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풍경처럼 오래 서 있었다  

    흔들림도 없었다   

    거부의 몸짓 

    풍경 너머에 있었음에도 

    당황한 풍경 속 바람이 전해주었다

    실존을 공격하기 위해 쓴 네 정치적 선전문처럼  

                                           너는 한동안 거짓 사랑의 추파를 던질 것이다   

                                           쉽게 용서해줄 신의 이름을 과신하지 마라 

                                           시린 뼈로 오래 아파해야 하는 이도 있으니  

                                           심장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악기를 어루만지는, 

                                           강해보이지만 약한 운명의 파블로  카잘스  

                                           오직 peace!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정치에 대해 말하고 

     나는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요."  (132쪽) 

 

    "내가 항상 콘서트의 마지막에 연주하는 곡은  

     스페인의 민요 <새들의 노래>입니다. 

     나의 고향 카탈루냐의 하늘에서는 

     새들이 peace! peace!하고 노래합니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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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지방방송에서 책 소개 코너를 맡은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내 생각이 들어가는 리뷰식은 아니다.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청취자들로 하여금 '이 책 한 번 읽어 봐?' 하는 느낌만 가져도 성공한 편인데 잘 모르겠다. 청취자를 의식하기보다 이 덕에 스스로 책 한 권이라도 더 알게 된다는데 의의가 있을 뿐.   

  어려운 책도 안 되고(너무 어려운 책은 대중 청취자 뿐 아니라 우선 나도 접수 못한다.) 전문적인 책도 안 되고, 종교적인 책도 안 되고 등등 걸러내고 나면 소설류나 에세이, 심리서, 인생지침서가 대세를 이루고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시집도 보태진다.  

 

  한 번 가면 두 편을 녹음하는데 그 중 한 편을 올려본다. 본부장님이 엄할 땐 생방송으로 했고, 요즘은 녹음방송한다. 가끔 급하면 전화로도 연결하는데, 아무래도 스튜디오 녹음보다 나을리 없다.  이쁜 신입 아나운서가 멘트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기(?)  때문에 사투리 버전 격심한 내가 어쩔 수 없이 많이 지껄인다.  방송 체질 아닌 나는 그저 원고를 읊어댈 뿐이다.  원고는 8-10분 분량이다.

 

  언젠가 지금은 서재에 잘 안 오는 플라시보님이 방송원고 사진 찍어서 살짝 올린 적 있는데, 그 분은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었다. 확대 사진이 아니라 자세히 볼 수 없었는데, 방송원고가 비밀일 필요는 없으니, 그래도 방송원고(대담식) 어떻게 쓰나 궁금해하는 사람들 있을까봐 공개해 본다.

 

 

 

 

 

<행복한 책읽기 4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A. 다음은 ***의 행복한 책읽기 순섭니다. 오늘도 *** ***씨 나오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애청자 여러분도 새해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A. 오늘은 어떤 책 소개해주실까요?

S. 새해 연휴 기간 동안 책 읽을 시간이 많아 좋았는데요,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 중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얘기해볼까 합니다.




A.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많이들 얘기하지만 제대로 읽은 분들이 많지 않을 만큼 긴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데,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S.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7권이나 되는 대하소설에 속합니다. 긴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의 구조가 아닌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묘사들 때문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저도 몇 번이나 처음 한두 권에서 들었다 놨다 하는 경우이긴 한데요, 이런 독자들을 위해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도 괜찮다 생각합니다. 저는 열화당에서 나온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데, 스테판 외에의 그림과 프루스트의 원문이 잘 어우러져 접하기가 한결 쉬웠습니다. 원작 그대로 읽기가 힘들 때는 이런 차선책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소개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만화판 위주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A.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스런 작품들을 만화로 재해석해주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는 게 부러운데요. 

S. 네, 그렇습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을 만화로 그려낸 ‘스테판 외에’의 수고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많은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겠지요. 프루스트 작품을 만화화한 스테판 외에의 이런 시도를 프랑스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룰 정돈데요. 난해한 프루스트 소설이 만화화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프루스트의 문학세계를 세밀하고도 애정 깃든 그림들로 복원해내는 외에의 화필에 매료되는 일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A. 스테판 외에의 이런 작업도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하겠죠? 원작자인 프루스트에 관한 소개도 좀 해주실까요?

