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듀본의 기도 - 아주 특별한 기다림을 만나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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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군: 나 왔다. 오우, 뭐냐? 너 공부하냐?
강군: 응. 왔냐. 오랜만이다.
공군: 오랜만이나마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니가 책상에 앉아 있다니.
강군: 어, 잠깐 뭐 좀 할 게 있어서. 다 됐다. 거기 앉아 있어라.
공군: 아냐, 아냐. 뭘 하는지 봐야겠다. 뭐 쓰는 거야?
강군: 하하. 우리가 사는데 그냥 막 살아서 되겠냐. 계획성 있게 살아야지. 그래서 백년지대계를 세웠다.
공군: 계획은 우리랑 안 어울리는 단어잖아. 너 뭐 잘못 먹었냐?
강군: 임마, 너도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나를 본받도록 해라.



공군: 그래, 뭔 계획이냐.
강군: 응. 서지혜랑 사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봤다.
공군: .......
강군: 어, 듣고 싶다고? 하하. 이거 비밀인데.
공군: 그런 말 안 했는데...
강군: 네가 그렇게 성화니 말해줘야지 뭐.
공군: 어이, 나 암 말도 안 했거든.
강군: 녀석, 호기심도.



공군: ......말해봐라.
강군: 먼저 서지혜를 만나. 그런 연예인들은 보통 주변에 떠받아들어주는 사람만 있을 거 아냐. 그럴 때 오히려 신선하게 한 마디 하는 거지.
공군: 뭐라고?
강군: "야, 이 X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공군: 그 다음에...
강군: 그리고 헤어지는 거지. 물론 그 당시에는 기분이 되게 나쁘겠지. 그런데 이제 그날 밤에 서지혜가 침대에 누워 생각을 하는 거지. "누구도 나한테 그렇게 대한 사람은 없었어."
공군: .......
강군: 그 다음엔 가만히 앉아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3일 안에 연락 온다니까.
공군: ....... 책 이야기나 하자.
강군: ....... 그러자.
공군: 거기 책상 위에 서지혜 사진이나 좀 치우고. 아주 입술이 하얗게 바랬구나. 얼씨구, 모니터에 침 덕지덕지 묻은 거 봐라. 니가 중학생이냐.



강군: 최근에 읽은 책은 <오듀본의 기도>야. 이사카 코타로 책이지.
공군: 왜 말을 돌려.
강군: 주인공은 이토라는 이십대 후반 남자야. 이 남자는 매사 도망만 치는 의욕이 없는 남자인데 최근에 눈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고, 좋아하는 여자랑도 깨졌어.
공군: 신세 처량한 건 우리랑 비슷하네.
강군: 그렇지. 암튼 충동적으로 편의점을 털다가 경찰한테 딱 걸린 거야. 이 경찰은 이토의 중학교 동창인데 경찰복으로 사람을 현혹시킨 다음에 재미로 사람을 망가뜨리는 게 취미야. 경찰이지만 강간, 마약, 살인 뭐든 다 하는 악인이지.
공군: 너처럼 악독한 놈이구나.
강군: 암튼 호송 도중에 교통사고가 나고 눈을 딱 떠보니 낯선 섬인거라. 알고보니 웬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토를 데리고 어떤 섬으로 옮겨논 거지. 그런데 그 섬은 일본 지도에도 없고 150년 넘게 일본 정부와 단절된 그야말로 환상의 섬이야. 하여튼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이 걸작이야. 무엇이든지 반대로만 말하는 화가. 자기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게 허용되는 권총을 든 미남자. 너무 뚱뚱해서 한 자리에서만 20년을 산 여자. 게다가 사람 말을 할 줄 알며 과거와 미래 모든 걸 보는 허수아비까지.


공군: 무슨 <오즈의 마법사>냐.  
강군: 일종의 판타지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네. 그런데 그날 밤에 미래를 보는 허수아비 유고가 살해를 당해. 아니, 기술 파손을 당해. 산산조각난 시체, 아니 잔해로 발견되지.
공군: 오, 허수아비를 파손한 범인을 잡는 거야?
강군: 그런데 그게 아냐. 생각해봐. 허수아비가 모든 걸 꿰뚫어보는 섬이니까 살인사건이 나도 범인을 허수아비가 다 말해줄 거 아냐.
공군: 일종의 명탐정이군.
강군: 칼이네. 바로 그거야. 그런데 그 명탐정이 죽었으니 또 다른 살인을 꿈꾸는 사람은 실행에 나서기가 쉽겠지. 그래서 또 한 번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거야. 이제부터는 허수아비 유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주인공이 추리를 해야 하는 거지.



