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왜 집착했느뇨, 하면?
한겨레
»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60년대 근대화와 우리 근대문학 연구

지난해 모 대학 대학원에 강의할 기회가 주어졌소. 소금기둥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뒤돌아보아서는 안 되었을 터인데 첫 시간부터 이 터부에 부딪히고 말았소. 밑천이라고는 내가 그동안 해온 공부의 성격을 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던 탓이오. 비트겐슈타인의 어법으로 하면 체험(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이니까. 60년대에 들어서 인문학에 입문한 우리 세대의 성격은 어떠했던가. 이 물음에는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소. ‘독립운동하기다!’라고. ‘독립운동이란 만주벌판에서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아해하는 세대 앞에서 이 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적절할까. 그 방도를 알지 못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겠으나, 만일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두 가지 점을 말해볼 수 있겠소.

식민지사관 극복이 그 하나. 조선후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자체의 힘으로 극복할 힘이 없었기에 식민지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 식민지사관은 과연 과학(학문)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만일 있다면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연 극복되어야 하겠지요. 극복방식이란 어떠해야 할까. 일목요연한 해답이 주어지오. 학문적으로 증명되어야 함이 그것.

학문이라 했거니와, 조선후기 사회를 문제삼을진댄 근대 곧 자본주의화의 근거를 밝힘이 아닐 수 없지요. 이 점에서 제일 유력한 쪽이 당시로서는 이른바 과학 중의 과학이라 말해지는 사회경제사 분야였지요. 북한에서는 광산 조직과 그 운용 방식에서 자본주의적 맹아를 찾아냈다면, 남한에서의 그것은 양안(量案, 토지대장)의 분석에서 얻어낸 김용섭 교수의 ‘경영형 부농’ 개념(1970)이었습니다. 근대화의 맹아가 18세기 후반에까지 이끌어올려진다는 이러한 학문적 성과만큼 60년대 인문 사회학의 거대담론이 없었다고 해도 큰 망발은 아닐 터. 고 김현 씨와 밤을 새며 토론하고 함께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한국문학사>(1973)를 쓴 것이 그 한 증거.

다른 하나는, 이 점이 중요하거니와, 근대화란 냉전(양극) 체제의 산물이었다는 점. 근대화라는 용어가 19세기에 등장했다고는 하나, 이 용어가 적극적 의미를 갖고 사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입니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그리하여 사회주의로 인류사가 나아간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역사적 필연론’에 대해 그 반론으로 제시된 것이 산업화 근대화론이지요. 러시아 혁명에서 이룬 러시아사의 과정을 산업화 근대화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이 논리를 ‘이데올로기의 끝장’이 잘 말해놓았소. 혁명 없이도 사회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역사인식이 그것. 이러한 새 역사 인식의 학문적 사례의 하나가 로스토의 <경제성장의 제 단계>(1960)입니다. 선진, 후진국을 막론하고 ‘이륙’(테이크 오프)을 겪어 산업사회로 이행한다는 이 이론이 제3세계의 근대화를 내세운 미국의 대외정책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그 ‘근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자본제 국민국가로 요약될 성질의 것이지요. 구체적으로는 (1)사회구성원의 이동의 활성화, (2)신분에서 계약으로 나아가기, (3)세속화로 말해지는 경제적 합리성 등등.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묻더군요. 어째서 그토록 ‘근대’에 집착했는가, 입만 벌리면 근대문학, 또 한국근대문학이라 떠드는가, 라고. 그럴 적마다 번번이 샛별처럼 눈을 뜰 수밖에요. 어째서? 내 경험의 세대적 한계인 까닭. 혁명 없이도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이것만큼 주어진 여건 내의 가슴 벅찬 확실한 일이 당시로서는 없었으니까. 혁명으로라야 인류사가 바람직하게 나아간다는 생각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회 속에서 내가 살았기 때문이오. 러시아어 사전 갖는 것도 안 되는, 국시(國是)가 반공으로 된 그런 사회였으니까. 헤겔 투로 하면 ‘여기가 로도스(장미)다, 여기서 춤춰라’였소. 그러기에 내 시야엔 일제하에서 악전고투하는 우리의 ‘근대화’만이 크게 보이고 나머지는 아주 사소하게 보일 수밖에요. 근대문학이란 무엇이뇨. 국민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국어(국가어)로써 하는 문학인 것. 한국의 근대문학이란 새삼 무엇이뇨. 임시정부 및 그 대행기관인 조선어학회가 관장한 조선의 언어여야 하는 문학. 일제가 한국 근대문학을 식민화한 것이 조선어학회 사건(1942. 10)에서 광복까지라 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말 탄 자여, 지나가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마천 2007-01-2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평천하를 보면 의병들과 양반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중인출신 부자가 나옵니다. 사민평등이 바로 근대의 가치인데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못해내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법을 통한 보편적 공동체의 설정이라는 근대화의 명분이 그냥 거부되기는 어려웠습니다. 더우기 청연에 나온 여주인공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농부의 딸에서 첨단기술의 최고봉인 비행기를 몰게 되는 여자.
근대화는 한쪽에서 김구와 윤봉길의 의거를 볼 수 있지만 반대편에서 기술에 매료된 친일파를 훨씬 많이 만들었습니다. 친일군인,관료 박정희,최규하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나라가 과거에 대해 공정하게 보지 못한다는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신 분이 김교수님의 근대에 대한 강의였죠.

