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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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설에 재도전한다는 것은 아마도 <변신>을 읽었다는 말일게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었다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던 작품 <변신>.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제작가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유대인 부모를 두었고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법학은 아버지의 소망이었을 뿐. 법관이나 변호사가 될 마음이 없었기에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오랜동안을 국영기업 법률고문관으로 죽기 2년전까지 일을 했다.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이유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보람이 있었고 일찍 퇴근해 근무조건이 좋았던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이기도 할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은 미완성이 많았고 그나마도 자신이 죽으면 남은 원고를 파기해 달라는 부탁을 친구에게 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친구가 미출간 원고들을 출판하게 되어 결실을 이루었다 한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안을 깊이 통찰했다는 그의 문학세계... 내가 들여다보기엔 너무나도 깊었던 것 같다. 

K는 성의 측량사로 초빙이 되어 밤늦게 마을에 도착하지만 그 마을은 어째 좀 수상하다. 그를 초빙했다던 성은 어둠과 안개에 쌓여 있을뿐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뭔가 수상하다. 간신히 여관을 얻어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숙박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잠을 깨우기도 하고 성에 전화를 걸어 그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기도 한다. 백작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숙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의 조수로 배당되어진 두 명의 사내와 마을사람들, 그리고 여관집 주인과의 불협화음, 그 와중에 만난 주점 여급인 프리다와의 사랑이야기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K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따라잡을 수 없이 난해했던 K의 여정이 나를 헤매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령같은 마을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찌보면 만나기 힘든 관리들의 모습을 통하여 관리계급의 부패를 꼬집는 것 같기도 하고, 주점 여급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마져도 무언가 비틀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며 간신히 만나게 되는 하급관리조차 그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남겨주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런 와중에 주점 여급 프리다와의 사랑도 어긋나버리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시간만 많이 흘러갔다. K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책읽는 시간이 흘러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달려 마지막 부분 '카프카의 생애와 성의 해설' 편까지 와서야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우선은 그가 살아왔던 일생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 작품속에 녹아있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결국은 이 책속에 그의 생애가 담겨있다는 말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이지 읽기에 힘겨운 책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들의 불공정하고 무자비함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성의 관리 소르티니의 요구를 거절한 마을 아가씨 아말리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은 왠지 서글프다. 그들 자신들조차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단지 관리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녀 가족과 가까이하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지함이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의 불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욕심이 부합되어진 이치일 뿐이다. 주점 여급 프리다가 클람이라는 관리에 대한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신분상승이나 부를 얻기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성의 측량사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아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런지...