공군: 아주 독특한 내용이구나.
강군: 응.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실질적인 데뷔작인데 처음부터 그 사람 작품의 특징이랄까 원형이랄까 다 들어 있더군. 다소 과장된 듯한 묘한 인물들과 기묘한 사건, 재치있는 대사와 시원한 전개, 상쾌한 끝맺음과 무언가 담아갈 수 있는 여운까지 말야.
공군: 네 말만 들음 아주 신선한 작가일 것 같구나.
강군: <오듀본의 기도>는 미스터리 작가로 원래 출발한 이사카 코타로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것 같아.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굳이 미스터리로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거든. 하지만 이 작품은 아주 전형적인 미스터리 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하는 허수아비, 뭐든지 반대로 말하는 남자 같은 기묘한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통해 미스터리 장르를 비틀고 꼬는 재미가 있거든. 특히 흔히 추리소설의 핵심이 되는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허수아비의 역할과 일치시켜서 담론을 이끌어내는데,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명탐정이 있는 게 아니라 명탐정이 있어서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뭐 이런 식이지.
공군: 물 한 모금 마시고 계속 해라. 힘들겠다.
강군: 처음에 그저 스치고 지나갔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합쳐져 진실이 밝혀지는 추리소설 특유의 재미도 있고, 산뜻한 이사카 코타로 풍미도 있지. 데뷔작이지만 그닥 쳐지지 않는 것 같다.




공군: 오늘 빌려가서 한 번 봐야겠네.
강군: 이사카 코타로도 초기작과 요즘 작품이 좀 다른 느낌이라 팬층이 각각 양분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초기작들이 더 좋아. 최근 너무 다작해서 신선도가 떨어진 감이 많거든.
공군: 잘 될 때 빠짝 버는구나.
강군: 다 그런 거지. 뭐, <오듀본의 기도>는 작가가 아직 절정에 오른 상태가 아니니까 약간 산만한 감도 있고, 멸종한 새를 통해 한 종이 절멸하는 순간의 쓸쓸함이나 그 많던 새를, 너무도 많으니까 내가 몇 마리 죽여도 표도 안 나겠지, 하며 멸종시켜버린 인간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도 인간들의 의지와 서로간의 교감, 우정, 뭐 그런 것들로 인간성 회복을 꿈꾸는 등 주제적으로는 약간 거창한 면도 있는 것 같긴 하다. 데뷔작으로 너무 나간 감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처녀작이니까 소박하게 써야겠다,는 사람보다는 패기있고 좋지 않니?
공군: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꼭 읽어보겠다.
강군: 아, 읽어볼 때 웬만하면 옮긴이의 글은 건너 뛰어라. 후기 쓰기 싫어하는 역자에게 글을 강요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옮긴이가 쓰고 싶을 때 써야지 안 그러면 이 책 옮긴이의 글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거란다.  
공군: 잘 알겠다. 그나저나 실컷 떠드니까 목 마르지? 맥주나 한 잔 사라.



강군: 장난하냐. 돈없어서 밥도 못 먹고 있는데.
공군: 헐. 나도 얻으먹으려고 왔는데. 야, 그럼 집에 있는 기물이라도 팔자. 냉장고 같은 거. 들여놓을 것도 없는데 있어서 뭐하냐.
강군: 네 거 팔아라. 그럼.
공군: 좋아. 그럼 내기를 하자. 지는 사람 기물 팔아서 맥주 사기. 사자성어 끝말잇기 대결.
강군: 오케이. 시작해라.
공군: 양상군자.
강군: 자축인묘.
공군: 너 대학 나왔잖아. 어떻게 두 번을 못 돌아 이 자식아.
강군: 야, 이 X아. 네가 그렇게 잘났어.
공군: 암튼 뭐 팔 거냐.
강군: 냉장고.