kleinsusun 2007-01-2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은 늘, 항상 공부를 열씨미 하시는 것 같아요.
경제/경영 관련만 주로 읽으시는지 알았는데.... 존경!^^
 

[김윤식교수의문학산책] 학병들이 ‘글쓰기 행위’에 집중한 이유
한겨레
»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

1944년 1월 20일. 약 4500명의 조선 학병들이 일제히 끌려갔소. 이들과 그 주변의 의식을 학병 세대 의식이라 부를 터이오. 광복 후 생존해서 귀국한 이들의 글쓰기는 논픽션계와 픽션계로 대별되오. <장정>(김준엽), <탈출>(신상초), <돌베개>(장준하), <탈출기>(김문택), <모멸의 시대>(박순동) 등이 전자라면, <관부연락선>(이병주), <분노의 강>(이가형), <현해탄은 알고 있다>(한운사) 등이 후자이겠소. 양쪽 모두 체험에 바탕을 둔 글쓰기이지만, 전자 쪽이 체험의 직접성에 기울어진 것이라면 그 내면화에 기운 것이 후자 쪽이라 하겠소. 이 직접성과 내면성이 마주치는 곳, 거기에서 학병 세대 글쓰기의 본질이 숨쉬고 있지 않을까.

그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거리를 재는 독자의 감각이 요망될 터이오. 그 거리는 처음엔 금방 잡힐 듯하지만 조금만 나아가면 아득해지기 마련. 그러한 아득한 장면 하나를 조금 말해보고 싶소.

여기는 중국, 안휘성 임천(臨川). 때는 1944년 가을. 일본군에서 탈출한 약 80여명의 학병이 중국군관학교에 설치된 한국광복군반에서 약 4개월간 훈련을 받는 장면. 이 교육기간 중 윤제현의 제안으로 장준하, 김준엽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이 잡지 <등불>이었소. 내의를 빨아 만든 표지는 한반도의 지도 속에 등불을 그려 넣은 것. 김준엽의 솜씨. 2호까지 냈고 3호는 중경 임시정부에 가서 냈소. 총 6호. 서안으로 옮긴 이들이 O.S.S.(미군전략첩보부) 훈련 도중 새로 낸 잡지가 <제단>이었소. 2호를 냈을 때 광복을 맞았다 하오.

