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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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누가 언제 논문방어를 했는지, 언제 임용되었는지, 언제 퇴직하고 언제 죽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늙은 퇴역 군인의 어마어마한 기억력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란다. 그러면 그는 연도, 달, 날짜뿐 아니라 해당 상황과 관련된 디테일까지 알려줄 것이다. 오로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식으로 기억할 수 있다. (21쪽)

2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죽음 앞에서 내 흥미를 끄는 것은 오로지 과학뿐이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과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필요한 것이라 믿을 것이다. 과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사랑의 가장 고상한 표현이며 오로지 과하겡 의해서만 인간은 자연과 자기 스스로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나의 믿음은 그 근본에 있어서 순진한 것일 수도 있고 부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게 내 잘못은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신념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29쪽)

바랴와 리자는 모두 까쨔를 증요한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이해하려면 여자가 되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48쪽)

평생동안 오로지 내 존재가 가족과 학생들과 동료들과 하인들에게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애를 쎴어.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는 나와 가까워지는 모든 사람에게 일종의 교훈이 되었다는 걸 나는 알아. 그러나 이제 나는 더이상 왕이 아니야. 나의 내면에서는 노예에게나 걸맞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 머릿속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사악한 생각들이 요동을 치고 영혼 안에는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둥지를 틀고 있찌. 요컨대 나는 증오하고, 경멸하고, 짜증 내고,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나는 극도로 엄격하고 까다롭고 짜증스럽고 야비하고 의심 많은 인간이 되었어. (중략) "그냥 아저씨가 이제야 눈을 뜨신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이전에는 어쩐 일인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제는 보게 되신거에요." (60-61쪽)

예전에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보다는 소망을 참조하곤 했다. 무얼 원하는지 말하라. 그러면 내가 누군지 말해주지.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뭘 원하나? 나는 우리의 아내들과 자식들과 친구들과 학생들이 우리 안에 있는 이름이나 간판이나 상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을 사랑해주기 원한다. (중략)... 한 10년만 더 살고 실다. (중략) 나는 패배했다. 그렇다면 더이상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퍼질러앉아 조용히 뭐가 오든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102-103쪽)

그녀의 슬픔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가 겪는 고통은 심각한 것이기에 더욱더 애처롭게 여겨졌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에도 이 존재는 하루 종일, 아니 어쩜 평생 동안 불행할 수도 있겠구나! (135쪽, 검은 옷의 수도사)

선택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영원한 진리를 섬긴다는 것, 수천년을 앞당겨 인류를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줄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것. 인류를 수천년 동안의 불필요한 투쟁과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 청춘과 힘과 건강, 즉 모든 것을 이상에 바치는 것. 공동의 선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 - 이 얼마나 고결하고 행복한 운명이란 말인가! 순결과 순수와 노고로 점철된 그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필쳐지면서 그는 자기가 배웠던 것, 그리고 자기가 가르쳤던 모든 것을 기억해냈고 결국 수도사의 말에는 요만큼의 과장도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41쪽)

그는 따냐를 불렀고, 이슬 맺힌 화려한 꽃으로 가득 찬 정원과 공원을 불렀고, 털복숭아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와 호밀밭을 불렀고, 자신의 탁월한 학문과 젊음과 용기와 기쁨을 불렀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삶을 소리쳐 불렀다. 얼굴 옆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커다란 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기력이 소진해 단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감이 그의 전 존재를 가득 채웠다. 발코니 아래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옷의 수도사가 그에게 소곤소곤 알여주었다. 그는 천재이며 허약한 육신이 균형을 상실해서 더이상 천재를 위한 껍질이 되어줄 수 없기에, 오로지 그 이유 하난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165쪽)

그는 자신들이 이 사랑이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도대체 왜 그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여자들에게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였고, 여자들은 그에게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 그들이 자기네 인생에서 애타게 찾아 헤매던 어떤 사람, 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 사람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중에 자기네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햇다. 그런데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그와 함께하는 동안 행복해하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가고 그는 여자들과 만나고 관계를 맺고 헤어졌지만 사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걸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절대로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고 희끗해지지 시작한 지금에서야 그는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난생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197,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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