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그가 매우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정반대로 평소에는 무척 과묵한 편이데, 글을 쓸 때만 끝없이 수다를 늘어놓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쩜 이렇게 많은 지식을 끝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그의 이런 경이적인 ‘수다’능력 덕분에 그의 책은 늘 재밌다.

 

빌 브라이슨이 이번에 관심을 가진 건 집이다. 그가 살고 있는 영국 어느 작은 마을의 오래된 목사관을 조목조목 살펴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활사를 다룬 역사서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은 영국 혹은 미국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밝혀주는 역사적인 지식이다. 대개는 그 집이 세워진 1800년대 중반의 이야기들이지만, 가끔 고대문명을 언급하기도 하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정보들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무척 재밌어서, 한번 책장을 펼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슬쩍 맛만 보고 자려고 앞부분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수정궁 이야기에서부터 흠뻑 빠져들어 버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걸 깨달으며, 기분 좋은 낭패감을 느꼈다.

 

저자가 살고 있는 영국에서 ‘풋볼매니저’라는 제목의 축구게임이 유행하는데, 한번 빠지면 속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게임만 하게 된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있다. 게다가 남편이 이 게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이혼소송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다분히 과장이 섞인 이 게임에 대한 소문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게임을 한번 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히딩크’라고도 된 것처럼, 자신만의 선수들을 키우고, 유명한 선수들을 데려오고, 상대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짜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면 자꾸만 게임 속으로만 빠져들게 된다. 난데없이 축구 게임 얘길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저 유명한 게임만큼이나 나를 정신못차리게 만들었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다.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아내는 몇 번이나 뭔가 말을 걸었다가 별 반응이 없자, 그냥 대화를 체념해버렸고, 큰 아이는 훨씬 더 자주 놀아달라고(혹은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다가 지쳐 혼자 놀아야했고, 둘째 아기는 울음으로도 평소처럼 강력하게 내 주의를 뺏어가지 못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 집’은 단칸방에 좁은 재래식 부엌이 딸린 공간이었다. 그 집에는 그렇게 작은 단칸방이 아주 많았다. 집의 중앙공간에 주인집 가족이 살았고, 그 주인집을 빙 둘러서 디귿자로 단칸방들이 포위하는 모양이었다. 일층에만 대략 예닐곱의 단칸방이 있었고, 그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단칸방이 이층에도 있었다. 그 집에는 적어도 열다섯 가족이 살았던 셈인데, 한 가족을 네 명(당시 가장 보편적인 핵가족의 숫자인)으로 잡으면 약 육십 여명이 그 좁은 공간에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은 마당 한쪽 구석에 겨우 두 칸이 있었을 뿐이다. 아침마다 그 두칸의 화장실 뒤에는 신문지와 질이 좋지 않은 (회색빛에 가까운)휴지를 손에 쥐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바쁜 아침시간에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오래 시간을 끌면 뒤에 선 어른들이 소리를 지르곤 했다. 나와 동생은 주로 재래식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큰일을 보았고, 작은 일은 마당 구석 담벼락에 해결하곤 했다. 세면공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여성들은 한 사람이 겨우 서있을 정도의 폭인 재래식 부엌에 쭈그리고 몸을 씻었고, 남자들은 마당 한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씻었다. 지금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싶지만,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 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주인집은 절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구역이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한번 가본 후로, 처음으로 ‘빈부격차’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가족이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에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두 번째 ‘우리 집’은 소형임대 아파트였다. 초등 2학년 때였다. 멀리 해운대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산 기슭에 지어진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우리 가족은 이 집에 꽤나 오랫동안 살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동생과 나만 따로 방을 쓴다는 것이 몹시 낯설었다. 아직 어렸던 동생은 밤마다 울면서 큰방으로 가서 엄마 품에서 자곤 했다. 그러면 나 혼자 방 하나를 온전히 다 차지하고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았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나가지 않아도 집안에 화장실과 부엌이 있다는 것도 무척 이상했다. 부엌은 뭐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화장실이 집안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뒷베란다에는 연탄창고도 있었다. 단칸방에 살 때는 가끔 이웃에서 연탄가스 사고가 나서 일가족이 몰살했다거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는 소릴 듣곤 했는데, 이 아파트는 그런 걱정이 없다고 했다. 연탄창고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탄 이삼 백장쯤은 거뜬히 들어갔다. 우리 집은 4층이었는데, 겨울이 되면 연탄 집에서 아저씨들이 4층까지 부지런히 연탄을 날랐다. 연탄 배달이 오는 날이면 현관에서 부엌을 가로질러 뒷베란다까지 더러운 깔판을 깔아놓고 신발을 신은 그대로 아저씨들이 들락거렸다. 게다가 시커먼 연탄 가루가 여기 저기 바닥과 벽을 더럽혀놓았다. 배달을 마친 아저씨들이 깔판을 둘둘 말아 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나면, 더러워진 부엌 바닥을 닦은 것은 내 일이었다. 연탄보일러는 나중에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연탄창고로 쓰이던 공간은 잡동사니를 쌓아놓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연탄창고 바로 옆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작은 문이 있었다. 시커먼 철제문을 잡아당겨서, 쓰레기를 버리면, 짧은 경사로를 따라 미끄러지던 쓰레기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잠시 후 1층 쓰레기장에 무사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문을 열면, 다른 층에서도 쓰레기를 버리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쓰레기의 낙하 시간은 층마다 달랐다. 저녁마다 쓰레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리며 ‘중력’의 존재를 느끼곤 했다. 그 문으로는 쥐나 바퀴벌레 따위가 드나들기도 했다. 여름이면 악취가 심하게 올라왔다.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통로마다 마련되어 있던 쓰레기장이 폐쇄되고, 더 이상 그 문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했다. 더 이상 쓰레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 ‘우리 집’은 어느 빌라 지하주차장 옆이었다. 서민들의 보편적인 거주지인 반지하였다. 방은 두 칸이었는데, 방 한 칸이 특이하게도 무척 길었다. 이제는 다 커버린 여동생과 계속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 긴 방의 중앙에 바퀴달린 플라스틱 병풍처럼 생긴 칸막이를 달았다. 밤에 잘 때면 칸막이를 치고, 아침에 일어나면 걷었다. 남자인 내가 입구 쪽 공간을 쓰게 되었는데, 밤에 여동생이 방을 드나들 때마다 ‘드르륵’하고 칸막이 여닫는 소리에 깨곤 했다. 하루는 주말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동생의 친구가 놀러와 있었다. 살짝 잠이 깼는데, 여학생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었고, 나는 팬티만 입고 자고 있었다. 낮이어서 칸막이는 열려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화장실을 갈지, 계속 자는 척하면서 녀석들의 수다를 듣고 있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다.

