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 - 진보의 시선으로 바라본 2010 한국사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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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과연 선진국일까? 선진국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GDP/GNP, 사회지표, 국민총행복, OECE사회지표, GPI, 삶의 질... 따위의 복잡한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우리가 처한 삶에 얼마나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물론 각자의 만족도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의 미래에 얼만큼의 관심과 얼만큼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단순하다. 간단하게 말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일에 무관심으로 일관되어진 내 삶의 모습에 한번쯤은 채찍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유행어처럼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속에서 내가 이렇다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개천에서 용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양극화 현상이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현실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인양 흘러가고 있는 이 사회의 모순이 싫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더 마음만 타들어간다.

변해가는 세계정세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한국경제의 탈출구가 무엇이 되었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듯 하여 하는 말이기도 하다. 단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것, 체감온도로 나를 바짝 죄어오는 것, 예를 들자면 고용위기라거나 가계부채라거나 교육개혁에 관한 대안은 있는가, 내가 나이든 후에라도 살 만한 세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회복지는 어떻게 변화되어져야 하는가..라는 점들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망치를 들고 문을 때려부수고 하는 지금의 정치만 보더라도 그들이 이끌어내야 할 많은 것들을 차라리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2010년, 올해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노인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측되어진 일이고,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물밀듯이 밀려와 많은 문제가 발생될 것이라는 것 또한 이미 예측되어졌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없는 듯 하다.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나 부양해야 할 몫이 1인당 6명정도가 될 것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예측과 통계만 있을 뿐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온갖 말들만 풍선처럼 떠다니는 세상속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무조건 소비를 줄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이 다 오르는데 남편 월급과 아이 성적만 오르지 않는다는 우스개소리가 단지 우스개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살림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된다해도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을 것 같다. 나조차도 가장 먼저 냉혹하게 와닿는 교육비 문제가 장난이 아닌 까닭이다. 사교육비를 없앤다고 내놓는 정책마다 오히려 사교육을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고 있으니 말해 무얼할까? 요즘 한참 시끄러운 '취업후 학자금 상환제'만 보더라도 단순히 정치적인 이론일 뿐이라는 말에 나는 공감한다. 미래의 빚쟁이들만 무작위로 쏟아낼 것이다. 지금도 심각한 고용문제는 그때가면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질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저 하나도 살기 힘들텐데 결혼은 생각도 못할 것이고 설사 결혼한다해도 사는 일에 치여 아이는 당연히 뒷전일 것이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교육비의 희생양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잊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해도 현실적으로 변화되지 않는한, 그리고 지속적인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그들 귀에는 소 귀에 경읽기가 될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로써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나는 싫다. 말 많았던 일제고사의 결과를 보면서 무엇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전국등수... 과연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숫자일지...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먼 느낌으로 다가설 것이다. 요즘 말로 나는 낀세대에 속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마지막 줄에 내가 서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노후가 엄청나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고, 남편과 나는 늙어 힘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막막하기조차 하다. 몇 개의 보험을 들어둔다 한들, 몇 푼의 저축을 하고 있다한들 오래 살기만을 지향하는 지금의 세태에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내용도 없이 창의적인 교육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조금더 실용적인 교육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이라는 공룡에게 의미없이 아이들을 제물로 갖다 바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살려 공부할 아이에게는 좀 더 깊이 공부할 수 있게, 사회에 일찍 진출 할 아이에게는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다. 흔한 말로 발에 치이는 게 대학생이고 그 덕에 등골 휘는 건 부모들이다. 무슨 공장의 물품마냥 쏟아져나오는 대졸자들은 그야말로 갈 곳이 없다. 그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고학력자들을 양성했으면 그 역량을 살 곳도 마련되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국민질서의식 수준이 조사했던 30개국중에서 우리나라가 27위였다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말뿐인 고학력, 말뿐인 교육개정이 아닐수가 없다. 우리보다 나은 나라들조차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개혁을 추진중이라 한다. 하물며 인적자원 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야 말로 가장 시급하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 교육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가계부채는 단지 최근 몇 년 사이의 추세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근원적 문제라는 말이 깊이 와 닿는다. 사실 사회정책에 있어 이런저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핵심을 피해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것처럼 보여진다는 거다. 고용문제나 여성의 사회진출, 육아문제, 교육비지출등 무엇이 문제인지를 그들이 몰라서 안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것이다.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장경제의 원칙에만 매달리다보니 겉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는 대안들만 내세우며 뒤로 숨기에만 급급하다.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저라는 말이 안고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많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에는 양만 많이 주면 좋아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맛을 따지는 세상으로 변했다. 아무리 많은 양을 줘도 맛없으면 안먹는다는 말이다. 양적수준보다는 질적수준에 더 많은 의의를 두는 세상으로, 보여지는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충실한 세상으로 하루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 경제성장률이나 국민소득이라는 거창한 말로 우리의 실생활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답답해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했다. 