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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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이웃 나비종님과 둘이서 단출한 고전문학모임을 결성하여 같이 독서하기로 했다. 첫 번째 선정도서는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나는 고전문학과 친하지 않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내게 고전문학은 스포츠카랑 비슷하다. 스포츠카는 시동을 켜고도 예열 시간이 길어서 바로 운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열이 마치면 폭발적인 주행이 가능하고 일반 차량과는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고전문학 역시 마찬가지로 예열시간이 길어서 기다리는 동안은 답답해죽겠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현대문학과는 다른 깊이의 재미와 깨달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경우는 전체 분량의 3분의 2 정도가 예열시간이다. 솔직히 특별한 이슈랄 것도 없는 무난한 이야기뿐이라 지루해서 혼났다. 진정 고전문학은 매번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싶다가도, 간간이 터져 나오는 그레이트한 문장 속에서 오는 깨달음 때문에 다들 이 맛으로 고전을 읽는구나 한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들군요.


준남작 월터 엘리엇 경은 아내를 떠나보낸 뒤 세 딸과 살고 있다. 그중 차녀인 앤 엘리엇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장녀는 어머니의 권한과 지위를 물려받아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고, 막내는 제일 먼저 결혼하여 출가했다. 그러나 앤은 27살까지 어떠한 남자도 못 만나고 있다. 사실 8년 전에 사귀던 해군 대령이 있었는데 대모인 레이디 러셀의 결사반대로 강제 이별을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내의 시댁에는 죽은 군인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상사가 하필 앤의 첫사랑이었다. 게다가 대령은 아버지의 세놓은 집을 산 해군 제독의 처남이었다. 제독의 집에서 잠시 머물던 대령은 앤과 재회하지만 이미 감정은 식어버린 상태였다. 앤은 대령이 다른 여자들과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티 내지 못하고 한숨만 짓는다. 멀어질 대로 멀어진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얼핏 보면 로맨스물 같지만 사회적 계급과 지위를 중시하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품 해설처럼 격식과 예절 뒤에 숨겨진 온갖 졸렬함과 이기심, 질투, 편견 등의 내용이 더 많다. 과거 영국의 젠트리 계급사회가 배경이라서 그런지 다들 겉치레와 허례허식만 쫓고 있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가문의 체면 때문에 지출 항목을 줄이지 않았던 아버지와 장녀. 레벨이 안 맞는다고 대령과 앤의 교제를 반대한 대모. 자신을 걸맞게 대우해주지 않아 불평하면서도 자존심을 꺾지 않는 철부지 막내. 이외에도 각자 잘난 듯 떠들어대는 상황이 잔뜩 나온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한 성깔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앤 혼자만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컸는지 의아하다. 그보다도 일단 주인공의 매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거의 테레사 수녀에 가까운 성격이라 캐릭터의 재미는 전혀 볼 수 없다. 아무튼 계급사회가 아니어도 이처럼 지위만 추구하고 내세우는 속물들을 현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피차일반이다.


네이버에 설득을 검색하면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이라고 나온다. 말 그대로 설득하는 상황이 자주 나오는데 자잘한 건 무시하고 주인공 두 남녀만 놓고 보자. 레이디 러셀이 대령과 헤어지도록 앤을 설득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대령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가 아니었고, 딱히 성공할만한 인물 같지도 않았으며, 앤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이 모든 게 앤을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앤이 아닌 러셀 자신을 설득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러셀은 대령을 반대하던 것과 달리, 앤에게 안성맞춤의 남자를 어떻게든 교제하게 하려고 앤을 설득한다. 과거에는 러셀에게 설득을 당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설득해나가는 앤이었다. 새 남자는 내 타입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지만, 이미 대령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얼마든지 다른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대령의 위치를 비교하며 본인을 달래고 설득했다. 두 남녀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지만 현재의 체면을 생각하며 멀쩡한 척을 한다. 답답하기도 한데 이해되기도 하고 참 거시기 허여. 아무튼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하나가 된 이들이 참으로 부럽스므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은데 구글 번역기 돌린 것처럼 어색한 번역 때문에, 안 그래도 복잡한 구도가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또한 서로 간에 자잘한 감정 마찰도 많아서 어수선했다. 특히 집안 내외의 분쟁은 거의 ‘왕좌의 게임‘ 축소판 수준이다. 왕겜은 미드로 1기까지 보다가 너무 복잡하고 진도가 안 나가서 하차했는데, 이 책은 근성으로 완독해냈다. 진짜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어 작가의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다만, 레이디 러셀을 보며 약간 알겠더라. 자신의 사고방식과 맞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것이고, 맘에 드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자라고 속단하는 그녀. 잠깐의 그릇된 판단으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앤의 행복을 수년간 뺏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설득이란 게 보통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하는 건데, 꼭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됐다. 신선하군.