 

네 번째부터 ‘우리 집’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 선배들과 술 마시느라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는, 안 들어오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군대를 갔고,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가족들은 이사를 했는데,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휴가를 나왔다가 옛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아예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방과 고시원을 떠돌던 시절 얘기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쯤에서 줄이는 게 좋겠다. 결혼 후 서울에 정착해서 전세방을 떠돌고 있는 지금의 얘기도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가끔 딸아이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난감할 때가 있다. 한 끼에도 계란 프라이를 두 개씩 먹곤 하는 아이에게, 계란이 너무 먹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화만하면 이삼십 분 안에 프라이드치킨을 배달해주는 시대에, 전기구이 통닭이란 걸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을 어떻게 얘기해줘야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을 준비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빌 브라이슨처럼 재밌게 ‘수다’를 떨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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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1-04-1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아들이 책가방이 무겁다고 불평을 하더라구요.
생각해보니 제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사물함이 없어서 날마다 그 날 수업이 있는 책들이 가방 안에 꽉 차 있었고, 거기에 체육이 있는 날이면 체육복 가방도 들어야 했고, 도시락 두 개에 신발주머니까지 챙겨들고 학교를 다녔더라구요.
아이들 소꿉장난감을 봐도 격세지감을 느껴요. 제가 어렸을 때엔 아궁이에 가마솥,, 뭐 그런 것들이 소꿉장난감 세트에 들어 있었거든요. 요즘은 가스레인지도 모자라 전자레인지에 오븐까지 갖춰있더라구요.
감은빛님 글을 읽으며 저도 추억에 잠겼다가 갑니다. ^^

감은빛 2011-04-16 03:24   좋아요 0 | URL
그랬죠. 가방엔 무거운 책들과 점심과 저녁 도시락이 들어있었죠.
그뿐아니라 가방 자체도 요즘 가방보다는 훨씬 더 무거웠을걸요.
아궁이에 가마솥. 요즘 아이들은 아마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함께 추억에 잠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4-1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바나나는 또 얼마나 귀했어요!
요즘은 썩어 버려지는게 바나나인데, 아유, 그때는 아주 횡재한 기분이었죠.
토막씩 나누어 먹으면서. ^^

저두 4층에 살았는데, 연탄 나르던 아저씨 기억나네요.
연탄 들어오는 날은 정말 집안이 난리였죠, 죄송스럽기두 하구.

저두 요즘 집 관련된 책을 줄줄이 세권이나 샀어요. 주로 짓는 쪽으로요.. ㅎㅎ

감은빛 2011-04-16 03:26   좋아요 0 | URL
바나나! 엄청 귀하고 비싼 과일이었죠.
저는 아마 거의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었습니다.

