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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 공간과 현실 공간에 대한 에세이

건축, 그 바깥에서

엘리자베스 그로스│그린비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한 명인데 각각의 장을 각기 다른 역자가 번역 작업을 했네요. 아직 본문을 다 읽진 않았지만, 이유가 있겠지요. 건축에 대한 철학자의 글인데, 건축이 공간을 구획 짓고 공간에 대한 고민과 그 구획에 대한 미와 기능에 대해서까지 고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본다면, 사이버세계의 공간 뿐 아니라 광장같은 공간 등등, 다양한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괜찮은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고쳐쓰기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한겨레출판


어, 그러게요.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에 대해 좋다나쁘다, 혹은 지속가능한가 아닌가 등등의 생각은 해봤지만, 자본주의를 좋게, 혹은 안 좋게, 천박하게, 괜찮게 등등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깊게 해보지 못했네요. 뭐랄까요.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고 지적해왔지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힘이 셌고 고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데다 손해만 보는 사람들은 눌려있느라 변화를 일으킬 힘도 없을 정도여서 더디게 변화해왔죠. 네 뭐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공산주의라는 대안을 찾는 움직임과 더불어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움직임도 필요하다고 봐요. 종교개혁이 안팎에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해봐도 그렇지요. 그래서 살짝이나마 엿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발, 자본주의가 변화할 수 있는 거였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색

문은배│안그라픽스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서체, 색 등등을 정하기 시작했죠. 으아, 저게 뭐야 싶을 정도로 급조한 느낌이 팍팍 났지만, 그래도 그렇게 시작하는 게 어디냐 싶더군요.

한국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색이 있겠지요. 그러니 이 전통색에 관한 연구서가 값진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나 이 책이 나온 걸, 이제야 나왔다고 서운해야 하는 건지 이제라도 나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네요. 




달콤함에 관한 잔혹 리포트

초콜릿 탐욕을 팝니다

오를라 라이언│경계 


초콜릿이란 게 공장에서 뚝딱 나오는 물건이긴하지만, 알고보면 커피처럼 열매를 따서 볶고 갈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며칠 안 되었어요. 믹스커피만 커피인 줄 알고 살다가 원두커피란 걸 알게 되고, 생두를 사서 볶아서 갈아 내려마시는 일이 대중화된 건 몇 년 안 됐죠. 초콜릿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도 어쩌면 몇 년 후에 조금은 사치스러운 취미라며 볶은 카카오빈을 사다가 초콜릿을 만들어먹게 될 지 몰라요. 공정무역커피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처럼 카카오빈도 그렇게 생각합시다. 우리가 카카오빈을 사는 건 아니지만, 이미 많은 초콜릿공장이 노동착취와 어린이인권문제등을 일으키며 카카오농장을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이에 대해 좀더 자세한 저널을 읽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겨울이 오고 있어요. 발렌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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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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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있어서나 장래에 있어서나, 고민하고 있을 때면 듣게 되는 말이 있었습니다. 미련보다는 후회. 그렇습니다. 주저하다가 때를 놓치고 ‘그때 했으면 잘 됐을 텐데’ 따위의 미련을 가지느니, 질러놓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지요.

선택을 한 적도, 끝내 하지 못한 적도 있다보니 제 20대는 온통 미련과 후회로 가득합니다. 미련과 후회, 왠지 반반 정도의 확률 게임인 것 같지만 백이면 백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래도 그때의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선택들이요.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마르크스를 가슴에 품은 코뮤니스트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전쟁과 이념싸움이 어느 정도 끝난 뒤에 태어난 저는 소비에트 연합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편하게 TV로 볼 수 있었죠. 왠지 공산주의는 이제 끈 떨어진 가방처럼 쓸모없어졌다 생각하고 말아버렸을 시대가 있었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저는 다시 공산주의를 생각하는 요즘, 책을 열심히 읽으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요.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 이전부터 새록새록 피어난 공산주의에 대한 갈망은 마르크스를 만나 정점을 찍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이론 정립에 박차를 가하면서 그들의 저작은 공산주의계의 바이블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저작도 시간이 흐른만큼의 주석서들로 넘쳐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해요. 성경이든 마르크스든.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는 1917년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코뮤니즘을 정리했는데, 얼추 따져보면 약 백 년 정도의 역사를 훑은 것이 되지요. 한 나라의 백년사를 다루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유럽에서 시작하여 아시아를 거쳐 전지구적으로 번져나간 코뮤니즘의 불길을 정리하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번역본으로 7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이라니 정리한 것도 놀랍지만 그 양도 엄청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백 년 여의 역사를 700여 페이지로 정리하는 작업도 대단합니다. 요점 정리를 한다해도 이렇게 줄이기 쉽지 않을 거에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문장이 굉장히 단단합니다. 수사를 줄이고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역사를 정리해나가고 싶은 사가의 마음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처럼 알알이 박혀 있달까요.