인물 간의 관계도 가족과 가족의 지인 정도로 폭이 좁고, 무대 배경도 이웃집과 시골 무도회 정도로 제한되어있고, 본격 로맨스보다는 영국 계급사회의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인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독자의 이목을 끌만한 장면은 없어 보였는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이라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지 뭐. 두껍지도 않은 책을 한 800 페이지 읽은 것처럼 오래 걸렸다. 고생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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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07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국 드라마로도 있는데 재밌더군요...

물감 2019-05-07 11:48   좋아요 1 | URL
고전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던데요, 글보다 영상이 더 나으려나요... 그보다 레삭매냐님은 진짜 모르는게 없으신 분 같으심🤔

나비종 2019-05-07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해냈습니다! 박!수!! 이제 어떤 종류의 무재미도 웬만하면 극복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ㅋㅋ

물감님의 리뷰를 읽고 추가하고 싶은 제 의견을 몇 가지 적습니다.

1. 두번째 단락 : 앤과 재회한 대령의 감정이 과연 식어버린 상태였을까요? 아무와나 결혼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상처입은 마음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2. 네번째 단락: 두 주인공이 여전히 사랑하지만 현재의 체면을 생각하여 멀쩡한 척 했다고 표현하셨는데, 체면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혹여 그것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상처받기 두려운 마음이 더욱 크지 않았을까요?

3. 다섯번째 단락: 이미 물감님께서 세번째 단락에서 ‘러셀 자신을 설득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라 언급을 하신 것처럼, ‘설득이란 게 보통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로 쓰신 문장의 ‘좋은 결과‘ 앞에 ˝나에게˝라는 말을 추가하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좋은 결과가 반드시 상대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상의> 고전문학 2탄! 이어서 뛸까요? 아님 지친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다른 책으로 놀러갔다 올까요?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물감 2019-05-07 18:20   좋아요 2 | URL
1.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같은 남자입장에서 적어보았습니다. ‘식었다‘라고 적긴했지만 사실은 두마음이 엄청 싸우고 있겠죠. 저도 이거 무슨 기분인지 알거든요...하하. 남자들은 대령처럼 차도남 컨셉잡고 센척이라도 해야합니다. 안그러면 와장창 무너질테니까요^^;

2. 이것 역시 1번 대답과도 이어지는데요, 속마음이 들키지 않게 체면과 입장을 생각하는 ‘척‘이라고 봅니다. 두사람의 감정선을 보면 후반에는 상처받기 두려운 마음이 맞는 듯해요. 그런데 초중반에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었을거라는 짐작을 해봅니다.

3. 이 의견은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일단 ‘나에게 좋은 결과‘란 러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텐데, 러셀이 본인 좋고자 앤을 설득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앤을 사랑하고 아껴서 그랬을거에요. 그러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러셀은 의도치 않게 앤을 슬픔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해요. 아마 본인은 끝까지 이 사실을 모르겠죠.
나에게 좋은 결과가 상대방도 좋을 수 없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자신을 위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런 표현을 적어봤습니다 ^^


일단 한달에 한 권씩 읽는걸로 진행해보는건 어떨까요ㅋㅋㅋ저는 멀티태스킹이 안되어서 여러권을 못읽어요 ㅠㅠ 나중에 속도가 붙으면 월 2회 하는것으로...ㅋㅋ

나비종 2019-05-07 19:46   좋아요 1 | URL
1. 차도남 컨셉잡고 센척..에서 빵터졌습니다.ㅎㅎ
2. 물감님의 답변을 보고 생각해보니 님의 생각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이런 관점은 얼마 전부터 갖게 되었습니다. 종교에서 기도를 하거나 불공을 드릴 때가 있잖아요. 그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다른 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행동이 표면적으로는 기도하는 대상을 위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결국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렇게 해야 본인의 마음이 편해지니까. 다른 사람의 행복으로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자체가 이타적인 면이 다분히 있지만. 맘껏 비뚤어질테다!도 아닌데 마음 한켠에 그런 생각이 계속 들거든요. 음..아직도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콜입니다~ㅎ 저 역시 멀티가 안되는, 한 번에 한 우물만 디립다 파는 인간인지라, 당분간은 월 1권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것 같아서 뭉클하네요..

