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날개옷"

서평: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 J.L. 곤잘레스 저, 이후정 역(컨콜디아사, 1991)

 

들어가면서

곤잘레스의 “세 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문제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두 가지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전통적인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에 의한 혼란, 둘째는 전통적인 신학으로 대처할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상황들이다. 그는 초대 교회에서 현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이외에 세 번째 다른 신학 유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서와 그 메시지를 다르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오늘날의 혼란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의미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p.24) 우선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후에 저자의 분석과 주장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또 저자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성취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 요약

[제1부 세 가지 유형-그 고전적 정형(定型)]

곤잘레스는 제1부에서 2세기 말~ 3세기 초경에 기독교 교회에서 정통으로 여겨진 세 가지 주된 신학적 관점에 대해 설명한다.

[제1장 지역과 인물]에서는 각 유형이 형성된 지역과 중심인물의 측면에서 각 유형을 설명한다.

유형A는 로마화, 라틴화된 도시 카르타고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라틴계 신학의 시조 터툴리안이다. 유형A 신학의 특징은 만유의 지배적인 질서인 자연법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스토아 철학”과 우주의 궁즉적인 법인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을 중시하는 “법률주의”를 통해 도덕적인 측면에 주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선구자로는 로마의 클레멘트와 헤르마스, 제2클레멘트가 있다.

유형B는 가장 헬라적이고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조류들이 혼합된 지적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유형B 신학의 특징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감각세계 너머의 ‘불변의 일자’, 곧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영향을 준 선구자로는 필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다.

유형C는 안디옥을 중심으로한 소아시와 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카르타고보다 덜 로마화되고 알렉산드리아보다 덜 헬라화되었으며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과 관련된 곳이었다. 대표자인 리용의 이레니우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유형C 신학의 특징은 목회적인 관심과 하나님의 미래로 인도되는 역사가 중심주제였던 점이다. 선구자로는 신약의 대부분과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데오빌로가 있다.

[제2장 하나님, 창조 및 원죄]에서 저자는 이단들과 이교의 도전과 박해 속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형성된 맥락을 살핀다. 이교의 다신론에 반대한 논쟁의 맥락과 영지주의와 마르시온 같은 이단 사상의 이원론이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몸의 부활 등의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의도와 그 방식들을 통해서 각 신학 유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마르시온에 반대하여 신론과 창조론과 원죄에 대한 신학을 형성한다. 마르시온이 은혜를 강조하여 율법의 역할을 멸절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터툴리안은 재판관과 법제정자로서의 하나님, 모든 존재에 대한 완전하고 완료된 질서로서의 창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는 율법을 어긴 죄의 결과일 뿐이고 죄가 유전된다는 원죄관을 형성한다.

유형B의 오리겐은 플라톤 주의에 근거해 이교 다신론과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신학을 형성한다. 그로인해 유형B신학에서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一者, 절대적 초월자이다. 그리고 오리겐에게서 창조는 원래의 영적인 창조와 타락에 의한 물질 창조의 이중창조였다. 죄는 一者에 대한 명상과 교통에서의 이탈이고 원죄는 둘째 창조에 의해 모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인임을 의미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아버지이시고 창조의 역사와 역사의 인도에 있어서 세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임을 보여준다. 그에게서 창조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역사는 죄의 결과가 아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통으로 성장하게 하려던 신적 질서를 앞지른 불순종이고 원죄는 인간의 유대성 즉, 아담 안에서 모두가 범죄한 것을 의미했다.

[제3장 구원의 길]에서는 구원의 길과 목표를 세 유형이 각각의 방식으로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인간의 곤궁은 보상해야할 법적인 빚으로서 회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회개의 새로운 법을 전해주는 율법수여자가 된다. 세례는 죄인을 씻는 행위로서 기독교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효과는 의식에서 끝난다. 성찬은 세례의식에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포함한다고 봤다. 최종적 완성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이 회복된 나라이다.

유형B의 알렉산드리아적 관점에서 인간의 곤궁은 하나님을 명상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능은 一者의 관상으로 돌이키게 하는 조명을 제공하는 것이고 결국 세례와 성찬은 영적 실재를 상기시키는 상징의 역할을 한다. 오리겐에 의하면 최종적 회복은 모든 타락한 존재까지 포함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남아있게 된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곤궁을 사탄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중심인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새창조의 몸의 지체로 연합시키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만드는 접붙임이고 삶 전체를 통해 유효하며, 성찬은 그 몸의 지체인 신자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창조주를 닮아가는 神化이고, 최종적 완성은 모두가 주권자의 공동상속자가 되며 자유와 정의 및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계속 성장하게 될 나라이다.