 

그래서 이 책은 쉽게 읽기도 어렵고, 양도 만만치 않아 단숨에 읽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책은 그 무게를 달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코뮤니즘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를 듣듯이 읽고 싶으시다면야 슬렁슬렁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되겠어요. 생각보다 다이나믹하거든요. 코뮤니즘은 혁명을 일으키고 또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미련의 문제일 겁니다. 조금만 달리하면, 조금만 희생하면, 조금만 완력을 쓰면 모두가 행복한 그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있을 거라는 그 희망을 지피기에 부족함이 없거든요. 그러니, 미련스럽게 굴지 말고 하자, 해보자, 외칠 수 있는 것이죠.

 

하워드 진이 쓴, 맑스인소호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맑스는 영국의 소호에 살았었거든요. 그런데 어쩌다-아마도 관리의 실수로- 미국 소호로 오게 됩니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허락받아서요. 백 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세계를 지켜본 맑스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다시금 설파하고 떠납니다.

 

그 작품을 읽고, 꼭 한 번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감사하게도 무대에 올릴 수 있었지요. 배우는 아니었지만 대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마르크스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아닐까 했죠. 마르크스는 인간을 너무 믿었어요. 아직도 헷갈리는 역사의 단계,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건지 아님 그 역인지, 어쩌거나 일당독재가 있고나서 사회 체제가 완전히 바뀐 후엔 독재를 끝내고 시스템에 맞춰 행복하게 살게 될 거란 기대는 정말 기대가 아닐까 싶은 거지요. 어느 누가 권력을 쥔 후에 그걸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반지인 걸요.

 

많은 시도들이 독재까지는 어떻게 끌고갈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넘어가지 못했고, 또 아직도 그러고 있지요. 그 사이에 노선을 달리한 사람도 있고, 포기한 사람도 있죠. 미련과 후회, 두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혁명을 꿈꿉니다.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책은 아마도 미련과 후회, 두 사이로 당신을 밀어넣을 수도 있고 책장을 덮는 순간 미련이고 후회고 다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며 코뮤니즘을 지워버리게 해줄 수도 있을 만큼, 코뮤니즘을 잘, 또 세세히 정리해줍니다. 아차, 글쎄요. 어쩌면 이 책을 덮은 후엔, 입맛에 맞게 코뮤니즘을 읽어 줄 또 다른 책을 찾게 만들어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마르크스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거든요. 위정자들은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고,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독기를 품은 채 범죄에 집중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버리는 일이 빈번해지는 요즘에도 내일을 꿈꾸며 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은 채로 살고 있다는 걸요.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이 어떻게 출근을 하고 밥을 먹겠어요.

 