집짓는 책이라니!
어디 시골에 집 지으시려나요? ^^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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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미 묻힌 자의 유골을 다시 파낸다는 것은 공포물에나 어울리는 소름 돋는 얘기다. 그래서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호러소설이거나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읽고 나니, 이 책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해야 할지 참 모호해진다. 이걸 소설이라고 봐야할까? 아니면 인문교양서(역사)로 봐야할까? 모르겠다. 뭐 그런 기준이 뭐가 중요한가! 그냥 흥미롭게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하면 될 일이다. 제목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분실사건’이라는 표현이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은 단지 유골이 분실된 사건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실제 내용은 유골이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옮겨 다니는 경로를 쫓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토머스 페인의 유골을 파낸 사건(분실사건) 자체는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다분히 추리소설의 느낌이 나는 이 제목을 일부러 붙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선 ‘토머스 페인’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무척 생소한 이름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책날개에 토머스 페인이 어떤 사람인지 상세하게 소개가 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의 앞부분에서도 그의 삶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이 책은 출간 3달 만에 12만부가 팔렸고, 이후 3년 동안 50만부이상이 팔렸다. 저자에 의하면 당시 미국 인구는 250만이었고, 이들 중에 상당수가 문맹이었으므로, 글을 아는 사람은 모두 이 책을 읽었다고 보아야 한단다. 이 책은 <독립선언문>이 나오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독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혁명가였다. 이후 페인은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 혁명에도 참여했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그가 혁명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처럼 엄청난 혁명가가 왜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당해야만 했을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에 의하면 <이성의 시대>라는 책 한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종교제도와 성서의 정통성을 비판한 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즉 기독교를 건드렸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외면당했다는 것이다. 책 앞부분에는 마치 작가가 눈으로 본 것처럼 위대한 혁명가의 비참한 말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엄청난 집중력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며 당시의 수많은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잠시 방심했다가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헷갈려서, 앞 뒷장을 들춰봐야 한다. 이 독특한 형식에 잘 적응이 되었다면, 그다음부터는 저자의 뛰어난 묘사를 만끽하며, 유골의 행방을 좇는 흥미로운 지적 여행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좀 더 쉽게 읽는 한 가지 방법은 제일 마지막 부분에 실린 ‘더 읽을거리’를 제일 먼저 읽거나,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더 읽을거리’에서 해당부분을 찾아 읽는 것이다. 물론 제일 먼저 읽을 경우에는 뜻을 이해하려하지 말고 그냥 눈으로만 훑어야 한다. 본문을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이 책이 쓰였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본문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지식 중에 하나는 ‘골상학’이라는 학문의 유행과 쇠퇴에 대한 부분이다. 게다가 골상학의 영향으로 소설에서 주인공의 두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해서 많은 유명한 작가들이 그런 방식의 글쓰기를 따랐다는 점도 재밌는 사실이다. 또 1819년 영국에서 등장했다는 ‘도서자동판매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언젠가 지하철 승강장에서 도서자판기를 보고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근대 영국의 혁명가들이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이 장치를 썼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토머스 페인이 쓴 <상식>을 직접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비록 출판될 때에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집필 당시에는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던 또 다른 책이 있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출판되기 전까지는 <상식>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러미스의 책을 다시 들춰보니 머리말에 토머스 페인의 <상식>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러미스는 자신의 책이 페인의 <상식>과 같이 거대한 변혁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는 마음의 <21세기의 상식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제목을 갖게 되었다. 일본어의 ‘상식’이 영어의 커먼센스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고, 익숙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와의 논의를 거쳐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이럴 수가 나는 이미 여러해 전에 이 책을 통해 토머스 페인과 <상식>에 대해 읽었는데, 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단지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상식>이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국내에 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두 종이었다. 문고판으로 하나가 있었고, <상식>과 <인권>을 묶어서 출간된 단행본이 하나 있었다.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둔다. 페인이 이 글을 쓴 1776년의 현실과 2011년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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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3-22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감은빛 2011-03-22 15:3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후애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cyrus 2011-03-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언뜻 추리소설물 같아요,, 먼저 토머스 페인이 쓴 책을 읽고
그 다음에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거 같아요, 참고로 <상식>과 <인권>을 묶어서
나온 책이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가 번역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분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번역한 적도 있구요,, 아무래도 문고판보다는 <상식. 인권>을 읽어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

감은빛 2011-03-22 15: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일부러 그런 제목을 정한 것 같아요.
그 책이 박홍규 교수님이 번역한 책이군요.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문고판과 단행본은 가격에서 차이가 많이 나더군요.
문고판은 정말 소책자던데요. 가격도 아주 저렴하구요. ^^

루쉰P 2011-03-22 21:33   좋아요 0 | URL
박홍규 교수님의 책은 오타쿠 수준으로 모으고 수집하는 히키코모리로서 <상식,인권>도 반드시 출판돼 있음을 증명해 드립니다. 국내 작가 중 강준만 교수와 박홍규 교수 책을 주로 읽죠.^^ 정말 읽어야 할 책인데 우리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해 박홍규 교수님은 많이 번역하셨어요. 읽어 보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웃긴 건 저도 아직 못 샀다는 사실...하지만 전 박홍규 교수님의 서적을 무려 30여권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오타쿠가 확실합니다.