성... 그 성이 안고 있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가 갇혀 사는 우리만의 성. 누구나 하나씩은 가슴속에 쌓았을 자신만의 성. 그 성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깊이 팠거나 너무 높지는 않은지... 미완성의 작품이라서일까?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 뒷이야기가 있다해도 나는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다. <변신>을 읽고 난 후 카프카의 작품을 다시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은 욕심이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감상문을 쓰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도 내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답답하기도 하고.. 무언가 꽉 막혀버린 듯한 그런 느낌.. 우리 삶의 모습 역시 미완성인 때문일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왠지 부끄럽다. 왠지 부질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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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기사단의 검
폴 크리스토퍼 지음, 전행선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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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세상은 이분법인가? 화이트 템플기사단과 블랙 템플기사단이라고 한다. 밝히고자하는 이가 있다면 숨기고자하는 이가 있고,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키고자하는 자가 있다. 쫓기는 자가 있다면 쫓는자도 있을 것이고 산자가 있다면 죽은자도 있을 것이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이 있을테고, 과거가 있었으니 미래도 있을테다. 그리고 또 사실이 있다면 거짓도 있을 터... 템플기사단 혹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소재는 수도없이 많다. 하지만 작자는 말한다. <템플기사단의 검>에는 매우 정확한 조사자료가 이용되었다고. 그러니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고. 사실 팩션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섬세한 상상을 입히는 것. 그런것이 팩션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재미있냐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떠올렸다. 아니 떠올렸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크게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기에 아직도 그 장면들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글의 구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말이 더 솔직한 말일게다. 종교기호학 교수였던 랭던과 암호전문가인 손녀 소피가 <다빈치코드>를 이끌어갔다면, 여기서의 주인공 홀리데이 박사는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헨리의 손녀이자 홀리데이의 조카인 페기는 사진작가이다. <다빈치코드>가 살인을 동기로 옛 과거를 쫓아갔다면 <템플기사단의 검>에서는 죽은자가 숨겨두었던 검 하나가 옛 과거를 쫓아가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빈치코드> 뿐일까? <인디아나 존스>나 <미이라>와 같은 영화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왔다. 흥미롭냐고? 잘 짜여진 구성은 그랬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또하나의 <인디아나 존스>를 만든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면 그다지 흥미로울 것 없는 소재였다는 말도 되겠다. 뭔가에 짜맞춘듯이 척척 들어맞게 흘러가고 있는 이야기의 흐름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다빈치코드>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남녀가 한팀이 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 때문이었겠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풍기는 뉘앙스가 너무도 비슷하다. 신템플기사단. 그 역사의 고리를 연결하기 위해 선택되어진 또하나의 인물. 그 닥터 홀리데이가 이미 정해진 루트를 밟아가고 있었다는 건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시원하게 풀린다. 마치도 화살표 방향처럼 주인공에게 하나씩 건네지는 메세지와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방해하기보다는 도우미의 역할로 보여졌던 까닭이다. 결국 비밀의 끝에 다다랐지만 그에게 남겨진 말은 시작과 똑같은 거였다. 비밀이 너무 많다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뭐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얄팍한 함정처럼 보여지던 브로드벤트 변호사라는 존재다. 초반에 등장해 뭔가 쥐고 있을것처럼 보여지던 그 인물은 약간 허탈하다.

종교와 정치가 교묘하게 서로를 이용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어 보인다. 타락된 모습의 대표급이 바로 정치와 종교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사실 그 종교를 제대로 된 종교로 바라보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을 하느냐고 우습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종교적인 모습처럼 가식적이고 거짓된 것은 아마 없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처럼 종교가 정치를 버리고 정치가 종교를 버리는 그런 순간이 또 오지 말란 법은 없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하고 생각했었던 프리메이슨이나 템플기사단의 후예가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일이니 그리 놀랄일도 아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아니 공개될 수 없는 복음서가 이 땅위에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은 공개되어서는 안되는 거라는 이색적인 논리에도 어느정도는 수긍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해도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충격과 충돌이 존재할테니 하는 말이다. 책속에서 닥터 홀리데이에게 전해졌던 그 마지막 말 "비밀이 너무 많아" 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는 메세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덩치만 커져가는 종교건물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은 무엇이 두려워 저토록이나 두터운 벽을 둘러쳐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려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형식과 허울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그려본다.

유독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가장 마지막에 있던 작가노트였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싶어서.. 그만큼 이 책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세상속에 많이 떠돈다는 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도 대화를 통해 언급하고 있듯이 자판기만 두드려대면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무작위로 쏟아져나오는 세상이다보니 그렇게 말 할 만도 했겠다 싶어진다.  작가가 어느정도는 사실에 입각하여 쓴 글이라고 했던 말처럼 책속의 주인공이 템플기사단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듯 싶다.  템플기사단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새롭게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여하튼 속도감을 놓치지 않았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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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잡학상식
손영란, 조규미 지음, 김영진 일러스트 / 삼양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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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가장 먼저 목차를 살핀다. 우와~ 많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정말 잡학사전이군! 할 만하다. 인체와 질병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늘 먹는 음식에 관한 것들, 과학이나 우주에 관한 것들, 동식물에 관한 것들, 문화나 유래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고 있음이다. 상식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사항들도 꽤나 많다. 말처럼 상식이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거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꽤나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우리 모두가 이런 잡학 상식 정도는 알고 있는만큼 도움이 되긴 하겠다. 지금은 모르는 게 약인 것보다는 아는 게 힘이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짤막 짤막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면서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는 그림들도 재미있다. 부러 재미있게 그린 것 같은데 아이들이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 보인다.