카알벨루치 2019-05-07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열 너무 긴데 제인 오스틴이라 용서합니다 사놓고 묵히고 있는 중인 <설득>되겠습니다 ^^

물감 2019-05-07 18:22   좋아요 1 | URL
아 이작가는 원래 예열이 긴가요? 오만과 편견읽고 싶은데 겁나네요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5-07 18:43   좋아요 1 | URL
제가 <오만과 편견>을 대학때 레포트 때문에 읽었는데 넘 좋더군요 명작입니다 그땐 읽어야하기에 예열이나 뭐시고 없이 읽어 느낌이 말씀드리기가...쩝!ㅋ

물감 2019-05-08 08:59   좋아요 1 | URL
명작이면 이해해줘야죠ㅎㅎ
언젠가 읽어보겠습니다^^
 
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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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참여했던 서평단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드럽게 까탈스러운 나에게서 별 5개를 뽑아먹은 슈퍼 그뤠잇한 작품이다. 몇 년 전, 아바타 조종으로 소개팅을 하던 예능프로그램이 기억난다. 직접 소개팅에 나가는 사람은 아바타가 되어 주인의 통신 명령을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 예능이라 그저 웃고 넘겼지만, 그 시스템이 평생 유지된다면 과연 어떨까? 내 삶의 모든 과정과 결과가 나 스스로 정하고 이뤄낸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렇게 이끌었고 나는 그대로 따르기만 한 거라면 정녕 나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김호연 작가는 그에 대한 질문을 이 작품으로 대답해주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하는 투수 박준석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실에서 만난 최경에게 빅뉴스를 듣게 된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거머리가 나의 감각정보를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자 주인공은 자신을 해킹한 X맨을 잡기 위해 그녀와 손을 잡는다. 그녀에게 들은 바로는 자신들을 조종하는 ‘파우스트‘와 그들을 운영하는 ‘메피스토‘라는 단체가 있고, 조종당하는 자신은 ‘파우스터‘로 불린다고 했다. 준석은 자신의 스폰서를 추궁해 메피스토가 정부와도 연결되어있음을 알게 되고, 파우스트의 최종 목적이 자신의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단 것도 알게 된다. 준석은 자신의 꿈이 파우스트의 꿈으로 이뤄지기 전에 그를 찾아내어 결판을 지으려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들의 권력은 어마어마했고, 메피스토의 시스템은 너무도 견고해서 함께 맞서는 자들이 전부 죽어나갔다. 과연 준석은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고서 진정한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의 이 작품은 정유정 작가와 장용민 작가의 스타일을 합쳐놓은 듯했다.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딱 필요한 문장만으로 채우는 것과, 제 삼자가 내레이션 읽듯이 감정을 절제해가며 쓰여진 문체는 정유정 작가를 닮았다. 기발한 상상력과,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와, 빠른 진행 속에 묵직함과, 리얼한 팩션 기법은 장용민 작가와 닮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는 영화나 책들도 허구의 이야기로 와닿을 때가 많은데, 이런 팩션 문학은 다큐멘터리 방송 같은 현장감이 들게 한다. 진짜 장점이 눈에 띄게 많은 작가다.


