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화분에서도 꽃은 핀다.
이미 깨져버린 화분속에는 그리 많은 흙도, 그리 많은 물도 없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보란 듯이 꽃을 피워냈다.
기지개를 켜며 한껏 자신의 화사함에 도취되었다.
햇살도 피해가는 저 미소앞에 나는 잠시 멈춘다.
숨을 쉬지 못한다.
사람은...
사람은...
왜 저리도 아름다운 아픔을 알지 못하는가..

사랑인들 뭐 다를까?
버려진 마음속에서도 사랑은 늘 피어난다.
사랑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어쩌면 새로운 사랑은 다시 잉태되어질 것이다.
밤새 내려준 빗방울이 잠시 멈춰선 까닭은
저 꽃들의 미소에 화답함이리라..
저 먼곳으로부터 나의 이름 부르는 이 있어
나의 사랑도 아직은...
진행중인가 보다...



처음, 버려진 화분속의 저 꽃을 바라보았을 때 알 수 없는 희열이 있었다. 이제는 화려했던 그 시간이 가버리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저토록 화려했던 순간이 원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내가 느끼는 시간들이 화려함으로 채색되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머무는 모든 순간들이 저렇게 보기 좋았으면 했던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오지랍이 넓지 못한데도 나는 늘.. 그렇게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넓은 이해와 포용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려놓지 못하는 등짐을 지고 시지프스처럼 그렇게 내가 오르는 일상의 언덕.. 그 언덕위에 혹은 아래에 내가 모르는 나만의 꽃들도 저렇게 꽃을 피워내고 있을까?  알.수.없.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폭풍우 치는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꿀꺽꿀꺽 골짜기' 에 살고 있던 늑대와 '산들산들산' 에 살고 있던 어린 염소가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염소고기를 가장 좋아하던 늑대 '가브' 와 엉덩이가 예쁜 염소 '메이'가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폭풍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함께 울던 그 밤, 그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만난 늑대와 염소..  폭풍우를 피해 뛰어들었던 그 집에서 '메이'가 착각했었던 건 목발소리였었다.  발을 다쳤던 '가브'의 그 목발소리에 한시름 놓인 '메이'..  사실 이 애니는 구성이 조금 어설프다. 철저하게 아동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작은 그릇속에 너무 많은 음식을 담으려했던 욕심의 덫에 걸려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 감기때문에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설정도 조금 어설프기는 했지만 해피앤딩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쯤으로 여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그늘에서 잠시 벗어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때는 서로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한다.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암호 '폭풍우 치는 밤에'를 나누어 가진 다음 그들은 헤어졌다. 자, 그 다음날 그들은 정말 만날 수 있었을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로 했다. 왜냐? 서로가 서로의 매력에 끌렸다는 설정하에서 우정을 나누기로 약속을 한거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는데 앞서가는 '메이'의 엉덩이를 보며 꿀꺽! 침을 삼키던 '가브'.. 친구가 먹이로 보인다! 과연 저 둘의 우정 지키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둘의 만남에 숲속 동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끝내는 무리들에게 그 소문은 퍼져나간다. 당연히 일어날 순서는 이렇다. 늑대무리는 '가브' 를 통해서 염소고기 잔치를 벌이고 싶어하고, 염소무리는 '메이' 를 통해서 늑대가 다니지 않는 곳을 알아내고 싶어한다. 순수한 우정을 뒤로한 채 마지막 만남을 갖게 되는 우리의 '가브' 와 '메이' 는 과연 어떻게 될까?  차마 자신들의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지만 비가 내리고 냇물을 건너면서 그들은 끝까지 우정을 지켜내기로 한다. 각자의 무리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쪽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둘은 급하게 흐르는 물살속으로  빠져들고 떠내려가며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폭포 아래에서 다시 만난 '가브'와 '메이'는  전설의 숲으로 가기로 한다.