'키메라 혈액형'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한 사람이 두가지 혈액형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인데 글쎄다... 실제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짬뽕 좋아하는 사람이 꽤나 많을게다. 그런데 그 짬뽕의 원래 의미가 "밥 먹었니?" 묻는 말이었단다. 중국말로 "밥 먹었니?" 라는 '츠판'의 사투리였던 '샤퐁'이라는 말을  일본사람들이 '찬폰'으로 알아들었고 그 '찬폰'이 한국으로 오면서 '짬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호떡 집에 불났다는 말처럼 우리가 흔히 쓰는 속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실려있다. 정신없이 시끄러운 걸 보면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을 쓰지만 실제로도 호떡집에 불이 났었다는 '만보산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농민과 중국농민이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중국 상점이나 호떡집들이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던 사건이란다. 깨물면 꿀물 흐르는 호떡의 달콤함속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을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이 자겸의 물고기라고 하는 굴비에 대한 일화도 재미있다.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 굴비였다니 하는 말이다.

햄버거의 '햄'은 '함부르크'의 앞 글자에서 나왔다거나, 마카로니는 이탈리아어로 '와, 맛있다'라는 뜻으로 '와, 맛있다 (마 카로니!)"가 마카로니로 변했다는 말, 더구나 마카로니는 이탈리아가 아닌 중국의 음식이었다는 걸 알고는 정말? 하고 눈이 동그래지기도 했다. 키위의 원래 이름은 키위가 아니었다는 걸 아는가? 뉴질랜드가 종자를 도입, 개량하면서 자신들의 국조(國鳥)인 키위새의 이름에서 '키위'를 따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하이힐이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 나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테지만 그 하이힐을 맨처음 신었던 것이 남성이라는 말은 처음 알게 되었다. 키 작은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남성용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반신반의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다면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겠다.  빨간색 옷을 입고 빨간색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면? 아마도 믿고 싶지 않을게다. 하지만 사실이다. 1931년 코카콜라는 추운 겨울에도 콜라를 팔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콜라를 마시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디자인하게 되었는데 코카콜라 회사의 상표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산타클로스의 옷으로, 코카콜라의 풍부한 거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흰 수염을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고해서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동심을 심어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마시라! 산타클로스의 모습만 그렇다는 것 뿐이니.. 알고 있듯이 산타클로스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태어난 인물이다. 터키 지방에 살았던 성 니콜라스 주교가 매년 12월 6일 어린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던 것이 산타클로스의 배경이다. 그 후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어 매년 12월 6일을 성 니콜라스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된 네덜란드인들에 의하여 성 니콜라스의 영어 발음인 산타클로스로 바뀌게 되었고 축제일도 12월 25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탄일이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 어떻게해서 그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대체 이 세상속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의미로 전해져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만큼은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익만을 위해 변질되어버리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만약에 당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적으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것 같은가? 아마도 인상을 쓰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나 안심하시라. 당신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적는다해도 무탈할테니.. 중국의 진시황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하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붉은 색이 온갖 좋은 의미를 다 가졌다고 생각한단다. 그런데 진시황이 그 좋은 의미의 색을 저 혼자만 쓰고 싶어서 누구도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고 만약 그것을 어길 경우 죽음을 면치 못했을테니 사람들은 당연히 붉은 색으로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하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쓴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욕심이 그토록이나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다. 그렇다해도 우리는 아마 붉은 색으로 자신의 이름쓰기를 꺼릴 것이다. 그만큼 이미 오래되어 굳어진 속설을 깬다는 것이 만만찮을테니... 쓴다고해도 그 꺼림직함을 이겨내기가 쉽진 않을테니..

