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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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낳은 판타지 직업 중 하나가 검사이다. 요즘 배우들이 워낙 다양한 직업을 소화하다 보니 국민들에게 말도 안 되는 환상을 심어주곤 하는데 검사라는 직업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거의 정반대라고 한다. 아마 대다수 직업들이 TV의 모습과 많이 다를걸. 게다가 모든 집단과 조직에는 부패한 인간과 문화와 시스템이 꼭 있다. 검찰 계도 매한가지인데 그렇게 더러움이 가득한 곳에서 나름 물들지 않고 살아온 검사가 책 한 권을 냈다. 저자는 독기 가득한 눈빛의 검사가 아니라 미생의 장그래 같은 순하고 투명한 캐릭터에 가깝다. 차근차근하지만 할 말은 다 하면서 제법 찰진 드립까지 날려주는 게 이제 막 예능 방송에 적응해가는 사극 배우의 느낌 같달까.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은 글빨도 좋을 수밖에 없나 봐.


많은 사건과 사람을 담당하면서 느끼는 1순위는,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니 최대한 피해를 입지 말라는 것이란다. 검사 입에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검사냐! 할 수 있겠으나 현실이 그렇단다. 사건을 종결하고 나면 뿌듯함보다는 안팎으로 쓸쓸함만 남는 직업이 검사이다. 인간의 추함이 쏟아낸 토사물을 매일 봐야 하니 말이다. 자신은 그렇게 슬퍼하지만 독자에게는 각종 사례들을 설명할 때 팩트와 유머를 적절히 섞어서 들려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재주가 좋아 웬만한 단편 소설집보다 재미있다. 재미로 읽을 책은 아닌데 진심 재미있다. 교통사고로 전치 3주가 나왔어도 3일 만에 회복하는 울버린, 반나절 만에 전국 팔도를 순회하는 플래시, 1시간 안에 드립 커피 3백 잔을 만든다는 오병이어 기적의 예수님 등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대한민국은 초능력자들이 모여사는 기적의 땅이다. 그런 사람들은 양반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는 일단 져준 다음 수사를 시작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때문에 검찰은 오늘도 휴일근무에 폭풍 야근 중이다.