작품 속 메피스토 회사는 젊음을 누리고 싶은 노인들을 위한 첨단 시스템이다.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은 노인들은 파우스트가 되고, 젊은 육체의 인간을 선택해 자신과 동화시켜 청춘의 기분을 느끼고 대리만족하는 변태들이었다. 하필 준석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 한국지사의 창립 멤버여서 주인공을 옥죄는 내공이 다른 이들보다도 더 뛰어났다. 노인들은 파우스터의 가족과 지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파우스터를 도와주었고, 날마다 승승장구하는 파우스터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줄 착각한다. 그러다 진실을 마주한 파우스터는 지난 수고와 노력들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게 아니었음을 알고 크게 절규한다. 자신이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느꼈던 감정들이 실은 그렇게 느끼도록 조종당한 것이라면, 나의 감정들은 정녕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선택과 판단들이 내 뜻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게 아니고 뭐겠는가. 어쩐지 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젊음을 조종한다는 게 노인들이 청춘의 육체를 얻는 건 아니고, 파우스터가 느끼는 기분과 감정들을 똑같이 느껴서 젊은 감각으로 사는 것이었다. 이게 뭐가 좋은 걸까 싶다가도, 내 몸이 10대, 20대 시절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니 미친 듯이 좋을 것만 같았다. 스무 살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군대조차 재입대 할 의향이 있다. 30대가 이러한 생각일진대 하물며 노인들은 얼마나 젊음을 원할까. 파우스트들의 그릇된 욕망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는 게 참 씁쓸하다. 그건 그렇고 작품 속 노인들은 대부분 갑부에다 자식농사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집안 사정도 비슷비슷했는데 유독 자식들과 틀어진 관계의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자식보다는 본인의 꼭두각시를 더 사랑하고 줄기차게 매달리고들 있었다. 준석의 파우스트는 말하길 ‘자식들은 부모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지만 파우스터는 그게 된다‘고 했다. 이 생각 또한 기성세대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젊은 날에 뼈 빠지게 고생한 만큼 자신의 권위가 당연하다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아랫사람들과의 벽을 쌓고 건강한 소통을 단절한다. 이렇게 자신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구라도 무참히 짓밟는 기성세대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김호연 작가였다.


부패한 사회의 이모저모를 다양하게 풍자했는데, 그중 베스트는 준석과 타락한 목사의 대화 장면을 손꼽는다. 세속에 물든 목사는 준석의 할머니를 사주하고 컨트롤한 것을 부인하기 바빴고, 종교라는 그림자에 숨어 끝까지 발뺌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돈 밝히는 습성은 여전하여 준석은 물질로 목사의 배후를 추궁하는데 성공한다. 현대의 종교계를 비판하는 따끔한 장면이다. 스토리와 메시지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두 번째는 둘째 오빠와 최경의 대화 장면이다. 기성세대는 아집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에서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위치라고 오빠는 말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요즘에 꼰대 기질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데 그게 다 윗사람들 보고 배워서 그런거다.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어떻게 깨끗하랴.


결국 준석과 그의 파우스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고, 메피스토 본사에서 엄청난 진실을 마주한다. 나는 이 반전을 정통으로 맞아버렸고 눈과 뇌가 몇 초 동안 굳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거였는데, 워낙 푹 빠져 읽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정말 여러 번 반하게 만든다. 만약 메피스토 회사가 무너지지 않고 파우스터들이 해방되지 않고 배드 엔딩으로 끝나면 어땠을까. 디스토피아식의 결말도 나쁘지 않았을 듯? 쓴맛 가득한 이 책은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추악한 말로를 보여준다. 인간은 절대 전지전능할 수 없으며, 고생 없는 성공 또한 불가능하다. 인간은 대가를 감당해내고 얻은 기회만큼만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까지 탄생했다. 그 말에 해당되지 않도록 독서 많이 하고 견문을 넓혀서 정도의 길을 걷는 현자들이 되시길 바란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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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4-25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호연 작가의 책 재밌게 읽었던
기억입니다.

이번에 나온 책도 기대가 되네요.

물감 2019-04-25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이게 처음인데요, 원래 굉장한 작가였군요. 전작들을 역주행 해봐야겠습니다. 국내에 보물같은 작가들이 은근히 많네요.

카알벨루치 2019-04-26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별5개 , 은근히 또 땡깁니다 ㅎㅎ

물감 2019-04-26 08:42   좋아요 2 | URL
저는 원래 책추천은 잘 안하는편인데요,
이 책은 강추합니다ㅎㅎ

coolcat329 2019-04-26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신청했어요. 처음 듣는 작가인데, 국내 진주처럼 묻혀있는 작가 덕분에 알게 되서 기쁘네요

물감 2019-04-26 13:26   좋아요 1 | URL
저도 좋은 작가를 알게되어 기쁩니다ㅎㅎ 쿨캣님도 저랑 같이 역주행하시죠!