[제4장 성경의 사용]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던 세 유형의 성경관을 살펴본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법률가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하는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유형A신학에서의 성서의 기능은 기독교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예언과 신앙인이 지켜야할 도덕적 법칙과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유형B의 오리겐은 성경 본문이 문자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면서 특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적 교리의 체계를 찾는 것을 중시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유형론적 해석으로써 성경에서 신적 경세(oikonomia) 즉,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성서적 계시의 빛에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전적인 비젼을 읽어낸다.

[제5장 관점의 문제]에서는 세 신학 유형을 형성된 사회, 경제적 상황과의 관계를 통해서 각 유형이 수용되거나 사라지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유형B는 기독교 신앙과 헬라철학의 조화를 보여주려는 동기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자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 신앙이 멸시당하는 문제에 대해 변증함으로써 전도의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상류계급의 욕구에 기독교를 적응시키는 길을 열었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기독교 신앙이 로마의 도덕적 성취와 조화될 수 있음을 변증하려 했다. 이는 기독교가 비도덕적이라는 유언비어에 대한 변증이되었지만 동시에 기독교가 현존하는 도덕적, 법적 질서의 지지 체계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유형C 신학의 소아시아와 안디옥 교회는 주변 사회로부터 배척당했고 사회 질서의 선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교회 밖을 향해 변증하지 않았고, 가장 비천한 자들의 神化와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강조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이런 관점들로 인해 수세기 이후에 유형C 신학은 잊혀지게 되었다. 유형A가 법과 질서를, 유형B가 철학을 통해 Graeco-Roman사회에 적응하고 결국 권세있는 지식인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제2부 서구 신학의 경과]

곤잘레스는 제2부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시기까지 어떻게 변화되고 수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제6장 후기 교부신학: 어거스틴의 역할] 콘스탄틴 개종후에 제국과 교회가 서로 얽히게 되면서 유형A와 B는 지지되고, 권력과 조화되기 힘든 유형C신학에는 큰 압력이 가해졌다. 그것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오리겐의 추종자로서 제국과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제국에 대립하는 기독교의 경향 때문이었던 박해를 단순히 제국 측의 오류로 평가하고 유형C신학의 종말론적 기대를 낮게 평가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부지불식간에 기독교 신앙을 권세있는 자들의 관점에 맞게 해석해온 전통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방신학은 복음에 대한 다수의 유형B의 요소들을 유형A의 본질적인 것에로 병합시켰다. 이런 과정에 탁월할 역할을 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론, 영혼론, 악의 이해를 형성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성 및 구원받는 것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본적 견해를 보여주는 은총론과 예정론에서는 터툴리안의 유형A신학을 반영했다. 즉 구속에 있어서 은총의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하고 여 구원이 빚의 탕감이라는 유형A의 근본적인 이해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신학은 중세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위계질서에 대한 이해와 지배자의 관점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전쟁”과 같은 관점들은 교회가 법과 질서를 보전해야하는 요구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은 또한 법과 질서에 대한 유형A신학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제7장 중세 신학] 어거스틴 이후 로마의 평화는 무너지고 교회가 사회 질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형A신학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로마의 감독 대그레고리 시대에는 지배적 신학이 되었다. 중세의 유형A신학적 경향은 참회제도와 죄의 보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개념에 잘 나타난다. 유형A의 주된 범주가 법과 도덕질서이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빚인데, 중세에는 이를 사면해주는 참회제도가 발전하게 되고 결국 연옥과 ‘공로의 보고’라는 교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적 보상의 십자가에 배타적으로 집중되고 결국 그리스도에 의한 유일한 구속교리가 서방 신학에서 통상적인 것이 되었다. 

유형A신학이 중심이 된 중세의 흐름에 반대하는 서방신학자들은 주로 유형B의 관점에 의지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플라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피터 아벨라드가 있다.

[제8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서 저자는 종교개혁 시기부터 20C 기독교 사상사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각 유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한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는 유형C신학의 부분적 재발견이 있었으나 결국은 유형A신학이 중심이었다. 합리주의 전통은 유형B신학의 경향을 보이고 경건주의는 유형C의 요소를 지니지만 중심은 유형A의 영역이었다.

19C에 이르러 역사 개념이 발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유형B 신학의 성향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을 선택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근본주의과 카톨릭 교회의 반응은 유형A신학의 재긍정이었다. 20C에는 뛰어난 신학자들-폴 틸리히나 루돌프 불트만 등-에게서 유형B의 새로운 판이 나타났다. 이처럼 20C는 유형A와 유형B신학 양자의 연속과 부흥의 과정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과정은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논쟁들과 재연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제3부 현대적 의미]

저자는 3부에서 20C에 유형C신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회복되는 재발견의 과정을 살펴본다.

