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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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34쪽, 흡혈귀)

나는 노트북을 내 앞으로 가져다놓았다. 남자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피조사자들의 일관된 반응이다. 나에게만 보이고 상대방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이 형사의 노트북과 사진기의 공통점이다. (62쪽, 사진관 살인사건)

살다보면 이상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어쩐지 모든 일이 뒤틀려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하루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하나씩 찾아온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 (77쪽,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앙코르는 아침과 저녁, 일출과 일몰, 건기와 우기를 비롯한 모든 시간을 위해 건축되었다. 태양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하늘이 트는 무렵엔 장관을 이룬다. (110쪽, 당신의 나무)

나는 생각했다. 왜, 표범은 킬리만자로의 정상까지 올라가 얼어 죽고야 말았는가. 왜 돈 많은 유부녀를 유혹한 바람둥이는 사소한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야 말았는가. 왜,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우아한 죽음을 바람둥이의 사고사 따위에 비교하는가. 왜 그의 문장은 그토록 간결하고 명료한가. 그것은 소설의 문장인가.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22쪽, 바람이 분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던진 말이다. 나는 놀랐다. 몇 명의 여자들이 이 방을 방문했지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라는 말보다 훨씬 좋았다. 그녀는 정말로 이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완전하게 그녀는 이곳에 젖어들었다. (224쪽,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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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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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협잡은 의도적인 부정확한 진술이다. (중략) 협잡이 되기 위한 속성은 거짓말이 되기 위한 속성과 비슷하다. 거짓말은 오류와 다르며, 거짓말쟁이가 하는 진술의 다른 속성과도 같지 않다. 거짓말이 되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특정한 심리 상태, 즉 기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진술해야 한다. (12-13쪽)

개소리에 대해서도 그것이 거짓말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부정확한 진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23쪽)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을 구분하는 게 중요한 활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게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중략) 그녀의 진술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며, 거짓말이라면 응당히 그러해야 할,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36-37쪽)

개소리는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분명히 허세 부리기에 가깝다. (중략) 거짓말하기와 허세 부리기는 둘 다 부정확한 전달 또는 기만의 양상이다. (중략) 거짓말쟁이는 참이 아닌 것을 계획적으로 퍼뜨리는 사람이다. 허세 부리기도 전형적으로 뭔가 허인인 것을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중략)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phony라는 데 있다. (48-49쪽)

들통 났을 때의 결과 면에서 거짓말쟁이보다는 개소리쟁이가 통상적으로 덜 치명적이라는 점 (중략) 사실 사람들은 거짓말보다는 개소리에 대해 좀 더 관용적인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소리를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덜하기 때문이다. (중략) 거짓말은 종종 모욕감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53쪽)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56쪽)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63쪽)

결정적으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중략) 개소리는 거짓말로 들통난도 거의 타격받지 않는다. 개소리는 거짓말과는 다른, 진위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언어게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팩트를 가지고 대응해서는 트럼프류의 뻔뻔한 개소리쟁이를 이길 수 없다. (74-75쪽)

정치에서 말하는 프레임론과 마케팅에서 말하는 포지셔닝론 모두 개소리의 기술에 관한 이론이다. 모두가 말의 진리값에는 관심 없고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언어조작에 전념한다. 언론의 언어가 무책임해진 지는 오래되었고, (중략) 인터넷은 한마디로 개소리의 바다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떠들어댄다. 아는 것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지껄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말의 무책임성에 대해 둔감해진다. (중략) 어떤 거짓말이 거짓ㅁ라임이 판명되었음에도 거짓말쟁이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다. 지금 우리는 거의 모든 말이 개소리화 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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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음악서재, C# - 혼돈의 시대, 사색이 음악을 만나 삶을 어루만지다
최대환 지음 / 책밥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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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시대를 짓누르는 불안의 구름은 너무나 무겁고 어두워서 사람들은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지 그 중심과 방향을 잡기 어렵습니다. 지속 가능하고 함께 연대하는 사회를 향한 길은 너무나 멀고 아예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연한 무력감은 신경증적 사회의 토양이 됩니다. 분노와 낙담이 일상이 되는 것이지요. (64쪽)

인생 전체를 전망할 수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현명함을 지닌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좋음‘ 곧 ‘선‘을 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명함은 근본적으로 선을 식별하고 추구하는 능력입니다. (중략) 현명함이 이끄는 삶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90쪽)

