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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알라딘 이웃 나비종님과 둘이서 단출한 고전문학모임을 결성하여 같이 독서하기로 했다. 첫 번째 선정도서는 제인 오스틴의 ‘설득‘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나는 고전문학과 친하지 않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내게 고전문학은 스포츠카랑 비슷하다. 스포츠카는 시동을 켜고도 예열 시간이 길어서 바로 운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열이 마치면 폭발적인 주행이 가능하고 일반 차량과는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고전문학 역시 마찬가지로 예열시간이 길어서 기다리는 동안은 답답해죽겠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현대문학과는 다른 깊이의 재미와 깨달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경우는 전체 분량의 3분의 2 정도가 예열시간이다. 솔직히 특별한 이슈랄 것도 없는 무난한 이야기뿐이라 지루해서 혼났다. 진정 고전문학은 매번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싶다가도, 간간이 터져 나오는 그레이트한 문장 속에서 오는 깨달음 때문에 다들 이 맛으로 고전을 읽는구나 한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들군요.
준남작 월터 엘리엇 경은 아내를 떠나보낸 뒤 세 딸과 살고 있다. 그중 차녀인 앤 엘리엇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장녀는 어머니의 권한과 지위를 물려받아 가문의 안주인이 되었고, 막내는 제일 먼저 결혼하여 출가했다. 그러나 앤은 27살까지 어떠한 남자도 못 만나고 있다. 사실 8년 전에 사귀던 해군 대령이 있었는데 대모인 레이디 러셀의 결사반대로 강제 이별을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내의 시댁에는 죽은 군인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상사가 하필 앤의 첫사랑이었다. 게다가 대령은 아버지의 세놓은 집을 산 해군 제독의 처남이었다. 제독의 집에서 잠시 머물던 대령은 앤과 재회하지만 이미 감정은 식어버린 상태였다. 앤은 대령이 다른 여자들과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티 내지 못하고 한숨만 짓는다. 멀어질 대로 멀어진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얼핏 보면 로맨스물 같지만 사회적 계급과 지위를 중시하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품 해설처럼 격식과 예절 뒤에 숨겨진 온갖 졸렬함과 이기심, 질투, 편견 등의 내용이 더 많다. 과거 영국의 젠트리 계급사회가 배경이라서 그런지 다들 겉치레와 허례허식만 쫓고 있었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가문의 체면 때문에 지출 항목을 줄이지 않았던 아버지와 장녀. 레벨이 안 맞는다고 대령과 앤의 교제를 반대한 대모. 자신을 걸맞게 대우해주지 않아 불평하면서도 자존심을 꺾지 않는 철부지 막내. 이외에도 각자 잘난 듯 떠들어대는 상황이 잔뜩 나온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한 성깔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앤 혼자만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컸는지 의아하다. 그보다도 일단 주인공의 매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거의 테레사 수녀에 가까운 성격이라 캐릭터의 재미는 전혀 볼 수 없다. 아무튼 계급사회가 아니어도 이처럼 지위만 추구하고 내세우는 속물들을 현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피차일반이다.
네이버에 설득을 검색하면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이라고 나온다. 말 그대로 설득하는 상황이 자주 나오는데 자잘한 건 무시하고 주인공 두 남녀만 놓고 보자. 레이디 러셀이 대령과 헤어지도록 앤을 설득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대령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가 아니었고, 딱히 성공할만한 인물 같지도 않았으며, 앤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이 모든 게 앤을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앤이 아닌 러셀 자신을 설득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러셀은 대령을 반대하던 것과 달리, 앤에게 안성맞춤의 남자를 어떻게든 교제하게 하려고 앤을 설득한다. 과거에는 러셀에게 설득을 당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설득해나가는 앤이었다. 새 남자는 내 타입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지만, 이미 대령에게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얼마든지 다른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대령의 위치를 비교하며 본인을 달래고 설득했다. 두 남녀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지만 현재의 체면을 생각하며 멀쩡한 척을 한다. 답답하기도 한데 이해되기도 하고 참 거시기 허여. 아무튼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하나가 된 이들이 참으로 부럽스므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은데 구글 번역기 돌린 것처럼 어색한 번역 때문에, 안 그래도 복잡한 구도가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또한 서로 간에 자잘한 감정 마찰도 많아서 어수선했다. 특히 집안 내외의 분쟁은 거의 ‘왕좌의 게임‘ 축소판 수준이다. 왕겜은 미드로 1기까지 보다가 너무 복잡하고 진도가 안 나가서 하차했는데, 이 책은 근성으로 완독해냈다. 진짜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어 작가의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다만, 레이디 러셀을 보며 약간 알겠더라. 자신의 사고방식과 맞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것이고, 맘에 드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자라고 속단하는 그녀. 잠깐의 그릇된 판단으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앤의 행복을 수년간 뺏어버린 결과를 낳았다. 설득이란 게 보통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하는 건데, 꼭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됐다. 신선하군.
인물 간의 관계도 가족과 가족의 지인 정도로 폭이 좁고, 무대 배경도 이웃집과 시골 무도회 정도로 제한되어있고, 본격 로맨스보다는 영국 계급사회의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인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독자의 이목을 끌만한 장면은 없어 보였는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이라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지 뭐. 두껍지도 않은 책을 한 800 페이지 읽은 것처럼 오래 걸렸다. 고생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