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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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은 혼자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다‘ - 이 의견은 1인 가구/N포세대가 늘고 있는 요즘, 온라인에서 엄청나게 찬반이 나뉘고 있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게 부담이 되고, 있는 관계도 끊고 사는 시대인데 혼자 사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시장도 상품을 1인 가구에 맞춰서 내놓는 추세이므로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가득하다. 그 말에 나는 뭐 반반 입장이다. 그러나 절대 사람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가 없다. 마이웨이 독고다이의 싱글 플레이어 캐릭터들(007요원이나 람보나 셜록 홈스 같은)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계속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 호신술도 할 줄 모르고 사고 대처도 못하는 우리가 납치되거나 인적 없는 곳에서 사고 나거나 조난당했을 때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내가 위급상황일 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내가 죽거나 없어져도 아쉬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너무나 괴로울 것 같다. 이런 상상만 해봐도 사람은 완벽하게 혼자일 수는 없다. 그 생각은 이 책을 보면서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번 편은 인적 없는 설산에 갇힌 병리학자 마우라 아일스의 이야기이다.


성직자와 밀애 중인 마우라는 절대 평범치 않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 중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병리학 컨퍼런스를 참석하러 날아간 캘리포니아에서 대학 동기를 만난다. 기분전환을 위해 그의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산 길에서 차 사고가 나서 다친 동료를 주변 마을로 데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을은 모두 빈 집이었고 집문이 전부 열려있다. 바깥은 폭설 중이고 전화는 안 터지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상처하나 없이 죽어있는 반려동물들과 의문의 피 웅덩이... 한편 그녀의 실종을 눈치챈 형사 리졸리 일행은 마우라의 사고 차량을 발견하고 근처에 죽은 시신들이 마우라 일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진짜 마우라는 이제 아무도 찾으려 하질 않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하나의 그림자. 마우라는 자신을 반기는 위험과 공포 가운데에서 무사히 구조될 수 있을까.


고립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조난 사건과 사고들. 흔한 소재라 딱히 기대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다만 같은 소재라도 추리소설과 스릴러소설의 패턴이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겼다. 보통 추리소설이 밀폐 장소에서 범인을 밝히는 게 기본 플롯이라면, 스릴러소설은 건물 안과 밖에서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범인도 찾으면서 위기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 과정까지가 기본 플롯이다. 이 책은 밀폐된 공간을 집안 같은 좁은 장소에서 마을과 지역 전체로 확산시켰다. 무대가 커지면 써먹을 장치도 더 많이 늘어난다. 작가는 텅 빈 곳에서 인기척을 느끼게 함으로 공포감을 형성하였고, 일행들이 의견 불일치로 싸워서 흩어지게 한다. 여기까지는 어느 조난 장르물이나 비슷한 흐름이다. 그러나 후반전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녀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에 누군가가 집들을 불질러서 일행들이 전부 죽었고, 그 지역의 보안관들이 그녀를 죽이려는 황당무계한 전개가 진행된다. 이렇게 뻔하면서도 예측불허한 특징이 장르소설만의 매력이다.


이번 작품은 유독 마우라의 심리상태가 뒤집히는 상황이 자주 있다. 항상 시크하고 완벽주의에다 일 외에는 모든 게 서툴고 유연치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워할 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이와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죽은 사람만 상대해온 마우라는 처음으로 산 사람을 수술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 죽은 사람은 해부할 때 피도 안 흐르고 비명 지르는 일도 없고 옆에서 통곡하는 가족도 없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모든 게 정 반대였다. 환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괴로움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그녀의 돌 같은 심장을 깨뜨렸고, 산 사람이 가진 생명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여러 가지로 마우라의 성장을 보여주었던 작품이다. 그런데 꽤 비중 있었던 일행들이 화재 이후로 갑자기 다 퇴장해버려서 급 당황스러웠다. 뭔가 있어 보였던 등장인물이 알고 보니 병풍 역할이라면 이 얼마나 허무한가. 스릴러 장르는 이렇게 김빠진 콜라 하나가 작품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도 주의해야 한다.