감은빛 2011-03-23 14:03   좋아요 0 | URL
루쉰님 / 30여권을 갖고 있다면, 오타쿠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만간 장바구니에 담을게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에서 1967년에 나온 번역본(루소의 '사회계약론'과 페인의 '상식' '인권'이 합본되어 있음)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해서 <상식>을 읽었습니다.2단 세로줄에 국한문 혼용인데, 톡 쏘는 맛이 있더군요.나중에 마르크스나 레닌이 페인의 문체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를 비판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시사평론을 쓰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감은빛 2011-03-23 13:56   좋아요 0 | URL
톡 쏘는 맛이 있다니 무척 궁금해집니다.
어렵고 따분한 책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불안감을 날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3-2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특히 골상학 쪽 흥미로워요.

사실 이 책보다 아래쪽의 박홍규 교수 번역본이 더 흥미롭지만요~^^

감은빛 2011-03-23 14:02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저도 소개해주신 말씀들을 읽고 나니.
더욱 흥미가 생기네요.

골상학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은데,
전혀 몰랐던 분야인데,
의외로 굉장한 유행이었고,
여러분야에 영향을 많이 미쳤더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 어떻게 한 명의 저널리스트가 독점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렸나
스티브 와인버그 지음, 신윤주.이호은 옮김 / 생각비행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 ‘통섭’이란 말에 관심이 많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만 관심을 가져왔는데, 최근에는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관련된 소식이나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메모해두었다가 찾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그냥 흘려 넘겼을 주제에도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도 ‘지구과학’이나 ‘생물’, ‘물리’ 등의 과목은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기초지식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데, 가끔 새로운 사실들을 접할 때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군집생활을 하는 생물들의 생태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때,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이론이 도움이 된 적이 있다. 이런 경우가 ‘통섭’의 일례에 속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기 생물학자를 꿈꾸었던 한 사람이 거대 독점기업을 무너뜨린 사례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통섭’의 힘에 대해 깨달았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록펠러를 무너뜨린 여성이라고 소개받았다. 단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어떤 사람인지 그 출생에서부터 차근차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는 록펠러와 타벨의 관계를 좀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두 사람의 삶을 번갈아가며 소개하고 있다. 시간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소개하는 글의 전개는 어떻게 보면 흥미진진할 수도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에게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한창 타벨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록펠러 얘기를 다시 시작하니 흐름이 끊겨 버리기도 한다.

이 책은 타벨과 록펠러의 삶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잘 몰랐던 1800년대 후반 미국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게 된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꾸만 주변 인물들로 주의가 분산되어서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방대한 자료를 놓고,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소개하고 싶었던 작가의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벨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생물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호기심이 많았고, 틈만 나면 현미경을 들여다보았고, 진화론과 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특히 진화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관을 수정해나가며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타벨은 대학 졸업 이후 잠깐 사립학교 주임교사를 맡았다가, 다시 <셔토퀀>이란 잡지에 편집기자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언론인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연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적저한 일을 찾게 되면 언제든 그만두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생물학자가 되지 못하고, 결국 언론인으로 살아간다. 우여곡절을 겪다가 <매클루어 매거진>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폴레옹’이나 ‘링컨’에 대한 기획기사를 통해 큰 인기를 누렸다. 나중에 타벨이 록펠러의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양한 학문에 걸친 관심과 연구가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는 ‘탐사보도’의 선구자였고, 록펠러를 쓰러뜨린 장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통섭’의 힘을 실제로 보여준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여러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 언급 한 것을 보았다. 책 뒷부분의 ‘옮긴이 후기’에서도 ‘삼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삼성’이란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타벨의 폭로가 없었다면,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추악한 진실은 영영 드러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진실을 파헤쳐서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침내 그들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때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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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0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메리포핀스님 서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그때도 기억에 남았는데,
님의 이런 조곤조곤한 글쓰기를 통해서는 그녀의 삶을 엿보게 되는걸요.
'통섭'이라는 단어를 잘 기억해 두려구요~^^

감은빛 2011-03-02 13:26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만큼 여러모로 남는게 많은 책입니다.
그리고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나무꾼님 책 읽는 스타일을 보면 이미 '통섭'을 실천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마녀고양이 2011-03-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섭이라는 책을 사놓고도 처음 읽다가 내팽겨쳐 둔... 어렵더라구요, 개념이. ㅠㅠ

그래두, 제가 상담 방면으로 혹시 일을 하게 된다면
예전에 했던 IT일이나 대기업 근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성에 맞진 않지만 억지로 사고 방식 체계를 바꾸어 놓은
전산 분야에서 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두번 다시 하고 싶진 않지만요. ^^

감은빛 2011-03-10 13:56   좋아요 0 | URL
그럼요.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던, 그 전에 했던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죠.
지금 공부하고 계신 분야가 상담쪽인가봐요.
왠지 잘 하실 것 같아요!

답이 많이 늦어 죄송해요!
 