수백만 명의 사기꾼을 담당하는 검사 한 명이 시달리는 내용과 만렙 사기꾼들의 내공이 아주 자세히도 나온다. 검사들이 2년마다 인사이동하는 것과, 오래된 사건부터 처리하는 시스템을 파고들어 사기꾼들은 거미줄에서 당당히 빠져나가기도 한다. 특히 고위급 거물들을 구속할 때면 검찰을 방해하는 자들이 꼭 등장한다. 온갖 권력을 행사하는 음모자들 때문에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일도 허다했다. 개인이나 소수의 인원도 범죄를 밝혀내기 어려운데, 집단이나 조직 대 조직으로 이루어진 범죄는 더 힘들다. 무능력한 검사로 낙인찍히는 건 한순간이라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평생을 무시당하게 된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범죄 종류도 워낙 다양해서 각종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게 검사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지만 검사도 참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험 사기, 도박, 소년법, 부동산 불법 매매, 갑질 프랜차이즈 가맹점, 불법 기획사, 뇌물, 마약 등등. 큼직한 사례들이 분야별로 하나씩 소개되는데 그중 도박 현장에서 붙잡힌 박여사의 발언들이 제법 흥미로웠다. 내 돈으로 내가 도박하는 게 뭐가 문제냐, 데모하는 학생들이 경찰을 피하는 게 찔려서 그런 거냐, 도박이 불로소득 때문에 불법이라면 돈을 못 딴 경우 무죄 아니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면 모두 죄가 되냐, 국회의원이 법으로 만들면 국민이 무조건 지켜야 하느냐 등등. 법조계나 학계에서도 어려워하는 논쟁거리 주제들을 마구마구 던지는 박여사와, 이에 대한 코멘트를 다는 저자. 법이란 무엇인가. 윤리는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기회를 통해서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실전에서 오는 고충도 많지만 검찰계의 로직이나 조직문화에서 오는 내부의 고충도 한몫한다. 숨 쉬듯 검찰을 고소해대는 사람들이나, 정신을 종잡을 수 없는 내부 사람들이나 장단 맞추는 건 똑같이 힘들다. 나는 관공직, 전문직,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낼 때면 업계에 시달릴 것을 먼저 걱정한다. 전에 읽은 ‘임플란트 전쟁‘의 저자도 업계의 비리를 책으로 썼다가 치과계의 왕따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했다. 역사 책을 보면 늘 바른 말을 하는 자가 죽었다고. 안 그래도 필터 없는 또라이 검사로 낙인찍혔는데, 초임검사 때 검사장을 디스 했던 일화를 그대로 책에 쓴 걸 보면 저자도 진심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제는 짬이 높아져서 이런 내용도 쓸 수 있는 거겠지? 세상을 바꾸는 모든 또라이들이여, 멈추지 말고 가던 길 계속 가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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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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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나오는 요 시리즈는 하나같이 작품 퀄리티가 상당히 높아 보인다. 지금까지 4권 읽었는데 전부다 소재나 테마가 독특했고, 이슈되는 사회문제를 꼬집는 장면이 꼭 있다. 스토리텔링도 훌륭하고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고 있어 유명한 일본 사회소설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 시끌시끌했던 ‘82년생 김지영‘도 이 시리즈던데 그 책도 언젠가는 읽을 날이 오겠지. 요즘은 국내 작가 쪽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보려 한다. 한국문학은 유명한 작품 위주로 읽어봤는데 내 코드와 영 안 맞는 작품이 많았고 실망을 거듭하여 선입견이 생겼었다. 꽤 괜찮은 국내 작가들도 많은데 스타 작가들에게 가려져 모르고 지나쳐온 것도 있고 사실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기도 했다. 이젠 골고루 좋아해볼게유.


주인공 고요나는 재난 당한 나라에 관광을 보내주는 여행사 과장이다. ​퇴출 대상만을 성추행하는 김 팀장에게 성추행당한 그녀는 결국 사표를 던지지만, 회사는 한 달 휴가와 함께 출장 개념으로 재난 관광지를 보내준다. 무이라는 섬으로 날아가 5박 6일의 일정을 마친 요나는 공항 가는 열차에서 가이드 일행과 떨어지고 섬에 혼자 남겨진다. 회사도 도와주지 않았고, 소지품도 사라져서 불법체류자가 된 그녀는 묵었던 여행사와 계약 맺은 리조트로 돌아온다. 마침 리조트 업체에서 고용한 한국인 작가가 요나를 알아보고 이 섬의 재난 프로그램을 리뉴얼하자고 제안한다. 이 섬은 관광 상품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제안을 기회로 삼아 상품 가치도 되살리고 본인의 가치도 높여볼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작가의 시나리오가 범상치 않다. 인위적인 재난을 발생시켜 여행사에 재계약을 체결하시겠다? 이 계획에 공범이 되는 게 과연 잘한 선택일까. ​​