스릴러 소설은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외면받는 장르이다. 이유야 많겠지만 잔인하고 폭력적인 게 싫은 것과, 문체가 딱딱해서 싫다는 이유가 가장 많다. 전자는 어쩔 수 없지만 후자의 이유라면 이 작가의 책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테스 게리첸은 감성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여성으로 설정하였고, 사건 사고마다 여성만의 아픔과 연민의 감정으로 연결시키는게 특징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사건보다 캐릭터들의 인간적인 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아무튼 글도 하드보일드 하지 않고, 작품의 거친 면만 보여주고 땡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가의 책은 스릴러 장르에 입문용으로 적격이다. 플롯도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 재미는 재미대로, 교훈은 교훈대로 다 갖춘 편이라 부담이 덜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간된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2013년도에 출간된 이 책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후속작이 없는 건 국내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오는 걸까.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끊어진 걸까. 그래 뭐 나중에라도 작가의 신간을 볼 수 있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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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는 왜 퇴보하는가 - 청년세대의 정치무관심, 그리고 기성세대의 정치과잉
안성민 지음 / 디벨롭어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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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락 주신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정치/사회 분야는 평소 잘 안 읽는 편이지만 궁금해서 신청했다. 근래에 내가 빨간 표지와 맞지 않다고 글 쓴 적 있었는데 떡하니 빨간 책이 와서 당혹스러웠다. 혹시나 이번에도 꽝일까 싶어서. 다행히 꽝은 아니지만 비문학들은 문학보다 실패 확률이 적지 않나? 암튼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꽤 만족스럽게 읽었다. 저자는 오늘날 청년층이 겪고 있는 수많은 사회문제들을 보기 쉽게 정리 및 분석하였고, 국민들의 혐오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한국 정치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아주 잘 돌아가는 국내 정치판에서 청년들의 입지는 얼마나 열악한가를 알아보자.


청년을 지칭하는 나이는 다 다르나 통상 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쯤 된다. 이 연령층이 나라를 움직이고 유지하는 주역이라지만 여전히 다 해 먹는 건 기성세대들이다. 그들은 물러나지 않고 건건이 사회에 개입하여 청년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 한다. 이미 수없이 거론된 부동산 경제, 비결혼, 일자리, 저출산과 같은 문제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증명해 보였건만, 청년들의 외침을 근성 부족으로 치부해버린 기득권과 정권 아니었던가. 지금 청년들은 나라에 욕하는 것도 지쳐서 돈 없고 빽 없는 스스로를 신세한탄하고 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20대 초반의 친구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헬조선의 한국 청년들은 온갖 나쁜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다 들어맞는 세대가 되었다. 성실하기만 해도 잘 살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모든 게 풍족하고 발전했음에도 미래는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청년들의 앞길을 기성세대가 전부 막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말이야,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이놈의 헬조선은 ‘니도 당해봐라‘ 식의 보상심리가 학교와 군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입들이 들어오면 경력자들이 도와주긴커녕 지 밥그릇 뺏길까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말이다. 방송인 유병재가 이런 말을 했지. 다 경력자만 뽑으면 나 같은 신입은 어디 가서 경력을 쌓냐고. 딱 이것처럼 억울한 일 투성이인 게 지금의 청년들이다. 직장을 못 구해도 힘들지만 취업을 해도 상황은 여전하다. 월급쟁이도 퇴직 걱정하고, 자영업자도 매출 걱정하고, 알바생도 무인 시스템에 밀릴까 봐 걱정한다. 이쯤 되면 청년들이 정치판에 개입하는 게 싫은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이 2030의 생존 문제들을 일부러 외면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과만이 전부인 세상이다. 늘 그래왔지만 요즘 시대는 유독 심하다. 그래서 성과나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들은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인간관계?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 끊어도 문제없다. 워라밸? 옆집 개 사료처럼 나와 상관없는 단어다. 도전정신?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해서 자폭할 필요 있나. 이런 마인드의 친구들이 사회로 나와서 꼰대 마인드 기성세대와 부딪히니 회사가 잘 돌아갈 수가 없다. 잘못을 밑에서만 찾으려는 꼰대들은 후배들이 사회 적응 못하는 이기적인 놈으로만 보일 뿐이다. 시대는 날로 급변하는데 아직도 7080년도의 사고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기성세대는 그게 지금도 먹힌다고 믿는다. 이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청년들은 침묵을 택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인주의가 된다. 국가는 청년들이 왜 이러는지 원인 파악도 안 하고, 눈앞에 불만 끄려고 말 같지도 않는 대책만 꺼냈다가 몰매 맞기를 반복 중이다. 아무도 청년들 마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고 공감하려 들지도 않는다. 굳이 말 안 해도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 젊은 것들은 노오력이 부족하단 말이 한때 나돌았다. 고것 참 희대의 뻘소리다. 당장 내 주변에는 풀야근에 주말 근무하는 분들이 널렸는데 이 워크홀릭들이 노오력 부족이라? 근무시간은 지금도 한국이 세계 탑 순위권 아니던가? 그렇게 버닝하면서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가야만 하는 심정을 기성세대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내 일이 아니므로 관심 없는 것 뿐. 문 대통령은 취임 시에 평등, 공정, 정의를 강조했지만 과연 그렇게 되고 있는지 저자는 묻는다. 위에서는 청년들이 도통 정치에 관심 없다고 생각들 하는데,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평생직장이 사라지면서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청년들에게 정치까지 관심 가지 길 바라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정치에 참여 안 하면 무관심하다고 뭐라 하고, 관심을 가지면 어린 게 뭘 아냐고 하고. 대체 어쩌라는 걸까?