음주운전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알래스카로 가라. 달팽이도 이빨이 있다, 무려 25,600개나!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소라는 걸 아시는지? 소나 양 염소같이 되새김질 하는 동물들이 뿜어내는 메탄의 양이 장난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메탄 발생량의 1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모두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동물이 무엇일까? 답은 지렁이다. 공룡과 함께 살았고 지독한 기후변화도 이겨냈으며 심지어 히로시마의 원폭속에서도 살아남은 식물이 있었다. 바로 은행나무다. 놀랍지 않은가? 일전에 읽었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처럼 거꾸로 나이를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태어나서 첫돌이 되면 예순살이 된다고 하니 그사람들은 딱 예순살까지만 사는 것일까? 이래저래 참 복잡 미묘한 것이 사람사는 일인것 같다. 지금까지 말했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라. 재미있고 유익한 그야말로 상식으로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어디 이것뿐일까?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욕심을 부리고 싶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보게 된다. 더 많은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상식을 전해주고 싶었을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상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알아두면 좋을 다양한 분야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다루어주고 있다. 한번쯤 읽어보아도 손해나지 않을 책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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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정벌레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9
S.S. 반 다인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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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추리소설에 푹 빠져 허우적거릴때가 있었다. 한번 빠져들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추리소설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그 치밀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시작하자마자 범인이 여기있소,라고 밝히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범인의 행방을 오리무중으로 몰아가는 작품도 있다. 어느것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그런데 가끔은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도무지 추리소설답지 않은 맛을 내고 있을 때는 당혹스럽다. 어디쯤에선가 추리소설의 긴박함을 찾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갔다가 내내 실망한적도 여러번 있다. 나 학창시절에는 애드거 알란 포우나 아가사 크리스티같은 작가의 작품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스릴 만점이다. 그 재미로 추리소설을 읽기도 하지만 함께 범인을 찾아나서는 그 여정 또한 괜찮은 여행이다. 미리 밝혀진 범인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쳐가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내가 추격자가 되어 누군가의 뒤를 밟고 있다는 그 느낌, 참 멋지다.  나에게는 지금 한창 유행하고 있는 환타지소설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며 그 유혹앞에 무너지기를 거부하고 싶지 않음이다. 

고전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된 것들. 하지만 그 오래된 것들속에는 우리 삶의 이치가 담겨있어 참 좋다. 작품 하나하나가 가벼운 재미만을 탐하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소홀히 대할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추리소설을 선택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빠져들었다. 치밀한 구성이 나를 긴장하게 했고 범인과 심리전을 벌이며 끝까지 쫓아가는 주인공 번스의 인내심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흔하지 않은 이집트신화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파괴와 재생의 여신 사크메트를 내세워 범죄를 계획했다는 것도 그렇고 죽은 사람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생전 진실의 무게를 가늠한다는 저승의 신 아누비스를 내세워 정의를 심판하는 것도 멋졌다. 한 노인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미스터리의 세계. 책장을 넘길때마다 펼쳐지는 범인과 추격자의 심리전이 만만찮다. 그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함정이 많은 까닭이다. 그 함정마져도 멋지게 드러내보이는 수법에 혀를 내두른다.

현재 있는 모든 것들은 애초에 이름이 없었다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형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만들어진 틀에 의해 자신들을 다시 만든다. 그래서 법의 정의조차도 때로는 범인을 감싸주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인간이 만든 허례와 허식으로 인하여 인간성이 말살되어버리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이건 아니라고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만들어진 것들에 꿰어 맞추다보니 진실이 죽어버리고 그 진실을 담고 있던 모든 것들은 살아도 숨을 쉬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다가왔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도 치밀하게 짜여져있던 범죄의 구성앞에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형식적인 법의 틀. 그 틀조차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범인의 치밀함앞에서 추격자 번스와 검사 매컴, 형사부장 히스는 아연실색, 법이라는 틀을 들이댄다면 더더욱 범인을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어쩌랴.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결연하게 심판을 내려준다. 정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현실적이지 않으나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신의 이름으로. 

