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할까? 이렇게 물으면 신에 대한 존재의 有無가 약간은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우주속에 신은 존재할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건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 이런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고 나만의 느낌일 뿐이니 오해마시라.. 왜 이런 말을 꺼냈는가하면 내가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 책 <파이이야기>의 서두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모습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묘한 이름을 가진 소년은 그 철자의 발음때문에 이름으로 인한 곤혹스러움을 겪게 되지만 파이 파텔, 덧붙여 π=3.14라는 애칭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한고비를 넘어간다. 소설속의 배경은 인도. 그다지 잘사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사는 것도 아닌 파이의 부모님은 동물원을 경영한다.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일상생활을 보면서 자라나는 파이에게는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특성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울림의 미학이 여기에 숨어 있다. 우리가 모르는 동물들만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어느날의 여행길에서 똑같이 생긴 세개의 언덕을 오르며 파이에게 다가왔던 신의 존재는 놀라웠다.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귀결시키는 기독교의 신에 대해 묘한 반항심을 느끼면서도 그 조용함을 잉태한 평안이 좋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나 빵가게 주인을 통해 이슬람교를 만난다.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라는 말과 함께. 그를 통해 본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곳 자체에서 빠르고, 필요한 동작만 하는 그들의 믿음이었다. 자아가 알라와 만나는 순간을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그렇게 알라신은 들어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캐나다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 사랑 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던 성모 마리아를 보면서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해서 세번째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단지 가슴 떨리는 기쁨과 평안으로 다가왔던 신의 이름은 세개였지만 그가 받아들였던 신은 오직 하나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마음속에 머무는 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와 신의 만남을 세상사람들은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했던 대답은 정말이지 멋졌다.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랬기 때문이었을것이다. 단지 신을 사랑하고 싶었을 뿐인 소년이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아 벵골 호랑이 한마리와 장장 7개월을 바다위에서 살아냈던 것은.. 처음 구명보트에 함께 남겨진 것은 파이와 하이에나와 얼룩말과 나중에 바나나배를 타고 왔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 호랑이 이렇게 다섯이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는 하이에나에 의해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죽어갔고 그 하이에나는 벵골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기싸움은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동물원에서 자랐던 파이의 어린시절 경력을 상황에 맞춰본다면 그다지 생뚱맞은 모습은 아닌 듯 하다. 먹이가 될 수도 있는 작은 소년으로 인하여 먹이를 조달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벵골호랑이의 선택은 탁월했다. 함께 해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살고 싶다는 의지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었을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작은 구명보트와 파이가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던 뗏목이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이었다. 아래는 물고기와 상어들의 세상이었고 구명보트의 한쪽은 벵골호랑이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현명했다. 구명보트의 모든 것들로부터 삶의 방식을 터득해나가기 시작했고, 벵골호랑이와의 기싸움에서조차 더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사람이었지만 동물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속의 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해주었던 벵골호랑이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227일간을 버텨냈던 그의 조난생활은 지루하지가 않았다. 아니 스스로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한정된 배경속에서 엮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 좁은 공간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벵골호랑이와 작은 소년의 어울림이 묘하게 따스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잠시 멈췄던 해초섬에서의 짧은 휴식조차도 그들을 떼어놓지는 못했다. 구명보트의 생활에서 풀려나 육지를 밟았을 때 아무런 인사도 없이 훌쩍 밀림속으로 떠나갔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인사도 없이 떠났다고 눈물짓던 파이의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파이는 구조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물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탔던 배는 왜 침몰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벵골호랑이와 함께 했던 파이의 모든 시간들을. 해초섬에서 식충식물을 만났던 그 모든 사실들을. 소년 파이가 할 수 있었던 말과 사람들이 파이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무도 달랐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어째서 작은 소년의 구명보트위 생활보다도 배가 침몰했던 이유만을 듣고 싶어했던 것일까? 파이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말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소년 파이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는거라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거라고.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무덤덤한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거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안일성을 꼬집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렸다.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만 알면 된다는 식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편협된 마음을 꼬집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입부분에서 살짝 엇나가고 싶었었다. 약간은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그 도입부분의 파이 이야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깊은 뜻이야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길을 가다가도 굳게 닫혀진 종교건물의 출입문을 보게되면 '저들만의 신이 저들만의 공간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활짝 열리지 못하는 종교, 형식의 너울을 뒤집어 쓴채 닫혀진 그들의 종교는 불쌍하다. 파이처럼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신을 사랑하면 안되는 것일까?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 이라는 이 책속의 말에 백프로 공감한다. 그런 자들이 정작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며 단호하게 그 아픔을 물리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겉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신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과 분노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말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바깥의 악은 내면에서 풀려나간 악인 것을... 선을 위한 싸움터는 공개적인 싸움장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는 작은 공터인 것을... 96쪽의 이 말은 내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파이와 벵골 호랑이의 짧지않은 동거속에서 내가 찾아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보인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어울림의 아름다움과 서로 엉킨 마음이 만들어냈던 따스함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여운이 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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