공군: 그래도 둘이 같이 드니까 좀 낫지.
강군: 그래.
공군: 우리 신세도 참 거지 같다. 이 나이 먹어서 맥주 마실 돈이 없어 집기를 팔다니. 이것 참.
남보기 부끄러워서 원. 인생 헛 살았네. 정말 자괴감이...
강군: 마찬가지다. 에효, 우리 몇 살?
다같이: 서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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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군 공군이 서른이라니 오^^

jedai2000 2007-05-0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밝혀지는 강군 공군의 비밀이라죠. 일단 나이는 서른살, 대학은 나왔고, 백수 상태 ^^
 
시티즌 빈스 블랙 캣(Black Cat) 12
제스 월터 지음, 이선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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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빈스 캠든에 대해 알아보자. 시민 빈스는 워싱턴 주 스포캔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당신을 허기지게 만드는 도넛' 가게에서 지배인 겸 수석 제빵사로 일한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4시 30분에 출근을 하고 점심 시간까지 근무하는 그는 출근하기 전에 온갖 인간 쓰레기, 낙오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포커를 하는 '샘스 피트'라는 술집에 들른다. 샘스 피트의 전 주인이 샘이라 샘스 피트지만, 현재 주인은 에디다. 하지만 다들 그를 샘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기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빈스지만 사실 어두운 과거가 있었으니, 알고 보면 그는 뉴욕에서 마피아와 손을 잡고 일하던 카드 사기 전문가였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마피아에 대한 폭로 증언을 하고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마티 하겐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스포캔에 숨어 빈스 캠든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빈스는 스포캔에서도 제 버릇을 못 버리고 여전히 카드 사기와 마리화나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어느 날 자신의 동업자가 얼핏 봐도 무시무시한 인상의 한 사내를 데리고 나타난다. 음험한 분위기의 이 남자, 레이는 수 틀리면 다짜고짜 사람을 쏴 죽이는 흉악한 범죄자인데 빈스를 노리고 있다. 빈스는 생각한다. 마피아가 내가 사는 위치를 알아냈구나, 레이는 나를 죽이려는 킬러고. 사기꾼 잡범에 불과한 빈스에겐 마피아의 해결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빈스에게 의혹의 눈을 거두지 못하는 듀프리 형사와 킬러 레이의 총 앞에서 간신히 몸을 빼고 결자해지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빈스의 운명이 어떻게 풀릴지 관심이 가지 않는가?



전반적으로 풍부한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빈스의 심리 상태를 기술할 때도 자잘한 유머가 많고, 가끔 한 번씩 기가 막히게 웃겨주는 부분들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믿지 못할 테니 예를 들어볼까. 레이에게서 도망가려는 빈스가 짐을 싸고 있는데, 레이의 차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다. 무기가 될 거라곤 납 파이프 하나뿐. 그 순간 초인종이 울리고 대통령 후보(그러나 레이건과 카터에 비하면 지지율이 형편없는) 존 앤더슨의 홍보원 셜리가 들어온다.



셜리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건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빈스는 어리석은 짓임을 잘 알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다른 방법이 떠오를 수 없을 만큼 이 생각 하나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셜리에게 파이프를 건넨 뒤 현관문에서 무릎 높이쯤에 나 있는 우편물 수신용 함을 가리켰다. (...)
레이와 레니는 빈스의 시선을 따라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총신으로 보이는 물건이 우편물 홈 밖으로 나와 레이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레이는 총이 맞는지 확인을 하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총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



"파이프 아냐?" 레이는 실눈으로 현관 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레니 역시 실눈을 뜨고 있었다. "저걸 총이라고 믿으란 말야. 빈스?"
레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릴 포위하려고 배관공을 불러모았군, 형씨?"
바로 그 순간 총신은 큐 사인을 받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문이 열리더니 셜리 스태퍼드가 활짝 웃는 얼굴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손에 든 파이프를 흔들고 있었다.
"친구 분이 속아 넘어갔나요, 캠든 씨?"




위에서 얼핏 레이건과 카터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이 작품의 배경은 두 사람이 격돌했던 1980년 대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티 하겐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는 쉴새없이 감옥을 들락거리느라 선거권이 박탈되었지만, 빈스 캠든은 새로 태어난 사람이나 다름없으므로 물론 선거권이 있고 선거용지도 배달되어 온다.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와 감동은 여기에 있다. 마티로는 밑바닥 삶을 살았지만 빈스로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 빈스는 한 사람의 훌륭한 시민으로서,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다시 없을 인생의 기회가 이번 선거에 걸려 있음을 직감한다. 생명의 위기 앞에서도 선거에 광적으로 몰두하다시피 하는 빈스의 집착은 물론 우습지만 어느 순간 그 진심에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여기서 한 인간의 반성과 회오, 다시 시작하기 위한 굳은 의지와 열망이 한 순간에 교차하고 독자들은 진한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져게 되는 것이다.



