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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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발표된 후, 2018년에 국내에 출간된 소설 『파친코』 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던 스테디셀러다. 애플TV플러스에서 동명 드라마가 공개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전 출판사의 판권이 만료되고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새롭게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파친코 1
Pachinko (2017년)
이민진 장편소설
인플루엔셜


재미교포 1.5세인 이민진 작가가 1989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이 작품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 뿌리내리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민자의 삶을 작가 특유의 통찰력과 공감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첫 문장 또한 유명하다. ( 이전 판의 번역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였다.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 2017년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첫 문장의 화자가 누구인지 추측해보게 만드는 첫 장은, 영도라는 섬에 살고 있던 소녀 양진이 남편 훈이와 결혼한 이후, 여러 번의 유산 끝에 겨우 만나게 된 딸 선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엄마와 선자와 남아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중, 생선중개상인 한수를 만나게 되고 선자는 몰래 연애를 한다. 그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한수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던 유부남이었다. 선자는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한수를 거절하고 일본에 가기 위에 목사 이삭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 도착한 부부는 조선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일본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중 이삭이 감옥에 끌려가고, 생계를 위해 갖은일을 하게 된다. 



1, 2권에 걸쳐 선자를 중심으로 대략 1910년에서 1990년까지 4대에 이르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여 풀어내는 이 소설은, 개정판 책소개에 따르면 원문의 의미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다시 번역하고, 작품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살리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작가가 처음 의도한 구조와 흐름을 살리기 위해 총 세 파트(1부 ‘고향’, 2부 ‘모국’, 3부 ‘파친코’)로 된 원서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소설 『파친코』 1권은 1부 ‘고향(1910-1933)’ 과 2부 ‘모국(1939-1962)’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제시대, 일본의 패망, 광복, 한국전쟁 동안의 시대적 배경 속 선자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은 수난과 생존 투쟁의 역사다. 소설 『파친코』 는 첫 문장에서 개인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이기거나 혹은 지는 승부의 서사를 담지 않았다. 작가가 첫 문장에서 운을 뗀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역사의 파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다. 


1권의 후반부에는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백요셉( 일본어로 보쿠 모자수, 창씨개명으로는 반도 모자수 ) 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2권에서 본격적으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2권이 더욱 기다려진다! 개정판 2권이 얼른 나오길!! )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 p307

한 방의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구슬에 돈을 걸고 대박 혹은 쪽박을 맞이하는 운명의 게임인 '파친코'가 소설의 제목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책의 제목인 ‘파친코’가 “도박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뜻함과 동시에,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한 타향에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비극적 삶을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다. 많은 차별을 받으며 정식 직업을 얻기 힘들었던 재일 조선일들이 생계를 위해 뛰어들 수 밖에 없던 이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야쿠자 같은 이들과 엮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재일조선인들의 이미지가 게으르고 불량스럽게 보이는데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배우 이민호가 일종의 악역인 '한수' 캐릭터를 선택했다기에 궁금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원작을 읽고 드라마를 다시 보니 더욱 새롭다. 





'한수' 캐릭터가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이었나?

- 정돈되어있지 않은 감성에 끌렸다. 제가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성을 담은 이야기고 이 안에서 한수는 '악'의 모습, 어두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존하며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순히 '나쁜 남자'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내면의 처절함을 느꼈다. 그가 참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 배우 이민호 인터뷰 중에서




애국심은 그저 이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잊게 돼.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 이념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을 이용하지. 넌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너 같은 사람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일본이 빠져나가고, 이제 소련과 중국과 미국이 거지같이 작은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 네가 그들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조선은 잊어버려.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에 집중해.

- p362,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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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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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자마자 한 호흡에 다 읽어버렸다. 제 1회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소설이다. 전반적으로 웹소설같은 산뜻한 가벼움을 품고 약간의 호러와 미스터리 장르를 보여주다가 판타지 로맨스로 마무리된다고 할까. 휴가지에서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되지 않는다

리러하

팩토리나인

인공 서주는 무너지지 않으면 다행인, 허름한 단톡주택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오래 묵은 세입자들은 하나둘 떠났고, 새로운 세입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날, 집 안에서 이상한 사람과 장면들을 목격하고 할머니가 지옥에 방을 임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옥이 요새 리모델링하느라 죄인들 둘 데가 모자란대서 빈방이랑 남는 공간 빌려주기로 했다.(p13)" 할머니의 쿨한 대답에 잠시 당황하지만 금새 긍정하는 주인공 또한 범상치 않다. 문득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도 되는 설정이다.

