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는 약력을 설명하기도 귀찮은 한일 양국의 인기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이다. '미야베 월드'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작품 여러 편을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의 제3작인데, 예쁜 표지와 꼼꼼한 번역, 성실한 편집으로 만족감을 주는, 추천할 만한 시리즈라 생각한다. 일본에서의 전설적인 명성과는 무관하게 한국에서는 <화차> 한 권만을 겨우 만나볼 수 있었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이 작년에 쏟아져 나왔는데, 다작이지만 뭘 써도 평균 이상은 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녀의 인기가 국내에서 더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대답은 필요없어>는 처음 소개되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이라 개인적으로는 꽤 궁금했다. 왜 장편 잘 쓰는 작가가 꼭 단편도 잘 쓰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시기적으로 1992년 발표라는 비교적 초기작에 가까워 어느 정도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미야베 미유키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장편을 쓰는 이도 미야베 미유키, 단편을 쓰는 이도 미야베 미유키인데, 명필이 붓을 가리겠는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잘 읽히는 안정적인 느낌의 단편들이었다.

 

주제로는 주로 화려한 외양으로 번쩍번쩍하지만 내면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도시 생활의 고독과, 또 그 차가운 고독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마음을 터놓을 이 하나 없이 쓸쓸히 홀로 살아가거나 하는 이들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 고독한 인간군상들이 소리없이 외치는 절규를 안타깝고 허망하게 그러나 약간의 희망도 섞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6편의 단편 제목 모두가 구어체 문장이다. 예컨대 '대답은 필요없어' '말없이 있어줘' '배신하지 마' '들리세요' 등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지가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책 말미에는 미스터리 평론가 차키 노리오라는 사람의 아주 쉽게 쓴 해설이 실려 있다(내용도 쉽지만, 참 해설 쉽게 날로 먹는구나 하는 이중적인 의미다). 그의 말에 따르면 92년도에 1월부터 9월까지 본서를 비롯해 국내에도 소개된 <화차> <용은 잠들다> 등의 여섯 작품을 연이어 발표해 일본 열도를 일약 진동시켰다는데,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다. 엄청난 다작이면서도, 완성도에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아니 일본 미스터리 사상 손꼽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는 것이 아닌가. 

 

짐작컨대 이 시기 미야베 미유키는 신용카드 빚을 매개로, 경제적 약자를 철저히 짓밟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심도깊게 비판한 대표작 <화차>를 준비하면서 많은 조사를 했던 듯하다. 여기 실린 '배신하지 마'는 특히 <화차>의 원형이라 불릴 정도로 유사한 구석이 많은데 카드 빚더미에 오른 여자가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노형사가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과연 <화차>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표제작 '대답은 필요없어'는 은행 현금카드의 구조적 문제점을 이용해 은행을 터는 이야기다. 당시 작가가 은행과 신용카드사 등의 금융회사 취재에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답은 필요없어'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결말을 맺고 있어 쓰는 작품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녀의 능력을 증명한다.

 

읽으면서 가장 만족했던 작품은 '들리세요'. 이사간 집에서 밤마다 나타나는 유령에 기겁하는 초등학생 소년이 주인공이다. 코지풍으로 귀엽게 전개되다 뜻밖에 안타까운 사람과 사람 사이(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일지라도)의 소통 부재를 확인하게 되는 결말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비교적 적은 분량의 단편들이므로 구구절절히 내용을 소개해 독서의 재미를 빼앗는 짓은 할 수 없고, 이 정도로만 소개를 마치겠다. 단편에서도 여전한 미야베 미유키의 따스한 작풍과 이야기 창조력, 결말의 애잔함 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요, 아무래도 장편에 비해 어느 정도는 힘이 떨어진다는 것과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깔끔해 이거다 하고 탁 튀는 한 작품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ongbong 2007-08-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은 단편집이죠...아!!!둘시네아로 오세요!!!!!

jedai2000 2007-08-1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 단편집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할 구석이 많은데 의외로 묻혀서 놀랐습니다.
 
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한 엄마, 가난한 형, 가난한 동생으로 이뤄진 가난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지긋지긋한 악령 같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제에게 공부로 성공할 것을 종용합니다만, 형 츠요시는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점점 나쁜 길로 빠지고, 방황하며 고교생활을 보냅니다. 어느 날, 과로에 지친 엄마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츠요시는 크게 반성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의 소원이었던, 동생 나오키를 대학에 보내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이삿짐을 나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허리를 다친 츠요시는 이삿짐 센터에서 쫓겨나고 돈이 궁해집니다. 어떻게든 나오키의 대학 입학금 마련을 위해 그는 예전에 이삿짐을 날라주었던 부유한 노파의 집을 털러 갑니다.