지금 정계는 6070이 다 해 먹고 있다 보니 새로운 복지나 정책도 그들 세대에 맞춰져있다. 청년세대에겐 특혜도 주지 않고 정치를 실패할 기회도 안준다. 누가 봐도 불평등, 불공정, 불의를 느끼는 청년들이 왜 가만있는 줄 아는가? 나서봤자 바뀌는 건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군대랑 똑같다. 군대는 온갖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일과 융통성 없는 인간들의 소굴이다. 그런 곳에서 일개 병사가 기존의 시스템을 뒤엎고 개혁을 일으켜 보겠다? 강산이 수십 번 바뀌어도 그대로인 군대에 변화를 바라느니 그냥 버티다가 전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군인들이 자기 부대에 관심도 없는 개인주의라고 비난받아야 할까? 어느 세대건 개구리는 올챙이를 이해 못한다. 개구리는 개구리의 세상이 더 중요하므로 올챙이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게다가 올챙이 시절은 기억도 안 나거든. 본인은 처음부터 개구리였던 거야. 벽 타고 점프하고 사냥하는 스킬이 처음부터 타고났던 거야, 아주 그냥. 


정치인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 프레임 씌우기이다. ‘어려서 뭘 몰라‘, ‘젊은 것들은 경험이 없어‘ 등등. 그래서 실패하면 ‘것 봐라, 내 말이 맞지?‘ 식으로 본인들의 입지를 다지고 밥그릇 하나라도 더 챙긴다. 청년들이 정치하려는 게 꼴사나워 대놓고 소외시키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자신들의 힘을 잃는 건 죽어도 싫은 모양이다.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새파란 것들이 진보를 외치며 적잖은 위협을 해대니 본 때를 보여줄 수밖에 없으시겠지. 그러나 저자는 청년들에게 물러서거나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는 정치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심판하여 본분에 맞는 정신을 갖게 하고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정계는 군 복무도 안한 사람이 군대 문제를 거론하고, 회사를 가본 적 없는 사람이 직장 문제를 거론하고, 자녀도 없는 사람이 육아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건 마치 새가 물고기 걱정하는 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서로 합심하여 시늉만 하는 국회와 정치인들을 놀지 않게 해줘야 한다.


제목 때문에 단순히 정치 분야의 내용인 줄 알았드만, 이 시대의 2030들이 겪고 있는 고충을 꼬집는 내용이 더 많았다. 그 많은 걸 다 조사하고 신조어까지 공부하느라 엄청 수고한 게 느껴진다. 다만 챕터마다 분량이 너무 짧다고 생각되어 그 부분이 좀 아쉽다. 하긴 이 많은 문제점들을 작정하고 다루면 성경책보다 두꺼워질 듯. 나는 20대에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청년은 왜 이리도 할 게 많은 걸까. 학점 관리, 스펙 쌓기, 군 입대, 취업 준비, 연애 사업, 저축, 청약, 대출 갚기 등등... 진짜 너무하다 싶은데 이 불만을 어디에 토로할 수 있지? 청년이 이렇게 극한 직업인 줄 알았다면 안 했을 텐데, 나이 먹으면 저절로 되는 거라서 더 억울하다. 아무튼 저자만큼이나 나도 할 말이 많은데 글이 계속 길어져 이만 줄인다.​



※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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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16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네개나 주시고... 이 책을 읽어 봐야겠네요.

물감 2019-08-16 13:47   좋아요 1 | URL
사실 어떤 분야든지 점수를 줄때 작가의 성의를 가장 먼저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문성이 대단하고 완성도가 높은 책이라도 작품에 대한 성의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낮으면 제 능력 자랑하려고 쓴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반대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게 느껴지는 작가의 책은 얼마든지 점수높게 주려고 합니다. 이 책도 읽어볼만 하실거에요^^
 
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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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웬만해선 신간을 잘 안 읽는다. 검증 안 된 책들을 읽었다가 괜히 시간만 버리고 기분 상했던 경우가 허다해서 그렇다. 지금은 남들이 다 읽고 검증해준 책만 골라 읽는다. 그런데 시즈쿠이 슈스케의 신간을 고른 이유는 뭘까. 처음엔 이 작가는 당연히 읽어줘야지 했지만서도 돌아보면 이전 작품들은 별 세 개 이상을 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분도 글은 참 잘 쓰는데 알맹이는 약한 것이 딱 하루키 스타일이다. 하루키는 멀리하는 내가 이 작가의 글은 왜 읽느냐면, 일단 작품마다 컨셉이 신선하고 둘째는 심리를 다루는 글을 주로 씀에도 전혀 올드하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한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컨셉 얘기는 진짜니까 한번 읽어들 보시길.


