서 이탈되는 것으로 본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271)는 것이다.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의 하나됨이 탈은폐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하느님과 자신을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는 모든 것들은 어리석은 망상에 고착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들의 삶의 특성]
철저한 자기 부정 곧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고 하느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의 첫 번째 특성은 모든 존재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변화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될 때 무가치해 보이던 존재들까지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를 지니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가 하느님으로부터 일탈된 타락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보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피조물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의 책"(274)이라고 한다.
두 번째 특징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느님과 동등한 삶으로서의 자유로운 자족성이다. 하느님은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이자 근거이다. 바로 그런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하느님 아들도 역시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충일함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충만한 자족성은 자신 안에 어떤 분리도,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소외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밖의 그 어떤 피조물도, 심지어 하느님에 의해서도 강요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타자에 의해 부과된 의무나 타자에 의해 유발된 동기나 목적 혹은 이유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누구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살지도 않는다. 카푸토의 표현대로, 그는 하느님을 위해for God 살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부터out of God 산다."(276, 277) 오직 스스로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하느님의 자발적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런 자족성은 전통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무신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엑카르트의 관점은 무신론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무신론"이라고 해명한다. 즉,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와 분리된 하느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진 차원이라는 것이다. 바로 신비주의적 휴머니즘의 차원이자 "비종교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엑카하르트가 이런 관점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가 지닌 표피성과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자기 기만적 이기심과 자기애를 간파했다고 한다.
세 번째 특성은 자발성에 근거한 의지와 내적 동기에 대한 강조이다. 엑카르트는 어떤 행동이 옳은가하는 윤리학적 관심보다는 어떻게 본질적 삶을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뒀다고 한다. 그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하느님 아들의 자기 충일성에 근거한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보다는 의지와 동기"를 "행위보다는 존재"를 중요시하게 된다. 즉, 어떤 행위를 했느냐보다는 어떤 존재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행위가 우리를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행위를 성화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존재의 뿌리에 근거하지 않는 한,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 행위라 해도 거부한다."(282) 그는 성례전이나 그밖의 경건한 행위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내면적 동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종교적 형식주의나 의례를 통해 교권을 유지하던 교회의 권위에 반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에게 적용된 28개조의 최종 이단 혐의 가운데 4개조가 외적 행위의 무가치성을 강조한 발언의 문제였던 점은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네 번째 특성은 활동적 삶의 영성, 곧 비종교적 종교성이다. 엑카르트의 초탈과 초연은 결코 정적주의나 관조적 삶으로 도피하지 않고 참된 활동적 삶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힘이 된다. 이런 지향성에 대해서 저자는 불교에 빗대어 "진심眞心의 체體에 근거한 용用으로서 활기찬 삶이 전개되는 것"(287)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특성은 『루가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엑카르트의 독특한 해석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해석에서 마리아는 세상일을 등지고 하느님에만 집착하는 관조적 삶을 나타내고, 마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놓아버림으로써 세상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활동적 삶의 경지를 나타낸다. 그는 이 둘 가운데 활동적 삶을 더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봤고 신비한 종교적 경험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다섯 번째 특성은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이 하나를 이루는 관조적 실천성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는 하느님에 집착하지 않고 떠나서 영혼의 근저에 자리잡은 충일한 존재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세상사를 수행해 나가는 실천적 삶을 더 성숙하고 고차적 삶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마르타의 삶은 실천적 삶의 자리에 있을 뿐 그 실천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것은 실천을 통해 관조하는 더 높은 경지로서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지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빛에 감싸여 활기차게 수행"(288)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마저 떠나는 "돌파"를 통해 자기 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사는 하느님 아들이 살아내는 본질적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성과 속,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린다. 도피적 세계 부정과 맹목적 세계 긍정을 넘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이원적 대립이 극복되고 세상 안에서 완전히 편안하게 느끼는 종교적 내면성이 열리는 것이다."(289) 이처럼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두 차원이 같이 가며 하나인 마르타의 경지는 관조와 활동, 초탈과 헌신이 하나인 영성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당연히 신비 체험이나 영적 경험 자체에 집착하거나 도취되지 않는다. 그 결과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되는 개방적 영성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 아들의 삶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안과 밖, 존재와 행위를 이분적 단절이나 역설적 모순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충만에 근거한 순수한 내적 자발성은 실천적 삶을 지향함으로써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둔 행위를 의도하고 있다. 그래서 "엑카르트의 사상은 "중세적 질서인 성과 속의 외적 구별, 종교적 일과 세속적 일의 형식적 구분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과 행동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강력한 인격적 윤리를 형성한다."(284) 결국 "그의 윤리학은 존재와 행위, 존재와 당위, 인식과 실천 그리고 존재론과 윤리학이 하나인 '존재의 윤리학'이며 외적 행위보다는 내적 마음의 태도를 근본으로 삼는 '내면의 윤리학'"(281)인 것이다.
여섯 번째 특성은 무엇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에게 여전히 어떤 참회의 행위나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 금식, 철야, 기도 등과 같은 참회의 행위보다는 "사랑의 고삐"를 매는 것이 수천 배 더 낫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함 짐을 진 자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참회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292)고 한다. 이런 엑크하르트의 활동적 영성이 중세적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길희성은 그럼에도 내적 삶의 근원적 순수성으로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활동적 영성의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그 절정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영혼의 근저에 태어난 하느님에 근거하여 '하느님 없이' 자기 충일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안과 밖, 내면과 실천, 종교적 삶과 일상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길희성은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해 살펴본 후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엑카르트를 평한다.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293)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느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느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남아있는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하나됨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닌 영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나와 하나되지 않고 나의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이유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되는 절대긍정인 것이다.
완전한 하나됨의 삶인 하느님 아들의 삶은 종교적 형식이나 교리, 신앙의 내용 등을 강조하는 제도적 신앙에 대한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해체와 전복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하느님 아들의 삶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어떤 매개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놓인 어떤 것-내 밖에 있다면 하느님마져도-도 우상이며 참된 구원의 걸림돌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고 교회의 전통 밖이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예수의 믿음이 나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들이 되었는가, 그 삶을 누리고 있는가 만이 중요할 뿐이다. 여기서 믿음이냐 행위냐의 이분법적 도식이 자연스레 해체된다. 
이렇게 엑카르트를 통해 어렴풋이 그려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빈틈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견고하고 또 신앙의 실존적 차원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신앙이 삶의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는-을 돌이켜 볼 때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밖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건져주는 초월적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며 경배하는 데 너무나 익숙한 신앙의 자리에서 볼 때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큰 괴리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초탈하여 돌파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한 소망이 자리잡고, 갈급한 갈증의 요구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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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0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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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공부는 않하고요, 숙제는 늘 벼락치기로...^^::
오늘 이정배 교수님께서 고3 아들 만큼만 자고 공부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성실한 열정에 감동받았습니다....
어제 문자가 넘 늦게 도착해서 답장을 못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 양태에 붙들린 집단신경증으로서의 신앙....심각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통찰력이죠. 오늘 아침에 제 책꽂이에서 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종교"라는 책을 오랜만에 뽑아봤습니다. 여기 저기 설익은 비판과 비평을 적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 아련한 그리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빌려드릴께요.
향린교회는 제 친구와 깊이 관련된 교회입니다. 기장(기독교장로교)측 교회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기장측에서 공부마치고 전임으로 나가 있습니다. 녀석이 사역 하던 교회 이름도 향린교회였어요. 그 향린교회와 관련된 교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일궈나가보고 싶은 욕심도 있죠. 저도 이제 살림의 신학을 읽어야겠네요.
콩나물 시루에 물뿌리듯....^^::