이 책에서 다루어주었던 것처럼 2010년 지방선거는 한국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회의적으로 보여지던 책속의 말처럼 정치를 모르는 나의 느낌도 회의적이다. 실속없는 정책들이 날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 빚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웬만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쉴새없이 들려오는 광고의 외침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게 쓸 돈이 없어서라는 말도 되겠지만 이제 우리의 의식도 어느정도는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사회의 흐름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일테니 말이다. 책의 내용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읽긴 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어 좋았던 시간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겠지만 이렇게 우리의 실생활속에 파고드는 경제지침서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싫은 소리도 과감하게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용기있는 외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말로 내세우는 이론을 근거로 예측하기 보다, 단순한 통계지수를 내세우기 보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제지침서가 필요한 듯 하다. 무슨 경제학 박사가 될 것도 아닌데... 나 살기도 바빠 그런데 신경쓸 시간도 없는데... 싶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가장 먼저 나부터 달라져야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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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매튜 메이 지음, 박세연 옮김 / 살림Biz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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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한 남자의 재킷을 열고 옷깃속에 얼굴을 감춘다. 그리고 잠시 뒤에 살짝 얼굴을 내밀어 달콤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행복한 여자의 미소만 보여줄 뿐이다. 말도 필요없다. 어떤 말이나 글로도 여자의 달콤한 행복을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여자의 머리결을 어루만지며 지나갈 때 딱 한마디 할 뿐이다. 00쵸코렛...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광고중에서 가장 멋드러진 광고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쵸코렛 광고를 선택할 것이다. 쵸코렛의 달콤함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또한 느끼게끔 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거기에는 생략의 묘미가 있었고 여백의 미가 있었다. 적어도 광고라면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끔은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은채 온통 다 보여주며 당신은 그저 이런게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식의 광고가 먹힐 때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삼성의 광고를 참 좋아한다. 그리고 참 잘 만들어진 이미라고 후한 점수를 준다. 상투적인 인기 배우들을 쓰지 않고, 뻔한 문구와 대사를 넣지않아도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것이 참 괜찮다. 그런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한쪽이 따스해져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또하나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생뚱맞게 왠 광고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책의 제목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광고를 생각했었다.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끝도없이 머리띠를 졸라 맬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했었다는 말이다.

가장 최근에 배꼽을 잡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졌던 광고를 생각해본다면  show가 아닐까 싶다. 난데없이 사람들 앞에서 웃기는 모양새로 그야말로 쇼를 하던 그 장면을 보면서 저건 뭐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그 광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몇 번을 반복하여 보여준 뒤에 나는 누구입니다,하면서 나타나는 기법도 꽤나 괜찮게 다가오는 광고의 기법인 듯 하다. 숨겨진 것을 찾아내기 위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디어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우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아한 아이디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사전에서 찾아보자면 우아하다는 말은 고상하고 기품이 있으며 아름답다는 뜻으로 나온다. 그 말 자체도 참 난해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라 아이디어, 즉 생각이 우아함을 품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더 얼만큼이나 사람들의 감성속에 혹은 이성속에 머물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크게 나누어진 장을 만날 때마다 눈길을 끄는 그림이 보인다. 2/3만 보이는 나비인데 그 나머지는 뒷쪽에 숨겨져 있다. 나비 그림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이 책속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아한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법칙이 필요한 것일까?  첫째가 대칭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가 여백의 유혹이고 세번째가 생략의 법칙이라고 나온다. 두번째 여백의 유혹이나 세번째 생략의 법칙이 안겨주는 의미는 내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실제적으로도 내가 끌리는 아이디어 또한 그런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는'것이 '하지않는' 것보다 중요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27쪽) 는 책속의 말에 백프로 공감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해야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처럼 복잡하게 살아가다보니 '비어있는 듯한', 조금은 '덜 채워진 듯한' 이라는 컨셉이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들의 뇌 자체가 너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논피니토 기법이나 스푸마토 기법만 보더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불확실성과 애매호모함의 효과를 극적으로 활용해 보는이로 하여금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기법.. 사람들에게 '안개처럼 사라지는' 느낌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윤곽을 없애는 방법'을 구사해야한다는 정의를 보면서 내 짧은 소견으로는 이런 가정을 하게 된다. 인간은 채워진 것보다는 자신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완벽해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열심히 외치고 있는 '내려놓음'이나 '비움'의 정의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책속에서 마주쳤던 '축복받은 무지의 효과'라는 말이 참 흥미롭게 다가온다.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던 제품보다도 약간의 정보만을 주었던 제품에 대하여 사람들이 좀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실험결과는 정말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호기심! 호기심은 인간에게 있어 알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그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한다면 많은 정보를 주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채워넣기'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려놓음'이나 '비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win-win 전략인 셈이다.