작가 제스 월터가 비교적 경험이 일천한데도 작년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 수상작을 받은 작품으로 당시 경쟁자가 미국추리작가협회 회장 마이클 코넬리, 미지의 거장 토마스 쿡, 최근 국내에 두 작품이 소개된 조지 펠레카노스, 메디컬 스릴러의 신성 테스 게리첸으로 쟁쟁했음에도 수상의 영광을 이뤄 많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막상 읽어보니 탈 만한 작품이 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내 유쾌하며 책장을 다 덮고 나면 커다란 감동까지 아울러 느낄 수 있었기에. 미스터리 장르라는 기준으로 보면 사실 근사한 트릭이나 반전 등이 없고 어떻게 보면 일반 소설에 더 가깝다. 빈스가 레이의 위협에 맞서 좀더 머리를 굴려 기발하게 끝냈으면 좋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책 자체가 워낙 좋아 지금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개인적으로는 한 동안 여기저기 추천하고 입소문을 낼 작품으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부동산 중개인이 되려고 공부하는 중이예요.'하고 말하는 게 좋았고요."
베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빈스..., 칫! 정말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내가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쩌죠? 그럴 만한 머리가 안 되면 어떻게 해요?"
"베스..."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요. 그런 것에 이렇게 목매달다니 정말 바보 같죠?"
빈스는 마침내 팔을 내밀어 베스의 부러진 팔을 잡았다.
"베스, 지금보다 나은 걸 원하는 건 바보 같은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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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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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세기의 최초 10년 동안 사람들은 향후 역사를 바꿀 천재들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파블로 피카소는 현대 미술을 다시 그렸고, 특허청에서 일하던 독일인 아인슈타인은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1900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 박사는 정신분석학이라는 혁명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니, 가히 천재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살인의 해석>에서도 세상을 바꿀 천재는 세기초의 10년 안에 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셰익스피어와 프로이트의 예를 들고 있는데, 2007년 현재 전 세계를 놀래킬 천재는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들고 나올지 개인적으로 매우 궁금하다.

 

<살인의 해석>은 정신분석학의 태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이자 '컴플렉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또 다른 심리학의 거인 카를 융이 살인사건을 수사한다면, 이라는 흥미로운 가정으로 출발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기틀을 닦아놓은 심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이 오늘날 각광받고 있으니 아주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활동하던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생전에 단 한 차례, 미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강연을 부탁했기 때문에 1909년에 배를 타고 건너온 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살인의 해석>은 이때 미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프로이트가 참여한다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09년, 프로이트와 수제자 융이 뉴욕의 항구에 도착한다. 젊은 정신과 의사 스트래섬 영거는 프로이트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성심성의껏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날 호화찬란한 발모럴 아파트에서 한 젊은 여인이 넥타이에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온몸에는 채찍과 면도칼로 난자당한 상처가 가득한 채. 공교롭게도 다음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또 한 번 뉴욕 시내에 울려퍼진다. 또 한 명의 여인이 살해당할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났지만 역시 채찍과 면도칼에 당한 상처가 났으며, 넥타이로 졸린 목은 피멍으로 얼룩졌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소녀, 노라 액튼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으며 사건 당일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심리적인 원인으로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해본 경험이 많은 프로이트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와 융을 내세웠지만, 사실 주인공은 영거 박사와 리틀모어 형사다. 영거 박사는 프로이트를 대신해 노라 양을 치료하는데, 그녀는 곧 영거 박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사실 이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숭배 현상을 뜻하는 전이에 다름아닌데, 영거 박사 역시 노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역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인지 마음의 장난인지 반신반의하는 영거 박사와 노라의 이야기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또한 이 사건을 심리학이 아닌 증거 제일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경찰의 입장에서 수사하는 리틀모어 형사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직 젊기에 뇌물을 안 받아먹고 때가 덜 탔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담당 수사관이 된 것인데, 의외로 명탐정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추리력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진상에 점차 접근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배경이 20세기 초반이라서인지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빠른 템포의 스릴러 식이 아니라 엘러리 퀸 풍의 클래식 미스터리 형식으로 사건을 풀어가서 일단 반가웠다. 유전자나 다른 과학 지식 난무로 머리 아플 일도 없고. 하지만 확실히 미국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양식이 사양길이고, 쓰는 작가도 거의 없기에 참조할 작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고전 미스터리의 맛을 썩 잘 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고전 미스터리의 맛은 매력적인 탐정이 단서를 잘 조합해낸 다음 명추리를 전개해 용의자 인간군상들 앞에서 트릭을 확 폭로하며 한 방을 멋지게 터뜨려야 맛이 사는 법인데 <살인의 해석>은 대체로 밍숭맹숭하다. 가장 중요한 단서인 목에 새겨진 머릿글자를 둘러싼 공방도 이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한 가지 더 실망스러운 점은 프로이트와 융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홍보 문구와는 달리 프로이트가 약간의 조언을 해주는 정도고 융은 작품 내내 방황만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성실하게 씌어진 점은 마음에 든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당시의 시대상을 꼼꼼이 조사해 독자들이 마치 1900년대 초반 뉴욕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사실성을 덧입혔다. 그가 아니었다면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설할 때 아래가 뚫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상자 모양의 '잠함'을 강 속으로 투하시켜, 그 안의 물을 빼고 공기를 주입한 다음 인부들이 작업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밖에도 프로이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당대 미국의 지식인 계층(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따지고 보면 근친상간의 욕망인데,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 이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의 배척과 탄압, 살인 사건의 해결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프로이트와 융의 대립과 결별 등의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심리학이 태동하던 당대의 공기를 잘 잡아내고 있음은 칭찬할 만하다.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프로이트를 오래 연구한 사람이라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프로이트의 대사는 거의 실제 그의 학설, 발언, 논문 등을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아주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프로이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이고. 미스터리로서도 적당히 재미있고, 시대를 초월한 프로이트 이론의 매력도 잘 살려내 누가 읽어도 그다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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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2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도 엘러리 퀸을 느끼셨군요^^