나비종 2019-04-29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가시가 떠올랐습니다. 비슷한 현상들이 실제 생물계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니, 소설 속 이야기도 언젠가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까요? 살짝 섬뜩했습니다. 나날이 발전해간다는 AI도 생각나구요. 이 모든 혼란들 속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정체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물감 2019-04-29 22:23   좋아요 1 | URL
읽어보시면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실겁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여진다죠. 그런데 개인 또한 누군가에게 움직여진다 생각하면 진짜 답이 없더군요. 많은걸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매드 매드 시리즈
클로이 에스포지토 지음, 공보경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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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흔한 병맛 B급이 아닌 프리미엄 C급 소설이다. 교양과 기품이 전부인 영국인에게도 이렇게 확 깨는 감성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부디 앞으로도 이 스타일을 잃지 마시옵서예... 라고 하려다가 취소했다. 왜 그랬는지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일단 ‘왕자와 거지‘의 현대판 이야기이다. 물론 재해석도 이런 재해석이 없지만 말이다. B급은 좋아하지만 이런 막장 스토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가 미쳐버린 한 여자만을 다루고 싶었던 걸까? 독자들은 이 작품에 시간 쏟지 말고 다른 책 읽으시길 바란다.


일란성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이 언니를 시기 질투해 언니의 삶을 뺏는 내용이다. 인생 탄탄대로인 언니와 달리 막장 인생으로 세상만사에 불만 가득한 동생은 직장에서 야동 보다가 걸려서 퇴직한다. 마침 지내던 집에서도 쫓겨나 할 수 없이 이탈리아의 언니 집으로 간다. 언니는 잘생긴 갑부 남편을 만나 관리 잘 받은 귀부인이 돼있어서 동생의 자존심은 팍팍 깎였다. 언니는 자신의 좋은 저택과 돈도 다 제공할 테니 어느 한 날에 자신과 신분을 바꾸자고 한다. 잠깐 동생이 된 언니가 외출하고 와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있었고, 동생과 옥신각신 다투다가 저택의 수영장에 빠져버렸다. 형부가 뛰어들어 구해냈으나 이미 언니는 죽은 뒤였다. 그리고 형부가 동생에게 하는 말. ˝여기서 처제를 죽이면 어떻게 해? 계획대로 했어야지!˝ 갑자기 멘붕 상태가 된 주인공. 자신은 곧 죽을 입장이었던 걸까? 언니네의 원래 계획은 뭐였을까? 몰려드는 비구름을 온몸으로 맞닥뜨린 동생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낼까.


언니의 삶도 남편도 아이도 전부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며 그렇게나 증오하던 언니였는데, 막상 언니의 신분이 되고 나니 이대로 살고 싶지 않아지다니. 복잡 미묘한 이 마음과 자신의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자신을 죽일 계획이었다는 걸 알고도 언니인 척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 그러나 이런 고민들은 잠깐일 뿐, 내가 이제부터 언니다! 라고 인정해버리니 모든 게 OK였다. 전개도 빠르고, 스릴감도 넘치고, 캐릭터 표현도 좋고,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밀당 스킬도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중반 이후로는 사라지는 게 문제였다. 언니가 왜 신분을 바꾸려 했는지, 완벽한 생활에서 왜 도피하려 했는지, 자신이 왜 위험한 상황에 놓였는지 등등. 호기심 유발하는 스킬은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그런데 비밀의 정체들을 너무 허무맹랑하게 드러내니까 이건 뭐 쫄깃쫄깃한 맛이 전혀 없다. 이 작가는 템포 좀 낮추고 적당한 무게함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


제목 그대로 동생은 미쳤다. 아니, 점점 미쳐간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죽은 사람을 보고 흥분을 하더니, 마침내 본인이 총질로 죽인 사람을 보며 쾌감을 얻는다. 심지어 마피아 집단의 오른팔을 죽여놓고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인증샷을 SNS에 올리고 싶어 한다. 게다가 섹스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면 자신을 헤치려는 남자를 보고도 음란한 생각뿐이다. 등장하는 남자들하고 전부 잠자리를 가지는데 굉장히 적나라한 묘사의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쯤부터는 인물 설정에 지나친 무리수를 둔다고 느꼈다. 아무리 나사 빠진 사람이라도 이 정도로 무식하고 생각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반까지만 해도 나름 신선한 문화 충격의 스릴러라고 여겼는데, 이건 뭐 스토리는 산으로 가고 19금 장면만 정성을 쏟다가 끝난다. 언니 부부가 죽고 난 뒤에는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형부 집안에 마피아가 개입되어있다는 게 특별한 설정도 아니고 말야. 유쾌한 코믹 에러 스릴러 장르인 척하고 있지만, 이건 그냥 냄비 받침대로 써도 될 듯.