 

무사히 돈을 훔치고 나오던 차에 동생이 좋아하는 군밤을 들고 나가려고 식당으로 가다가 마침 집에서 자고 있던 (집에는 없는 줄 알았던) 노파가 깨어나고, 소리를 지르는 노파를 츠요시는 우발적으로 살해합니다. 곧 체포된 츠요시는 15년 형을 받고, 나오키의 가시밭길 같은 인생이 펼쳐집니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살인자의 동생으로 온갖 차별과 좌절을 경험하는 나오키. 형 츠요시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내며 동생과의 교감을 기대하지만, 형 때문에 사랑하는 음악과 애인, 무수한 기회들을 날려 버리고,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까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고립되는 걸 목격한 나오키는 형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한 번 태어난 이상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가 바로 가족일 것입니다. 미워도 예뻐도 함께 나아가야 할 가족인데, 그 구성원 중 한 명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면,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욕하는 살인자라면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편지>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범죄자라면? 이라는 가정 하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아프게 그리고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다양하고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게 푸는 법을 아는 당대의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게 한 번 책을 손에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형의 범죄로 인해 앨범 녹음 직전인 밴드에서 탈퇴당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부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이 돈을 줄테니 제발 떨어져다오, 하는 제의를 받는 등의 대목은 70년대 드라마를 연상시켜 다소 통속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기대하는 재미는 그런 통속적이고 다소 뻔한 이야기의 곡절을 흥미진진하게 쭉 따라가다 결말에 이르러 펑펑 울려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도 한 50 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고나 할까요. 그러나 제가 기대했던 눈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결단코 뻔한 신파 감동소설이 아닙니다. 결말에서 나오키는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입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이지 울지는 않습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직 살인이라는 범죄와 그 범죄가 낳은 아픔에 관해 독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함께 해볼 것을 제의할 뿐입니다. 특별한 정답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긴 절대로 정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죠. 무엇보다 츠요시가 저지른 죄로 인해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고통을 받습니다. 15년간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맛볼 수 없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닐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사랑하는 어머니(노파는 당연히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입니다)를 잃었습니다. 나오키는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지금도 포기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누구도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츠요시가 범한 살인이라는 범죄는 피해자가 품고 있던 여러 관계를 단절시켰고, 그 죄값으로 츠요시가 맺고 있던 유일한 관계인 동생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물론 나오키도 형과의 관계로 인해 소중한 많은 관계들을 잃어야만 했죠. 살인은 이처럼 무서운 범죄입니다. 관련된 모든 이들의 관계를 낱낱이 파괴하니까요.

 

어디에도 해답은 없습니다. 츠요시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매달 보내지만 피해자 가족은 오히려 고통이 커집니다. 그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또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오는 츠요시를 아직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오히려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츠요시에게 매달 편지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에게 사죄하지도 않다니 천하의 악인이로구나, 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우니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문제죠. 동생 나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으로 인해 숱한 괴로움을 당하고, 그 화가 어린 딸에게까지 미치자 형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만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 차별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할지, 내 가족인 형의 일이니 그리고 날 위해 저지른 일이니 빌고 또 빌며 차별을 감내해야 할지 뭐가 맞는 길인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한히 섞여 돌아가는 카오스처럼 끝없는 혼돈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도달한 지점은 거기까지입니다. 나오키의 선택과 츠요시의 회한에 대해서는 읽는 분들 나름대로 각자의 생각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옮긴이의 말'에 실린 것처럼 원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는 열린 결말이고, 족집게 과외는 바보만을 양산할 뿐이니까요. 사실 이 긴 글보다는 서점에 가셔서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편지>라는 작품에 대한 장단점이 모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니까요. 여성 심리 묘사는 게이고가 자신없는 부분이니 건너뛰고, 작가 자신도 결말을 어떻게 내야할지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등장인물(나오키가 일하는 회사 사장)의 입을 빌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이 받는 고통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 종종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기야 누구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소설은 하나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아픔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죄가 낳은 필연적인 고통과 죄로 인한 안타까운 차별 같은 공감가는 주제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션 플래츠
윌리엄 랜데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인 주 베르세일스의 경찰서장인 벤 트루먼은 우울하다. 경찰서장이라는 높은 직함인데 왜 우울하냐고? 시골이라 마을 인구라봐야 몇 명 안 되고, 경찰서도 전 직원이 자기까지 합쳐 2명에 불과한데. 게다가 얼마 전에는 치매에 걸려 고통받던 어머니마저 음독자살했다. 이런 시골에 쳐박혀 희망없는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차에 벤은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일에 맞닥뜨린다. 대도시 보스턴의 검사 로버트 댄지거의 시체가 베르세일스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견자는 벤 트루먼 자신. 그러나 그는 보스턴 검찰국의 압력에 밀려 수사에는 참여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이때 우연히 알게 된 인물이 전직형사 켈리. 켈리는 벤에게 조목조목 수사의 요령을 알려주고, 이에 감탄한 벤은 은퇴한 노형사 켈리에게 다시 한번 수사에 대한 열정을 심어준 다음 그를 베르세일스 경찰서 부서장에 임명하고, 보스턴으로 함께 떠난다. 아이는 집을 나서야 어른이 되고, 어른은 여행을 떠나야 남자가 되기 때문에.