jedai2000 2007-04-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리 퀸이 이런 소재를 가지고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더 잘 했을텐데 ^^

2007-04-23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4-2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글쎄, 뭐 읽을 만은 합니다. 뒤의 설명이 좀 부실해서 그렇지,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몰입감이 있고 재미있어요 ^^
 
카후를 기다리며
하라다 마하 지음, 오근영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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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파도가 넘실대는 남국의 섬,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 제목 <카후를 기다리며>의 '카후'는 오키나와 사투리로 좋은 소식, 행복 등을 뜻한단다. 좋은 어감 만큼이나 좋은 뜻이다.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사는 아키오는 28살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자그만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애견 카후와 함께 하루하루를 재미없게 보내고 있다(애견만 없다 뿐이지 다른 신세는 필자와 비슷하다, 흑). 책 첫 머리에 아키오의 외로움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어쩐지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고백하자면 여기서부터 역시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과는 인연이 먼 인생을 살고 있는 필자가 급격히 몰입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키오는 섬 밖으로 관광을 나갔다가 한 신사에 들러 기원문을 매달아둔다. 신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진지하게 미지의 여성에게 구애를 한 것이다.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래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 아키오."

개인적으로도 특정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친구들이랑 어디 놀러 가서 절이나 사당 같은 곳이 나오면 꼭 헌금을 하며 소원을 비는데, 친구들이 돈 낭비라고 다 비웃어도 나는 진지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되기를 빌기도 하고, 지금처럼 항상 맑고 곱기를 기원하기도 하며 뭐 그런데, 인연이란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도 때로 어긋날 수도 있는 모양이니 뜻대로 되지 않는 애정이 벽에 부딪쳤을 때 신을 찾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결국 그렇게 많이 빌었음에도 본인은 신으로부터 어떤 기별이나 연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질투나게도 이 작품의 주인공 아키오는 대뜸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니, 사치라는 이름의 낯선 여자에게서 온 것이다.