S.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는 1871년 파리 근교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의사 아버지와 유태계 부르주아 어머니 밑에서 자란 프루스트는 어릴 적부터 병약했으며, 9살 때 신경성 천식의 발작을 일으키는데, 이는 평생의 지병이 되어 그를 괴롭히게 됩니다. 일찍이 문재(文才)를 드러내어 에세이, 단편소설 등을 발표하며,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게 됩니다. 건강악화와 진실의 승리를 상징하는 <드레퓌스 사건> 구명운동으로 보수적인 상류계층과 소원해져 사교계를 멀리하게 되는데요, 이 사교계의 체험은 훗날 대작을 위한 풍부한 소재가 됩니다.

  1909년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착수하며, 1911년에 제1편 <스완네 집쪽으로>를 탈고했으나 출판사를 찾지 못해 2년 뒤 자비 출판에 나서게 됩니다. 제2편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는 1919년에 출판되었으며, 이것으로 콩구르 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프루스트는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며 작품의 완성을 서둘렀으나, 1922년 11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A. 간단한 줄거리도 소개해주실까요?

S. 이 작품은 파리의 부르주아 출신으로, 뛰어난 지성과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문학 청년 '나(마르셀)'의 1인칭 고백 형식으로 된 대하 소설입니다.

  한잔의 홍차에 적셔 먹은 마들렌느 과자가 화자인 '마르셀'에게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소년이 매년 휴가를 보내러 갔던 콩브레에는 두 개의 산책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파리의 부르주아인 스완네 별장으로 향하는 길인데, 그곳에는 아름다운 딸 질베르트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길은 중세 이래의 명문가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소년인 '나'의 마음에 깃들여 있는 두 갈래의 동경어린 방향이 됩니다.

  화자는 파리에서 재회한 질베르트와의 아련한 첫사랑이 깨진 후 할머니와 노르망디 해안으로 떠나고, 사교계에 몸담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 휴양지에서 '나'는 또 게르망트 일족의 생 루나 같은 다정한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파리로 돌아온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 동경의 대상이었던 생 제르망 가의 귀족사회에 조금씩 발을 들여 놓게 되며, 또한 괴기한 소돔의 마을에도 가 보게 됩니다.

  한편, '나'는 휴양지에서 만나게 된 알베르틴과 사이가 깊어짐에 따라 그녀가 고모라의 여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질투심에 불타 그녀를 집에 가두게 되지만, 이윽고 알베르틴의 죽음으로 인해 그 지옥 같은 동거생활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만화판 총 12편 중 아직 5편까지 밖에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뒤편에 이어지는 얘기들에서도 결국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초시간적 인상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임을 깨닫게 되며, 이 초시간적 경험이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해줄 원천임을 알게 됩니다.  




A. 네, 줄거리를 들어도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데, 미리 말씀하신 대로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상이나 의식을 따라가다 보니 그런 것일텐데요,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일까요?

S. 살아가면서 우리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영원한 세계가 존재함을 느끼게 되며,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런 세계가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이 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지나간 삶 전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프루스트는 마들렌느 과자와 길가에 피어난 산사나무꽃에서부터 어려운 철학· 미술 등을 융합해 하나의 언어로 통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어린 시절이라는 옛 고향으로의 초대일 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가 될 수 있는가를 되짚게 만드는 책입니다. 




A. 얘기 듣다 보니 굳이 7권짜리 책을 차례대로 다 읽어야 할 부담감은 가질 필요가 없겠는데요.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해도 될 것 같은데요.

S. 그렇습니다. 제가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위주로 얘기한다고 했는데, 만화를 그린 스테판 외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굳이 원본의 차례를 따르겠다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때에 따라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했는데, 흐름을 이해하는데 모자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원 책에서 느끼는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해주기 때문에 만화판 책이, 프루스트를 연구하는 책읽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독서를 위한 것이라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A.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해주기 때문에 만화판이 도움된다’고 하셨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도 궁금한데요.