이 애니는 정말 이쁘고 귀엽다.  구성자체는 어눌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쏙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지 싶다. 깊은 속뜻이야 전해지지 않는다해도 외모나 조건, 보여지는 것들에 치우쳐 살아가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주제의식도 보인다.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 또한 무리중에서 왕따를 당했던 '가브'의 외로움을 약하고 힘은 없지만 '메이'의 따스함이 감싸줄 수 있었다는 사실, 힘겨운 과정을 서로 헤쳐나가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그 순간들이 아주 잘 그려져 있음이다. 가끔  아주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이런 작은 애니에게조차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런 영화평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냥 이렇게 순수하게 보여지는 것만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었다.  물론 같은 작품이라해도 보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너무 복잡하게 꼬인 일상만을 바라보았기에 단순한 것조차도 복잡하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함께 보았던 아들녀석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참 좋았다.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다면 행복할까? 그건 알 수 없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년 모월 모일.. 나는 죽었다> ... 어린 영혼의 독백으로 시작되어지는 이 애니는 가슴절임을 안고 있다. 전쟁속에서 공습을 피해 반공호로 숨어 들었던 엄마는 피격을 당해 화상으로 죽고 어린 남매는 살아 남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도 장교였던 것 같다. 부족함없이 자라던 이들 남매에게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정말이지 참담하다. 그 극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들은 어느 영화,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느낌이 비슷하게 다가온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으나 아직까지도 깊은 감동의 선율을 떨쳐내지 못하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아버지 로베르토 베니니가 아들 죠슈아에게 보여주었던 놀이로써의 전쟁이미지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 온다. 잡혀가는 아버지를 숨어서 지켜보던 아들 죠슈아.. 어린 죠슈아가 행여 밖으로 나올까봐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그 순간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남매가 겪어내야 할 전쟁의 참상보다는 이웃들의 정에 관해 포커스가 맞춰진 듯한 이 영화는 내내 안타까움에 가슴 조이게 한다. 엄마를 화장시키고 그 뼈를 담은 항아리를 숨겨둔 채 숙모의 집으로 들어가던 세이타의 모습은 서글프다. 어린 남매를 떠맡고 이미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숙모.. 단순히 양식을 얻기 위해서 그 아이들에게 남은 유품을 팔아야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숙모와 어린 남매의 관계는 거짓됨과 과장됨없이 처리된 듯하여 보기에 안스럽기까지 하다. 엄마의 기모노에 베인 엄마의 냄새를 잃어버리기 싫어 굳이 엄마의 기모노만큼은 가져가지 말라고 울며 떼를 쓰던 세츠코.. 아직 어린 세츠코의 가슴속에서 얼만큼의 시간동안 그 엄마는 살아줄까? 아마도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날마다 얼굴을 마주쳐야 할 이웃이라는 이유보다도, 같은 피붙이라는 이유보다도 더 간절했던 것은 내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을게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이 온다한들 확실하게 드러나는 그 진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린 남매의 힘겨운 여정보다는 살아야 한다는 저마다의 의식이 너무도 서글펐다. 어린 동생 세츠코를 위하여 공습 경보가 울리는 마을을 향해 달려가던 세이타와 그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마을을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되던 장면속에는 삶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숨어 있었다. 그 선택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동생의 배고픔뿐이었을까? 세이타는 자신의 배고픔조차도 힘겨웠을 것이다. 남의 밭에 들어가 훔치다가 주인에게 잡혀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일본 순사에게로 끌려가는 세이타의 뒤를 따르는 어린 동생 세츠코.. 이 영화를 만든 작가는 아마도 그런 마음을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훔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이 아이에게 행한 폭력은 어찌할 것이냐고 되묻던 일본 순사의 말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그 비장함이라니... 굶주림으로 죽은 동생 세츠코를 불에 태우고 그 뼈를 사탕통에 담아 간직했던 세이타도 고베시의 한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저 많은 죽음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오래전 친척과 이웃의 질시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굴로 피신해왔을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해 병속에 담았던 반딧불.. 아침이 되어 그 반딧불들의 묘를 동굴앞에 만들어 주었던 세츠코.. 돌아갔을까? 세츠코도 세이타도 그 반딧불이 되어 자신이 가야할  길고 되돌아 간 것일까?