결국 말만 '우아'하게 했을 뿐이지 사람들의 헛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전략이라는 말과 다를게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글의 맥락을 찾아내지 못하고 글자만 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을 넘기면서 이내 책속으로 빠져들었다. 성공한 사람들, 화가나 예술가 혹은 스포츠선수들의 예를 들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방법속에서 '우아'하다는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사람들이나 거기에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필요한 것이 '채워넣기'위한 '내려놓음'이나 '비움'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고리가 아닌가 싶다. 순환의 고리! 이 책에서는 말한다. 우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복잡함을 버려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당신에게는 숙제라고. 오래 고민하기 보다는 즉시 반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기억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책을 다 읽고나니 한 권의 심리학을 읽고 난 기분이다. 자신이 '믿는'대로만 '본다'는 사람들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파헤져진 그런 느낌이랄까? 마음 다스리기가 필요하다는 말로써 결론을 맺는 것이 왠지 생뚱맞기는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 결론에서 말하고 있는 명상수련이나 뉴로피드백 훈련 역시 마음 다스리기가 관점인 것만 보더라도 책속에서 말했던 '그만두기'는 곧 '내려놓음'이나 '비움'과 일맥상통하지 싶다.

우아해지고 싶다면 여유의 유혹에 넘어가고 생략의 법칙에 충실하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 이 책은 옮긴이의 말처럼 한마디로 이런 책이다,라고 단정짓기 힘들것 같다. 입구는 하나인데 출구는 많은 그런 동굴속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심리학 같기도 하고, 철학 같기도 하고, 자기계발서 같기도 하고, 경영에 관한 글처럼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느끼는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그런데 자꾸만 책의 제목이 내용과 동떨어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래서 나는 되묻는다. 도대체 우아하다는 게 뭐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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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눈물 샘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지음, 양대원 그림, 유타루 글 / 알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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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한산성에 관한 글들은 참 많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도 왠만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대충 들어 아는 이야기와 소설로 만나보는 남한산성에는 참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가지 사실을 두고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봄에 따라 살짝 살짝 비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말이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관점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은데 부끄러운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백성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남한산성의 비화를 보통의 일반적인 견해로 바라보던 나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 것은 김 훈의 <남한산성>이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서민, 백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역사적인 사실은 그야말로 가슴 한쪽의 응어리를 확 풀어주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답답했던, 너무도 기가 막혔던 그 이야기들이 시선 하나만 비껴갔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아울러 무지몽매하다고 벼슬아치들이 내쳐버렸던 우리의 백성들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 내심 통쾌하기도 했다. 양반이나 벼슬아치들만이 나라를 걱정했던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책 <남한산성의 눈물>은 고전 시리즈로 다시 나온 책이다. 나만갑이라는 관료가 직접 일기형식으로 남겨 둔 <병자록>이라고 한다. 그랬기에 나는 이 책을 만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멀리서 바라보았던 남한산성의 이야기가 주였다면 이 책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니 그야말로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속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공조참의 벼슬에 있던 나만갑이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남한산성에서 쓴 전쟁일기... 아주 소소한 것까지 이 책속에는 기록되어져 있다. 조선이 청나라와 명나라의 힘겨루기에서 애매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서 조금은 생각의 변환을 맞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이 보여주었던 치졸함속에는 이미 이런 상황이 잉태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청나라는 오랑캐나라이니 가까이 할 수 없나이다 주장했던 척화파나 어찌되었든 힘있는 나라이니 가까이해서 나쁠 것은 없나이다 주장했던 주화파의 입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왜 좀 더 깊고 넓게 생각하지 못하고 명분만 내세워야 했는지 나는 묻고 싶을 뿐이다. 김 훈의 <남한산성>에서 어렵게 배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던 사공이 자신을 따르지않는다고 목을 베어버렸던 그 죽일 놈의 양반네가 떠오른다. 실리를 따지지 못하는 명분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만 괴롭힌다.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일을 날마다 써내려갔던 나만갑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척화파의 우두머리격인 김상헌과 주화파의 우두머리격인 최명길의 모습은 정말이지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척화파의 김상헌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실 때 무던히도 반대를 했던 최만리를 떠올리게 한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벼슬아치의 전형이다. 탁상공론으로 목소리만 높일 줄 알았던 그들. 상황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물러서거나 머뭇거리면 목을 베겠다고 말했던 그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이 책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아픔을 겪어 세자와 다른 왕족들이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돌아온 소현세자의 죽음만 보더라도 그렇다. 