식품주식회사 - 질병과 비만 빈곤 뒤에 숨은 식품산업의 비밀
에릭 슐로서 외 지음, 박은영 옮김, 허남혁 해설 / 따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2003년 어느 날, 부산 장림공단의 한 피혁가공공장에 환경단체 회원 십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었다. 미국에서 공업용 쇠가죽을 수입해서, 지갑이나 가방, 신발 등을 만들기 위해 가공하는 공장에 엄마들이 왜 모였을까? 우리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과자의 원료가 이 공장에서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쇠가죽(쓰레기)으로 만들어진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부산항으로 수입된 쇠가죽은 이미 온갖 약품처리가 되어 악취가 심했다. 사용하기 알맞은 크기로 재단하고 남은 쓰레기가 공장 마당 한 쪽에 쌓여있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온갖 먼지와 매연에 노출된 쓰레기 더미를 집게차가 와서 실었다. 공장에서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쇠가죽을 실은 집게 차는 부산의 젤라틴 가공공장으로 들어갔다. 젤라틴은 젤리를 만드는 원료다. 젤리 뿐 아니라, 초코파이나, 초코바, 초콜릿, 마시멜로, 캐러멜, 껌 등 온갖 과자류에도 들어간다. 또한 떠먹는 요구르트, 알약의 캡슐에도 들어있다. 젤라틴을 만드는 과정은 곰국을 끓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소뼈를 푹 고아서, 천연단백질인 콜라겐 성분을 뽑아내서 만든다. 그러나 공장에서 값비싼 소뼈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쇠가죽을 이용하는 것이다. 쇠가죽을 이용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공업용 쇠가죽을 사용하는 건가? 그것도 피혁공장에서 자르고 버린 쓰레기를 갖고 만드는 이유는 뭔가? 돈 때문이다. 어차피 피혁공장에서는 버리는 쓰레기일 뿐이니, 젤라틴 공장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원료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피혁공장에서 젤라틴공장까지 함께 갔던 환경단체 회원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식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다들 피혁공장에서 맡았던 악취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 앞으로 다시는 곰국을 못 먹을 것 같다는 분들도 여럿 있었다. 우리는 피혁공장에서 버려진 자투리 쇠가죽 몇 개를 자루에 담아왔는데, 그 악취가 너무 지독해서 말도 못하게 괴로웠다. 회원들은 곧바로 부산식약청으로 달려갔다. 식약청장을 불러달라고 요구하며 한참동안 직원들과 실랑이를 했다. 결국 식약청장과 면담이 이루어졌다. ‘우리 애가 지금까지 먹었던 초코파이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쓰레기로 만든 과자를 먹어왔단 말인가!’ 어느 회원이 흥분하여 쇠가죽이 든 자루를 청장실 바닥에 쏟아 부었다. 순식간에 악취가 퍼졌다. 다들 코를 틀어막았다. 식약청 직원 몇 명이 흥분하여 얼굴이 벌게져서 달려들었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엄마들은 소리를 질러댔고, 직원들은 이들을 밀어내고 냄새나는 가죽 쓰레기를 치웠다. 식약청장은 잘 알아보겠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황급히 사라졌다.

이 젤라틴 문제는 이후 몇 년간 길고 지리한 싸움을 끌어왔으나, 결국 크게 알리지도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쓰레기로 과자를 만드는데, 그걸 가만히 놔두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우리나라 식약청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젤라틴 공장에서 사들인 원료를 깨끗하게 씻어서, 고온으로 끓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단다. 게다가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단다. 젤라틴은 식품첨가물이다. 우리나라 식품첨가물 공전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다, 온갖 해로운 물질들도 다 허용 되어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품첨가물 공전을 조금 살펴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에 혀를 휘두르고 말았다.

결국 해결되지 못한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절대로 젤리와 초코파이와 초콜릿 등을 사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아이들에게 먹이지 못하도록 당부하곤 했다. 나중에 태어난 내 아이에게도 절대 먹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젤라틴이 들어간 온갖 나쁜 과자들을 먹고 왔다. 허탈했다. 집에서야 못 먹게 막을 수 있지만, 밖에서 먹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아이를 집에 가둬놓고, 감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젤라틴뿐만 아니다. 햄에 발색제로 쓰이는 아질산나트륨은 발암물질이다. 이 물질이 햄에 들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 예쁜 색깔을 내기 위해서다. 아질산나트륨을 넣지 않은 햄은 허여멀건 한 색깔이다. 몇 년 전 환경단체의 발표 이후로 어느 가공식품회사가 아질산나트륨을 뺀 하얀 햄을 시중에 내놓았지만, 곧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판매가 부진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환경단체의 발표 이후로 줄어들었던 햄 소비량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늘어났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질산나트륨이 들어간 햄을 사먹고 있다.