"기원문이 진심이라면 저를 당신의 아내로 받아주시겠어요? - 사치"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사치를 몹시 기다린다. 하루하루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해가지만 사치는 오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아키오는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은 지금껏 전부 나를 떠나갔다.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난 어머니, 나보다 단짝 친구를 더 좋아했던 짝사랑하는 여자애...평생 이렇게 외로울 팔자인가 보다, 하며 포기한 순간에 사치가 찾아온다. 눈부신 미소에 단아한 아름다움, 활달한 성격에 싱그러운 젊음을 소유한 사치가...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 사치"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자연을 배경으로,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을 간직한 아키오와 사치가 점점 가까워지고,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를 돋운다. 왜 이쁘게 사랑하는 커플을 보면 괜시리 훔쳐보고 싶고, 그저 예뻐 보이고, 잘 됐으면 하고 응원하는 게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우리네 마음 아닌가.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튼튼한 결실을 맺기를 열심히 바라며 읽었다. 제1회 '일본 러브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데, 분명히 매력있는 소설이다. 만나고 가꿔워지다, 오해를 겪고 이별하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는 대강의 설정은 통속적이고 대부분 짐작 가능하지만 솜씨 좋게 빚어져 있어 결점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의 오해는 대부분 아키오의 우물쭈물함, 용기없음, 지레짐작에서 비롯되고 있어 '이런 바보'하면서 내내 욕을 하면서 보았다. 마지막 100여쪽을 볼 때는, '빨리 사치의 마음을 알아채란 말야', 하면서 하도 몰입하면서 봤더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순진한 아키오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풋풋한 연애담, 꼭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사치라는 여인의 매력,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남국의 싱그러운 바람, 전쟁 같은 도시가 아닌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시골의 여유를 안겨줘 한참을 잊지 못할  독서가 될 듯하다. 좋은 연애소설은 아마도 책장을 모두 덮고 나면 나도 지금 당장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카후를 기다리며>를 읽고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닷가 모래밭을 단둘이 다정하게 걷고 싶어서, 철 지난 사랑 노래를 찾아 듣고 싶어서, 카메라처럼 내 눈에 나만을 보고 웃어주는 한 여인을 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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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 밀리언셀러 클럽 58
조지 펠레카노스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스트레인지는 어린 크리스토퍼를 상상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 매일 아침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개 짖는 소리도 듣던 아이. 창문을 내다보며 기적의 터치다운을 꿈꾸고, 경기장 밖으로 만루 홈런을 쳐내는 상상을 하고, 옆자리에 앉은 예쁜 여학생을 그리워하던 아이. 엄마가 준비하는 아침식사 냄새를 맡고 엄마의 콧노래를 들었을 아이. 그리고 엄마가 고개를 삐쭉 들이밀며 이제 일어나 학교 갈 시간이다, 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던 아이......

 

LA에 제임스 엘로이가 있고, 보스턴에 데니스 루헤인이 있다면, 워싱턴 D.C에는 조지 펠레카노스가 있다. 비록 펠레카노스가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해 진가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을 읽어본 결과 엘로이나 루헤인 급의 '크라임 픽션Crime Fiction'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거명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듯하다. D.C가 미국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범죄율로 유명하듯이 펠레카노스의 작품의 수위 또한 대단하다. 그리스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나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다양한 체험을 했다고 하는데, 직접 보고 들은 밑바닥 생활을 묘파하기에 그렇게 리얼한 범죄소설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는 펠레카노스의 사립탐정 데릭 스트레인지 시리즈의 제1작이다. D.C 토박이 데릭 스트레인지는 초로의 전직 경찰관이자 현직 사립탐정이며, 흑인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이곳 D.C에서 바람난 애인 뒷조사로 짭짤한 이문도 좀 남기고, 애인이 있지만 적당히 바람도 피면서 그럭저럭 남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즐기는 것은 서부영화 사운드트랙 듣기. 도입부에서 스트레인지는 뜻밖의 의뢰를 받게 되는데, 크리스토퍼 윌슨이라는 사망한 흑인 경관의 어머니로부터 아들의 죽음을 재조사해달라는 것이 의뢰 내용이다. 크리스토퍼는 비번인 날 술을 마시고 거리를 걷다, 노상 방뇨를 하려는 백인을 제압한다. 반항하는 백인과 실갱이가 커지자 소란이 나게 되고, 순찰 중 이 장면을 목격한 백인 경찰관 테리 퀸은 동료 경찰인 줄도 모르고, 총을 들고 있던 크리스토퍼를 쏘아 죽인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전말인데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아들이 흑인이라, 천한 흑인과 같이 경찰 생활을 하는 것이 고까워 일부러 죽였다는 것. 스트레인지는 의뢰를 받아들여 테리 퀸을 만난다. 테리 퀸은 동료 경찰을 오인 사망케 한 죄로 해임되어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다. 멋진 경찰이 되고 싶었지만 좌절된 현실에 늘 억압된 분노를 품고 산다. 스트레인지는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친절하고 진실되어 보이는 테리가 그리 싫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서부영화 사운드트랙을 좋아하는 취미도 같고. 하지만 때로 화산처럼 분출되는 테리의 돌발적인 폭력성에 완전히 그를 믿지는 못하고 있다. 더구나 테리가 한 눈에 반해 구애하는 흑인 아가씨 주아나에 대한 테리의 마음이 혹시 자신의 수사를 피하기 위한 위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작가 조지 펠레카노스는 오우삼의 <첩혈쌍웅>의 미국 배급을 맡기도 했단다. 아마도 오우삼과 <첩혈쌍웅>을 무척 좋아하는 듯, <살인자에게 정의는 없다>의 스트레인지와 퀸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고결한 남자들만의 우정으로 점차 분신이 되어가는, 영락없는 오우삼 영화의 두 주인공 모습과 판박이가 아닌가. 여기다 작가는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영화 문법도 그대로 가져온다. 비열한 마약상, 타락한 경찰, 사기꾼, 마약에 중독된 창녀, 백인 쓰레기, 남미 갱 등이 등장해 페이지를 욕설과 수다로 화려하게 수놓으며, 각각 다른 인물과 이야기가 툭툭 던져지다 나중에 모든 상황이 하나로 합쳐져 짜릿한 쾌감을 주는 스타일은 그야말로 잘 만든 타란티노 영화를 보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스트레인지와 퀸에게 각각 포커스를 맞추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와 전혀 무관한 마약 밀매꾼들의 이야기도 병행되어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었다. 하지만 이 세 이야기는 결국 정교하게 한 가지 결말로 수렴되니 안심하기 바란다,