[제9장 20세기의 유형C신학] 20C의 기독교인들은 보편적인 교회의 성장, 제국과 문명의 지지를 받았던 콘스탄틴 시대가 지나간 변화, 북반구의 백인중심의 비젼의 실패라는 세 가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현대신학의 조류가 유형 C의 재발견을 통해 형성된다. 바르트, 디트리히트 본회퍼, 판넨베르그, 몰트만 등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역사가 다시 개혁신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유형C신학의 재긍정을 보여주었다. 유형C의 재발견은 스웨덴 루터파 전통인 룬트신학에서도 나타났다.

카톨릭에서도 떼이야르 샤르뎅, 칼 라너 등이 그런 재발견을 보여주었고 바티칸 제2공의회는 다양한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유형C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흐름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자극제가 되었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중심성, 해방자 그리스도, 성서에 대한 유형론적 해석 등 유형C신학의 다른 관점들을 재발견해냈다.

이런 재발견들은 전례(예배, 예전)의 갱신을 통해서 교회의 실천적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세례에는 죄와 악에 대한 거부의 의미가 포함되었고, 성찬도 그리스도의 수난만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축하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이런 경향은 유형C신학의 관점으로 돌이켜진 것이다.

곤잘레스는 이런 유형C의 재발견이 불일치와 분열을 낳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형C신학이 기독교가 직면한 현대의 문제상황에 도움을 줄 것이기에 21C는 인류가 정의와 평화의 주된 논제들과 씨름하면서 유형C신학이 충분히 재발견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나가는 글; 되찾은 날개옷, 입을 때와 벗을 때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자는 기독교 사상사의 복잡한 흐름들을 세 패턴의 신학으로 유형화하고 그 중에 유형C 신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기독교 역사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뒤엉킨 듯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유형화는 기독교 역사의 심연 깊이 감춰져있던 거대한 사상의 흐름들을 엮어내는 대가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의 원류인 유형A신학과 자유주의의 원류인 유형B신학이 현대의 새로운 문제 상황에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잊혀졌던 유형C신학-목회적이고 역사적이며 해방을 통해 새 인간과 새 나라의 비젼을 지녔던 초대 교회의 또다른 신학유형-이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이다. 마치 선녀가 잃어버린 날개옷 이야기처럼 전통의 옷을 벗고 그 날개옷-유형C신학-으로 갈아입을 때 현대의 문제라는 높은 벽을 날아올라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서 미래를 그려보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저자의 해석은 무엇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과 미래을 향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한국 개신교는 그 성장이 정체되고,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으로 개신교를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종교이고, 사회적 신뢰도 역시 가장 낮은 종교로서 젊은 층이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위기는 한국 개신교가 급속한 사회변화에 휩쓸려 사사화(私事化)되면서 사회적 참여에 무관심하고 더욱 배타적이며 보수적인 신앙만을 강화해온 경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1) 바로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해온 그런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은 곤잘레스가 말하는 유형A신학에 속한다.

곤잘레스의 세 유형의 관점은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 현대의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인 정통주의 신학이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 흘러온 세 흐름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절대적인 신앙의 척도로 군림해온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보여주고,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 자유주의 등의 다양한 관점 중에 어느 한 전통만을 절대시하는 우상화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유형A신학에 속하는 그 전통이 초대교회 전통의 유형C신학이 지녔던 해방과 승리의 복음, 사회를 향한 구체적 실천을 가져오는 역사적 관점 등을 상실하게 했다는 점도 폭로하고 있다. 또한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유형C신학의 전통을 회복해야할 급박한 필요성을 알려준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 유형이 모든 하나의 신학 유형으로써 어느 하나가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스스로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했다. 저자가 세 유형으로 기독교 사상사를 유형화하는 과정에서 A와 B유형의 신학 자체가 뭔가 문제를 내포한 관점이거나 적어도 유형C신학보다는 부족한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들은 자유주의든 근본주의든 현대의 혼란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못된다”(p. 24)는 저자의 언급에 단적으로 나타나있다. 유형C신학이 현대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신학 유형이다. 구체적 역사성을 초월하는 절대 보편의 관점은 아닌 것이다. 즉, 날개옷은 허공을 날아올라 벽을 넘을 때에만 유용하지 깊은 강물 속을 헤엄칠 때나 목욕할 때는 벗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이 초래한 혼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런 두 유형의 대립에 오히려 세 번째 대립의 축을 안겨줌으로써 더 혼란스러운 형국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혼란은 어느 유형도 규범화하지 않고 각 유형의 통찰력과 한계를 균형있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등의 각 유형들은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가 새롭게 대처해나간 방법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 유형이 문제가 된 것은 적합하지 않은 역사적 상황을 향해 절대화되고 규범화되었기 때문이지 그 유형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지녔던 각 방법들의 장단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그럴 때 현대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모범으로서 역사적 실례를 제공하는 의미를 지니고 양자택일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럴 때 상황과 용도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골라 입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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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에스카톤을 향한 예수의 연민"