모건 스퍼록 감독의 <슈퍼사이즈 미>라는 영화는 감독 자신이 한 달 동안 맥도날드의 음식만을 먹으며 살아보는 실험을 보여준다. 하루 세끼를 모두 맥도날드에서 먹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은가?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될 당시에, 똑같은 실험이 시도되었다. 환경정의 활동가 윤광용씨는 모건 스퍼록 감독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실험을 했다. 역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실험은 24일 만에 중단되었다. 건강이 치명적으로 악화되어서 도저히 실험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당시 윤광용씨와 모건 스퍼록 감독은 모두 30대 초반이었다. 한창 건장한 나이의 청년들조차도 이럴 진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몇 년 전까지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종종 했다. 시민단체 활동비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이들의 먹거리에 대해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학원으로 온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 매점에서 컵라면과 삼각 김밥 따위로 저녁을 때운다.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라고 하면 그럴 시간도 없고, 집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였다.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매일 컵라면과 삼각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틈만 나면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다. 언젠가 어느 아이의 생일을 집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 친구들이 이십 여명 와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무슨 세트를 먹고 나서 한참 떠들고 놀다가 돌아갔다. 패스트푸드 점 직원들 두어 명이 옆에 대기하면서 아이들이 흘린 음식이나 두고 간 쓰레기 따위를 치우고 있었다. 생일은 맞은 아이의 부모는 햄버거 값을 계산하는 것으로 생일잔치를 간단하게 끝냈다. 마침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한동안 그 가게를 지켜봤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그렇게 생일잔치를 치르는 아이들이 시간대별로 계속 있었다. 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점원들은 와르르 들어왔다가, 우루루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아이들의 비만, 허약한 체력을 지적하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아토피에 대한 얘기들. 병원에선 유난히 면역력이 떨어진 요즘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급식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이런 문제들이 먼저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 날마다 구제역이 확산되어 150여만 마리의 가축이 생매장되었다는 뉴스. 조류독감의 유행. GMO 농산물 수입, 농약의 피해 등등 먹거리 문제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너무나도 많다.

이 모든 문제는 식품산업과 관련이 있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산업의 영역에 속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미국의 식품산업을 파헤쳐, 무엇인 문제이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식품안전에 대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과 단체가 나온다. 단순히 먹거리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식품산업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산업이므로 사회구조의 다양한 요소들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7장과 8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본과 노동과 식량의 문제가 무척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다양한 먹거리 문제를 두고 단편적으로 하나하나의 문제에만 집중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큰 틀에서 식품산업이 어떻게 움직여지고 있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책에서는 각 장마다 우리사회의 이야기를 함께 전해준다. 먹거리와 농촌문제에 대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계시고,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라는 책을 쓰고, <굶주리는 세계>, <로컬 푸드>, <학교 급식 혁명>, <래디컬 에콜로지> 등의 책을 번역한 허남혁 선생님이 이 부분을 쓰셨다. 미국의 상황과 더불어 국내의 상황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출판사의 기획이 돋보인다!

환경과 생태분야 책들을 접할 때마다 늘 느끼지만, 외국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부럽다. 우리나라에도 활동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이 공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가 밖에서 젤라틴이 들어간 과자를 먹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위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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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1-1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초코파이 즐겨 먹는데 이런 거로 만들다니...ㅜㅜ
먹을거리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우린 너무 허술하죠.ㅡㅡ
번역자 박은영씨는 제가 아는, 감은빛님도 아는 박은영 같아요.^^

감은빛 2011-01-18 17:15   좋아요 0 | URL
초코파이 정말 국민과자라고 부를만큼 많이 먹죠.
그래서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결국 바뀌지 않는 것도 충격이라고 할만하죠!

네, 그 박은영님이 번역하셨더라구요. ^^

herenow 2011-01-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정말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네요.
가려가며 먹지 말자, 식품 안전 보장해라, 작은 목소리라도 내려고 들면
그런거 다 따져가며 어떻게 사느냐고 까다로운 취급받기 일쑤구요...
그래도 요즘 사람, 엄마들 중엔 공부하고 조심하는 분이 많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내 아이 먹이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식품산업을 운영해야 할 텐데 말이죠.

감은빛 2011-01-18 17:17   좋아요 0 | URL
실제로 어느 방송에서 잠깐 다룬적도 있었습니다만,
왜그런지 이슈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 몇 년간 싸웠는데, 그냥 묻혀버렸죠.

먹이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비로그인 2011-01-17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탕이나 조미료가 다량 들어간 음식, 콜라나 햄버거, 유전자 조작을 한 옥수수나 콩.. 꽤 자주 먹을거리들에 대한 위험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나오지만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아 아쉽습니다.

오늘의 사회에서 식품 판매 시스템안에서 만드는 이의 양심도 가격 경쟁력 앞에서는 무기력해질테고, 그나마 제대로 만들어져야 할 각종 법규도 각종 로비등에 의해 기준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고요.