 

보스턴의 미션 플래츠라는 도시. 길거리 어딘가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힙합 음악이 들려올 듯한 전형적인 흑인 갱단의 동네다. 이 곳을 지배하는 세력은 해럴드 블랙스턴이라는 두목을 정점으로 뭉친 '미션 파시'라는 마약 조직. 벤은 해럴드가 10년 전, 경찰 살해 사건의 용의자였지만 무죄방면 됐고, 최근 댄지거가 수사를 재개하려 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벤은 유사 아버지 같은 존재인 켈리와 그녀의 딸 캐롤라인(미션 플래츠의 검사로 재직하고 있다)의 도움을 받아 수사에 나선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실제 검사 출신이라는 윌리엄 랜데이의 처녀작이다. 첫 작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받았다. 이 정도 글이 되는 사람이 지금까지 왜 검사를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오가는 이야기는 촘촘하며, 문장도 유려하고, 결말에는 충격적인 반전까지 갖췄다. 데뷔작에서 이미 제임스 엘로이 풍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사회 정의를 실시한다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경찰들의 위악적인 폭력이 특히 그렇다)와 문장력, 스콧 터로를 연상시키는 법조계의 풍경들과 반전을 보여주고 있으니 장래가 촉망된다고 할 수밖에. 그런데 사실 언급한 대가들의 느낌이 너무 강해 이제 첫 작품을 낸 신인작가만의 개성은 조금 흐릿해 보여 약간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첫 작품에서 이런 공인 받은 대가들의 느낌을 줄만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잘 이해하고, 능란하게 이끌어나가고 있음은 칭찬해야 마땅할 것이다.

 

<미션 플래츠>의 최대 매력은 아마도 반전일 것이다. 이런 결말을 상상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듯. 충격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감이 있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독자에게 사실상 제공하지 않으면서 반전을 터뜨리기에,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뒤로 갈수록 어, 어? 어! 하게 되지만 결국 독자가 절대 미리 알아챌 수 있게끔 단서를 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반전이므로 아쉬움이 제법 남는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간만에 보는 탄탄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등장인물들은 조금도 허황되지 않고, 심지어 악역에게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그럴 듯한 이유를 쥐어줌으로써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의 함정을 벗어난다. 특히 비밀을 간직한, 노련한 형사 마틴 기튼스와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훌리오 베가 전직 형사의 캐릭터 묘사가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켈리의 매력에 포로가 되었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인생 선배로서, 때로는 경찰의 모든 수법에 통달한 노회한 형사로서 켈리는 벤을 교육시키고 성실하게 돕는다.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벤과 캐롤라인의 관계보다 오히려 켈리와의 우정이 훨씬 흡족하게 읽혔다.

 

장점만 가득 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히 매력 있고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과거의 사건을 둘러싼 현재의 흥미로운 공방전, 한없이 우울한 결말까지, 처녀작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대단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인작가 윌리엄 랜데이를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의 미래라고 불러도 과히 부족함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잘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것 같아요. 부서장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그는 내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길을 택했다고 말이예요."

켈리가 신음을 토했다. 흠.

"다 털어놓을 걸 그랬어요. 그들도 경찰인데, 그들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소리 말게. 우리는 보스턴 경찰청 소속이 아니야. 우린 우리 수사만 하면 되는 거라고. 자넨 그저 원하는 만큼만 들려주면 돼. 그들도 우리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있진 않으니까. 진정한 법 집행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하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솔로 2007-01-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괜찮은 스릴러인데 다소 찬밥 취급을 받은 거 같아요. 무엇보다 문장이 꽤나 매력적이었어요.