​재난 지역으로 관광을 간다니, 발상 한 번 프레쉬하다. 재난 지역을 관광하면서 삶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하는 취지라나. 맨날 고객들만 비행기 태워주다가 직접 날아가보니 감회가 퍽 새로운 주인공. 그녀는 관광하며 카메라에 담아둔 섬의 모습과 사람들의 분위기가 이곳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광이 끝난 다음에야 섬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1달러를 벌기 위해 섬 주민들은 억지로 웃고 노래했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면 마치 기초생활수급자들만 사는 섬처럼 변했다. 가치를 잃은 관광지는 주민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요나의 말대로 재난은 눈앞에서도 진행 중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섬 전체가 아닌 실속을 챙기는 몇몇을 위해 상품을 리뉴얼 한다는 게​​ 어쩐지 꺼림칙하다. 그렇게 무생물 같던 그녀의 심장 속에서는 조금씩 조금씩 감수성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요나의 양심을 시험하는 순간이 참 많았다. 섬 주민들까지 동원해 재난 조작극을 꾸미는 황 작가와 업체를 말릴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제 코가 석자인 요나는 그러지 않았고, 심지어 이 일이 주민들을 대학살 할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번번이 외면하였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였다. 근데 나는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야망에 눈이 멀어 분별력을 잃은 게 아니라 그냥 피곤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니까. 마치 성추행 당한 직원 그룹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문제는 요나도 본인의 선택이 어떤 운명을 가져올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모른척하기 위해 죽어가는 소금 땅을 살려내는 것만 집중했을 뿐이다. 그러나 공포 앞에서는 다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천천히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곧 죽을 사람들에게 별 감정도 없다가, 본인이 죽을 처지가 되고 나니 생명이 귀한 줄 깨달으신 우리 고 과장님.


여행사에 도움을 요청해도 회사는 알아서 하라며 그녀를 모른 척 한다. 그제서야 요나는 고객들의 취소/환불 요청들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절실한 고객들에게 갑질로 대응했던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동정을 해야 할지,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도와줄 마음이 없는 여행사는, 이윤 없는 일에 힘 쏟지 않는 자본주의사회의 표본이다. 내 밥줄 챙기기도 바빠서 타인을 신경 쓰는 게 오지랖이 돼버린 사회. 그 속에서 벗어나 보려고 떠났던 여행인데, 교만함으로 만든 재난과 대 자연 앞에 요나 일행은 굴복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다고 숨 막히는 현실이 달라지기나 할까.


꼭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추격전 같은 액션이 있어야 스릴러, 호러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처럼 철저하게 사람을 고립시키고 궁지에 몰아넣는 것만으로도 극 공포와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다. 직장에서 퇴출될 위치임을 감지했을 때, 외국에서 길을 잃고 국제 미아가 되었을 때, 여권이 없어서 귀국할 방법이 없을 때, 재난으로 죽음이 닥쳐오는 게 느껴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죽을 예정임을 알고 있을 때. 얼마든지 살면서 이 같은 절대 위기의 상황을 실감할 수 있고 공포를 마주할 수 있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겠다만. 작품 해설자는 지독한 현실의 중압감을 다른 방식으로 허구화한 작품이라 했다. 아, 역시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았구나. 현실이라는 재난의 하루를 무사히 버텨내고 살아남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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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9-06-27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던 클래식도 그렇고 민음사 시리즈 좋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물감 2019-06-27 11:58   좋아요 1 | URL
ㅎㅎㅎ시리즈 전부 줄줄이 읽어봐야겠어요^^

카알벨루치 2019-06-2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좋아요 물감님 글은 속도감이 있어요 ㅎㅎ

물감 2019-06-27 14:53   좋아요 1 | URL
크으... 저의 템포를 알아봐주시다니요, 역시 프로 리뷰어 카알님ㅋㅋ

카알벨루치 2019-06-27 12:26   좋아요 1 | URL
물감님 과찬에 점심 안 먹어도 되겠습니다 ㅎㅎ

물감 2019-06-27 13:08   좋아요 1 | URL
ㅎㅎㅎ감사합니당. 남은 6월도 마무리 잘하십시오^^!
 
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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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 교육이 모두에게 다 잘 먹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수가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고 한다.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며 조심하는 세상. 이 얼마나 이상적인 유토피아인가. 내 생각, 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실례이고 상처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는 삶. 피곤하게 산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습관화되고 일반화되면 피곤한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냐면, 이 책은 자신의 지난 잘못이 뭐가 문제인지, 자신의 태도가 타인에게 왜 상처인지를 모른 채 살다가 땅을 치며 후회하는 한 남자를 말하고 있어서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타인이 말하는 말에 조금만 귀 기울여도 고치고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인데, 자존심이 밥 먹여준다고 믿는 권위적인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 생각은 안 하고 외부 요인에서 찾으려고만 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 또 이 사회를 어떻게 더럽혀가는지 알아보자.