서평: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앨벗 놀런 저, 정한교 역(분도출판사, 1992)

들어가면서


 보수적인 신앙 전통 속에서 “신앙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Faith)”의 내용이 곧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실 그대로에 대한 기술인 것처럼 믿어져왔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성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 발달하면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1)와 “신앙으로 고백된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가 드러났고 이 두 차원의 관계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는 중요한 난제로 대두되었다.

사실 그리스도론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신학적 서술로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이 의미하는 바를 해명하고 밝히는 과정이라는 것이다.2) 이런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가능케 하는 근거이자 “신앙의 그리스도”가 지닌 의미를 알려주는 기준이 되고,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탈은폐시키는 계시의 의미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모범을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해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직면한 난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동적 생명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변증법적 대화라는 필연적 요구 앞에서 앨벗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가 그려내는 역사적 예수가 전해주는 통찰력은 무엇이고 그 장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몸 글


[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제와 목적 ]

앨벗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에서 우선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저자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제와 그 목적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관심사가 신앙의 대상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의 예수’ 곧 “역사적 예수임”을 밝히면서 그 어떤 신앙의 전제 없이 연구해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호교하려는 전제없이 연구해나갈 때 일반인들이 오히려 믿음에 얻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바로 예수의 역사적 발자취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저자의 확신 때문이다.

과연 역사적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진리가 충분히 드러나는지 그 성공여부를 떠나서 이미 저자의 접근 방식 자체가 중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신앙의 그리스도 안에 갇힐 수 없는 예수의 신비와 ‘예수는 만인의 것’이라는 통찰력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전통 속에 예수가 오히려 적지않게 왜곡되었고, 그 전통을 통해서 예수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으며, 역사상의 어느 그리스도교도 예수를 전유물로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p. 11) 바로 역사적 예수 스스로가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화된 예수상은 역사적 예수가 드러내는 계시의 신비를 모두 담을 수 없다. 또한 그 계시의 신비가 오늘날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성육화하여 새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열린 계시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늘 새롭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신앙의 예수가 역사적 예수를 고백한 모범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교회의 체계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저자의 관점은 신앙의 그리스도로 표상된 예수상이 현대의 상황 속에서 화석화되고 무의미화되는 문제를 극복하는 통찰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진리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한다. 목적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라는 것이다. 그 절박한 문제의 내용은 “새전망”이라는 첫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우리 시대의 특징이 온 인류의 사활이 걸린 심각한 문제라면서 원자탄, 심각한 환경 파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인간적, 도덕적 근원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는 비인격적 메카니즘으로서의 정치, 경제 체제, 제도적 폭력 등을 언급한다. 바로 이런 말세적 상황에 직면한 우리에게 예수의 역사적 삶이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가 고백해온 교리화된 예수상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문제와 무관한 공허한 신앙이 되기 쉽고, 영혼의 영원한 삶과 구원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부터의 도피처가 되기 쉽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구원의 의미로서 역사적 예수를 체험하고 표상해왔듯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 상황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추체험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이렇게 현대 인류가 직면한 문제로부터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는 저자의 통찰력은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 즉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뿌리내려야할 삶의 자리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가 하려고 한 사역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가를 밝히는 것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자칫 둘 중에 어느 것이 참된 진리인가의 문제로 비약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통찰력은 “역사적 예수”나 “신앙의 그리스도”의 두 극단 중 하나를 절대화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함몰되지 않고, 둘 사이를 비껴가면서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드러내 준다. 두 차원의 변증법적 대화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향한 해결의 실마리를 지향할 때 표류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굳게 뿌리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앨벗 놀런의 역사적 예수 ]