S. 네, 제가 처음에 번역본 한 두 권을 들었다 놨다, 읽은 게 전부라고 했잖아요. 그 때도 그 유명한 마들렌느 과자 먹는 장면이 나와요. 엄마가 차려주신 홍차에 적신 마들렌느 과자를 먹으면서 그 옛날 콩브레 마을에서 이모가 준 그 맛을 상기하면서 희열감과 충만감에 쌓이는 주인공의 내면의식이 나오는데요, 도대체 마들렌느 과자가 어떤 것인지 상상이 안 가는 거예요. 이때 그림이라도 곁들여줬으면 참 좋겠다 싶었거든요. 한데 만화에서 스테판 외에가 그 장면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놓은 겁니다. 홍차를 스푼으로 떠서 거기에 마들렌느 과자를 적셔 먹는 성인 마르셀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나른한 희열 같은 것을 맛보았습니다.




A.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쁨일 텐데요, 이참에 마들렌느 과자 모양을 확실하게 알게 됐겠네요. (웃음)

S. 네, 저는 국화빵이나 타원형 과자 모양인줄 알았는데, 통통한 가리비 조개 모양이었어요. 지금 옆에 홍차가 있다면 찍어 먹고 싶을 만큼 이색적인 모양이었어요. 만화가, 접근하기 부담스러운 문학을 이해하는 차선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라고 할까요.




A. 마지막으로 밑줄 그을 만한 구절을 소개해주실까요?

S. 마들렌느 과자 때문에 마르셀이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인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감미로운 행복감이 나를 엄습해와, 어찌 된 영문이지 나를 고립시켜 버렸다. 지금 내 안에는 과자 때문에 되살아난 이미지, 시각적 기억이, 이 맛의 뒤를 따라 내 자아에까지 이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도대체 이 극도의 희열감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이 희열감이 홍차와 과자 때문에 생겨나긴 했지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뛰어넘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운 것이다. 그 후 연거푸 열 번은 더 마셔봐야 했는데...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과연 내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 (열화당 1권 콩브레 편 15쪽)




A. 네, ***의 행복한 책읽기, 오늘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 얘기 나눠보았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S.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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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정말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라디오방송을 들은게 아닌데도 프루스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꽤 오랫동안 보관함에만 담겨있거든요. 읽을 엄두가 안나서 말이죠. 2010년에는 프루스트의 책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홍차와 마들렌느 부분의 밑줄긋기를 읽으면서 갑자기 드네요.

다크아이즈 2010-01-04 07:4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반갑습니다. 제가 서재를 방치하는 동안 님은 졸리가 되어 나타나 응원해주시는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친구 될게요.^^* 본 책이 버거우면 저처럼 만화판으로 다시 시작하셔도 좋을 거예요.

2010-01-07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04 07:34   좋아요 0 | URL
따님이 고3때 방송 데뷔했군요. 내친 김에 피디 하라고 권하심이... 제 담당 피디분도 여성인데 제 로망이죠.ㅋㅋ 만화판 잃어버린~은 중학생 아들이랑 같이 읽었는데 빛의 속도로 읽어 치우네요. 전 음미하느라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걔는 뭘 느낄까 궁금한데 안 물어 봤어요. 지루하다거나 아무 느낌 없이 읽었을 것 같아서요. 그냥 청소년 도서로도 넘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해봤어요.

이매지 2010-01-0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
어렵다는 얘길 많이 들어서 선뜻 손이 안 가더라구요.
개인적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소설과는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
팜므느와르님의 말씀처럼 만화로라도 읽어봐야겠어요 :)

다크아이즈 2010-01-04 07:37   좋아요 0 | URL
어렵다기 보다 지루하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엄격하게 따지면 의식의 흐름 기법과는 거리가 멀어요. 왜 그렇게 분류하는지 저도 의아해요. 스토리 위주의 당시 소설과는 확연한 차이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요.