 

주인공은 스트레인지지만 더 매력적인 인물은 자책감과 분노, 열정, 억압, 혼란으로 가득찬 복잡한 내면의 퀸이기에, 그가 범인이 아니었으면 하고 몹시 바랐다. 하지만 계속 의혹의 여지를 남겨두어 그가 악인인지, 정의의 편인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게끔 만든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며, 스트레인지가 고생스레 모아온 관련자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결국 사건의 진상을 도출해내는 과정은 독창적이며 매우 흥미롭다. 이젠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 되는 미국의 인종 갈등도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갈등을 넘어 아예 서로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흑백의 모습은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 흑인 스트레인지와 백인 퀸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마약범들의 노리개가 된 아가씨를 구출하기 위해 <황야의 무법자> 음악을 들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하면서부터인데, 약한 여자를 구출하는 서부 사나이들의 활극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주의와 마초이즘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가 보기에 유치한 영웅주의와 마초이즘이 미국의 본질인 것을.

 

거의 익히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처럼 생생한 폭력과 도발적인 성애 장면, 걸쭉한 욕설, 대중문화에 바탕을 둔 농담(<리쎌 웨폰>을 패러디한 농담이 그중 백미다) 등 B급 영화스런 재미가 살아 있는 책이다. 싫어할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좋아할 사람은 거품을 물 그런 작품. 쓸데없이 꼬아서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저돌적으로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미국 사회를 안에서부터 곪게 만드는 고질적인 문제들-인종 차별, 범람하는 마약, 총기 허가 등-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을 가진 작품으로,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이 모든 문제들을 직시할 것을 종용하기에 결국 깊은 감동까지 남긴다. 조지 펠레카노스, 크라임픽션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이제 빗소리만 시끄러웠다. 빗줄기가 창고 지붕을 하염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정체가 뭐야? FBI? 마약반?"

레이가 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혼자야."

얼이 말했다.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군. 당신 카우보이야?"

레이가 비아냥댔다.

'그래, 그게 바로 나다.'

 

 

p.s/ 아무리 복고 열풍이라지만 80년대를 연상시키는 제목과 표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들고 읽으면 다 쳐다보는 것 같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 원제 이 살리기 어려운 제목이라지만, 지금 제목보다는 더 좋게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괜찮은 작품인데 표지와 제목에서 먼저 점수가 깎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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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4-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기대됩니다.

jedai2000 2007-04-2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이런 남성적인 범죄소설도 좋아하니까 매우 좋았는데, 판매지수를 보니 후속작을 볼 수는 없겠더군요. 아듀~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