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하필 잡지를, 그것도 둘씩이나 만들어야 했을까. 무엇을 호소해야 했고 왜 하필 기록물이어야 했을까. 학병 세대만이 지닌 모종의 특수성일까. 아니면 단지 몇몇 학병 탈출자의 기질에서 온 것일까. 후자라면 이를 굳이 학병 세대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르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할까. 이 물음에 응해오는 것이 버마 전선에서 종군한 학병들이 낸 잡지 <신생>이오(이가형, <버마 전선 패잔기>). 이가형, 차주환, 김정례 등이 주축이 되어 한인 수용소에서 낸 <신생>은 대체 무엇인가. 또 있소. 버마 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박순동 등은 인도, 대서양, 미국 본토를 건너 태평양의 카타리나 섬에서 O.S.S. 훈련을 받는 도중 해방을 맞았소. 딱하게도 이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것. 포로수용소에서 박순동들이 낸 잡지는 <자유대한>이었소(박순동, <모멸의 시대>). 태극기와 무궁화가 3색으로 그려진 이 잡지는 또 무엇인가. 박순동, 이종실, 박정무 등이 미군의 도움으로 매주 1350부를 냈다 하오.

유감스럽게도 <등불> <제단> <신생>은 물론 <자유대한>도 깡그리 소멸되어 남아 있지 않소(<등불> <제단>은 장준하 씨가 갖고 귀국했으나 6·25때 분실). 그렇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소중한 것이 따로 있소. 학병이기에 감히 할 수 있었던 모종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기록성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또 저절로 궁극적으로는 글쓰기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

그렇다면 대체 글쓰기 행위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이젠 피해나갈 수 없게 되었소. 지식인으로서의 학병 세대가 아닐 수 없다는 것. 입신출세주의를 목표로 한 일제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것. 당시 사상계를 휩쓴 ‘교양주의’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선발된 엘리트 계층 출신이기에 민족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인류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것만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거기에 글쓰기의 본질이 있소. 곧 자기 해방을 위한 글쓰기라는 것이 그것. 지옥의 전쟁 체험, 명분 없는 죽음에 대한 이율배반적 심리로 인한 상처에서 해방되기, 이 정신적 상처의 치유방식이 글쓰기의 본질이었다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7-01-19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병들이 ‘글쓰기 행위’에 집중한 이유... 부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인지는 속삭말로 ㅋ.. 다른 건 몰라도, 자기 해방을 위해 글쓰기를 한다는 것엔 수긍이 가네요. 가장 빡세고, 숨막히게 하는 조직에 있었을 때 혼자 끄적거리는 낙서 같은 글을 많이 갈겨댔었으니까요.

김윤식 교수 하면 이명원도 같이 생각나던데.. 송혜교 라는 시도~(ㅎㅎ 다른 김윤식 교수가 쓴 거람서요?)

2007-01-19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와 문학사이](1)김연수
입력: 2007년 01월 05일 15:08:02
한 편의 소설, 김연수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수록)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소설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나’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전처와 만나 안국역 근처 일대를 걷다가 어정쩡하게 헤어진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과 재동이 나오는 북촌 근처의 지도를 산다. 그리고 그날의 행로를 지도 위에 그어나가기 시작한다. 안국동 175번지 앞에서 걷기 시작해서, 우리의 대화는 가회동 12번지 지날 즈음 끊기고, 그러다가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를 지날 즈음 그녀는 꿈 얘기를 하고….

그러나 사실 그날의 행로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녀와 내가 걸어다닌 그 길의 행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녀와 내가 왜 헤어졌는지, 그날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자신들이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걸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나무는 박지원, 지구의, 홍영식, 갑신정변, 제중원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과 느슨하게 연결된, 이제는 천연기념물이 된 육백년 된 백송이다. 소설에서 ‘나’는 질문한다. 과연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진 그날의 동심원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백송처럼 육백년을 견디면 우리의 행로도 필연이 될까.

모든 의미는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무의미한 행로 중심에 놓인 육백년 된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우연과 농담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상은 어떤 의미의 빛을 띠게 된다. 이즈음 김연수의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 ‘모두이면서 하나인’)은 이 우연의 세계에 떨어진 개인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흔히 역사라고 하는 필연과 진담의 세계가 어떻게 우연과 농담의 세계와 겹쳐지면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허무한 농담의 세계를 견디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 김연수 소설의 평범한 개인들이 결코 평범하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놓인 우연한 삶의 자리에 대해 끝까지 질문한다. 명쾌한 답은 없지만, 결국 대답 없는 그 질문은 그들을 벽 앞의 절망으로 밀어가겠지만 그래도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김연수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이자 불가지적 세계의 암호를 풀려는 자이다. 그는 자기가 던지는 질문에 정답은 없으며 세계라는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질문과 해석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사실들을 동원한다.