일상은 어지간해서는 비틀어지지 않는다. 집 앞 골목길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옆집이 야반도주해도, 보일러실 밑에서 용암이 흘러도 집은 똑같다. 복도에는 먼지가 쌓이고, 창틀은 비가 올 때마다 회색으로 흘러넘친다. 염병할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 p23

집이 지옥이에요.

비유 아닌데요. 진짜로 집에 지옥이 있다니까요. 사실 저희 집이 하숙을 해서 방이 엄청 많은데, 밤마다 비명이 들려요. 어느 방에서는 사람 손톱을 찌르는 걸 본 적도 있고요. 얻어먹은 게 있다보니 못 본 척 했지만 ...

있죠.

제 지옥에는 ...... 악마가 살아요.

비유가 아니에요. 맛있는 걸 만들어주는 악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가장 비싼 생일잔치, p95-96

생하는 이야기 속 사건의 흐름은 군더더기 없는 속도로 진행되는 편이라 이른바 고구마 전개는 없다. 주인공 서주와 할머니의 관계, 할머니 아들의 정체, 서주를 챙기고 있는 악마의 진정한 의도 등을 궁금하게 하면서 흡인력을 높인다. 서주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터라 주인공의 심리를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는데, 힘든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개그감이 충만한.. ) 그녀의 마음 속 소리들은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악마가 좋은 소리를 하면 그 이면에 통신사30개월 유지 약정 같은 함정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p117)' 라던가 '이거 한 문장만 말해도 나에게 천만 영화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 인간들이 우글우글했는걸. 거기에 스릴러와 막장까지 뒤섞어 아침드라마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필요는 없지(p85)' 등 현실 속 웃픈 장면들을 끌어들인 표현들에 저절로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대화에서 느껴지는 악마의 캐릭터는 천진난만하다. "가능하면 비유를 안 하려 했는데, 아예 안 쓰자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공기업 직원 같은 거죠. 잘리지 않는데,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해주고 직원들 배치 뺑뺑이 돌리는 것까지 닮았어요(p152)", "칼 맞기 직전, 이렇게 말하긴 했어요. '힘드셨겠다', 이건 인간을 상대하는 공감의 화법. '건강하게 오래,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건 세입자로서의 깔끔한 마무리. 여기에 문제가 있을까요?(p167)"

경쾌한 어조에도 주인공 서주의 결핍, 외로움은 절절하게 느껴진다. 온갖 기묘한 세입자들을 만나고, 매 계절 다양한 형태로 난장판이 되는 집을 마주하며 그걸 수습하는 게 일상이 되고, '이 썩을 집' 이라고 부르지만 어느 순간 낡고 삐걱대는 집, 늙고 삐걱대는 집주인 그 두가지를 잃을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할머니 아들과 관련된 중심 서사의 진행 속에 간간히 밝혀지는 서주의 인생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세입자로 들어온 악마라니. 이 설정은 판타지 로맨스의 전형적 클리셰로 느껴질 수 있음에도 미스터리, 호러 적 장치와 현실적 배경이 더해져서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필명이 독특하다. 작가 소개를 보니 '리러하' 는 늑골(rib), 폐(lung), 심장(heart) 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를 한 조각씩 떼어 와 지은 필명으로 '어떤 식으로든 가슴에 닿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는 생각을 직접적인 단어를 빌려 기억하고자 했던 작가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작가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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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볼루션 - 어둠 속의 포식자
맥스 브룩스 지음, 조은아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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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소설 마니아라면 더욱 읽어봐야할 소설이다. 크리쳐 SF 라는 서브 장르. 에일리언 같은 새로운 크리처들이 등장하는 소설의 대가인 맥스 브룩스의 신작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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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너 이름이 뭐니?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56
이주영 지음, 이상현 그림 / 현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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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개인 후, 저녁 공기가 제법 시원하다. 달궈진 대지가 조금이나마 식어서일까.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그나저나 여름에 부는 바람은 뭐라고 부르더라? 그림책 한 권을 펼쳐 여름을 확인한다. 