처음 이 책을 접하면서 예외적이지 않게 제목만으로 나는 미리 한조각의 편견을 내세우고야 말았었다. 이집트 문화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피라미드 신전이라거나 파라오의 저주와 같은 유적 발굴과 같은 류의 사건현장이 배경일거라고. 그것을 빼놓고 이집트신화를 말한다는 건 왠지 용납되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조금은 그랬다. 유적발굴에 관한 소재가 있기는 했다. 그것이 범죄의 동기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추리소설속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인간의 이기심이라거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어설픈 감정들이 이 작품의 기초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랑과 욕망을 동시에 얻기 위해서 너무나도 치밀하게 짜여져 있던 범죄의 구성. 그러나 그 범죄를 감추기위한 방법이 치명적으로 다시 자신을 옭아매고 말았던거다. 지키고자했던 사랑과 욕망은 집착만으로는 지켜질 수 없는거라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한번 보게 된다. 통쾌한 승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읽었던 추리소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그 긴장감이 좋았다. 남들은 연말이라고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늦추지 못할수도 있고 어찌 생각하면 만사가 풀어져버리는 상황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중에 만난 이 소설은 자꾸 느슨해지려고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느낌표가 되어준 것 같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이집트신화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떠도는 이야기만으로 이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다.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추격자 번스의 인간적인 고뇌와 정의로운 심판이 나를 멋지게 휘어잡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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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싸부님 2 - 이외수 우화상자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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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 이것은 무엇으로 보이는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그림이다. 그리고나서 등장했던 우리들의 싸부님. 물에 비친 달속에 들어앉아 까만 올챙이와 선문답을 주고받던 그 그림. 글은 많지 않으나 글보다 더 많은 의미들이 가득했고, 등장인물이 많지 않으나 그곳에서 머뭇거리던 존재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맨처음 이 책을 보면서 나는 그 여백들이 참 좋았다. 하릴없이 이것저것 채워넣기보다는 나에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주었다는것이 고마웠다는 말이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벼운 그림과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작가의 그 역량에 압도되기도 했다. 선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 얼핏 보면 이건 뭐야? 할수도 있겠지만 짤막짤막한 대화속에서 내게 전해져오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책을 열면 바로 들려오는 작가의 한마디, 닫혀있는 당신의 마음부터 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고정관념도 버리십시오.... 어쩌면 당신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일수도 있으나 노하지는 마십시오...

원하나와 선하나로 만들어져 온 우주를 표현해내고 있는 하얀 올챙이가 바다를 꿈꾼다. 강원도 어느 산골의 작은 웅덩이에서부터 시작되는 우주. 어느 청개구리 부부 사이에서 513남 41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돌연변이 하얀 올챙이.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특별할 것 없이 태어난 우리의 하얀 올챙이일수도 있겠다. 그가 바다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다를 아십니까? 물으며 길을 가는 하얀 올챙이가 만나는 존재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실, 눈앞의 삶에만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구나 하얀 올챙이처럼 꿈을 꾸고 있지만 누구나 하얀 올챙이처럼 꿈을 찾아 길을 떠나지는 못한다. 그러고보면 하얀 올챙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꿈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보라고 숙제를 내주시는 것 같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힘겹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냐고.