이 책을 쓴 이. 에릭 슐로서 <패스트푸드의 제국> 을 쓴 사람이네요. 패스트푸드의 제국.. 오래전에 읽고 그 비위생적인 조리과정이며, 첨가제등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런 류의 책들에 꽤나 관심을 갖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은 마침 저도 갖고 있어서 뒤적여 보게 되었는데 여러 명이 쓴 책이네요.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우리나라도 곧 미국내에서 일어났던 이런 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날이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니어링부부가 행했던 "소박한 밥상"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감은빛 2011-01-18 17:20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점들을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식품공전이나 식품첨가물 공전을 보면,
이게 과연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법인건지,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법인건지 모르겠습니다.

에릭 슐러서의 <페스트푸드의 제국>은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니, 관련해서 읽어볼 책들이 잔뜩 소개되어 있더라구요.
천천히 하나씩 찾아볼 생각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1-17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들 초등학교 1학년 때,학교 급식 식품검수위원을 했었어요.
그때 이런저런 단체,공장들을 다니면서 경악을 했었어요.
하지만, 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하여 일상이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 모두의 문제니까 말예요.

근데, 초코파이도 먹지 못하면...情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죠?^^

감은빛 2011-01-18 17:22   좋아요 0 | URL
저는 그 광고 참 이해가 안되던데,
초코파이와 정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식품검수위원이란 것도 하셨군요!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실 것 같아요!
아이들의 먹거리 문제를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1-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많은 단체들이 활동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이 슬픕니다. 하기사
그런 단체들이 활동할 수도 없도록 하는 우리나라는 더 슬프겠죠.

우리의 현실은, 도살도 하지 않고 매몰시킨 돼지 현장과 비슷한거 같습니다.
결국... 죄악은 우리에게 돌아오니까요. 어디까지 묻고 잊고 살지.. 참 무섭습니다. ㅠㅠ

그래도... 좋은 한주되세요, 너무 춥네요.

감은빛 2011-01-18 17:23   좋아요 0 | URL
이번에 생매장 시킨 가축들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은 계속 확산되었지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들은 알고 있을까요?

잘잘라 2011-01-17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이거야.
참말로.
ㅜㅜ

감은빛 2011-01-18 17:23   좋아요 0 | URL
에휴! 한숨만 나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1-2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공업용 소가죽...돈이 무슨 죄입니까...돈을 벌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이 나쁘지요.

감은빛 2011-01-25 18:40   좋아요 0 | URL
그냥 공업용 소가죽도 아니고 재단하고 버린 쓰레기를 쓴다는 게 더 충격적입니다. 자기 자식한테도 그 젤라틴으로 만든 과자들 먹일지 어떨지 궁금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1-26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집에서 나만 안먹어서는 되지 않는다는게 가장 중요한거 같아요.
밖에 나오면 저도 모르게 먹는게 얼마나 많겠어요.
사회적으로 굉장히 심각하다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할거 같아요. 그런데 이런 과로(애들도 어른도) 사회에서 참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00

저희 신랑은 매일 초코파이를 두개씩 먹는데다가 어젠 저몰래 합성 조미료를 집에 사들였더라구요. 제가 보는 앞에서 버리고 엄청나게 싸웠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게 문제예요..

어서 일회용 행주와 쪼꼬파이 없는 우리집을 만들어야 할텐데요.
반성.

감은빛 2011-01-27 13:35   좋아요 0 | URL
환경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과 대화해보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는 제 얘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입니다.
실제로 어떤 식으로든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를 거의 보질 못했습니다.

젤라틴도 그렇고 아질산나트륨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처음 얘길 들었을 때는 무척 놀라고, 본인도 이제 신경쓰겠다고 하지만,
바로 다음에 만났을 때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먹고 있더군요.
분명히 이런 것들은 먹지말아야 한다고 서로 얘기했었는데 말이죠.

제가 운동으로 실천하는 것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하거나, 강요하지않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회용 행주 좀 쓰는 것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써야할 상황도 있을테니까요.
문제는 반성없이 무분별별하게 마구 소비하는 습관이 아닐까 싶어요.
모리님은 일상에서 충분히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임경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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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담벼락이 이어진 더러운 골목길을 달려간다. 심장은 쿵쾅쿵쾅 시끄럽게 뛰어서, 주위의 소음은 모두 내 심장박동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마치 영화에서 극적인 부분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빠르게 달리는 내 몸과 상관없이 내 시야는 천천히, 골목길의 작은 부분까지 다 보여주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소리는 사라졌다. 뒤에서 총성이 들렸다. 개똥을 밟았던가, 무언가 미끌거리는 것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긁힌 팔꿈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홱 몸을 뒤집어 돌아본다. 어지러이 달려온 골목길, 아직 쫓아오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총성은 조금 더 먼 곳에서 들려온 것 같다. 몸을 일으켜 다시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숨이 가빠오고,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시야가 점점 불규칙스럽게 흐려지기 시작할 즈음, 골목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나를 껴안아 붙잡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놀란 나를 진정시키려 그가 중절모를 들어 올려 얼굴을 보였다. 낮은 목소리. ‘나요, 동지. 진정하시오. 여기까지 왔으면 안전할 것이니 숨을 돌리고 나를 따르시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절모를 다시 눌러 쓴 그는 곧 몸을 돌려 앞장섰다.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굽이굽이 어지러운 골목길을 또다시 누비기 시작했다.