이건 뭐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외치고 있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내가 뱉어낸 말이다. 그랬구나..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속마음은 따로 있었구나 싶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도 피해잡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왜지? 영화를 같이 보았던 내 엄마가 한말씀 하신다. 우리는 더했다, 이놈덜아.. 나는 엄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쟁의 참상을 겪지 못한 세대였기에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면 억지스러울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똑같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도 어디나 똑같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너무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이 영화를 통해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떠들어대는 그 속마음이야 알아챘던 말건, 어찌되었든 우리는 주변의 무관심속에서 사라져가는 그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본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기획했다는 것 하나.. 물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가 기획에 참여했다면 남겨지는 여운이 많을거라는 기대감때문이었다. 사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은 많다. 하지만 어떤 작품을 선택할 때의 기준점은 나만의 몫일테니까 망설임없이 선택했고 또한 평들이 참 좋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접근했던 작품이라는 느낌을 전해 받았다. 그랬던 까닭인지는 몰라도 애니메이션속에서 안개처럼 다가오는 환상적인 묘미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너무 사실적인 드라마였다는 말도 될테지만 말이다. 인간들의 택지개발로 인하여 없어져가는 자연의 공간들.. 그 공간들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너구리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무지막지한 개발을 막아낼 수 있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들의 숲에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TV였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재미있는 발상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매스컴 혹은 정보의 포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그 순간을 즐길 줄 알았던 너구리들이 트랙터를 앞세운 채 자신들의 영역을 갉아먹는 인간들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너구리중에서도 가장 경험이 많을 것 같은 할머니와 스님을 선두로 그들은 회의끝에 정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변신술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변신술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이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변신술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변신술의 과정에서나 너구리들의 습성을 보여주는 일상적인 장면에서 아주 지극히 일본다운 맛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간혹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캐릭터들이 보여 웃음을 짓게도 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각인되어진 일본적이라는 느낌은 바로 현실적이라는 거였다. 그들은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해도 결코 자신들이 발ㄹ을 붙이고 있는 이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너구리가 너구리만의 생각보다는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점이다. 그들만의 전쟁이 시작되어졌다.

누가, 왜 저들을 그토록까지 화나게 했는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평화롭게 살아간 저들에게 왜 그토록이나 힘겨운 전쟁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점은 이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일이다. 삶의 터전이 좁아지고 먹을 것이 없어진 너구리들이 택할 수 있었던 차선책은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인간들의 몫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실속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동물이 맘놓고 지나갈 수 없게 도로를 만들어놓고 동물길을 따로이 만들어 주었다고 큰소리친들, 동물이 살아가던 땅을 파헤쳐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놓은 채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작은 공원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들 그런 것들이 저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은 너구리들이 늘어났고, 굶주림에 쫓겨 인간이 버리는 음식쓰레기를 먹기 시작한 그들에게 진정 어떤 것이 행복한 길인가는 그들보다도 우리가 먼저 아는 정답인 것이다.

누가 저들에게 저 평화로운 숲을 되돌려주어 저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그들은 변신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세상속에 묻혀 살아가게 되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아픔이 남겨질 것이다. 그들은 묻고 있었다.  둔갑술에 능한 여우나 너구리들은 변신술로 살아남았지만 하얀 토기와 족제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사라진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아마도 그 해답은 인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주 심각한 상황을 해학적으로 그리려다보니 다소 무리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는 현실적인 우리의 일상과 겹쳐져 보고 싶지 않아도 확실하게 보인다.  애니메이션이지만 볼거리가 많았다. 단편적이었지만 일본의 한 면을 다양한 터치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까지도 돈으로 보인다는 인간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순간에도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동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 /아이비생각

<이미지는 영화포스터에서 빌려왔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보아주지 않아도 소롯이 제 몫을 다하는 아름다움의 미학..
세상엔 아름다워야 할 것들도 참 많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오롯이 제 몫을 다할 때의 아름다움..

살다보면 가끔씩 아름다워야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못함을 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예고없이 마주치는 아름다움의 의미앞에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아름다움이
때로는 삶의 여정속에서 퇴색되어진 채 버려질 때가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한다.
어린 아이들마져 동심을 잃어가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내는게 그리 녹녹치만은 않을것이기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 웃고 말아야지 한다.
저 어린 아이들의 색동옷속에 묻혀진 잃어버린 날의 추억은 어디로 갔을까?
무심하게 그저 무의식의 순간속에서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그 무엇..
그 무엇떄문에 오늘 나의 가슴이 오후 내내 서늘했다.
아직은 저마다의 욕심이 아름답게 보여지지 않았던 탓이다.

꼭두각시춤이 시작되었을 때 사진기를 들이대며 운동장으로 몰려가던 학부모들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몇번씩이나 반복되어지던 말, 운동장밖으로 나가 주세요 아이들의 안전이 우려됩니다.... 겨우 몇걸음 움직였을 뿐이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할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웃고 말뿐..../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