글샘 2010-01-0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의 후각적 추억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죽으라고 풀어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지요. 저도 7권짜리는 언감생심 엄두도 안 내고 있구요. 1권으로 만든 다이제스트도 4,500페이지 정도 되더라구요.
마들렌은 생김새야 다양할 수 있지만, 빵처럼 촉촉한 케이크를 부르는 이름일 겝니다.
만화로도 나왔으니, 기회가 되면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다크아이즈 2010-01-04 07:47   좋아요 0 | URL
글샘님 솔직한 댓글 공감해요.ㅋㅋ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작가의 본능적 통찰이 가끔씩 빛을 발하더군요. 하녀 및 이웃을 관찰하는 섬세한 눈썰미 같은 건 부정할 수 없었어요. 마들렌느의 정의를 확실히 알게 해줘서 감사해요. 이래서 여기가 좋다는. 국화빵이 국화모양이듯 전 마들렌느는 꼭 가리비 모양이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크~
 

 

  

특별한 연하장 두 장을 받았다. ‘구름’과 ‘386’이란 별호를 가진 두 사람이 보내온 것이다. 미리 밝히자면 그 둘은 수감자 신분이다. 최선을 다한, 각자의 친필이 녹아 있는 연하장에는 두 사람의 평소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시를 쓰는 구름은 깔끔한 성격답게 흰 봉투에 매향 가득한 그림에 보랏빛 글씨로 안부를 물어오고, 그림을 잘 그리는 386의 연하장은  갈매기떼 호위하는 일출 장면인데 글씨체마저 예술 지향적이다.

  검열을 통과한 그들의 편지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나는 특별히 숙연해졌다. 요 몇 년 새 연하장 같은 걸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언제부턴가 전자우편이라는, 멋없지만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친필 연하장을 번거로운 절차쯤으로 밀어낸 탓이리라. 오랜만에 접한 아날로그식 소통 방식도 신선한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에게서 전해진 것이라 더 놀랐고 고마웠다. 

 수감생활을 하는 그들을 정기적으로 만나왔다. 수감자들을 상대로 한 독서모임의 지도강사를 하면서 정작 많은 것을 배운 쪽은 나였다. 적극적인 독서활동을 통한 수감자들의 교화가 프로그램의 목적이었다. 남을 교화할 만큼의 입장이 못 되는 나는 이 프로그램을 스스로를 위한 교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교화(敎化)란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 또는 부처의 진리로 사람을 가르쳐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함, 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사전적 정의대로라면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평생 교화의 대상일 터였다. 스스로가 교화의 대상인데 누구를 교화한다는 말인가. 해서 나는 특별한 격식이 요구되지 않는 독후 토론 활동을 하면서 제일 목표를 ‘마음 터놓기’로 정했다. 착한 사람 되기 같은 현실성 없는 목표보다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토대로 회원들이 자연스레 사람살이를 얘기하면서 그들 내면이 한결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열댓 명의 회원들 대부분은 프로그램에 적극적이었다. 폐쇄적 생활에서 오는 갑갑함을 풀어내고 뒷날을 대비하는 재충전의 의미로서의 독후활동이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자신만의 얘기들을 진솔하게 풀어놓는 모습에서 희망적인 미래를 보는 듯했다. 한 달에 한두 번, 때론 프로그램 일정에 따라 일주일에 한두 번 짧고 길게 그들을 만나는 동안 그들을 조금씩 이해하고, 그들 곁으로 한층 더 다가간 느낌을 받았다. 바깥에서 가졌던, 수감자들에 대한 막연한 편견들이 하나씩 걷히는 느낌, 그 자체가 스스로를 위한 교화가 되기도 했다.   

  집중독서치료 과정 마지막 날, 자그마한 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 기왕이면 그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파티를 열어주고 싶었다. 회원들에게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대부분이 핏자와 햄버거라고 대답했다. 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도 했다. 영치금으로도 얼음과자를 사먹을 수 있지만, 빨리 녹아버리는 콘 아이스크림은 구경할 수가 없다고 했다. 파티가 시작됐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그 때 특별히 고마워했던 회원이 구름과 386이었다. 오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구름은 12년 만에 처음으로 피자를 먹어본다고, 정말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를 앞둔 수업 시간에, 구름은 자신이 쓴 시가 공모전에서 뽑혀 두둑한 상금을 받게 됐다고 자랑했다. 구름이 회원들 앞에서 그 시를 낭송할 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386은 나에게 권할 피자조각을 들고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다. 먼저 먹기가 미안했다며 눈도 잘 맞추지 못하는 쑥스러워하는 386은 출소를 앞두고 있다.