꿈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일본순사에게 쫓기기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1929년 만주 안동에서 서른 남짓의 김단야 선생을 만났으니, 그건 꿈일 수밖에 없다. 김단야 동지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사명을 갖고, 이른 여름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만주 안동에 이르렀다. 꿈속에서 나는 김단야 동지가 무사히 압록강 철교를 건너 국내로 잠입할 수 있도록 돕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실제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것 같다. 서른 즈음의 김단야 동지보다 더 어린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자 코민테른 전권위원인 김단야 동지의 위압감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비싸 보이는 양복에 중절모까지 잘 차려입은 김단야 동지는 얼굴도 매끈하니 잘 생겼다. 그는 1922년에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압록강철교를 넘는데 성공했다. 당시 박헌영 동지와 임원근 동지는 넘지 못했던 국경을 그는 혼자 넘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국경을 넘을 생각일까?  


허름한 여관방으로 돌아온 나는 김단야 동지에게 어떻게 쫓기게 된 사연을 설명해야 할까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단야 동지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황당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군 국경수비대 책임자의 꿈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비밀통로를 찾아내자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는 이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빙의되어 있었다. 영화 [인셉션]을 본 영향이 큰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일본순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본 어느 도시 중심가였다. 액션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꿈에서 나는 성룡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순발력을 보이며, 총탄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으로 자동차가 한 대 멈춰 섰다. 박헌영 동지가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엄호 사격을 했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출발하는 차에 뛰어올랐다.

차 안에서는 박헌영 동지가 다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비밀통로를 찾아낼 수 없으니, 한 단계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뒤쪽에는 국경수비대 책임자가 기절해 있었다. 우리는 [인셉션]에서처럼 꿈속에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꿈속에 있었으니, 세 번째 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아무튼 나는 액션영화를 너무 많이 보는 편인가보다. 꿈속에서 계속 총질만 하고 있었으니. 개미떼처럼 밀려든 일본순사들에게 포위되어, [영웅본색]의 윤발이 형처럼 총질을 했으나, 이미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 동지는 모두 총에 맞았다. 다리에 총을 맞은 김단야 동지를 향해 달려가다가 눈앞으로 날아온 수류탄을 보고 잠에서 깨었다.

이 꿈은 내가 반복해서 꾸는 꿈 중에 하나이다. 영화 [인셉션]을 보고나서 꿈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서 ‘꿈 침입’이라는 요소가 더해졌으나, 예전에는 주로 일본순사에게 쫓기다가 깨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이런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아마도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 말아야 하는 9명의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2008년에 출간되었으나, 이런 책이 곧 나오리라는 사실을 2006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다. 자꾸만 읽다보니 그들의 운동이(그리고 삶이) 더 궁금해졌고, 궁금증은 꿈속에서 그들을 찾아가게 만들었다. 어떤가? 일제 강점기 혁명가들의 흥미진진한 삶이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다면 어서 펼쳐보길 권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라잡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참고도서
1.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 1986 / 돌베개
2.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 2000 / 역사비평사
3. 역사속의 미래, 사회주의 / 2004 / 현장에서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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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은빛님 독서는 남다른데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책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책 읽는 밤'에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해서 얘기해 주던데.ㅋ
김단야라고 해서 김은빛님 딸 사랑이 남다르구나 했더니 그 단야가 아니었어요.ㅎㅎ


감은빛 2011-01-14 01:37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별난데가 있죠. ^^
아하, 스텔라님은 곧바로 딸 이름을 떠올리셨군요.
그 분 이름(엄밀히 말하면 '호'라고 해야겠죠.)에서 따왔어요.

마녀고양이 2011-01-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등학교를 홍대부여고를 나와서
홍익 대학교 안에 함께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재학 중에 마신 최류탄이
대학교 들어가서 마신 최류탄 보다 훨씬 많아요... 1986-88년 아주 심했잖아요.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다보니, 학교 후문 굽이진 골목으로
득달같이 도망가던 대학생들이 생각나요, 다들 입에 수건 두르고 그렇게 도망가고
뒤에서 쫒아가는 군인들 있고. 그랬죠.... 아, 그렇게 어렵게 얻은 지금인데 말이죠. ㅠㅠ

2011-01-12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1-14 01:41   좋아요 0 | URL
86~88 이라면 가장 치열할 때였네요.
그렇게 어렵게 얻은 시대를 단번에 역전시켜버린 저 쥐새끼는 참 대단하죠!

저는 묘사한 것 처럼 골목으로 도망다닌 일이 참 많았습니다.
고등학교때도 그랬고, 대학교때도 그랬죠.

양철나무꾼 2011-01-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혼자 읽기 넘 아까워요.

감은빛 2011-01-14 01:42   좋아요 0 | URL
흐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