여기, 한참 사춘기가 진행 중인 아들과 공부 좀 하는 딸이 있다. 부상으로 축구부를 그만둔 아들이 어느 날 실종되고, 뉴스에서는 아들의 친구가 폭행 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보도된다. 아들의 휴대폰은 며칠째 꺼져있고, 아들이 평소 질 나쁜 무리와 어울렸다는 정보를 듣는다. 사태는 점점 아들이 범죄하고 도주 중인 분위기가 되고, 대중은 이 가족을 범죄자 가정으로 몰고 간다. 당연히 아들을 믿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싹튼 의심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아빠는 아들이 피해자가 되어 집안에 피해가 최소화되길 바라고, 엄마는 아들이 가해자가 되어 살아있기만이라도 바란다. 두 사람의 사고는 끝없이 부딪히고 집안엔 냉기가 흐른다. 아들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두 가지 가능성, 희망 없는 바람. 깜빡이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이 고난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하는가.


​늘상 일본 문학의 라이트한 맛이 싫다고 투덜대지만 이 작가 책은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알맹이는 다소 약해도 남들이 잘 안 하는 소재를 주로 쓰는 데다 짬밥이 팍팍 담긴 글을 쓰기 때문에.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임팩트는 다 다를진대, 슈스케의 글은 유독 그런 느낌이 강하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통달한 산신령 같은 이미지랄까. 하루키에게도 있는 이 고유의 분위기가 이 분에게도 있다. 사실 이런 섬세함과 정교함을 가진 사람들은 장르 불문하고 어떤 글을 써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그런데 그 장점을 장르소설에 접목하면 서스펜스 묘사에서 엄청난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출간 전부터 심리를 다룬 끝판왕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작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결코 과대광고가 아니란 걸 알았다. 마케팅 팀 제법이야?


부모는 아들의 심성이 본래 따듯하고 착한 아이란 걸 알고 있다.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단 뜻이다. 그러나 날마다 집에 찾아오는 기자들의 압박과 그에 동조하는 주변인들로 인해 아들에 대한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절대 범죄 하지 않았다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그 일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비록 아들이 구경만 했다 쳐도 그 무리들 중에 하나라면 똑같은 공범이 된다. 더 이상 아들이 그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억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만약에 아들이 가해자라면 부모는 세상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안되는 게 없었다. 이쯤에서 작가는 느닷없이 범죄자 가족으로 돼버린 한 가정의 멘붕 심리와 함께 방향을 잘못 잡은 대중의 분노까지 다룬다. 가족도 대중도 약간의 정보만 듣고 마음대로 추측하여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이다. 너도나도 똑같이 주장하는데 혼자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힘들 테지만.


아빠는 아들 친구를 통해 축구부를 그만둔 과정을 듣는다. 아들이 이 사건에 말려있는 게 맞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계기나 동기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아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부모로서 버티는 게 한계가 온다. 아빠는 사업 계약이 취소되고 업계에서 왕따가 된다. 엄마는 기자들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가고 초인종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다. 당연히 집안일도 올 스톱 된다. 딸은 학교생활에 타격을 입고 고교 입시 준비는 엉망이 된다. 집 밖에서 받은 조롱과 상처를 집안에서 서로에게 화풀이하는 가족들. 개인에게 일어난 불행과 슬픔 때문에 내 가족이 느끼는 걱정과 근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롭던 가족의 일상들이 단 한 명의 부재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으로 이 커다란 태풍을 몰고 올 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므로.


자식이 범죄자일 때와 사망자일 때의 부모의 심정이 어떻게 다른지 세세히 나온다. 공통점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버틸지 막막하다는 것. 아빠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도 살인자라면 내가 알던 아들이 아니며 평생을 살인범으로 사는 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엄마는 설령 자식이 범인이라 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사는 동안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아빠와 감정이 격해지는 엄마는 서로를 이해 못 하고 싸운다. 아빠는 혹시 모를 상황도 예상하고 그에 따른 대비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엄마는 그런 주장이 자식이 범죄자이길 바라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 현실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를 뿐 자식에 대한 믿음은 같은데 각자가 받은 섭섭함으로 분별력마저 잃어버리는 두 사람. 아내는 현실을 못 보고 남편은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생각에 서로 말도 꺼내지 않는다.


계속되는 압박감에 휘청이는 부모는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각오를 한다. 이런 경우에 가장 참담한 게 뭐냐면 가해자일 바에야 차라리 피해자로 밝혀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이 죽었길 바라는 부모는 없으므로 가해자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다오 할 것 같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가해자 가족의 입장으로 지내온 가족들은 아들이 피해자였단 사실에 안도했다. 아들의 죽음을 바란 게 아님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단 게 더 참담한 것이다. 비슷한 상황을 꼽자면 ‘사랑해서 헤어진다‘ 정도 되지 않을까. 나만 좋자고 A를 택하느니 B를 택해서 여럿이 좋은 길을 가는 게 나은 그런 상황. 어떤 선택이든 이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반드시 피해자라야 가족이 누명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의 죽어준 덕분에 구제받은 집이라니. 그토록 사람들에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들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울부짖었건만, 대중은 저마다의 추측과 여론몰이로 한 가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탄 내버렸다. 사건이 종료되고 진실이 밝혀져도 사과하는 이 하나 없었다. 게다가 오해했다며 용서를 구한들 가족이 받은 상처가 없던 일로 되겠나. 그런다고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나. 이런 대중의 두 얼굴 현상은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더 심각하다. 살인과 폭행, 루머 같은 자극적인 뉴스들은 항상 결과만을 따지므로 이슈의 발단과 과정은 늘 뒷전이 된다. 그래서 정황이 드러나면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했던 사람들은 관심 없던 척 돌아서고, 네티즌들은 올렸던 악성 댓글을 조용히 삭제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 만드는 게 숨쉬기 운동만큼 간단한 세상이다. 나도 비슷한 일을 크게 겪어봐서 그런 두 얼굴의 사람들을 정말 정말 경멸한다.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떠들고 제 말이 무조건 정답 인양 우쭐대는 사람들. 어깨에 힘주고 어슬렁대다가 이때다 싶으면 물어뜯는 하이에나가 세상엔 너무 많다. 정작 사자 앞에서는 깨갱할 것들이.