2004-05-27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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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밖에 있는 하느님은 필요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마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뜻인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이 태어나게 되면 내가 곧 하느님이 되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내 안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밖에 있는 하느님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한 것이니까요. 그 밖의 하느님과 만나게 되지만 그 하느님을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죠.

 또한 밖에 있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본성을 묘사하려는 인간 언어의 한계, 상징성 때문에 어떤 표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결국 왜곡된 상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밖에 있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네 그런 인식론적 맥락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진짜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똑같이 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하느님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하고 인식할 수 있다해도 그 역시 여전히 내 마음과의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죠.

에크하르트 자신도 하느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 자체를 금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변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에리히 프롬이 분류하듯이 권위주의적 종교와 인간 중심적 종교를 생각할 때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내 밖에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나와 차이가 크면 클 수록 더 능력이 있는 권위적 신을 바라보는 종교를 말하죠. 인간중심적 종교는 오히려 인간 안에 신적인 것을 눈뜨게 하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도록 하는 종교를 말합니다.  에크하르트를 신비적 인본주의라고 하는 길희성 박사님의 표현이 보다 적확한 것 같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만 그 인간 안에 하느님과 일치되는 신비의 영역이 있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관점이죠. 하느님의 능력이 뿌리가 되지만 그 뿌리가 내 안에 자리잡고 자라나는 것이죠.

성경 말씀에도 하느님의 마음을 품으라고...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라고...하느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씀이 있죠....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은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영성".....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영성, 너무나 소중한 뿌리인 것 같습니다.  


2004-05-2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울

너는 뭐니?
나는 너.
너는 뭐하니?
널 보고 있지.
왜 날 보고 있지?
난 널 보고 있어야만 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진정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시야에서 너를 놓칠 수 없어.
때로는 너를 버리고 싶어
너를 지워 버리고 싶어
너를 묻어 버리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나의 존재가 진정한 너의 모습을 보고 싶어해.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오늘도 거울 앞에 섰어.
한 생을 다한다 할지라도
다음 생을 기약한다 할지라도
너를 바라보는 마음은 내 삶의 의미일거라 생각해.

                                         원성의 "거울" 중에서

 

내면 깊은 곳에서 불쑥 솟아오른 외로움

반가우면서도 어찌할지 몰라 서성인다.

가만히 내 안을 외로움 응시하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외로움의 여백 잔잔해 지고

고독이 그윽하게 베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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