저자가 그려내는 역사적 예수는 로마제국와 유대 지도자층의 이중 착취 속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도 차단당했던 가난하고 고통받는 하층민들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낀 한 청년의 삶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그는 그들의 고통과 병을 치유해주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용서를 실천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종말적 파국을 피할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과정에 로마 당국과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자 죽인다. 그러나 그의 죽음 뒤에도 그의 운동이 계속 되고 그의 뜻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을 체험하며 더러는 그가 살아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여타의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간과되기 쉬운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이 의미하는 바는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공히 강조되는 측면이다. 이런 공통적인 측면과는 달리 놀런이 그려준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특징을 들라면 무엇보다 “예수의 연민”과 “진리 자체의 권위에 의지하는 예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예수의 연민”는 그가 역사적 예수를 그려나가는 데 있어서 중추를 이루는 개념이다.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다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다름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중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가이없는 연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어떤 위대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사역을 하거나 목숨을 걸지 않았고, 오직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연민 때문이었다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참 믿음이란 연민 없이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연민의 하나님으로 계시했으며 하나님의 힘은 연민의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연민만이 인간의 연대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고 연민에 근거한 연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에게서 연민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연민은 일반적인 자비나 동정심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이 연민이 그런 차원을 넘어서 강한 감정의 근원으로서의 인간의 내부를 의미(p. 51)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함께 체험하며 느끼는 간절한 공감이자 애타는 사랑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깊은 연민의 체험을 통해서 행동하고 말했으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p. 222) 

이 연민은 성령이라는 신앙의 언어를 비신화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신앙과 교리의 언어에서는 예수의 능력이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표현되곤 했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 어디에도 성령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저자가 어떤 신앙적 전제도 없이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서술하기 위해서 적용된 일반적 개념인 것이다. 성령을 연민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닌 초월적 차원을 상실하게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성령이라는 종교적 개념은 비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이런 비신화화의 과정은 비신앙인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신앙인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를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점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A. 놀런의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또 다른 독특성은 오직 진리 자체의 권위에만 의지하는 예수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서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절대화한다. 예수에 대한 교회의 고백과 그것을 기초로 형성된 신념체계를 절대화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념체계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가 신앙의 척도이자 구원의 척도가 되기 쉽고, 예수의 신앙과 실천을 그대로 따라 사느냐의 문제는 간과되기 쉽다.

그러나 놀런이 그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는 그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를 느끼지만 스스로에게 어떤 권위적 칭호나 존칭를 붙이지 않는 모습이고, 오직 진리 그 자체가 스스로 진리임을 드러내도록 하는 모습이다. 예수는 어떤 권위에 의지하여 진리를 호소하지 않는다. 예수가 의존한 유일한 권위는 진리 자체의 권위였고,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진리에 복종하여 그것을 체험하고 드러내며 스스로 예수 자신처럼 살아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모습은 ‘예수에 대한 신앙’에 의존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려는 어리석은 집착이 또 다른 우상임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가 삶과 죽음으로 드러내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예수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임을 드러내준다.

신앙에는 ‘앎의 차원’과 ‘믿음의 차원’과 ‘깨달음의 차원’이 있다. 예수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아는 것’과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직 참된 진리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보여준 강력한 권위에 눌려 그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신앙인의 삶은 결코 거듭날 수 없다. 외적 권위는 내면에서 샘솟는 자발적 생명력을 거세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의 신앙이 보여준 진리가 신앙인의 내면에서 자유롭게 솟아오르는 체험에 근거하여 일상 속에서 그 진리를 체험할 때만 깨달을 수 있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진리를 체득하여 예수의 본을 따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화, 신격화의 신비한 이미지로 옷입혀진 그리스도의 상(像)은 오히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와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진리 자체와의 접촉을 가로막고 있다.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삶과 인격에서 그대로 풍겨나오는 그 초월적 깊이, 그 진리 자체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놀런이 그려준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외적이고 억압적이며 절대적인 권위도 부정하는 모습을 통해서 바로 이런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주고, 신앙의 전제 없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진리와 직면하게 한다.

이런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그럼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는 어떤 신앙적 전제도 없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가 보여주는 진리 자체만으로도 신앙에 도달하게 하려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논하면서 예수를 자의적으로 옹호하려하거 미화하려는 의도를 자제하지 못한 듯하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목표로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로마제국에 대한 편파성은 아니었다고 부정한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만으로는 그것이 편파성이 아니었는지를 확언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예수가 억눌린 사람들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는 무의식적 집착 때문인지 편파성보다 보편적 사랑이었다는 자의적 해석을 고집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미화하려는 듯한 자의적 해석의 흔적들은 역사적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내주는 진리에 직면하는 데 있어서 신뢰성과 연속성을 떨어뜨린다. 저자가 강력하게 주장했듯이 보다 객관적인 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했다면 더 강한 설득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아쉬움은 파국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는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다가오는 파국적인 사건이 바로 로마제국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임을 알고 믿고 있었고, 그 파국을 막기 위해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고 봤다. 저자는 예수가 “회개하면, 진정으로 믿으면 파국 대신에 그 나라가 오리라”(p. 153)고 믿었다고 봤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으로 표현된 파국과 회개의 관계에는 예수가 고통받는 자들에게 선포한 용서와 치유의 사역과는 모순되는 측면이 있는게 아닐까?