  분홍 매화 가득한 ‘구름’과 갈매기 환호하는 일출 장면의 ‘386’ 연하장을 번갈아 보면서 한 해를 갈무리한다. 그들에게서 배운 인생 공부를 적으면서 나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연하장을 대신해야겠다. 편견 없는 만남과 이해 많은 날들이 함께 하시라고. 그리하여 새해에는 보다 평화롭고 행복한 날들 맞이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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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은 환갑이 넘은 영어 선생님이다. 한국에 온 지 만 이 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교수인 아들의 초청으로 같은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답게 다정다감하고 이해심이 있으며 시원한 성격이다.

  한데, 어제 공부 멤버 중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잔의 교수법에 대해 우리들의 의견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게 요지였다. 그미 앞에서는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다.

  수잔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첫 강의를 맡은 학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고급반 학생들의 요구와 수잔의 교수법이 달라 종강 무렵엔 많은 이탈자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 다음에 우리를 맡게 되었는데 수강생들이 초보자들이라서 그런지 별 무리 없이 한 학기를 마쳤다. 얼마 전 개설한 가을 학기에 10명이 재수강할 정도로 출발은 산뜻하다. 한데 2학기 수업을 서 너 번 들은 상태에서 재수강생 사이에서 몇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다.

  발표하는 사람만 한다.  질문을 하라는데 초보자가 쉽게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수잔이 번호대로 질문하고 그들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 골고루 수잔의 입김을 맛보지 않겠는가, 하는 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수잔의 가르치는 방식이 여물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나이가 있다보니 테이프나, 디브이디 조작도 서툴고 , 수업 리듬을 놓치면 잠시의 공백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정적이 곧 수잔의 카리스마에 흠이 될 수도 있음을 사람들은 감지하는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다채로운 방식을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롭게 진행하니 흥미를 못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수업자체를 장악하지 못해서 어수선할 때가 많다. 이런 불만들을 멤버 몇몇이 수잔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해보자 하는데, 내 개인적 심정은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수잔에게는 수잔의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따라가냐, 마냐는 학생이 선택할 문제이다. 수 십년 동안 해온 교수법을 수강생들이 요구한다고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요구한 만큼 수강생들의 태도가 진전될 것 지도 않다. 두 번째는 수잔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 좋게 얘기한다고 해도 안 좋은 경험이 있는 수잔은 자신의 교수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마음 아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콩글리쉬를 할지라도 질문이 많은 나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수잔을 대면해주길 바라는데 고민이다. 멤버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수잔에게 별 불만이 없는 내가 앞장 설 수도 없고. 특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우루루 몰려 다니면서 패를 만드는 모양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든지, 타협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일단은 대세를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글쎄 대세가 무엇인지는 낼 수업을 가봐야 알겠다.

  어떤 식의 결론이든 수잔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상처받을 영혼은 아니겠지만. 수잔, 호기심 많고, 욕심 많은 수강생들 입장도 생각해 줘. 그리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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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개월 동안 잘 놀았다. 서재 관리 따윈 관심도 없었다. 더러 책을 샀고, 가끔은 읽었으나 별 진전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긴 하다. 모두가  '나의 영어 선생님' 때문이다. 책을 멀리 하는 동안 영어를 가까이 했나?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영어 선생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몇 개월 새 내게 영어 선생님이 두 분 생겼다. 수잔과 에밀리.

  수잔에게 나는 유료 회원이고, 에밀리에게 나는 무료 회원이다. 수잔은 뉴욕주 출신이고, 에밀리는 필리피노이다. 수잔은 시원하고 에밀리는 발랄하다. 수잔은 늙었고 에밀리는 젊었다. 수잔은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고, 에밀리는 대학강사(?) 출신이다. 수잔은 발음이 좋고 에밀리는 본토 발음과는 거리가 있다. 수잔은 어린이 눈높이에서 가르치고 에밀리는 학구적으로 가르친다. 수잔은 점잖고 에밀리는 수다스럽다. 수잔은... 에밀리는....

  비교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둘 중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소중하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여자라는 것 외에 낙천적이라는 점이다. 몇 개월 간 그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 낙천적인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의 낙천성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일기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들의 긍적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는 것 만으로도 내 영어 공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공부에 관한 것보다 영어 선생님에 관해 쓸 수 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에밀리와 만났다. 나는 영어 초보자이기 때문에 영어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할 게 없다. 다만, 나의 영어 선생님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그들은 내 모국어를 잘(에밀리 경우) 또는 전혀(수잔 경우) 모르는데다 내가 알라딘에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니까.  