그는 성균관대 동아시아 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있는 ‘학삐리’ 작가이자 ‘젠틀 매드니스’라는 번역서를 출간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단편 하나를 쓰기 위해 수십 권의 책을 탐독한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그러나 사실을 그러모아 허구의 탑을 쌓는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그는 소설을 쓸 때 아무리 많은 자료를 읽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그제서야 이 소설은 제대로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한단다. 그에게 사실에 대한 집요함은 결국 모든 사실을 동원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알 수 없음’의 세계를 향한 그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소설가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농담 같은, 거짓말 같은, 우연 같은 우리의 삶을 진담으로, 참말로, 필연으로 만들어주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문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굳빠이, 이상’에서 삶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스스로를 천재작가라는 허구적 텍스트로 변형시키고자 한 ‘이상’에게서 우리는 작가 김연수의 표정을 본다. 그것은 이 시대의 마지막 문학적 낭만주의자의 표정이다. 이토록 젊은 그가.

〈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7-01-14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틀 매드니스 역자였군요. 가져가요.^^
 
 전출처 : 로쟈 >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경향신문의 '작가와 문학 사이' 꼭지는 매번 챙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연수에 이어서 이번주는 평론가 신형철씨가 쓴 시인 문태준의 스케치이다. 문태준 시인과 관련한 페이퍼들은 두어 번 쓴 바 있고, 아래글에서 '문사마의 시대'란 말도 기억엔 내가 쓴 말 같다(내가 그리는 젊은 시인들의 구도는 '문사마와 바퀴벌레들'이다). 그러니 인연이 없지 않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백석-장석남의 계보를 잇는 적자인데(유사 계보에 백석-안도현도 있다), 젊은 나이에 너무 노숙한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시를 잘 쓰는 게 시인의 미덕이면서 또한 약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말도 안되는 트집인가?). 여하튼 '대가급'을 이미 예약해놓고 있는 시인의 묵묵한 '소걸음'을 따라가보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일들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경향신문(07. 01. 13) [작가와 문학사이](2) 문태준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만 외로운 게....아니었어?

근데...왜들 그렇게 외롭니? 왜? 도대체 왜?

========================================

세설] 상처받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한 해가 저뭅니다, 오오 이런!
외로움이 주는 영혼의 음식들이 성찬이라는
아파도 사랑할때 생의 열기를 알게 되리라는
인생이란 사랑하는 일밖에 없다는 상념이 노을에

한겨레
» ‘상처받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국화차 한잔을 만들어 창가에 섰습니다. 드물게 환한 겹겹의 분홍빛… 한참 찾았던 어느 기억처럼 진분홍에서 아주 연한 분홍까지, 온몸의 진물 터뜨린 자리가 꽃자리처럼 선연한 노을 아래입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또 한 해가 간다는 사실이 막막하고도 긴 상념을 자아올립니다. 한 해의 마지막과 하루의 저물녘 사이엔 마치 현생이 아닌 듯 느껴지는 착란과 몽환의 시간이 간혹 섞여 듭니다. 오늘은 그 시간 속, 지는 노을 밑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심상한 목소리로 불빛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엊저녁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막 나오는데 저만치 보이는 아파트 불빛들이 너무 따뜻해 보이더래요. 무수한 별처럼 총총히 박혀 있는 수많은 층층의 불빛들을 바라보자 갑자기 마음이 놓이더래요. 아, 나만 외로운 게 아닌가보다… 싶더래요. 나는 그 친구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가만히 물어 보았어요. 내가 갈까? 친구는 한참 만에 코맹맹이 소리로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괜찮다고. 나는 좀 쉬라고 말해주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얼마 후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요. 있잖니… 다 부숴버릴 거야! 응, 그렇게 해. 있잖니… 다 바꿔버릴 거라구! 응, 그렇게 해. 있잖니, 나 견딜 수 있어! 응, 그럼. 있잖니… 다 바꿔버릴 거라구! 응, 그래. 친구는 취해 있었고 전화는 끊어졌어요. 내가 알고 있는 친구의 주량이라면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단정하게 옆으로 곱송그린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을 거예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몹시 과격한 어조로 부숴버린다는 둥 바꿔버린다는 둥 소리 높여 떠드는 친구가 이상하게도 나는 안심이 되었어요. 오늘밤은 잘 자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울고 싶을 때 있지요. 한 해가 저무는 이런 즈음에 울고 싶다면 그 아픔과 외로움은 더하겠지요. “이 들녘에서 엎드려 울게/날 좀 내버려둬”라고 읊은 로르카는 스페인 최고의 시인이지요. 삼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날리고 모닥불이 탈 때 어두워지는 들판에 엎드려 울고 싶을 뿐인 시인이 외칩니다. 날 좀 제발 내버려두라고. 울고 싶은 이유를 쉽게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롭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외롭다는 게 정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외로움이 주는 음식들, 그 영혼의 음식들은 종종 성찬입니다. 정도의 문제이겠지만 가난과 질병과 마음의 상처가 주는 외로움은 삶을 컨트롤하는 데 필요한 약입니다. 가난을 모르고 질병을 모르고 상처를 모르는 생들이 그 풍족함에 길들여져 오히려 감사를 잊고 천박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되지요. 고독을 영접하고 잘 대접하는 일도 삶이니 당신에게 고독을 주세요.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주어야 합니다.