내가 만약 저 아이돌로 살았다면, 내가 만약 저 사업가였다면 하는 상상. 흔히 하는 상상이지만 그건 단지 상대방의 껍질만 보고 판단하는 것 밖에 안된다. 상대방이 어떤 환경과 생각, 입장, 고민 중에 있는지 알고도 그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내가 지금 당장 빌 게이츠가 되고, 정우성이 되고, 방탄소년단이 된다면 무조건 행복할까? 이 책은 그런 환상을 철저히 박살 내주는 작품이다. 남의 삶을 대신 산다는 건 강호동이 M사이즈의 옷을 입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남의 삶을 탐내기보단 그냥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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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특별판)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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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를 오마주한 현대판 디스토피아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앞전에 1984를 급하게 읽었더랬지. 전체주의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감시받는 1984와, 현대에서 사용하는 기계에게 감시받는 리틀 브라더. 두 작품은 분위기부터 소재까지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자유가 억압받는 세상과, 진실이 외면받는 과정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본 작품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있고 얼마나 쉽게 공격받을 수 있는지 알게 해주는데, 실제로 이런 세상이 온다면 전혀 살맛 나지 않을 것 같다. 1984를 읽으면서 북한에 안 태어나 감사감사 했는데 민주국가도 얼마든지 X될 수 있다고 말하는 떨떠름한 작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교 하나가 테러범에 의해 폭파되고 큰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그 주변에서 놀던 마커스 일행은 의문에 집단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간다. 그리고 국토 안보부 수사관들에게 억류되어 별별 심문과 고문을 받고 풀려난 친구들. 그러나 친구 하나가 끝내 풀려나지 못했고, 이어서 테러리스트를 적발해낸다는 명목하에 시민들은 국토 안보부에게 모든 동선과 일정을 감시받는다. 열 뻗친 마커스는 자신의 천재적인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국가에 복수를 결심한다. 접속기록이 남지 않는 가상의 웹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온/오프라인에서 교묘하게 반대 운동을 추진하는 마커스. 익명의 선동가인 그는 어느새 미국을 대표하는 범죄자가 되어있었고, 잡히면 평생을 감방 VVIP 고객으로 극진히 대접받게 생겼다. 자, 이제 미스터 해커씨는 이 국가 사태를 어떻게 회복하고, 자신의 누명을 어떻게 벗길 것이며, 붙잡힌 친구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지요?


책 제목에서 1984의 빅 브라더와 연관이 있을 거 란 생각은 했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가 워낙 달라서 감이 오지 않았는데 곧 자연스레 알게 됐다. 빅 브라더가 텔레스크린과 도청장치로 사람들을 감시했다면 현대에서는 카드 사용과 휴대폰, pc 사용, 인터넷 등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기들이 사람들을 감시한다. 내가 어딜 가서 뭘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전부 기록이 남는 현대사회는 첨단 감시망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집 앞에 슈퍼를 놔두고 옆 동네 슈퍼에 간 걸로 테러범 의심을 받는다 생각해보라. 그리고 테러범이 아님을 증명해보란 말을 듣는다면 어떨 것 같은가? 이게 나라냐 싶겠지. 자유 국가에서 내가 슈퍼를 가든 문방구를 가든 왜 감시를 받고 설명을 해야 함? 진짜 갈수록 온갖 것에 터치를 받는 게 완전히 빅 브라더와 판박이네. 이럼에도 작가는 말하길, 이 책은 경고를 주기 위함이 아닌 컴퓨터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지 묻는 책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은 독자에게 프로그래밍을 배워보라고 권한다. 입력하고 지시한 대로 실행되는 놀라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며, 컴퓨터로 사람도 통제하고 온갖 작업들도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는데 글쎄 난 이미 틀렸음. 그러니 자라나는 초딩들아, 공부 열심히 하렴...