바람아, 너 이름이 뭐니?

알이알이 창작그림책 - 56

이주영 글, 이상현 그림

현북스



'여름이면 쑤욱쑤욱 목숨 살리고 싱글벙글 몸을 키우는 시원한 비바람 불고요'. 쑤욱쑤욱, 싱글벙글. 읽다보면 절로 흥겨워지는 의태어들이 차분한 일러스트와 함께 존재감을 뽐낸다.




여름의 바람은 어떤 이름이었는지 궁금해서 그림책을 펼쳤다는 것을 떠올리고 찾아본다. 동쪽에서 여름철에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은 샛바람이었구나. 




바람은 부는 방향에 따라, 지나갈 때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 따라 이름이 다르다. 다양한 바람의 이름을 넌지시 알려주는 이 그림책은 어찌보면 지식정보 그림책처럼 느껴질 수도 있건만, 시어처럼 씌어진 문장들과 서정적인 일러스트는 바람이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 그림책처럼 다가오게 한다. 




순우리말로 쓰인 바람의 이름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바람의 이름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을 '이름씨(명사) 그림책' 이라고 부르는 글 작가는 "어린이들은 생활 영역이 넓어지고, 언어 단계가 발달하면서 더 많은 이름을 자세히 알게 됩니다. 거꾸로 이름을 많이 알고 계통에 맞게 기억하는 연습을 하면 언어 발달과 인지 능력 확장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면서 "어린이들의 언어 경험 확장에 도움을 주기 위해 본보기로 만든 것" 이라고 기획의도를 밝힌다. 물론 이렇게 언어교육적인 측면으로 아이들의 경험을 확장시켜주어야 할 때가 분명 있지만, '언어교육' 에 더하여 삶에서의 '경험' 적인 측면으로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 바람을 느껴보며 부모가 먼저 '오늘은 샛바람이 후덥지근하네~' 라고 말을 꺼내보면 어떻겠는가.



바람은 누구한테나 숨결을 나눠 주고

바람은 어디서나 꿈결을 채워 주고

바람은 언제든지 새로운 결을 만들어 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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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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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뮤지컬을 감상하러 다니던 때를 떠올려본다. 덕분에 많은 뮤지컬 넘버들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곡들도 많아졌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여러 넘버들도 그 중의 하나다. <The Phantom Of The Opera> 라던가 <Think Of Me> 등을 즐겨 듣는다. 다만 <오페라의 유령>은 공포물이 아님에도 이 음악의 도입부가 여러 공포물에 차용되어서인지, 아이는 첫 소절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덕분에 여름이 되자 시원함을 느끼겠다며 공포게임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면 도입부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종종 떠올리게 된다. 아직도 놀라려나. 




오페라의 유령

Le Fantome De L'opera

가스통 르루

소담출판사



크리스틴이야 워낙 사라 브라이트만의 목소리가 유명하고, 팬텀은 개인적으로 뮤지컬 배우 라민 카림루가 연기하는 팬텀 목소리를 좋아한다. 라민 카림루의 목소리를 같이 들으며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읽는다. 



국내초연(2001년) 뮤지컬 프로그램과 함께 찍어본 소설 「오페라의 유령」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해골 같은 얼굴에 장의사처럼 까만 옷을 입은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사건들이 계속 벌어진다. 소설의 초반은 추리소설처럼 전개되며 독자의 흥미를 끈다. 흉측한 외모, 괴팍한 성격의 팬텀(유령)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이런 모티브는 <미녀와 야수> 라던가 <파리의 노트르담> 등 옛 이야기나 다른 소설에서도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럼에도 '사랑' 이란 이름의 감정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크리스틴을 사이에 두고 팬텀인 에릭과 라울 드 샤니 자작의 벌이는 대결 구도는 로맨스 소설로 느껴지게도 한다. 


맞아요. 크리스틴.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정령도 아니고 유령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에릭입니다. 