저자는 예수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기존의 종교 체제로는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치유의 사역을 행했다고 봤다. 이런 예수의 사역에는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깊이 베어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가 믿었던 파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값으로 주어지는 결과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은 깊은 연민으로 회개할 수도 없는 이들에게 값없이 용서를 베푸는 은총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죄값으로 멸망을 주는 하나님이라는 모순을 낳는다. 또한 예수는 병든 고통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는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나 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서는 죄의 대가로 멸망을 주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나가는 글; 우리의 에스카톤을 향한 예수의 연민


지금까지 앨빗 놀런이 그린 역사적 예수가 보여주는 탁월한 통찰력과 장단점을 살펴봤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된 부분을 남겨뒀다. 그것이 이 책을 통해서 만난 가장 중요한 관점이고 내 실존을 향한 강렬한 음성이기에 나가는 글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이 서평을 매듭짓고자 남겨둔 것이다. 가장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된 부분은 바로 “예수를 믿음”이라는 마지막 장에 나타나 있다. 저자는 어떤 신앙적 전제도 배제하고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 드러나는 진리 자체를 현대의 문제 상황 앞에 제시하려 했다. 바로 역사적 예수와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서 오늘의 긴박한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려는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 결론은 바로 그런 역사적 예수를 오늘날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저자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해서 교회의 전통이 평가한 내용에 동의함을 뜻하고 동시에 예수와 예수가 뜻한 바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 교회의 전통이 평가한 내용이라함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예수가 뜻한 운동의 영향력이 계속되었고 예수의 지도와 감화가 예수의 영을 받는 일로서 계속됨을 체험한 교회의 고백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인간 역사의 모든 곳에서 존재로서 파악되는 궁극의, 최후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뜻한 바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바로 역사적 예수의 삶이 보여준 실천에 대한 동의와 실행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운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예수의 삶이 보여준 하나님의 연민과 연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당연히 구체적인 실천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절박한 문제들 앞에서 힘없이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체감하고 그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에스카톤 속에서 지금도 깊은 연민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있는 예수를 앨벗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그려준다.

결국 그런 역사적 예수는 우리에게 지금 묻고 있다. 예수가 이해하고 실천했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양자택일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우리 시대의 에스카톤적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모든 고통받는 존재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에 체험적 공명으로 참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연대임을 앨빗 놀런의 역사적 예수는 드러내주고 있다. 이런 실존적인 결단의 요구 앞에서 부자 청년처럼 주춤하고 방황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그 연대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지에 대한 절박한 질문과 대답에서 가능할 것이다. 예수처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자애로운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체험이 내 안 깊은 곳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앎의 차원과 믿음의 차원에 맺혀있지 않고, 오늘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죽기까지 사랑함으로써 주검의 문화를 극복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는 "깨달음의 차원"이 간절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참고도서]

앨벗 놀런 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정한교 역 (분도출판사, 1992)

서창원 저, “역사적 예수의 그리스도론적 의미”, ‘신학과 세계’ vol. 42 (감리교신학대학교, 2001), pp. 66-88.

오강남 저,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앎과 믿음과 깨달음의 차원, 그리고 현재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해야한다는 통찰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김진 박사님과의 대화와 가르침에서 통해서 얻은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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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역광(Back Light)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서 14:30, 31(표준새번역 개정판)