책 소개 글을 안 읽어서 소년의 실종사건이 중심인 줄 알았지만, 진짜 내용은 최악의 결과만큼은 피했으면 하는 부모의 간절함 바램과, 혹시나 그런 결과일 때 어떻게 해야만 좋을지 염려하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둔다. 과연 심리 소설답다고 하겠으나 그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대략 난감이다. 배경과 무대도 좁고 주요인물도 적고 무엇보다 사건이랄 게 없다. 좀 심하게 비약하자면 ‘어떡해 어떡해‘만 반복하다가 끝나는 스토리였다. 차라리 모노드라마 형식이었다면 좀 더 달랐으려나. 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아무리 맛있는 요리라도 계속 먹으면 금방 질린다. 반찬도 골고루 먹고 밥이랑 국이랑 번갈아 먹고 물도 마셔줘야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다채로움도 없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맴돌고 있어 골방에 갇힌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왕이면 인간의 이중성도 더 세게 고발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심리묘사의 달인은 인정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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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8-13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별 세개!!! ㅎ ㅎ ㅎ

물감 2019-08-13 13:4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ㅎㅎㅎ
근데 전 웬만한 책이 별 세개더라고요ㅎ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8-13 13:51   좋아요 1 | URL
물감님 까칠대마왕 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9-08-16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소설 같은데요. 자식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이길 바라는 부모의 심리라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을 것 같네요.
아무튼 리뷰의 달인이십니다. 이렇게 재밌는 리뷰는 오랜만에 읽어 봅니다. 리뷰가 흥미진진...

물감 2019-08-16 13:53   좋아요 1 | URL
오.. 페크님께 인정받은건가요? ㅎㅎㅎ 기분 너무 좋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칭찬받는게 정말 하늘의 별따기라서요 ㅠㅠ
여러가지로 볼게 참 많은 책인데요, 그중 부모간에 이념대립이 가장 볼거리입니다. 작가도 그걸 다루고 싶어서 쓰다 나온 책이 이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심리소설 좋아하시면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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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미쳤다. 내가 지금 지구에서 사는 건지 태양에서 사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다음 주가 입추인데 이제서야 열대야라니. 갑자기 어항 속 구피들이 넘나 부럽더라. 니들은 땀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이렇게 더울 때는 스릴러소설이 제격인데 왜 빌려온 건 죄다 어두컴컴한 사회소설뿐이지? 진짜 더위를 먹긴 먹었나 보다. 그래 곧 죽더라도 못다 쓴 리뷰는 남기고 죽어야겠음. 그나마 이 작품 배경이 겨울 왕국 러시아라서 시원하고 좋았는데 그냥 플라시보 효과겠지. 근데 재난 소설이라니 완전 의외였음. 느낌상 정유정의 ‘28‘과 영화 ‘설국열차‘를 섞은 듯한 분위기랄까. 대충 감이 오리라 믿겠다. 자 그럼 관자놀이에 나사 쪼이고 시작해볼란다.


세계는 지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서 줄줄이 사망하는 등 난리도 아니다. 도리 자매가 살고 있는 러시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병으로 가족들이 죽었고 거처를 잃었으며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온 마을이 고통받았다. 안식처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다 피난 중인 탑차에 얻어 탄 도리는 지나와 절친이 된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간 곳마다 강도들에게 습격을 받았고 생존자는 점점 줄어든다. 온 사방 천지에 죽음이 가득했고, 산 자들에게는 가족도 동료도 다 적이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마을마다 식량을 휩쓸고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가 노예를 삼았고, 도리와 지나 일행도 예외 없이 잡혀갔다. 탈출도 불가능하지만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이 없다.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이 상황.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여 이들을 이토록 미궁에 몰아넣는가.