항공사 승무원인 딸의 장례식 장면부터 시작한다. 유나는 차를 몰고 저수지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딸과 남처럼 지내왔던 공군 대령 출신의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지난 세월을 돌아본다. 현역 시절부터 전역한 지금까지도 아빠는 가정을 소홀히 했고, 10년간 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울고 싶어도, 화가 치밀어도 그럴 자격이 없는 아빠였다. 그는 딸의 일기장에 적힌 의미심장한 글을 발견하고 딸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조사한다. 그리고 딸이 근무하던 항공사에서 딸과 한 부기장의 스캔들 루머를 듣는다. 또한 진실에 다가갈수록 마주하는 건 딸의 심장에 칼을 꽂은 사람이 바로 아빠 자신이란 사실이었다.


유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진 두 사건이 있었다. 먼저 딸과 소문난 부기장은 과거 아빠의 운전병이었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던 날, 대령은 끝내 운전병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대령에 대한 증오를 분풀이하려 유나를 납치해 집으로 데려간다. 반면 유나는 그의 심경을 이해하고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유나는 납치되었음에도 집에다 가출한 것으로 말했고, 납치된 동안 자발적으로 운전병의 아내를 조리하고 집안일을 도왔다. 아빠 때문에 한 가정이 깨져버린 것을 대신 사과라도 하듯이. 일찍이 철들어 타인의 심경을 이해하고 위로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였다.


