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월드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미미즈(지렁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등학교 3학년생 소년이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 충동적으로 어머니를 죽이고는 세상의 분기점에 놓이게 된다. 매일같이 밥을 먹고 학교를 가서 공부하며 다른 아이들처럼 살아가는 세계와 엄마를 죽인 패륜아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경찰을 피해 한없이 도망쳐야만 하는 '앞으로' 겪을 세계는 분명히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미미즈에겐 그 '앞으로'의 세계가 현실, 즉 리얼 월드다.

 

미미즈가 저지른 모친 살해사건에 우연히 엮이게 된 네 명의 절친한 여고생. 그중 가장 평범한 축인 도시코는 여고생을 상술의 대상이나 성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회에 지쳐 '호리닌나'라는 가명으로 리얼 월드에서 도피하며 살아간다. 호리닌나가 미미즈에게 보이는 반응은 대다수의 평범한 여고생들처럼 '나와는 상관없어.' 성적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는 유잔은 어머니를 죽인 미미즈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를 포기한 자신을 동일시해 그를 도우며, 두뇌 명석한 데라우치는 손쉬운(?) 해결을 택한 미미즈를 경멸하고, 친구들 사이에선 요조숙녀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노는 여고생인 기라린은 살인자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의 신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적당히 웃고 떠들며, 그럭저럭 우정을 나누던 네 소녀가 한 살인자 소년의 범죄에 맞닥뜨림으로써 어두운 마음의 그늘을 가진 소녀들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고 그토록 애써 유지했던 가짜 세계가 산산히 조각나버린다. 바야흐로 그들은 압도적인 현실감이 넘치는 리얼 월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다섯 명의 소년소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것은 각자 비밀을 갖고 있는 네 소녀가 자기는 그 비밀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이미 그 비밀을 알고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들이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들 사이가 사실은 한쪽 발은 차도에, 한쪽 발은 인도에 걸치고 걷는것마냥 간신히 유지되는 위태로운 친구 관계였다는 것임이 확인된 것이다.

 

작품 맨 뒤에 실린 작품 해설을 보니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기리노 나쓰오는 여성들의 4인 구도를 즐겨 사용하고, 거기에 한 명의 남자를 더한다고. 그러고 보니 <아웃>도 네 명의 주부가 주인공이었고, <그로테스크>도 네 여성들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주로 사람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에 천착하는 '관계 문학'을 하기 때문에 가장 역동적으로 관계를 주고받을 수 있는 4자 구도에서 작품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설자는 적었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좋든 싫든 다른 이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러한 인간 관계의 본질, 심연 그리고 파국을 냉혹한 심리 묘사로 묘파하는 데는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오른 작가다.

 

<리얼 월드>는 어린 고교생들의 이야기다 보니 다른 기리노 나쓰오 작품들보다 더 빠르고 역동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등장인물들 개개인이 점차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에 작품 전체에 어딘지 요사스런 기운도 감돌고 있으며 여전히 빈틈없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로테스크>나 <내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같은 최고 수준의 작품들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는 면이 있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니만큼 평소처럼 인간의 병든 마음을 극한까지 후비고 파내기는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 작품을 기리노 나쓰오가 아닌 다른 신인 작가가 썼다면? 대단한 찬사가 쏟아졌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군에서 약간 처지는 수준이라는 것이지 일반적인 잣대에서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가작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끝을 보아야만 했다. 이 정도의 작품도 기리노 나쓰오가 쓴 것 중에선 비교적 무난하다, 는 평가를 받는 이 작가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p.s/ 지나가는 디자인학원 수강생을 붙잡아놓고 시킨 것 같은 표지와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 최소한의 편집 과정만 거친 듯한 만듦새는 아쉽다. 기리노 나쓰오가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작가는 절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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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0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해설이 작가의 작품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줘서 좋았습니다^^

jedai2000 2007-05-0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과 의사가 한 평론이라 그런지 제게는 사용된 단어들이 어렵더군요. ^^ 그래도 <대답은 필요없어>에서 미야베 해설한 사람같이 내용없지는 않았으니까 좋았습니다.

nemuko 2007-05-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에 절대 동감.

jedai2000 2007-05-0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무코님...이 마야라는 출판사는 국내에 <범인에게 고한다>의 시즈쿠이 슈스케나 이 작품처럼 좋은 작품은 소개하면서도 완성도에는 의문이 들어 항상 아쉬움이 남네요. 기왕 돈들여 소개하는 책 잘 좀 만들어서 내면 판매도 더 좋아질 텐데 말입니다.

oldhand 2007-05-0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출판사 책들 번역은 다 직역인건가보네요.

jedai2000 2007-05-0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윤혜원이라는 분께서 모두 맡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주변의 번역 잘 된 책들을 좀 찾아보고 공부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