물만두 2007-01-1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까운 작품이죠.

jedai2000 2007-01-18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꽤 괜찮죠. 아주 수준급이예요. 제2작은 미국에선 나왔는데,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는 시장성이 별로라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궁금한데...

물만두님...작년에 비교적 사장된 작품 중 가장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한 달 사이에 거의 5권이 나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온다 리쿠의 작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흑과 다의 환상><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빼고는 국내에 나온 건 다 읽어본 셈인데, 재미있는 사람들 사이의 취향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두고 두 작품 이상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갈리더라 이거다. 어떤 작품은 좋고, 다른 작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고 그저 취향의 차이거니 해야지. 내 취향에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가장 좋았고, <네버랜드><여섯 번째 사요코>는 볼 만했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밤의 피크닉>은 그저 그랬다.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인 <빛의 제국>은 어땠냐고? 개인적으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같은 수준의 베스트고, 비미스터리 쪽에서는 최고로 꼽는다.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집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코노 일족의 사람들은 각각 다른 이의 기억을 읽어내기도 하고,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훤히 듣거나 보고, 바람처럼 날아다니기도 한다.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고 약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 수록된 10개의 이야기들은 그 내용과 이끌어가는 방식,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은근히 도코노 일족의 그림자가 휘감겨 있다. 다소 짧은 단편들이라 이야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작품집은 전체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몸 부분부분이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것처럼, <빛의 제국>에 수록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도코노 일족의 빛과 어둠을, 그 머리를, 몸통을, 꼬리를 하나하나 보게 된다. 그렇게 모인 작은 부분들이 결국 하나의 전체를 이뤄 도코노 일족의 장엄한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뒤표지에 '단편을 읽었는데, 이상하게 거대한 장편의 여운이 느껴진다'는 아마존 독자의 코멘트가 실려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거라고 믿으며, 본인도 크게 동감한다. 근래 들어 이렇게 거대한 여운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스러져가는 도코노 일족의 모습.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꿈꾸며 다시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다 좋지만 역시 표제작인 '빛의 제국'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독자들이 행간에서 도코노 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꾸민 단편들과는 달리 이 단편은 직접 도코노 일족에 얽힌 박해의 역사를 그린다. 태평양 전쟁 무렵 산으로 숨어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민 도코노의 소년 소녀들과 일족의 지도자격인 두루미 선생님, 몇 명의 선생님들. 다들 상처를 안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지만 서로를 위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전황이 패색으로 짙어지자 그들의 초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총칼을 들고 산으로 찾아온 군인들. 군인들의 손에 하나둘씩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을 줄줄 흘려버렸다. 결국 다시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된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만든 기도문만 처연하게 떠돈다.

 

"우리는 억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실수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이 드는 것처럼,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꽃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풀에 볼을 비비고,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앨매를 따서 먹고, 별과 새벽을 꿈꾸면서 이 세상에서 살자. 그리고 언젠가 이 눈부신 빛이 태어난 곳으로 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자."

 

10개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의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다른 이야기에서 나오는 등 이어져 있는 것이 많으며, 도코노 일족 시리즈의 제2편 <민들레 공책>과 제3편 <엔드 게임>으로 확대되어 일종의 온다 리쿠표 '도코노 월드'를 이룬다. <빛의 제국>의 이야기들은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장편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소재가 흥미로우며 내용이 탄탄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총력전을 펼치는 심정으로 10개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는데, 이야기 만드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다 덮고 나면 눈 앞에 환한 빛으로 덮여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도코노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 빛은 따뜻한 느낌이 든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빛에 몸을 씻으며 돌아온 도코노 사람들, 그들을 더 알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성술 살인사건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전설 <점성술 살인사건>의 재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미 국내에 3번이나 출간되었지만 듣기에 일정 분량의 번역이 누락된 불완전한 판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진즉 절판되어 많은 분들이 헌책방 등을 애타게 찾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한 모양새와 꼼꼼한 새번역(이제 누락된 부분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작가 시마다 소지가 직접 원고에 가필 수정한 부분을 반영했다니, 미스터리 애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약간의 배경 설명을 드리자면, 본격 미스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코넌 도일의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어떤 트릭을 가지고 독자와 두뇌싸움을 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예컨대 밀실에서 시체를 발견한 탐정이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몇 가지 단서를 찾다가 끈으로 빗장을 걸어 열쇠구멍으로 빼내어 가짜 밀실을 만들어냈음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서구에서 주로 유행했던 이 장르를 30년대쯤부터 일본에서도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나 사카구치 안고 등이 충실히 이식해 일본식 본격 미스터리를 만들어냅니다.