그런데 이거 미련이면 어쩌죠. 이게 미련이라도 우리는 살아갈 겁니다. 그런데 이 미련, 영원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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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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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얘기를 듣는 건 굉장히 재미있다. 메이킹 필름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작업일지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약간의 관음증을 충족시켜 준다면 금상첨화겠다. 노골적이거나 일상에서 쉽게 꺼내기 힘든 사건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일상적이어서 지나가기 쉬운 일일수록 시각을 달리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개콘에서 오래 살아남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가 그렇다. 친구들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과 대화지만, 컨텍스트를 조금만 바꿔도 모순이 생겨난다. 집에서 흔히 나누는 엄마와의 대화도 눈물을 뿌리며 보게 되는 드라마도 한 발짝만 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가족기담>은 이런 시도로 가득하다. 어릴적 전래동화집이나 애니메이션, 유치원 발표회나 엄마나 할머니가 자기 전에 들려주셨거나 친구들에게 전해들었거나 아니거나 신기하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별 부담이 없는 옛이야기를 끌어와 비틀어본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저자가 예로 든 이야기 중에는 특정한 작가가 작심하고 쓴 소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구전이다. 구전은 화자의 ‘말빨’도 중요하지만 청자의 반응이 절대적이다. 청자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화자는 더욱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게 된다. 이야기가 시대를 담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공감의 폭이 넓어야만 더 많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정의, 원리, 원칙, 논리보다는 감성, 모순, 욕설, 음담패설에 가까워진다. 단번에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과장을 잘하는 화자를 만나기도 하고 캐릭터 구성에 능한 화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간다. 물론 이야기가 수사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할 수 있다. 너무 많이 갔을 땐, 나름 논리적인 화자가 나타나 드라마트루그를 하기도 했을 테다. 구전이란 그런 것이다. 공동집필의 미학.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품고 있는 시대의 한계와 인간의 모순을 밝혀내고자 했다. 흥미롭기도 했고 절망하기도 했다. 저자가 날카롭게 혹은 집요하게 찾아낸 의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때 특히 그랬다. 그렇지만 저자의 폭로(!)가 점점 불편해졌다. 정말 그랬을까?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회자될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듯이기도 한데 그 이야기에 웃고 울었던 사람 모두가 저자가 집어낸 모순과 비인간적인 면에 암묵적인 동의,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무지를 가졌다고 결론내야 하는 것일까 싶었다.

그래 웃자고 한 말을 다큐로 받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더욱 불편했던 건, 옛이야기 속에 담긴 여성비하나 폭력 등등의 문제점이 현실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흐르고 있다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몇 백년을 흘러내려온 인간의 속성을 인정해버려 더 이상 희망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끝까지 아닐 거라고,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가족 기담이 정말 기이한 이야기로 그치기를 바라는 건 현실 부정일까? 제발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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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번역가의 인문이 담긴 영성 이야기

번역과 반역의 갈래에서

박규태│새물결플러스


카피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있어서 그 가치를 조금 덜 인정받는 기분이 듭니다만, 번역에 대해 불만, 혹은 고민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함께 읽고 생각해보기 좋은 책 같습니다. 언젠가 번역가 두 분이 함께 번역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요, 창작의 영역에 가까운 일을 하지만 결국엔 프리랜서로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는 소소한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와야하는 작업이어서인지, 번역하면서 저자와 텍스트를 놓고 씨름한 것 같은 흔적들이 느껴져 오히려 창작이 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 적도 있었거든요. 번역문이 아무리 좋더라도 원작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반역에 가까워지겠지요. 아마도 번역가인 저자는 그 가운데에서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지 말자

도올 김용옥│통나무


나는꼼수다 호외편을 들어서일까요? “사랑하지 말자”고 말씀하시는 도올 선생의 진의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김용옥의 글이나 강연을 주의 깊게 살펴오지는 않았지만, 다른 책에 비해 쉽게 나왔다고 하니 스스로도 자신을 사상가라 말씀하시는 분이 어디쯤에선가 한 계단 내려오셔서 대중에게 친숙하고자 글을 쓰셨을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때가 때인지라 대선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 때에, 한 권 정도 읽고 다른 사람들은 대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지요. 




서양철학사 인식론적 해명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지혜정원


수학의 정석을 펼쳐놓고 수학공부를 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첫 챕터였던 집합부분만 책장 까매지도록 넘기고 넘겼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실제 문제는 후반부에서 더 많이 나왔는데도 왠지 첫 장을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거지요. 제게는 철학도 그랬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철학입문은 불가능할 거란 두려움이었죠. 게다가 철학이란 걸 좀 알아보자 마음 먹고 보니 철학은 마치 망망대해처럼 길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길잡이를 해 줄 것이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죠. 인식론(이 뭔지 아직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인식론)을 맥으로 삼고 철학의 길잡이를 자처한 책이 나온 것 같군요. 차근차근 따라 읽어가다보면 철학의 바다에 뱃길 하나 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시험볼 것도 아니니까 읽다 맘에 들면 잠시 정박하고 깊게 생각해보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세요?