보다시피 엄청 무겁고 우울한 줄거리이다. 게다가 재난물의 뻔한 절차를 그대로 밟고 있다. 이런 장르의 결말은 대부분 정해져있는데 대체 어떤 기승전결을 보여줄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생존‘에 포커스가 맞춰져있지 않았다. 읽다 보면 그건 금방 눈치채는데, 그럼 진짜 포커스가 뭔지 봐도 봐도 모르겠다가 도리와 지나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작가의 퍼즐은 하나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잘 가다가 생뚱맞게 웬 동성애물인가 싶었는데 그 이후로도 쭉 등장인물들의 죽어있던 사랑 감정들이 눈을 뜬다. 결국 작가는 이 ‘사랑‘에다 포커스를 두었고, 진부할 수도 있는 이 소재 덕에 더 진부할 수 있었던 장르를 그럴싸하게 완성시켰다. 이야기와 메시지, 두 마리 치킨을 잡은 것이다. 


아무리 포커스가 생존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기본 베이스가 재난물인데 바이러스 원인도 없고, 탈출 장면도 없고, 구원도 희망도 없어 끝까지 진퇴양난이다. 어째 내용이 너무 건너뛴다 싶었는데 그게 다 의도된 거란다. 근데 그것과 상관없이 흐름은 어색함을 못 느꼈고, 작가가 강조하려던 것들은 누락된 것 없이 다 보여진 듯하다. 자, 그러면 대체 이 책의 사랑들은 뭐가 다른가. 비상사태에도 주연들은 각자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는다. 눈앞에서 살인과 강간, 전쟁과 약탈이 일어나는데도, 그 가운데 피어나는 사랑으로 다 참고 이겨내고 있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나와 정반대 성향의 사람과, 나 아닌 다른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과,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사람과 하는 독특한 모양의 사랑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사랑이 서로를 소유하는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서로를 잘 모른 채 최소한의 관계로 맺어진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단순히 썸 아니냐 할 텐데 그거랑은 또 다르다. 여튼 이런 것도 사랑인가 싶은 것들도 이들에게는 강렬한 감정이 되었고, 그것이 죽고 사는 일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삶의 이유도 의미도 없는 이들에게 있어 사랑은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어주었다.


인류 멸망의 순간에도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을 작가는 강조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과거형 사랑의 류, 사랑의 감정에 눈을 뜬 현재진행형 사랑의 도리와 지나, 헤어진 지나와 재회를 소망하는 미래형 사랑의 건지, 그리고 곁에서 언니를 잠잠히 사랑하는 제자리걸음형 사랑의 미소. 죽음이 오늘내일하는 마당에 이 감정은 희미해지긴커녕 그 형태가 갈수록 뚜렷해졌다.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이 사치스러운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뿌리쳤다. 그러나 사랑은 내 마음대로 잘라낼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것에 기대어 숨을 쉬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등, 이 형국에 그거라도 없었으면 어쩌나 싶을 만큼 사랑은 위대했다. 지금은 사랑이 죽고 시들은 세상이다. 비연애, 비결혼, 남녀 혐오 등등 사랑이 부재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 같은 거 없어도 잘만 산다고 말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사랑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꼭 서로의 몸과 마음을 가져야만 사랑이 되는 게 아니므로.


지나는 똑같이 겪는 고난 속에서도 유독 다르게 행동했다.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화장품을 식료품보다 좋아했고,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내색 없이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도리는 이런 재앙 속에도 웃을 수 있는 지나가 부러웠고 닮아보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처지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도리에게 있어 어린 동생은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자 삶의 목표였고 버팀의 원동력이었는데, 겨우 사랑 감정에 흔들려 잠시나마 동생을 소홀히 했던 자신이 미웠고 지나도 미워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에 계속 노출되어온 사람들은 그 불행이 당연하단 듯이 여겨지고, 불행을 바라지 않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건 줄 안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불행은 두려움으로 이어져 나쁜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고 사소한 행동에도 벌벌 떨게 한다. 이윽고 부정정인 생각이 본인을 지배하여 ‘나‘라는 존재의 의미까지 부정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의 심경을 압축한 대사가 있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이면서도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 마지막까지도 기적은 없었다.


이성이 없는 좀비와 이성을 잃은 인간 중 뭐가 더 무서울까? 인간은 좀비에게 물리지 않고도 좀비처럼 포악해질 수 있었다. 바이러스보다 위험한 건 붕괴된 인간성이었다. 지나의 가족은 일원이 죽을 때마다 괜히 도리 자매를 원망해댔고 그녀들은 이유 없이 욕받이가 되었다. 지나 가족의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지나를 성폭행 했고, 지나의 아빠는 그걸 모르쇠 했다. 군인들은 마을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예로 부려먹었으며, 모기 잡듯이 사람들을 죽였다. 어린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괴담으로 전 세계는 장기 매매에 혈안이 되어있다. 보다시피 어디에서도 인간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게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을 때 사람은 목숨을 버리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하긴 세상이 엉망진창인데 제정신이면 그것도 비정상이겠다. 학대와 폭력을 일삼던 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던 자도, 짐승의 탈을 쓴 자도,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그것에 이유 따윈 없었다. 이 정도면 차라리 눈 감고 영원한 겨울잠을 자는 게 나을 정도니까. 그래서 사랑의 작은 불씨는 그렇게나 따뜻하고 강렬했던 건가 보다.