 

본격 미스터리는 주지하다시피 실제 현실과는 많이 유리된 두뇌의 유희만을 위한 장르가 되기 싶습니다. 그 점에 불만을 품은 마스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치 등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범죄의 트릭에서 현실성을 가미하고, 명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등장인물은 배제하고 실제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나 기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정계와 재계와 결탁 혹은 지방도시를 지배하는 불온한 세력, 환경 문제 등의 사회적인 해악을 폭로하는 도구로 미스터리를 사용합니다. 이게 바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아무래도 필치가 진지해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 문학적 가치도 높아 50년대부터 대단히 융성합니다. 그러나 매력있는 명탐정, 신기한 트릭 등의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옛날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되찾자, 는 흐름이 바로 신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본격이라는 의미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은 1980년에 출간되어 신본격의 본격적인 도래를 알린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작가 시마다 소지는 본인의 역사적인 데뷔작을 비롯하여, 당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마추어 신본격 작가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등단시킵니다. 시마다 소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아비코 다케마루의 <미륵의 손바닥> 등을 지금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미스터리 평론가로 활동하며 89년에는 <본격 미스터리 선언>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신본격 미스터리의 태두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군의 신본격 작가들로부터 더 이상 참신한 신본격 미스터리가 나오지 않는 추세라 '신본격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 오고 있습니다. 이에 시마다 소지는 신본격의 거장답게 본인이 직접 총대를 메어 더욱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 안에서 시마다 소지의 역할은 이렇게 깊고도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작가의 위상이나 역할 등은 차치하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작품이 재미있어야 하겠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본격이니 사회파니 신본격이니 하는 장르 구분을 무시하고서라도,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미스터리 소설 본연의 맛을 120 퍼센트 구현한 대단한 걸작입니다. 주요한 등장인물은 우울증에 걸려 입이 거칠지만 천재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와 '왓슨' 역을 맡은 이시오카입니다. 그들은 전후 일본을 들끓게 만들었던, 40년간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우메자와 가 점성술 살인사건'에 도전하는데, 거의 300페이지 가까이 두 사람의 대화로만 진행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사건의 해명에만 집중되며 로직과 트릭의 성찬입니다. 거의 황홀감까지 들 정도죠. 대화만 끝없이 나열된다면 지겹지 않겠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타라이가 내뱉는 말들(특히 홈즈를 '까는' 장면)은 대단히 재치가 있으며,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의 마음이 행간에 은근히 배어 있어 문장에 정감이 흐릅니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내용 설명은 할 수 없겠습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트릭이 거의 천의무봉의 경지라 굉장히 유명한 일본의 모 미스터리 만화에서 표절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만화라 대부분의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점성술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혹여 새로 읽으실 분들 중 그 만화를 읽은 분들에게 만화와 이 책을 연결시킬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기에 일체의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번 재출간을 포함하여 옛날 판본까지 3번을 읽었습니다. 트릭을 표절한 만화도 2번 보았구요. 하지만 트릭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작품의 매력과 가치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읽을 때마다 1980년에 이런 트릭을 만들어낸 작가 시마다 소지에게 감탄하고 맙니다. 잔재주가 전혀 없는 시원한 정면 승부(가장 중요한 단서가 제시된 시점에서 두 번의 '독자에의 도전장'을 던집니다)로 서구와 일본을 통틀어 미스터리 역사상 가장 기발한 트릭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쪼록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읽기 바랍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이후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들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를 미스터리와 결부시키기 위해 신문 등을 뒤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더 참신하고 기발한 트릭을 개발하기 위해 고전 본격 미스터리를 연구하고, 두뇌를 짜내게 되었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한 장르를 탄생시키면서, 완성시킨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전설, 걸작, 역작...최상급이 수식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p.s/ 요즘 생활이 팍팍하다 보니 이 작품에 더욱 몰입되는군요.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생활인의 향기가 전혀 없습니다. 신기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럼 우리가 풀어볼까나. 단서를 찾으러 교토로 가야겠어, 그럼 가야지. 이렇듯 여유와 낭만, 즐거움이 있는 생활, 정말 판타지입니다. 어디 미스터리만 풀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그런 낙원 없을까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1-1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불허전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겠죠^^

jedai2000 2007-01-1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명불허전에 손색없는 훌륭한 작품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