여기저기 구직광고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계단 많은 비탈을 한참이나 오르며 집으로 가는 샐러리맨이 사랑을 합니다. 술에 취해 집 앞에서 흐트러진 옷자락을 주섬주섬 집어넣는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억울하게 재판에서 진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예수나 부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아파도 사랑하세요. 아프고 아름다워서 사랑입니다. 어느 순간, 아픔까지도 곁눈질할 틈이 없는 황홀한 생의 열기라는 걸 알게 되어 당신을 더욱 사랑합니다. 선사들은 몸에 병이 들어오면 마음을 활짝 열어 병을 내보낸다지요. 마음에 병이 들어오면 몸을 활짝 열어 병과 놀아주고 앓아주고 달래주다가 내보낸다지요.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아플 수 있게 우리는 진화해 왔답니다.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결함 없는 넋이 어디 있으리?”라고 랭보가 말했던가요? 그래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어요?

까치밥이란 게 있지 않아요? 새들이 쪼아 먹은 감이나 배, 사과 같은 것들. 쪼아 먹힌 과일들이 훨씬 맛있다는 얘기에 골똘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새들이 맛있는 과일을 어떻게 용케 알고 찾아내는 걸까? 라고 신기해했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해요.

» 김선우/시인
새가 과일에 상처를 내면 상처를 회복하려는 나무의 열심에 의해 상처 난 과일에 더 많은 영양분이 공급되고 그래서 쪼아 먹힌 과일이 더 윤택해지고 맛있어진다는 거였어요. 그러니 두려워 마세요. 상처를 가지고 사랑하면서 가는 겁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게 된 저녁 5시, 당신의 사랑이 넉넉해져 누군가를 감싸면서도 또 다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사랑은 배반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되어요. 사랑은 자꾸 파문 짓고 파장이 됩니다. “사랑해”라는 당신의 말 한마디를 등불 삼아 오래 아픈 누군가 몸과 영혼의 신비로운 긴 여정에 오릅니다. 누가 할 일이 무어냐고 물으면 당신과 함께 밝힌 촛불을 들고 “사랑”이라고 말하렵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오, 오오 이런!

“인생 뭐 별거 있겠어요? 잘 될 때까지 사랑하는 일밖에”라는 편지를 내게 보내준 사람이 있었지요. 나무가 없는 아주 작은 무인도에 배를 타고 들어가 소나무 한그루를 심고 나온 그 사람의 해안에 지금 동백이 불을 밝히려 들겠네요.

김선우/시인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6-12-1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사람이 김선우 시인이군요! 말로만 들었는데.

2006-12-1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6-12-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모든 사람은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로움을 잊어보기 위해 우리가 벌이고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2006-12-17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18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