기독교 신앙에서 의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본문이 이런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이밖에도 믿음이 적은 자를 책망하는 예수의 모습이 복음서들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절대신념체계'에 대한 의심은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혹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이거나, 심지어 신앙과 대치되는 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데생(소묘)에서 그림자가 생긴 부분의 가장 어두운 쪽 끝에 오히려 밝은 부분을 그려 넣는 역광(back light) 기법처럼 의심과 신앙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히려 의심이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깊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의심의 역광'은 가장 어두운 부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때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점차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밝은 영역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이 연이어 있다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의심의 깊이 속에 잉태되는 성숙한 신앙도 잃어 버려서는 않될 신앙의 뿌리임에 틀림없다. 이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의 두 차원을 밝히 알아보기 시작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생명이 되는 의심과 주검이 되는 의심의 두 차원, 바로 '미숙한 신앙의 그늘인 의심'과 '신앙의 뿌리가 되는 의심'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다. 의심의 대상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과 체험' 자체일 때 그것은 미숙한 신앙이기 쉽다. 절대자의 무한함을 맛보지 못했거나 이미 맛본 것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나 생각"이 의심의 대상인 것은 신앙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깊어지게 한다. 하나님 또는 절대자를 체험할 때, 인간은 그 놀라운 경험과 감동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감탄이나 탄성, 흥겨운 콧노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여과될 때, 그 경험의 깊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이해나 해석, 종교적 표현만이 모든 것인양,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나 절대적 체험 그 자체인양 오해하고, 고집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억누를 때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되고 만다. 인간의 이해나 표현에 다 담길 수 없는 절대적 세계를 재단하고, 그 무한한 변화의 역동성을 화석화시키는 어리석음이자 오만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인간의 묘사와 체계화를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 지녀야할 당연한 겸손이자 필연적인 구도의 길이다.

이런 어리석음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의심, 겸손히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고개숙이게 하는 의심이 바로 신앙의 뿌리이다.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만 신앙은 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늘 부드러운 변화를 이어간다. 오늘의 내 몸은 어제의 그 몸이 아니다. 죽어가고 태어나는 변화에 연이어 자리하고 있기에 몸은 살 수 있다. 이처럼 신앙도 끊임없는 의심 속에 그 생명의 고동소리를 울려가는 것이다. 화석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놀라움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새로움을 정죄하고 파괴하려 한다. 이는 자신이 그려낸 하나님만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자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는 오만함이다. 물론 그 하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자신을 비우시는 하나님은 모르고, 오로지 상승과 강함으로만 오해된 하나님일 뿐이다.
이렇게 오해와 집착, 욕망으로인해 "의심의 역광"을 잃어가는 것은 인식중심주의적 진리관의 영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식론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관점은 설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은 진리의 영토 밖으로 추방해 버리곤 한다. 그로인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틀에 가둬둘 수 없는, 살아움직이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체계적 설명은 일관된 체계로 고정시키고 이와 다른 형태의 것들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을 때에만 안정을 느끼는 마음의 욕망 때문이다. 늘 새롭게 변하는 것은 계속 허물고 쌓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의 압력을 견뎌야만 한다. 이런 압박감에 대한 두려움과 반작용으로인해 일관된 이해의 범주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체계에 더 끌리기 쉽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바로 탈 수 없고, 사람이 물에 뜬다는 것을 안다고 물에 빠져서 떠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이 삶으로, 몸으로 이어지는데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참된 앎은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때론 오히려 알 수 없는 신비의 그 긴장감을 견디면서 몸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행할 때, 삶으로 베어나오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름의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매맺는 존재의 생명을 몸으로 삶으로 깨닫게 된다.
게다가 반대로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그 대상이 인식론적인 신앙 체계인 경우에 삶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맹목적인 신념이 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명의 기운은 고정된 체계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체계만을 고집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미 벗어나 새롭게 변해가는 일상의 생명과는 너무나 큰 간격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끊임없는 의심 속에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히 알 수 없는 신비의 긴장감을 견딜 때, 삶으로 스며드는 신앙의 실천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심의 가장 짙은 그늘에 고여, 시간의 흐름마져 잊어버린 어느 순간에 홀연히 비춰오는 역광, 실은 그곳에서 신앙의 깊은 뿌리가 맑은 생명을 빨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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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6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비슷한 세대라 그런지 음악의 코드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정말 좋아하는 곡입니다. 오늘 느즈막하게 집을 나서는데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더군요. 흐린 하늘, 젖어드는 보슬비가 정말 흐린 가을 날씨 갔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의심.....님의 글을 읽으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생각났습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아내가 죽은 뒤에야 알게된 아내의 다른 모습....믿는 일, 혹은 믿어주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내 믿음의 내용이 다 담을 수 없는 상대방의 깊이를 향해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믿음이 자칫 고정관념과 편견이 되기 쉬우니까요...."믿음과 의심의 긴장", 그 사이를 비껴가야 할 텐데...어느 한쪽도 어려우니...
 

이 번 주 채플에서는 성가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노래 제목은 " We will claim Victory", 어두움 속에서 괴로움 당할 때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예수 안에서 승리를 외치는 곡이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잘 못해도 웃으며 부를 것을 신신 당부했다.