- p266




이럴 수가. 뮤지컬도 보고 영화도 봤건만 그저 내게 팬텀은 '팬텀' 이거나 '목소리' 였다. 팬텀의 이름이 에릭이었다는 것을 원작 소설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음악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소리 이외에도 외부 세상을 완전히 잊게 하는 효능이 있어요.'(p270) 라던 크리스틴은 오페라 극장에서 어떤 목소리와 대화를 한다. 그 어떤 목소리는 '한 숨결로 두 극단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목소리처럼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하고 웅장하면서 달콤하며, 의기양양하면서도 은밀하며,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며, 매혹적이면서도 당당한 노래'(p209)를 부르는 존재다. 음악을 사랑하고 느끼며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노래를 듣기만 해도 자신의 음색을 한층 드높일 수 있을 정도인 목소리다. 크리스틴은 그 목소리에게 음악을 배웠던 것. 그러나 여러 사건이 진행된 후 그가 크리스틴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크리스틴은 이렇게 대답한다. 


공포예요! <중략>


저는 그를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싫어하지 못해요. 라울, 제가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지하 호숫가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에릭을 상상해 보세요. 에릭은 자책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제게 용서를 빌었어요. 그는 자신의 속임수를 자백했어요. 그는 저를 사랑해요! 저에게 비극적이면서도 엄청난 사랑을 바쳤어요! 사랑 때문에 저를 납치한 거예요! 사랑 때문에 저를 지하에 가두고 함께 있지만, 어디까지나 저를 존중하고, 제 앞에서 벌벌 기고 신음하며 울먹여요. 제가 벌떡 일어나 당장 빼앗은 자유를 돌려주지 않으면 그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고 했더니, 놀랍게도 선뜻 저를 풀어줬어요. 




크리스틴은 '음악천사' 로 다가온 남자가 흉칙한 외모와 비틀린 마음을 가진 '인간'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뮤지컬로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에릭의 사랑이 지고지순해보이고 안타까워보였다. 크리스틴이 그의 가면을 벗기고 얼굴을 확인한 후 공포에 질리는 것을 보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원론적인 생각조차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사랑하던 사람이 있던 크리스틴에게 에릭의 집착적인 사랑은 분명 부담스럽다. 게다가 비틀린 마음의 에릭은 크리스틴을 납치, 감금하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좀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리 '사랑'으로 미화를 해봐도 잘못된 방식이다. 


그때서야 저는 가면을 벗긴 행동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어요. 괴물이 내뱉은 말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저는 제 발로 영원한 포로가 된 셈이에요. 저의 모든 불행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어요. 그는 사전에 충분히 경고했는데...... 제가 가면에 손만 대지 않는다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고 제게 말했는데, 결국 거기에 손을 대고 말았어요! 저는 제 경솔한 행동을 저주했죠. 


- p284



문득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동화 <푸른 수염>이 떠오른다. 차가운 푸른색의 눈동자와 푸른색의 수염을 가진 푸른 수염은 결혼한 아내에게 모든 방의 열쇠를 주며 한 방만은 열지 말라고 한다. 호기심에 그 방을 열어본 아내는 그동안의 다른 부인들의 시체를 발견한다. 자신이 열지 말라는 방의 문을 연 부인들은 모두 살해되었던 것. 이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도 언급된다. 크리스틴이 라울이 잡혀있는 방의 열쇠를 찾기 위해 에릭의 가방을 빼앗았을 때 그는 "난 호기심 많은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당신은 '푸른 수염' 이야기를 알고 있지? 조심해야 할 거야."(p466) 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나도 사랑만 받는다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양처럼 온순해질 거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할 거야.


- p452




에릭의 이 외침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흉측한 외모로 태어나 부모, 가족,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에릭은 인간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 알려줄 이들이 없었기에 어떤 범행을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타올랐던 것. 그런 그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꿈꾸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끔찍한 수단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현실은 가혹하다. 



이야기의 결말은 원작 소설로 읽으니 훨씬 더 좋았다. 뮤지컬과 영화보다 좀 더 섬세하게 서술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는 매력적이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은 원작 소설의 여러 이야기들 또한 작품에 대한 풍부한 감상을 이끌어낸다. 뮤지컬도 좋았지만 원작소설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23년에 다시 뮤지컬로 공연 예정이라는 소식에 더욱 즐거워진다. 이번에는 더욱 더 감정선에 집중하며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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