또 한 사건은, 방산업체가 국방예산을 횡령하는데 동조한 장교들을 폭로하려던 윤 대령의 죽음이다. 그를 압박하여 입을 막고 자살하게 만든 것은 유나 아빠 홍 대령이었고, 이 사건은 사회에 알려져 대령은 불명예 전역했다. 당시 유나는 아빠를 비난했고, 눈 뒤집힌 아빠는 폭력으로 답했다. 한 가정이 무너졌는데 아빠는 고작 딸이 버릇없게 군 것으로 화를 낸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유나. 그 후로 딸과 엄마는 아빠와 따로 살게 된건데 듣자 하니 이건 도저히 커버칠 수가 없다. 나는 잘못한 거 없다는 태도로 나오는 아빠와 누가 같이 살고 싶을까. 더 충격인 건 어떻게 그 방산업체의 경비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지? 자신이 뭐 때문에 군복을 벗었는지 알면서? 그리고 힘들었던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딸한테 지금도 섭섭하다는 대령 이 인간은 진짜 하이킥 좀 맞아야 한다. 왜 아빠는 가족과 싸우고 해결할 생각보다 각자 갈 길을 택했을까?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고, 선택지도 없다고 판단한 걸까? 자신이 원인이고 가해자라는 인식조차 없으니 해결할 생각을 안 했겠지. 알았다면 딸과 대면해서 풀어볼 기회도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것들은 대령의 집안 사정일 뿐, 유나가 자살을 결심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직원을 고발하여 성과를 올리는 항공사의 엑스맨 제도가 시초였는데, 유나의 스캔들을 보고한 동료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유나가 잘못한 것처럼 몰고 갔다. 여기서 동료의 적반하장 태도가, 과거 아빠의 모습과 겹쳐진다. 똑같은 상황에서 아빠에게 저항했던 그녀는 세상에겐 저항하지 못하고 끝내 패배한다. 단순히 승산 없다는 사실에 분하여 자살한 게 아니다. 위계질서를 따라 비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가 그제서야 이해된 것이다. 그녀는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오랫동안 봐왔으면서도 좀처럼 위계질서 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운전병이 상사의 가족한테까지 기사 노릇하는 게 당연한 건지, 임신한 아줌마를 불러다 일 시키는 엄마의 행동이 당연한 건지 항상 의문이었다. 늘 부조리함에 거침없이 맞서던 그녀였는데, 사회로 나와 겪어보니까 이 바닥의 더러움을 실감했다. 그래서 아빠가 속한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끝냈다.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성장 소설이란 걸 알았는데 딸뿐만 아니라 아빠의 성장까지 그려냈다. 딸은 승무원이 되면서 고객들에게 희롱과 폭행을 당하고, 반성문을 쓰고, 근신 처분까지 받으면서 인생은 실전이라는 것과 혼자만 깨끗해봐야 소용없단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성장한다. 인생 승리하는 흔한 성장이 아닌 순수함에 때가 잔뜩 묻어 현실을 깨닫게 된 마이너 틱한 성장이었다. 반면 아빠는 딸이 죽고서야 걸어온 길이 오물로 얼룩져있었음을 깨닫는다. 수많은 불편한 진실로 부들부들하다가 끝나는 게 아니라 딸을 위해 달라지려는 아빠도 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두 부녀를 통해 독자까지도 성장시켜준다. 어째 세상은 의로운 사람일수록 가만 놔두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 심지어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문제 삼으려는 썩은 인간들도 많다. 똑같은 세상인데 어째서 누군가는 세상이 아름답다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더럽다고 말하는가. 적어도 어린이들만은 세상이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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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코드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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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 1편에서 마크가 구해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던 소녀는 ‘사악‘이라는 단체로 들어가 ‘테리사‘라는 이름을 받고, 바이러스 치료제를 만드는 실험체가 된다. 이 단체는 테리사처럼 면역력을 지닌 아이들의 뇌를 연구하여 치료제를 만들고 세계를 구원하려고 한다. 그리고 메이즈러너의 주인공 토머스도 어려서부터 이곳에 들어와 실험체로 자라난다. 방사능으로 뒤덮인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건 자신들 뿐이란 사실을 잘 아는 토머스와 친구들은, 좋든 싫든 사악에 협조해야 했다. 토머스와 테리사는 본부 지하로 내려가 그들의 미로 프로젝트를 돕는다. 그리고 미로가 완성되면 면역인들이 투입되고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얻은 뇌 감정의 데이터로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 사악의 최종 목표이다.


자신들이 인류를 구원할 치료제를 만든다는 희생정신으로 버텨온 면역체 친구들은, 미로 프로젝트를 숨긴 토머스와 테리사에게 배신감을 표출한다. 두 주인공은 중간 입장에서 사악의 편을 들어야 하는 난처함과 친구들의 비난으로 괴롭기만 하다.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사악을 믿었던 토머스의 내면은 점점 무너진다. 사악은 병에 감염되지 않은 가정을 협박하여 아이를 강제로 데려오고, 미로에서 친구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플레어 병은 인구 조절 때문에 사악이 인공적으로 퍼뜨린 거란다. 사악이 밤낮으로 해결하려는 바이러스의 문제는 알고 보니 그들이 싸지른 똥이었고 그 더러운 것을 면역인들이 꾸역꾸역 뒤처리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 역겨운 곳에 가담하고 있던 자신에게 화나있는데 공터인들을 광인들이 사는 초열 지역으로 보낸다는 말에 폭발한 토머스는 친구들을 구하러 미로에 투입하기로 한다. 이제야 모든 앞뒤 내용이 전부 파악이 되었다. 