일의 의미를 찾아서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

최명기│필로소픽


학생일 땐 그랬어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을까. 직장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단어만 조금 달라졌지요. 내가 무슨 업적을 세우겠다고 이렇게 일을 하고 있을까. 직장인이라고 공부를 멈출 일도 없고 말이죠.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며 나아져야하고 어제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직장인의 애환. 어디 한 번 생각해보자고요. 무엇이 나를 일하게,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게 만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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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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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입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잘못했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 사건 덕분에 저는 또다시 밤길을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낮에도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저도, 조금 달랐습니다. 동정표가 있었어요. 칼을 든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습니다. 의정부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어서 지나친 양극화가 일으킨 범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끝에 몰린 사람의 분노표출이라는 거지요. 삶의 끝, 그래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르포라고 줄여 말했던 TV방송프로그램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르뽀라고 발음하던 게 신기해서 그런 장르도 있구나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문이겠지요. 어느 작가의 신간이 르포르타주라고 나온 것 자체가 이슈가 된 걸 보면.

 

솔직히, 전 그 신간을 읽지 않았어요. 해고노동자가 직접 썼다면, 공활로 들어갔던 사람이 쓴 글이었다면 찾아 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요,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그것이 르포르타주일까, 그것도 르포르타주라고 말해도 될까, 왜 그 책을 굳이 르포르타주라고 설명해야만 할까? 의문이 먼저 들었거든요.

 

<노동의 배신>을 읽으며 저는 이것이 르포르타주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솔직한 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장르라고 느꼈지요.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드라마에서 종종 나타나는 작가라는 직업은 안 팔리면 무지하게 배고프지만 잘 팔리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살 수 있다는 걸 알죠. 어느 작가는 단어 당 돈을 받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에런라이크의 글을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되어 소개할 만큼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같은 데 신경쓰지 않아도 먹고살기 문제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이 잡지 편집장과 그런 얘기를 했다지 뭡니까. 우리나라 상황으로 치면 그런 거에요. “정말 최저임금만 가지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누가 그랬다죠. 평금 임금과 평균 월세, 생활비 등이 통계로 나와있으니까 셈 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요. 에런라이크는 아주 시-크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논문으로 나오겠지. 하지만 나는 궁금해, 언뜻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할 수 있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돈 아끼며 사는 법 같은 거.

 

그래서 출동한 겁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일을 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꿀수도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웬 스포냐구요? 책 읽을 맛 떨어지게 만들었다고요? 왜 이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이 책이 말하는 건 결론이 아닙니다. 뻔하잖아요. 최저임금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잘 살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까요. 월급을 탔는데, 지난 달 카드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카드도 못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라고요. 네, 솔직히 저도 어렵다어렵다 입에 달고 살지만, 빚도 있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도 있고요, 책도 사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런라이크가 들어간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어요.

 

미국드라마를 봐서일까요.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백인인데 트레일러에서 살았다구요.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벗어났다고 아직도 엄마는 거기 산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트레일러트레시’라고 말하는 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에런라이크가 그래요. 시급 7달러만으로는 트레일러트레시도 될 수 없다고. 그 말이 저에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막장인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최저시급으로는 막장흉내도 낼 수 없다니요. 

 

읽으면 읽을 수록 처참해졌습니다. 에런라이크가 말하는 현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그랬고, 나도 결국은 알게모르게 그 사회의 병폐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화가났습니다. 에런라이크가 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을 알리는 것뿐이었어요. 우리는 이래저래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책 날개에 준비중인 책 소개가 보이더군요. <희망의 배신>이었습니다. 에런라이크가 이번에는 화이트칼라노동자들의 삶으로 들어갔더군요. 그 책이 더욱 기다려지는 건, <노동의 배신>이 준 충격때문일 거에요. 당장 아무 것도 할 순 없지만, 그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배신감은 한 사람을 파멸시키지요. 어떤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선택합니다. 이 배신감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집단이, 한 사회가 배신감을 공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에런라이크는 글로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런라이크가 심은 조금의 씨앗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미국 사람들이 월가에 모였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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