왜 제목은 해가 뜨는 곳이 아니라 지는 곳인가. 해지는 곳은 금세 밤이 찾아올 것 같은 적막한 곳이 연상되는데, 반대로 이 작품은 해가 지는 그곳에 여름 같은 빛의 기운이 있는 곳을 뜻했다. 그럼 도리 자매가 가고자 했던 곳은 사랑이 깃든 곳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까. 작가는 매듭짓지 않은 결말처럼 아무것도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 뭐 독자에게 맡기는 건 좋은데 요즘 이런 작품이 너무 많은 듯. 난 그냥 전부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더워서 그런지 요새 전두엽이 잘 안 돌아가거든. 여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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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8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난 서사의 엔딩은 작가에게 딜레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비보다 위험한 건 아작난 인간성이라
는 점에 대한 지적은 정말 멋졌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살을 먹겠다고
덤벼드는 좀비보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
가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물감 2019-08-08 11: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어쩌면 뻔한 엔딩이 싫어서 똥싸다 만 결말을 택한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재난가운데 나는 과연 인간성을 잃지 않을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아이의 간 빼먹을 정도는 안되겠지만요. 인간의 이기심이 좀비를 능가함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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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던 2015년 당시, 네이버 파워블로거 중에 ‘까칠한 비토씨‘라는 닉네임의 서평가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독서광들은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었다. 나 또한 비토씨의 리뷰를 열심히도 읽었었는데, 그의 엄청난 글빨과 날카로운 분석력과 닉네임답게 까칠함으로 무장된 비평은 정말이지 완벽한 내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토씨의 스타일은 어느새 나의 롤모델이 되었고 그 느낌을 담아서 수차례 리뷰를 써온 결과 몇몇 이웃들에게 비토씨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의 희열은 진짜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리뷰로 글쓰기를 공부하던 차에 비토씨는 이 책을 써내고서 작가로 등단했고 블로그는 문을 닫았다. 그건 마치 맨날 가던 야동 사이트가 갑자기 막혔을 때 오는 충격과 견줄 정도였다. 여하튼 비토씨의 광팬인 내가 이 책이 나온 지 2년도 더 된 지금에야 읽은 것은, 적어도 쪼렙일때 리뷰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레벨이 어디쯤인진 모르지만 때만 기다리다가 영영 못 읽을까 봐 그냥 읽기로 했다. 그럼 이제 작가 도선우가 아닌 블로거 비토씨를 생각하며 리뷰를 써본다.


보육원 출신의 장태주는 불행이란 불행을 전부 짊어지고서 이 험한 세상 꾸역꾸역 살아간다. 이 왕따 소년은 자신이 돌보던 새를 죽인 동급생을 혼내주면서 잠재돼있던 전투능력이 각성하였고, 그 힘은 왕따에서 문제아라는 타이틀로 바꿔주었다. 이후 선도부에게 잘못 걸려 들어간 소년원에서 만난 담당 선생의 권유로 권투를 배우게 되었고, 타고난 재능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그 실력은 어느새 국가대표를 넘어 프로 선수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 챔프까지 되었지만 소중한 것들을 잃은 공허함으로 결국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고 만다. 그 많던 팬들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그를 비난하였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군중을 보며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주인공. 이제 그는 종점을 향하여 최후의 주먹을 뻗는다.