그(소크라테스)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을 면밀히 검토해야 하고 철저한 자기 반성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검증하고 시험에 부치는‘ 성찰의 삶은 우리를 인간답게 합니다. 이는 자유의 길이기도 합니다. (149쪽)

두 사람(마사 누스바움, 솔 레브모어)이 제안하는 ‘지혜롭게 나이 들어가는‘ 삶이란 스스로의 삶에 자긍심과 만족감을 가지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타적 행위를 선택하고 꾸준히 자신을 도야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는 판단력에 근거한 성찰과 숙고와 분별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판단력에는 적절한 감정적 공감 능력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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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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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누가 언제 논문방어를 했는지, 언제 임용되었는지, 언제 퇴직하고 언제 죽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늙은 퇴역 군인의 어마어마한 기억력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란다. 그러면 그는 연도, 달, 날짜뿐 아니라 해당 상황과 관련된 디테일까지 알려줄 것이다. 오로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식으로 기억할 수 있다. (21쪽)

2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죽음 앞에서 내 흥미를 끄는 것은 오로지 과학뿐이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과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필요한 것이라 믿을 것이다. 과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사랑의 가장 고상한 표현이며 오로지 과하겡 의해서만 인간은 자연과 자기 스스로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나의 믿음은 그 근본에 있어서 순진한 것일 수도 있고 부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게 내 잘못은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신념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29쪽)

바랴와 리자는 모두 까쨔를 증요한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이해하려면 여자가 되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48쪽)

평생동안 오로지 내 존재가 가족과 학생들과 동료들과 하인들에게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애를 쎴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는 나와 가까워지는 모든 사람에게 일종의 교훈이 되었다는 걸 나는 알아. 그러나 이제 나는 더이상 왕이 아니야. 나의 내면에서는 노예에게나 걸맞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 머릿속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사악한 생각들이 요동을 치고 영혼 안에는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둥지를 틀고 있찌. 요컨대 나는 증오하고, 경멸하고, 짜증 내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나는 극도로 엄격하고 까다롭고 짜증스럽고 야비하고 의심 많은 인간이 되었어. (중략) "그냥 아저씨가 이제야 눈을 뜨신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이전에는 어쩐 일인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는 보게 되신거에요." (60-61쪽)

예전에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보다는 소망을 참조하곤 했다. 무얼 원하는지 말하라. 그러면 내가 누군지 말해주지.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뭘 원하나? 나는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친구들과 학생들이 우리 안에 있는 이름이나 간판이나 상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을 사랑해주기 원한다. (중략)... 한 10년만 더 살고 실다. (중략) 나는 패배했다. 그렇다면 더이상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퍼질러앉아 조용히 뭐가 오든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102-103쪽)

그녀의 슬픔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가 겪는 고통은 심각한 것이기에 더욱더 애처롭게 여겨졌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에도 이 존재는 하루 종일, 아니 어쩜 평생 동안 불행할 수도 있겠구나! (135쪽, 검은 옷의 수도사)

선택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영원한 진리를 섬긴다는 것, 수천년을 앞당겨 인류를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줄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것. 인류를 수천년 동안의 불필요한 투쟁과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 청춘과 힘과 건강, 즉 모든 것을 이상에 바치는 것. 공동의 선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 - 이 얼마나 고결하고 행복한 운명이란 말인가! 순결과 순수와 노고로 점철된 그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필쳐지면서 그는 자기가 배웠던 것, 그리고 자기가 가르쳤던 모든 것을 기억해냈고 결국 수도사의 말에는 요만큼의 과장도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41쪽)

그는 따냐를 불렀고, 이슬 맺힌 화려한 꽃으로 가득 찬 정원과 공원을 불렀고, 털복숭아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와 호밀밭을 불렀고, 자신의 탁월한 학문과 젊음과 용기와 기쁨을 불렀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삶을 소리쳐 불렀다. 얼굴 옆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커다란 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기력이 소진해 단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이 그의 전 존재를 가득 채웠다. 발코니 아래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옷의 수도사가 그에게 소곤소곤 알여주었다. 그는 천재이며 허약한 육신이 균형을 상실해서 더이상 천재를 위한 껍질이 되어줄 수 없기에, 오로지 그 이유 하난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165쪽)