성가대석에 올라 순서지를 보니, 장애인의 날, 장애해방을 위한 채플이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을 하기 전에 학교에서 장애우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 가파른 언덕, 계속 되는 계단, 장애인 시설이라고는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고, 식당가는 길은 보통 사람도 조심해서 내려가야 하는 가파른 계단...그들은 교내에서 어디에라도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고 갈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그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멈춰있었다.

무거워지는 마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어질 우리의 찬양...."승리를 외쳐야 했다" 그것도 웃으면서...난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장애학우들의 문제 앞에서, 그 힘겨운 절망 앞에서 승리를 웃으면 외치는 비장애인들의 찬양 ?...표정은 이미 굳어있었고 이래도 되나하는 상념에 붙들려 시작을 놓쳐버렸다. 간신히 쫓아가면서 혼신을 다해 지휘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분의 당부가 떠올랐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념들 속에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계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외칠 수 있는거야, 그게 믿음이고 신앙이지"하는 변명이 스쳤갔다. 하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적어도 내가 장애우들을 향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상념 속에 찬양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모두들 박수를 쳐주었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치는 박수였을까? 그 때 장애우들의 특송이 이어졌다. 초등학생 쯤 되보이는 남학생-아마도 성장이 일찍 멈춘 듯 했다-이 혼자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는 수화를 했다. 그 찬양의 가사는 내 마음을 울려왔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과 거친 호흡을 삼켜야 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두를 위해 나아가야하는 좁은길 앞에서 난 아직도 두려워 서성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그들은 노래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멈춰서겠다고. 그 뜻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이에 것이라 했던가? 그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노래했고, 다른 사람들은 몸으로 그 노래를 그려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 말씀하셔도 나아갈 수 없었고, 멈춰설 수도 없었다. 그들의 휠체어로는 순종할 수 없었다. 아니 그 휠체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이 문제였다. 바로 그들의 아픔에 무관심한 우리의 안일함이 순종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렇게 나의 안일함과 무관심이 그들 앞에 놓인 벽이요, 계단이요, 가파른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서성이는 나의 무거운 마음을 향해 설교자는 선포했다. 장애우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 라고. 정상인이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목하게 하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라고. 나에겐 그들이 나의 죄악을 비춰주는 거울이고, 그들의 약함이 나를 시험하는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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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4-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뭉클합니다....

물무늬 2004-04-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터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뭐라고 말씀드릴지....저의 부끄러움을 담은 글인데...그것이 님의 마음에 어떤 울림이 되었다면, 제가 의도치 않았은 열매이자 감사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다연엉가 2004-04-2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유^^^^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4-04-2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시는 모습이 늘 제 맘을 움직입니다. 전 찬송가를 부르거나 들으면 늘 눈물이 나곤 합니다. 다른 노래일 때도 좀 그런 편이구요.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정말 우린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무늬 2004-04-2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종의 노래만이 승리의 노래를 잉태하건만....
약자의 순종으로 낳은 승리의 노래,
그 생명을 입양하려고만 하는 제 모습이
제게도 역시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진지한 듯한 제스쳐만 있는게 아닌지...
그 제스쳐로 나 자신으로 기만하는 건 아닌지...
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에게 반문해보게 되네요...

다연엉가 2004-04-2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언니 저도 종교는 안가졌는데 찬송가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가슴에서 뭐가 자꾸 밀려와요.... 요이런지... 언니도 나랑 같네요^^^^
 

신학자는 모름지기



-죽재 서남동-



신학자는 모름지기
거리를 오갈적에
빌딩 숲을 보기보다는
돌담 밑에 핀
풀잎 향기를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책방을 서성이기보다는
마을 어귀에 서서 노인들과 장기 한 판을 두고
농부들과 막걸리 한 잔
얼큰하게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갇혀 있지 말고
손끝으로 우주를 가르키고
쌀한톨속에 미소짓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는
시인도 되며, 농부도 되고
거지도 되며, 수녀도 되어
자유한 바람으로
이쪽 저쪽 바람의 끝이 되서
신학을 살 줄 아는 자이다.

 

"쌀한톨의 그리스도"라는 아이디를 즐겨사용하는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시. 녀석이 내게 그 시를 보내주었다. 신학도 학(學)인지라 머리와 눈으로 만지작 거리기 일수인 내게는 김진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얼됨과 얼함"을 향한 목마름이 필요하다.

신학은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삶의 신비 속에서 모름의 깊이를 지키는, "모름지기"로 익어가는 얼의 "됨과 함"의 삶.....그렇게 신학자는 "얼됨과 얼함의 모름지기"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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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