이야, 역시는 역시나였다. 스토리, 필력, 분위기, 속도감, 메시지 등등 완성도가 죽여준다. 과거 리뷰왕 비토씨께서 줄곧 강조하시던 게 바로 ‘페이소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왕따 소년의 단순한 개과천선 이야기가 아닐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심오했을 줄이야. 시작부터 끝까지 쌈질하는 내용은 맞는데 액션 장면은 한 3% 나올까 말까 한다. 줄거리만 보면 정통 액션물이지만 그쪽의 소재만 빌린 성장소설 겸 사회파 소설이었다. 거기에 연민, 슬픔, 고뇌 같은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요소도 잔뜩 넣어서 진짜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조건은 다 갖추었는데 말야, 작품도 작가도 많이 안 알려진 게 참 아쉽다. 암튼 읽어보면 매우 와일드하고 묵직한 문체가 시종일관 유지되고 있는데 대충 작가가 어떤 캐릭터인지 감 오지 않는가? 느낌 그대로 도선우 작가는 헬스장 관장님 같은 그랜드 바디를 소유하고 있다. 블로그에서 본인이 싸움 잘한다고 했으니까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아무튼 상남자 캐릭터라 글이 하드해 보이지만, 비토씨의 리뷰를 읽어본 분들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안다. 오랜만에 파워블로거 시절 비토씨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좋더군.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를 마침내 괴물로 바꿔버린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악‘이다. 태생부터 악한 자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악에 눈을 뜬 자.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종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도긴개긴이었다. 후자가 전자를 응징해 정의를 구현한들, 후자도 그저 폭력을 휘두른 또 하나의 악일뿐이다. 스스로 정해둔 선을 넘은 사람만 잡는 주인공도 남들에게는 똑같은 일진이고 양아치였다. 악을 응징했다고 선이 되는게 아니었고, 선의 가면을 쓴 악은 더이상 악이 아니었다. 이렇게 세상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했고, 태주는 정의란 것에 회의가 든다. 힘의 유리함을 택한 소년의 양심은 점점 사라지고 못된 친구들을 마땅히 응징하는 단계를 넘어서 끝내 선에도 발 한 짝, 악에도 발 한 짝씩 담그고 살아간다. 왜 세상은 태주에게 생존의 선택지를 악인이 되는 것 하나밖에 주지 않았는가. 모두가 나를 괴물이라고 부른다면 까짓거 진짜 괴물이 되어주겠다던 소년의 외침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작가 인터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삥 뜯기던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피해자는 도망가고 어느새 자신은 시비를 건 가해자가 되어있었다고. 분명 사건은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없으니 가해자도 없는 이런 상황. 이와 같은 정의의 부재, 정의의 이중성을 선도연합회한테서 볼 수 있다.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의 돈을 걷는 선도연합회는 학교폭력을 폭력으로 근절하고 있었다. 누구는 이 제도에 안정감을 느끼고, 누구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이미 잡혀있는 질서에 반대해봤자 혼자만 튕겨나갈 뿐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은 자기가 피해자인 줄 모르는 학생들이 스스로 유지하는 꼴이었고, 여기에 가해자는 없는 실로 희한한 상황이었다. 정의가 있어야 할 곳에 부조리가 있었고 다들 그것이 정의라 여겼다. 권위 앞에서 정의는 묵살당했고 그러므로 냉혹한 현실은 더 이상 정의 추구가 불가능했다. 세상에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한 정의도 다 있는가? 과반수가 지지하면 틀린 답도 정답이 되는가? 대체 정의가 책임져야 할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소년은 커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태주는 남들이 자신을 프레임에 가두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정의당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정의하였고, 만든 질서대로 묵묵히 달려나갔다. 시합을 이길수록 선수 장태주는 진짜가 되었지만, 인간 장태주는 점점 가짜로 드러나고 있었다. 남들이 정한 타이틀에 맞추다 보면 결국 본인을 잃어버리게 됨을 알고 있었으나 한번 폭주해버린 기관차는 멈출 수가 없었고 그런 태주를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태주가 생각하는 진짜 괴물은 불공정한 질서를 만들고 뒤에 앉아 씹고 뜯고 즐기는 자들이었다. 보육원 후원자들이 그러했고, 학교에 선도연합회가 그러했고, 권투연맹이 그러했다. 그들은 본인이 직접 한 게 아니니 일관 잘못 없다는 태도로 세상을 주름잡고 있었다. 그런 부류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건만 자신도 그런 불공정한 질서를 세운 똑같은 괴물이었다. 아이고, 태주야...


장태주는 작가의 삶이나 인생관이 아주 잘 반영된 캐릭터이다. 태주가 체고를 가지 않고 일반고에서 선수가 된 것은, 문학 쪽에 연줄 없는 작가가 노력으로 상을 타낸 것과 같다. 그리고 작가가 사업으로 쓰라린 고비를 겪고 재기한 것도 태주의 인생 굴곡 안에 그대로 담겨있으며, 수상하고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작가의 성격 또한 챔피언이 되고도 과시하지 않는 주인공과 닮아있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다. 비록 리뷰와 작품의 글 스타일이 많이 달랐지만 나의 롤모델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다. 지금의 내 글들은 이 분에게 받은 영향이 8할쯤 된다. 그 옛날, 많은 글쟁이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닮으려 했듯이 나는 비토씨를 닮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여하튼 선우 행님, 제가 이렇게나 행님 빠돌이입니다. 행여 이 글을 보신다면 쓴소리든 잡소리든 뭐든 댓글 하나만 달아주셔요. 솔직히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ㅎㅎㅎ 언젠간 저도 행님처럼 리뷰왕이 될 거니까 기다려주이소. 아, 그리고 늦었지만 상 탄 거 축하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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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1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롤모델이 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죠.
물감 님은 꾸준하게 열심히 쓰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좋은 글을 쓰고 계십니다. 조지 오웰도 서평을 많이 썼죠. ‘어느 서평가의 고백‘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도 있어요. 아마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제가 봤을 듯합니다.

꾸준히 그리고 절실히,를 이길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파이팅!!! 응원하겠습니다.

물감 2019-08-16 13:59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꾸준함과 절실함... 그렇군요. 어디에나 중요하지만 글쟁이에게는 절대 필요 조건이에요.. 분발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 조지 오웰의 책도 언젠가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