초반 전개가 지나치게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간다. 사실 처음에는 천재 해커 학생이 정부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놀고 나 잡아봐라,하는 식의 전개를 기대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주인공이 정부에 대항하려고 플랜 ABC를 만들어내면 그로 인해 대중들이 피해를 입었고, 자책감을 느낀 주인공은 심신이 점점 약해졌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을 못해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경찰에게 당하고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반대 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마커스, 너도 참 징하다.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고, 성공적인 결과로 만드는 건 더 쉽지 않았다. 결국 끝에 가서 다시 붙잡혔을 때, 졌지만 잘 싸웠다고 해줄까 하다가 너무 드라마틱하게 종결되어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결국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었단 말인가. 


국토 안보부의 빅 브라더가 헌법을 유린하고 정계로 나아가려는 음모가 드러나면서 작품의 진짜 메시지가 빛을 발한다. 헌법보다 안보가 우선이라는 안보부의 이념은, 인권을 막으면서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개똥같은 논리였다. 아니, 그러면 화장실에 설치한 몰카도 범죄가 아니겠네? 그러나 그런 개똥같은 말들도 경찰들을 동원해 무력으로 행사하면 시민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반항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텐데 그걸 누가 감당해내겠음? 게다가 미국정부기관이 오판했다고 누가 의심하겠음? 그런데 작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국가도 시뻘건 독재 권력질로 폭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솔직히 탁상공론은 너네 미국보다 우리 한국이 한 수위임. 꺄불지마라우. 아무튼 이외에 IT 기술들도 다양하게 설명해주지만 나는 ‘컴알못‘이라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하며 읽었다. 작가 딴에는 쉽게 설명한다고 한 건데 온전히 이해 못해서 미안했다. 근데 아직도 컴퓨터가 인간을 어떻게 자유롭게 해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중에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작품 하나 써주세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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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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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리뷰는 구병모 작가의 특기인 긴 호흡의 문장을 카피하여 써보겠다. 불편한 분들은 차분하게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면 되지만 그냥 어떤 식으로 썼는지 함 읽어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봐줬으면 하는 겨자씨만 한 작은 소망이 있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며 영화 ‘완벽한 타인‘이 자동으로 떠올랐는데, 이 책도 그 영화처럼 몇몇 가족들끼리 모여 지내다 불편한 상황이 연속으로 발생하여 결국 배드 엔딩을 넘어서 더티 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대놓고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한 이번 책은 이웃 간에 겪는 불편함의 지수가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수준급으로 높아서, 어머어머 웬일이니 하면서도 팝콘과 콜라를 삼켜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킹왕짱 쏠쏠했고, 이 정도면 작가님이 드라마계로 진출하셔도 손색이 없겠다 싶을 정도여서 혹시나 문학은 관두고 연예계로 데뷔하면 어쩌지 싶은 별 희한한 걱정도 이삼 초쯤 들었다. 암튼 이 정도면 거의 민간인 사찰 수준 아니냐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작가의 인생사 관찰력도 대단하지만, ‘파과‘에 비하면 많이 소프트해진 문장들과 짧아진 호흡에 읽기가 편해서 좋았는데, 사실 인간미 가득한 이런 작품은 몰입도가 워낙 대단해서 문장이 길든 말든 상관없다. 아무튼 역시나 구병모 작가다.


젊은 부부 대상으로 나라에서 집을 마련해주는 제도인 꿈미래실험 공동주택. 산속에 지은 작은 아파트에 네 가정이 입주해서 옹기종기 모였는데, 집마다 사정도 다 다르고, 각자 개인의 성향도 너무 달랐다. 어차피 계속 볼 사이니까 잘 지내보자며 이 주택단지만의 규칙도 세우고 아이들도 집마다 돌아가면서 돌보기로 정한다. 이런 공동체의식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때라야 가능한데, 성향도 개성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말처럼 쉽나 그게. 가면 쓰고 웃지만 속으론 짜증 내기 일쑤인 나날들이 이어지고, 티 안 나게 서열을 나누거나 선을 긋는 묘한 심리전쟁이 시작된다. 외부 세계와 단절돼있다는 것에서 오는 허전함을 채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남들과 살갑게 지내길 원치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제 자식을 봐서라도 싫은 건 싫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쭉 유지되었다. 마침 키우는 애들이 다 고만고만한 나이라 부모들의 고충도 다 비슷했는데, 부모들끼리 섞이지 못하면 제 아이는 저절로 따돌림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원치 않는 카플도 해야 했고, 남들 잘 때 목청 높여 싸우는 옆집 소리를 듣고도 가서 따질 수가 없었다. 다른 엄마들이 내 아이를 돌보다가 애가 크게 다쳤을 때 화내기 껄끄러운 일들도 다반사였다. 이만하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견적이 나올 것이다.