어찌 생각해보면 작금의 세태보다 더한 이기주의요 개인주의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인조가 청의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치욕이었다면 그 힘겨운 상황속에서도 나라의 임금과 벼슬아치들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백성들의 아픔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책에서는 또다른 피난지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썩어빠진 양반네들과 왕족들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피난생활이라니...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속에서 찾을 수 있는 환향녀라는 말이 있다. 전쟁중에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조선의 여인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 말이 와전되어 지금은 좋지않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모진 고초를 겪고 다시 돌아왔던 조선의 여인들. 그런 그녀들을 맞이해 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절개를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와 누이들을 집단으로 따돌렸고 보란듯이 첩을 두고 살았다는...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그런 몹쓸 이름을 안겨준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렇다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면서 오직 명분만을 내세워 참혹한 전쟁을 치뤄야했던 그 때의 상황은 되새김 할 때마다 아픔으로 다가온다.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아픔이다. 하지만 그 아픔의 농도가 다를 것이며 그 아픔의 종류 또한 다를 것이다. 누가 더 아팠을까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전쟁기록을 보면서 더많은 아쉬움이 느껴져 하는 말일 뿐이다. 과거를 보면서 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꿈꾼다는 말은 진리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생긴다. 작금의 세태를 바라보니 과거는 그저 과거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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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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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설에 재도전한다는 것은 아마도 <변신>을 읽었다는 말일게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었다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었던 작품 <변신>.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문제작가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 나는 모르겠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유대인 부모를 두었고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법학은 아버지의 소망이었을 뿐. 법관이나 변호사가 될 마음이 없었기에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오랜동안을 국영기업 법률고문관으로 죽기 2년전까지 일을 했다. 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이유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보람이 있었고 일찍 퇴근해 근무조건이 좋았던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이기도 할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은 미완성이 많았고 그나마도 자신이 죽으면 남은 원고를 파기해 달라는 부탁을 친구에게 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친구가 미출간 원고들을 출판하게 되어 결실을 이루었다 한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안을 깊이 통찰했다는 그의 문학세계... 내가 들여다보기엔 너무나도 깊었던 것 같다. 

K는 성의 측량사로 초빙이 되어 밤늦게 마을에 도착하지만 그 마을은 어째 좀 수상하다. 그를 초빙했다던 성은 어둠과 안개에 쌓여 있을뿐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조차도 뭔가 수상하다. 간신히 여관을 얻어 잠자리를 마련했지만 숙박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잠을 깨우기도 하고 성에 전화를 걸어 그의 존재에 대해 확인하기도 한다. 백작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숙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의 조수로 배당되어진 두 명의 사내와 마을사람들, 그리고 여관집 주인과의 불협화음, 그 와중에 만난 주점 여급인 프리다와의 사랑이야기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K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따라잡을 수 없이 난해했던 K의 여정이 나를 헤매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령같은 마을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찌보면 만나기 힘든 관리들의 모습을 통하여 관리계급의 부패를 꼬집는 것 같기도 하고, 주점 여급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마져도 무언가 비틀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며 간신히 만나게 되는 하급관리조차 그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남겨주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런 와중에 주점 여급 프리다와의 사랑도 어긋나버리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시간만 많이 흘러갔다. K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책읽는 시간이 흘러 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달려 마지막 부분 '카프카의 생애와 성의 해설' 편까지 와서야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우선은 그가 살아왔던 일생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 작품속에 녹아있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결국은 이 책속에 그의 생애가 담겨있다는 말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이지 읽기에 힘겨운 책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관리들의 불공정하고 무자비함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성의 관리 소르티니의 요구를 거절한 마을 아가씨 아말리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은 왠지 서글프다. 그들 자신들조차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단지 관리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녀 가족과 가까이하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지함이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의 불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욕심이 부합되어진 이치일 뿐이다. 주점 여급 프리다가 클람이라는 관리에 대한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신분상승이나 부를 얻기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성의 측량사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아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런지...