  에밀리는  몇몇의 나 같은 이를 위해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준다. 천성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오해마시라. 왕초보자도 영어로 누군가를 가르쳐 본 사람 앞에서는 이 정도의 독해력은 따라 준다. 처음엔 무척 신기했다.)

  오늘은 네 명이 에밀리와 만났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화제는 당연히 비에 관한 것이었다. showery에 관한 설명을 꽤 오래 했다. 소나기 쯤 되겠다. 한마디로 on and off로 오는 비가 showery한 비라고 설명해 주었다. 에밀리가 물었을 때 누군가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싫어한다고 했다. 나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오늘처럼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기어코 하고야 만다고 말해주었다.  있지도 않은 오래된 남자 친구를 급조해내어  그에게 전화를 건다고 말했다. 물론 거짓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꼭 오래 알고 지낸 남자인 적은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영어라는 울타리를 만나면서 표출된 것이다. 이를테면 의식하지 않은 거짓말이 튀어 나왔다.

  모국어보다 영어로 얘기할 때 좀 더 내면의 솔직성이 뿜어져 나온다. 영어 배우려고 모인 멤버들이 유창하지 않으니 막연한 보호막이  되겠거니 하는 믿음 때문이리라. plastic surgery(성형수술)에 관한 얘기를 할 때 나는 쌍거풀 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에밀리는 웃으면서 really?를 연발했다. 이십 대 때의 일이었고, 그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긴데도 술술 잘도 나왔다. 에밀리는 필리핀에는 게이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스무 명 남짓한 멤버 중에 반 정도가 게이 흉내를 내고 있어서 충격이었노라고 말해주었다. 정말로 우리 넷은 really?를 남발하고야 말았다. 에밀리의 의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사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필리핀은 아무래도 미국적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렇단다. 커밍아웃이 환영받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도 필리핀이나 태국 못지 않을 것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보컬보다는 연주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그녀는 트럼펫 악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고전이나 재즈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dvd도 많이 가지고 있다니 아마도 비오는 날 모짜르트의 유일한 트럼펫 협주곡 연주 실황을 들여다 보며 향수를 달랠지도 모르겠다. 비오는 날 음악 틀어 놓고 커피 마시며 청승 떠는 것은 세계 공통 관습인가 보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에밀리가 물었을 때 나는 요즘은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어제 알라딘에서 책 주문하면서 클레이 에이킨의 세 번째 앨범을 같이 주문했기에 올드 팝인 without you에 대해서 얘기했다. 오리지널은 배드핑거가 작곡하고 불렀고, 해리 닐슨이 리바이벌 해서 히트쳤고, 머라이어 캐리가 확대 재생산했으며 최근에는 클레이 에이킨까지 합세했노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해리 닐슨의 보컬이 내 정서에 가장 와닿는다고 말했다. 내 청춘이 그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배드핑거의 멤버 중 두 멤버가 자살에 이르렀다고 말했을 때 에밀리는 확실하게 짚어주었다. suicide는 commit suicide와 합쳐졌을 때 완벽한 의미전달이 된다는 것을.

  에밀리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텔리이자 인텔리 남편을 두었다. 미국 유학 중에 만났다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 치과 의사이다.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해서인지 대가 없이 영어를 가르쳐주면서도 신이 났다. 자청해서 영어를 가르쳐주겠다는 그녀의 선의가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토킨어바웃'을 좋아하는 그녀가 이국에서의 외로움과 갑갑함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가르치는 것을 선택한 것임을. 그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어디 있을까?

  바라건대, 에밀리가 지겨워하지 않고 나의, 아니 우리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내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맨날 김치 담글 줄 아니, 남편 어떻게 만났어, 한국의 시댁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딴 것만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영어에 입문하면서 영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전제되어야 맥 끊기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초보자를 면할 순 없겠지만 에밀리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임에는 틀림없다. 에밀리가 너무 일찍 우리 그룹(대 여섯 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수잔을 만나는 날이다. 수잔 얘기는 내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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