모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가까운 사이가 되려니 감내해야 할 항목들이 너무 많다. 나는 요기까지만 거리를 두고 싶은데 상대방은 웃으면서 그 선을 넘어오니 밀어내기도 뭐 하고, 또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기는 싫으니 억지로 받아주고의 반복이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임에도 과잉 반응을 해버리면 상대방은 음란 마귀가 끼였느니, 피해 망상이라느니 식으로 나올 수 있어서 나만 이상한 사람 되기 쉬운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이상한 소문나는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든 우리 애가 놀림 받고 따돌림당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공동체 생활은 유지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배려란 게 꼭 의무는 아니겠으나 이것이 잘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로다. 내 집 숟가락이 몇 개인가를 남들이 왜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싫으니까 이해 좀 해줘! 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지금 불편하다는 분위기나 좀 파악해주면 좋을 것을, 왜 다들 그걸 모르시는지. 각자가 생각하는 프라이버시의 범위가 다 달라서 일어나는 일상의 해프닝들이라 이건 도저히 해결 방도가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공동생활에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융통성도 없고 이해도 안 간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집안 챙기기도 바쁜데 공동생활까지 하는 게 버거워서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 국가제도의 취지를 알고 입주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사는 건 거기서 거기일 텐데 서로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받지 못하고 불편해하면서 왜 기를 쓰고 잘 지내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혼자가 익숙한 세대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공동체 생활이든 아니든 한국처럼 다닥다닥 붙어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집과 집 사이가 멀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구병모 작가를 높이 사는 것 중에 하나는, 고급 단어나 어휘를 ‘평범하게‘ 보이도록 쓴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평소에 잘 안 쓰는 단어를 쓰면 그 단어나 문장이 형광 스티커처럼 눈에 띄게 마련이나, 이 작가는 튀지 않고 내내 덤덤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글을 써서 참 신기하다. 그 세련된 절제미 안에서 나름의 강약 조절이 느껴져 보통 내공이 아니란 걸 깨달을 때마다 이런 사람이 작가를 해야 하겠구나 싶다. 많은 글쟁이들이 있다지만 자신만의 문체를 갖춘 사람은 보기 힘든데, 이 작가는 확실한 자기 색깔을 갖고 있어서 대단하고 또 부럽다. 그 재능, 겨자씨만큼만 제게 나눠주시면 안되갔습니까. 탐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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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4-11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된 시절을 적확하게 타격하는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이상주의적 공동체의 모습을 추구하기에는 속세의 물이 너무...

물감 2019-04-11 11:34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속세의 물이란 표현이 딱입니다. 앞으로도 공동체생활은 어렵겠죠. 전 지금시대의 생활이나 패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작품으로 확인을 해보니 씁쓸하긴 하네요...

페크pek0501 2019-04-1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작가가 글 잘 쓴다고 제 귀에까지 들어와서 저도 구입한 책이 버드 스트라이크예요.
앞에만 조금 봤는데 특색이 있더군요. 물감 님이 맨 마지막 문단에 쓰신 것. - 고급 단어를 평범하게 보이도록 쓴 것은 그 작품 안에 낱말이 잘 녹아 있다는 것이겠지요. 문장과 문장이,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음을 뜻할 수도 있고요.
글 잘 쓰는 사람이 왜 이리 많습니까? 저도 탐나네요.

물감 2019-04-17 09:41   좋아요 1 | URL
구병모 작가의 문체는 ‘멋있다‘ 보다는 ‘배워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조명받는 작가들은 다 이유가 있었네요. 나름 리뷰를 여러번 써오면서 느낀건데 노력으로 이뤄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듯 해요. 그래서 결국 뮤즈를 만나야 하는가 싶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