성... 그 성이 안고 있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가 갇혀 사는 우리만의 성. 누구나 하나씩은 가슴속에 쌓았을 자신만의 성. 그 성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깊이 팠거나 너무 높지는 않은지... 미완성의 작품이라서일까?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그 뒷이야기가 있다해도 나는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것 같다. <변신>을 읽고 난 후 카프카의 작품을 다시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던 것은 욕심이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감상문을 쓰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도 내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답답하기도 하고.. 무언가 꽉 막혀버린 듯한 그런 느낌.. 우리 삶의 모습 역시 미완성인 때문일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왠지 부끄럽다. 왠지 부질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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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기사단의 검
폴 크리스토퍼 지음, 전행선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이래저래 세상은 이분법인가? 화이트 템플기사단과 블랙 템플기사단이라고 한다. 밝히고자하는 이가 있다면 숨기고자하는 이가 있고,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키고자하는 자가 있다. 쫓기는 자가 있다면 쫓는자도 있을 것이고 산자가 있다면 죽은자도 있을 것이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이 있을테고, 과거가 있었으니 미래도 있을테다. 그리고 또 사실이 있다면 거짓도 있을 터... 템플기사단 혹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소재는 수도없이 많다. 하지만 작자는 말한다. <템플기사단의 검>에는 매우 정확한 조사자료가 이용되었다고. 그러니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고. 사실 팩션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섬세한 상상을 입히는 것. 그런것이 팩션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재미있냐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떠올렸다. 아니 떠올렸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크게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기에 아직도 그 장면들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글의 구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는 말이 더 솔직한 말일게다. 종교기호학 교수였던 랭던과 암호전문가인 손녀 소피가 <다빈치코드>를 이끌어갔다면, 여기서의 주인공 홀리데이 박사는 역사를 강의하는 교수이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헨리의 손녀이자 홀리데이의 조카인 페기는 사진작가이다. <다빈치코드>가 살인을 동기로 옛 과거를 쫓아갔다면 <템플기사단의 검>에서는 죽은자가 숨겨두었던 검 하나가 옛 과거를 쫓아가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빈치코드> 뿐일까? <인디아나 존스>나 <미이라>와 같은 영화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왔다. 흥미롭냐고? 잘 짜여진 구성은 그랬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또하나의 <인디아나 존스>를 만든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면 그다지 흥미로울 것 없는 소재였다는 말도 되겠다. 뭔가에 짜맞춘듯이 척척 들어맞게 흘러가고 있는 이야기의 흐름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다빈치코드>를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남녀가 한팀이 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새 때문이었겠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풍기는 뉘앙스가 너무도 비슷하다. 신템플기사단. 그 역사의 고리를 연결하기 위해 선택되어진 또하나의 인물. 그 닥터 홀리데이가 이미 정해진 루트를 밟아가고 있었다는 건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시원하게 풀린다. 마치도 화살표 방향처럼 주인공에게 하나씩 건네지는 메세지와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방해하기보다는 도우미의 역할로 보여졌던 까닭이다. 결국 비밀의 끝에 다다랐지만 그에게 남겨진 말은 시작과 똑같은 거였다. 비밀이 너무 많다는..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뭐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얄팍한 함정처럼 보여지던 브로드벤트 변호사라는 존재다. 초반에 등장해 뭔가 쥐고 있을것처럼 보여지던 그 인물은 약간 허탈하다.

종교와 정치가 교묘하게 서로를 이용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건 없어 보인다. 타락된 모습의 대표급이 바로 정치와 종교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사실 그 종교를 제대로 된 종교로 바라보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을 읽고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생각을 하느냐고 우습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종교적인 모습처럼 가식적이고 거짓된 것은 아마 없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옛날처럼 종교가 정치를 버리고 정치가 종교를 버리는 그런 순간이 또 오지 말란 법은 없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하고 생각했었던 프리메이슨이나 템플기사단의 후예가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일이니 그리 놀랄일도 아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아니 공개될 수 없는 복음서가 이 땅위에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은 공개되어서는 안되는 거라는 이색적인 논리에도 어느정도는 수긍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해도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충격과 충돌이 존재할테니 하는 말이다. 책속에서 닥터 홀리데이에게 전해졌던 그 마지막 말 "비밀이 너무 많아" 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는 메세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덩치만 커져가는 종교건물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은 무엇이 두려워 저토록이나 두터운 벽을 둘러쳐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려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형식과 허울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종교를 그려본다.

유독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가장 마지막에 있던 작가노트였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싶어서.. 그만큼 이 책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세상속에 많이 떠돈다는 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도 대화를 통해 언급하고 있듯이 자판기만 두드려대면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무작위로 쏟아져나오는 세상이다보니 그렇게 말 할 만도 했겠다 싶어진다.  작가가 어느정도는 사실에 입각하여 쓴 글이라고 했던 말처럼 책속의 주인공이 템플기사단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듯 싶다.  템플기사단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새롭게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여하튼 속도감을 놓치지 않았던 책임에는 분명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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