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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한 엄마, 가난한 형, 가난한 동생으로 이뤄진 가난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지긋지긋한 악령 같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제에게 공부로 성공할 것을 종용합니다만, 형 츠요시는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점점 나쁜 길로 빠지고, 방황하며 고교생활을 보냅니다. 어느 날, 과로에 지친 엄마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츠요시는 크게 반성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의 소원이었던, 동생 나오키를 대학에 보내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이삿짐을 나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허리를 다친 츠요시는 이삿짐 센터에서 쫓겨나고 돈이 궁해집니다. 어떻게든 나오키의 대학 입학금 마련을 위해 그는 예전에 이삿짐을 날라주었던 부유한 노파의 집을 털러 갑니다.
무사히 돈을 훔치고 나오던 차에 동생이 좋아하는 군밤을 들고 나가려고 식당으로 가다가 마침 집에서 자고 있던 (집에는 없는 줄 알았던) 노파가 깨어나고, 소리를 지르는 노파를 츠요시는 우발적으로 살해합니다. 곧 체포된 츠요시는 15년 형을 받고, 나오키의 가시밭길 같은 인생이 펼쳐집니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살인자의 동생으로 온갖 차별과 좌절을 경험하는 나오키. 형 츠요시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내며 동생과의 교감을 기대하지만, 형 때문에 사랑하는 음악과 애인, 무수한 기회들을 날려 버리고,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까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고립되는 걸 목격한 나오키는 형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한 번 태어난 이상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가 바로 가족일 것입니다. 미워도 예뻐도 함께 나아가야 할 가족인데, 그 구성원 중 한 명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면,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욕하는 살인자라면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편지>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범죄자라면? 이라는 가정 하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아프게 그리고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다양하고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게 푸는 법을 아는 당대의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게 한 번 책을 손에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형의 범죄로 인해 앨범 녹음 직전인 밴드에서 탈퇴당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부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이 돈을 줄테니 제발 떨어져다오, 하는 제의를 받는 등의 대목은 70년대 드라마를 연상시켜 다소 통속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기대하는 재미는 그런 통속적이고 다소 뻔한 이야기의 곡절을 흥미진진하게 쭉 따라가다 결말에 이르러 펑펑 울려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도 한 50 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고나 할까요. 그러나 제가 기대했던 눈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결단코 뻔한 신파 감동소설이 아닙니다. 결말에서 나오키는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입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이지 울지는 않습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직 살인이라는 범죄와 그 범죄가 낳은 아픔에 관해 독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함께 해볼 것을 제의할 뿐입니다. 특별한 정답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긴 절대로 정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죠. 무엇보다 츠요시가 저지른 죄로 인해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고통을 받습니다. 15년간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맛볼 수 없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닐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사랑하는 어머니(노파는 당연히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입니다)를 잃었습니다. 나오키는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지금도 포기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누구도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츠요시가 범한 살인이라는 범죄는 피해자가 품고 있던 여러 관계를 단절시켰고, 그 죄값으로 츠요시가 맺고 있던 유일한 관계인 동생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물론 나오키도 형과의 관계로 인해 소중한 많은 관계들을 잃어야만 했죠. 살인은 이처럼 무서운 범죄입니다. 관련된 모든 이들의 관계를 낱낱이 파괴하니까요.
어디에도 해답은 없습니다. 츠요시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매달 보내지만 피해자 가족은 오히려 고통이 커집니다. 그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또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오는 츠요시를 아직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오히려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츠요시에게 매달 편지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에게 사죄하지도 않다니 천하의 악인이로구나, 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우니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문제죠. 동생 나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으로 인해 숱한 괴로움을 당하고, 그 화가 어린 딸에게까지 미치자 형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만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 차별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할지, 내 가족인 형의 일이니 그리고 날 위해 저지른 일이니 빌고 또 빌며 차별을 감내해야 할지 뭐가 맞는 길인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한히 섞여 돌아가는 카오스처럼 끝없는 혼돈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도달한 지점은 거기까지입니다. 나오키의 선택과 츠요시의 회한에 대해서는 읽는 분들 나름대로 각자의 생각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옮긴이의 말'에 실린 것처럼 원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는 열린 결말이고, 족집게 과외는 바보만을 양산할 뿐이니까요. 사실 이 긴 글보다는 서점에 가셔서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편지>라는 작품에 대한 장단점이 모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니까요. 여성 심리 묘사는 게이고가 자신없는 부분이니 건너뛰고, 작가 자신도 결말을 어떻게 내야할지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등장인물(나오키가 일하는 회사 사장)의 입을 빌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이 받는 고통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 종종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기야 누구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소설은 하나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아픔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죄가 낳은 필연적인 고통과 죄로 인한 안타까운 차별 같은 공감가는 주제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