그는 자신들이 이 사랑이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도대체 왜 그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여자들에게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였고, 여자들은 그에게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 그들이 자기네 인생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던 어떤 사람, 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중에 자기네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햇다. 그런데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그와 함께하는 동안 행복해하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가고 그는 여자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고 헤어졌지만 사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걸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절대로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고 희끗해지지 시작한 지금에서야 그는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난생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197,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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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 이동시 총서 1
정혜윤 외 지음, 이동시 엮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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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바로 시이다. 살아 있는 움직이는 시. 파고 파내도 끝이 없는 이야기. 이야기와 동물과 시이다. 세 가지 단어이지만,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동물이야말로 가장 생태적으로 함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일 분, 일 초마다 이야기가 피어나오기 때문이다. (4쪽)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처럼 사막도 없는 나라의 동물원에서 나 구자*와 같은 단봉낙타를 왜 길러야 하는지. 그리고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돈다고 왜 오래 전에 입국한 동물원 낙타부터 검사해야 하는지. 감금의 이유나 검사의 근거에 대한 답을 못 듣고 나 구자는 죽을 것이다. 그것이 동물원에 갇혀 살다 죽는 낙타를 비롯한 동물들의 운명이니까. (39쪽)

*구자: 나는 단봉낙타고, 이름은 구자다. 2000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스무 살이다. (36쪽, 시의 첫째줄)

우리도 하나하나 엄연한 생명, 엄연한 세상인디, 물건 찍어내듯 공장에 가둬두고 기르고 죽이고 기르고 죽이고 찍어내고 찍어내고 찍어내듯 마구 만들어 잡아먹는 닭이다. (중략) 닭들의 말을 닭 치고 잘 새겨들을 것이니 시간이 얼마 없다. 지금 당장 닭 치고 모든 것들 바꾸지 않으면 더 무서운 물난리, 불바다, 병 창궐, 지진에, 방사능 유출, 나는 이제 죽을라네. (66-67쪽)

나(혹등고래)는 동정이나 환호가 아니라 공존을 바란다. 나를 신비화하지 말라. 나를 마스코트 취급하지 말라. 나를 ‘친구‘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동등한 존재로 대하라. 나를 다른 존재로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게 될 때라야 비로소 인간 스스로도 제대로 대우할 수 있게 될 테니까. (96-97쪽)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서 뽑아낸 기름이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한국에서만 매년 나를 수만 톤씩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나라에서 나를 잡아들이는 양이 세계 3위다. 내 몸에서 나는 기름은 그저 평범한 물고기 기름일 뿐이다. 당신들은 다른 기름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나를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남극의 생물들이 먹을 양식은 나뿐이다. 나를 그들에게 양보해 달라! (112쪽)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19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파고들고 있을까요? 중간 숙주 동물이 천산갑인지 아닌지 밝혀질까요? 확실한 것은 이 바이러스가 야생 동물에게서 전파됐다는 점, 인간이 그 동물의 서식지 점점 깊숙이 침투하면서 감염 접점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명제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는 것은 곧 동물에 주목하는 것이다. 코로나19는 물론, 앞으로 다가올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질병X‘ 역시, 동물에게서 나오고, 인간과 동물의 늘어난 접점에 의해 확대 전파될 확률 매우 높습니다.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새로이 창궐하는 전염병의 75%, 이미 알려진 전염병의 60%가 동물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이쯤되면 질병X는 동물X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동물문제를 해결한다고 질병X가 반드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동물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질병X 예방을 바랄 순 없습니다. (126-127쪽)

제대로 된 자원 순환의 출발점은 순환 가능한 자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 쓰이고, 가장 빠르게 분해되며, 가장 적은 에너지로 다시 쓰임을 창출하는 자원들로 된 물자의 선택적 사용, 그리고 그런 물적 토태로 이루어진 경제가 자원 순환 경제입니다. (138쪽)

야생 동물은 야생 동물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 다가가고 만지고 죽이고 먹는 것은 야생 동물과 인간의 질서를 깨는 짓이다. 야생 동물을 모아둔 실내 동물원이나 카페가 속속 선을 보이고 있다. 거기서 야생 동물에게 곧장 다가가고 만지고 안고 논 아이들은 돌오름길 같은 숲길에서 노루를 비롯한 야생 동물들을 만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165쪽)

쓰레기가 쓰레기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손에서는 그랬다. 나는 쓰레기를 잠깐씩만 만져왔으므로. 더군다나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으므로 쓰레기란 내가 원하는 물질을 깨끗하게 감싸던 것. 손과 물건 사이의 얇고 가벼운 한 겹. 어느새 불필요해진 제품. 버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기억. 그래서 아주 잠깐이었던 무엇.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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