하얀 올챙이 한마리의 시선과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투영되어지는 삶의 모습은 정말 처절하다. 넘기는 책속에서 환영처럼 보여지는 수많은 인간군상들.. 바늘로 찌르듯이 콕콕 와닿는다. 어려운듯하면서도 어렵지않게 들려주는 작가와의 선문답. 우습게 생각되어질 수도 있는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어느날 갑짜기 나타난 까만올챙이 한마리가 싸부님! 하고 부르는 그 장면이다. 왜 사람들은 아이들을 경망스럽게 키우려고 들까요? 짱구, 새우깡, 꼬깔콘, 꿀꽈배기, 쌍쌍바, 짜장면, 빼빼로... 애들이 먹는 것들이 모두 경망스러운 된소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던 그 장면... 작가는 거기에 이렇게 마음을 달아놓았다.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니라. 마음이 각박하면 자연히 되고 거센 발음을 자주 내뱉게 되지. 너는 부디 네 나이에 어울리는 말씨를 쓰도록 하여라..네, 싸부님! (-251-252쪽) 어쩌면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크고 높아서 우리도 어쩌지 못하는 도 (도(刀) 는 칼이다!) 를 마음속에 품으려고 하기 이전에 우리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면 안되는거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1편과 2편으로 나뉘어져 있어 2편에 대해 내심 기대감이 부풀었다. ○... 텅 비어 있다고 말하지 말라 ●... 텅 비어 있는 것은 곧 가득 차 있는 것이다. ⊙... 그대 스스로 이 안으로 들어가보라. 견고한 관념의 갑옷부터 벗어던지고... 철저하게 버리라한다. 우리들의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을. 무엇이고 애초에 이름지어진 것은 없는데 인간이 이름을 지어 그것의 틀을 만들고 그것의 범위를 정하였다고. 달팽이의 느림을 비웃지 말며,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보다 못한 것이 인간이 아니겠느냐고. 불신(不信)시대와 불신(不神)시대를 살아가고 있어 모두 다 믿을 수 없다는 작가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불만투성이 물고기와 한심이, 못난이, 옥떨메, 얼간이, 바보라고 못생긴 자신의 모습을 탓하는 모든 물고기들에게 맞는 말이니 웃음으로 화답해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던 뚝지의 대답을 들으며 한번 더 나를 생각해보게 된다. 

신(神)이 마음안에 있듯 성전도 마음 안에 있을 뿐이라던 작가의 말씀에 공감한다. 인간이 지어낸 이름으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 창조주는 이미 우리안에 있었던 것이다. ○●... 텅 비어 있다고 말하지 말라 텅 비어 있는 것은 곧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가득 차 있다고 말하지 말라 가득 차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 다른 듯 보이지만 본디 하나인 것을... 이름앞에 금(金)자가 붙어 있다고 제가 무엇이라도 되는양 부푼 탐욕과 툭 불거진 이기심과 아부근성을 감추지 못하고 항상 꼬리를 흔들어대며 우쭐거리는 금붕어는 되지 말지어다. 아주 흔한것들속에서 아주 귀한 것을 발견할 줄 아는 것도, 아주 작은 것들속에서 아주 큰 것을 발견할 줄 아는 것도 모두가 내 안에 있음이다. 눈 앞의 현실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하얀 올챙이 한마리와 물고기들이 나누었던 대화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며 작가 역시 비움의 철학을 우리에게 말하며 끝을 맺는다. 마음을 비우라고, 그래서 삶의 여정을 편하게 가야한다고...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것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멀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내게 있어서 이 책은 정말이지 다시 만나 좋은 것중 으뜸이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벌써 십년도 넘었을텐데 다시 나온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설레임을 어찌 말로 다할까 싶기도 하고... 그 옛날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작은 책도 아니었었다. 아이들 동화책처럼 커다란 크기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던 내게 뭐 그런 책을 다 사냐고 했던 지인의 말이 떠올라 피식거리며 웃어보기도 했다. 그랬던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는데 아마도 내게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로 간직하고 싶었던 책을 빌려주고 돌아오지 않았던 때의 그 상실감이라니... 그래서일까?  생긴모양에서 옛 맛을 찾을 수는 없었어도 나를 반겨주었던 올챙이 사부님의 말씀은 여전하게 나를 감동시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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