프리퀄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시리즈는 절대 프리퀄을 먼저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반드시 메이즈러너 1~3편을 먼저 읽고 프리퀄을 읽어야 훨씬 더 재미있다. 공터나 미로의 비현실적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왜 토머스와 테리사만 특별했는지, 어째서 뉴트가 나중에 감염되어 죽은 건지 등등 모든 비하인드스토리가 다 들어있다. 그리고 미로를 탈출해서 초열 지역으로 이동했던 게 다 짜인 수순이었던 것까지도. 아무튼 드디어 시리즈 전권을 완독했다. 장편소설 한 권 쓰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권을 쓰고 연결하고 대중성까지 갖추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그 힘든 것을 제임스 대시너는 멋지게 해냈다. 범죄 기자 출신인 마이클 코넬리가 경찰 소설을 쓰고, 의사 출신인 테스 게리첸이 메디컬 스릴러를 쓴 것처럼 전문 분야에서 책을 쓰는 작가들이 많다. 그런데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것을 다루고 이토록 큰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뇌구조는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며, 어떤 뇌 훈련을 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아무튼 이전 프리퀄 리뷰에 할 말을 다 써서 더는 쓸 게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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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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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0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26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0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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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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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한다. 사실 스토리보다도 작가의 필력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맞겠다. 이 책은 메이즈러너의 프리퀄 작품이다. 구매한 지는 되게 오래되었는데 이제서야 읽는다. 메이즈러너, 헝거게임, 다이버전트, 파인즈 같은 디스토피아 시리즈물이 예전에는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게 별로 없는듯하다. 아니면 내가 못 찾고 있는 건가. 여하튼 영화도 너무 잘 봤는데 프리퀄도 어서 영화화되었으면.


태양 플레어 현상으로 온 지구가 황폐해져가던 그 시절, 운 좋게 생존한 마크 일행들의 이야기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숲속에 헬기가 나타나 모두를 몰살하기 시작한다. 습격 받은 마을은 웬 바이러스가 싹 퍼져서 대부분 죽었다. 이곳을 떠나 적의 본거지를 향해 가던 중 똑같은 습격을 받은 다른 마을에서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은 소녀를 만나 데려간다. 그러다 마크가 정찰 중일 때 여자 일행들이 납치되고, 적진에서 연합정부가 세계 인구수를 줄이겠다는 계획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이 퍼뜨린 바이러스는 100% 전염되어 죽거나 광인이 된다. 붙잡힌 친구들을 위해 악어떼 속으로 돌진하는 마크의 구출작전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가의 책을 읽고 있으면 머리에 아무 생각이 안 든다. 그냥 물 흐르듯 편안하게 읽어내려간다. 딱히 태클 걸만한 것도 없고 심기를 건드리는 것도 없어서 좋다. 일단 분명 속도감이 있는데 절대 과하지 않다. 작가들이 집필하다가 텐션이 오르면 진도가 미친 듯이 팍팍 나가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제임스 대시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며 구멍들을 전부 메운다. 이런 게 진정한 절제의 미학이라 하겠다. 그리고 메이즈러너 시리즈를 읽었을 때도 느꼈던 건데, 이 작가는 진짜 끊는 타이밍의 달인이다. 어떻게 하면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건 한국 드라마 작가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많군요.


나는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교차하는 플롯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이 사나운 것도 있지만, 잘 보던 채널을 갑자기 다른 데로 돌려서 흐름이 끊어지는 게 싫다. 이 책도 그런 플롯인데 전혀 불편함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이유는 과거로 넘어갈 때 현재 상황을 뚝 잘라먹는 게 아니라 일시정지를 한 다음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주인공이 잠들거나 정신을 잃은 경우에만 꿈으로 과거 사건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자연스레 현재로 넘어오기 때문에 과거와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냥 읽어보시면 이해되실 거다.


프리퀄 1권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비상사태가 일어나게 된 경위보다, 병에 감염되어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상태변화이다. 인류애 넘치던 마크는 점점 자아를 잃고 흉포한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본인도 그것을 느끼고 초조해하며, 완전히 맛이 가기 전에 트리나를 구출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이 책의 핵심 포인트이다. 정신줄이 점점 끊어져가는 가운데 친구들을 지키려 필사적인 주인공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제 프리퀄 2편을 읽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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