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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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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입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잘못했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 사건 덕분에 저는 또다시 밤길을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낮에도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저도, 조금 달랐습니다. 동정표가 있었어요. 칼을 든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습니다. 의정부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어서 지나친 양극화가 일으킨 범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끝에 몰린 사람의 분노표출이라는 거지요. 삶의 끝, 그래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르포라고 줄여 말했던 TV방송프로그램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르뽀라고 발음하던 게 신기해서 그런 장르도 있구나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문이겠지요. 어느 작가의 신간이 르포르타주라고 나온 것 자체가 이슈가 된 걸 보면.

 

솔직히, 전 그 신간을 읽지 않았어요. 해고노동자가 직접 썼다면, 공활로 들어갔던 사람이 쓴 글이었다면 찾아 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요,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그것이 르포르타주일까, 그것도 르포르타주라고 말해도 될까, 왜 그 책을 굳이 르포르타주라고 설명해야만 할까? 의문이 먼저 들었거든요.

 

<노동의 배신>을 읽으며 저는 이것이 르포르타주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솔직한 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장르라고 느꼈지요.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드라마에서 종종 나타나는 작가라는 직업은 안 팔리면 무지하게 배고프지만 잘 팔리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살 수 있다는 걸 알죠. 어느 작가는 단어 당 돈을 받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에런라이크의 글을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되어 소개할 만큼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같은 데 신경쓰지 않아도 먹고살기 문제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이 잡지 편집장과 그런 얘기를 했다지 뭡니까. 우리나라 상황으로 치면 그런 거에요. “정말 최저임금만 가지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누가 그랬다죠. 평금 임금과 평균 월세, 생활비 등이 통계로 나와있으니까 셈 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요. 에런라이크는 아주 시-크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논문으로 나오겠지. 하지만 나는 궁금해, 언뜻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할 수 있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돈 아끼며 사는 법 같은 거.

 

그래서 출동한 겁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일을 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꿀수도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웬 스포냐구요? 책 읽을 맛 떨어지게 만들었다고요? 왜 이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이 책이 말하는 건 결론이 아닙니다. 뻔하잖아요. 최저임금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잘 살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까요. 월급을 탔는데, 지난 달 카드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카드도 못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라고요. 네, 솔직히 저도 어렵다어렵다 입에 달고 살지만, 빚도 있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도 있고요, 책도 사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런라이크가 들어간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어요.

 

미국드라마를 봐서일까요.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백인인데 트레일러에서 살았다구요.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벗어났다고 아직도 엄마는 거기 산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트레일러트레시’라고 말하는 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에런라이크가 그래요. 시급 7달러만으로는 트레일러트레시도 될 수 없다고. 그 말이 저에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막장인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최저시급으로는 막장흉내도 낼 수 없다니요. 

 

읽으면 읽을 수록 처참해졌습니다. 에런라이크가 말하는 현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그랬고, 나도 결국은 알게모르게 그 사회의 병폐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화가났습니다. 에런라이크가 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을 알리는 것뿐이었어요. 우리는 이래저래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책 날개에 준비중인 책 소개가 보이더군요. <희망의 배신>이었습니다. 에런라이크가 이번에는 화이트칼라노동자들의 삶으로 들어갔더군요. 그 책이 더욱 기다려지는 건, <노동의 배신>이 준 충격때문일 거에요. 당장 아무 것도 할 순 없지만, 그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배신감은 한 사람을 파멸시키지요. 어떤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선택합니다. 이 배신감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집단이, 한 사회가 배신감을 공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에런라이크는 글로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런라이크가 심은 조금의 씨앗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미국 사람들이 월가에 모였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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