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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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반전은 지금부터야!
   어른이 되면 분명 난 훌륭한 사람이 될거라고 믿었다. 다행히 성적도 좋았고, 머리도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난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아이였는데, 이건 모두 내 탓이 아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 때문이고, 바로 전해까지만 해도 인기있던 전공이 비인기 전공으로 전락했기 때문이고,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내가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야. 내 선택에 대한 어긋난 결과를 그렇게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탓이 아니기 때문에, 그 탓들은 모두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현실에 만족하지는 않지만 안주하며 살고자 했다.

   이런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 녀석이 있다. 이 녀석은 하늘로 쭉쭉 뻗은 가지를 자랑하는 백양나무의 곁가지로 태어나, 마찬가지로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백양나무로 성장할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 백양나무 근처에서 농사를 짓던 남자가 소를 길들이기 위해 이 곁가지를 꺾은 것이다. 곁가지에서 회초리가 된 것이다. 만약 남자가 소를 내리친다면 그나마 폼은 나지 않지만 유지하고 있던 회초리의 생명마저 끝날지도 모른다. 다행히 소를 내리칠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한편, 이 남자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 재희는 아버지가 드실 참을 들고 가끔씩 이곳으로 온다. 재희를 좋아하는 곁가지는 그날 오후 우연히 재희네 집 사리문에 자리잡게 된다. 같은날 밤, 곁가지는 다시 회초리가 돼 좋아하는 재희의 종아리를 내리치게 됐다. 게다가 몸도 마음도 모두 아픈 곁가지를 재희의 아버지가 측간으로 가져가 똥을 휘젓는 것이다. 백양나무가 돼야 하는데, 결국 똥친 막대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곁가지의 잘못이 아니다. 곁가지는 나처럼 남의 탓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곁가지에게 반전이 찾아온 것이다. 재희는 자신을 괴롭히던 동네 아이들에게 똥친 막대기가 된 곁가지를 흔들며 그들을 몰아냈다. 순식간에 재희를 구해낸 용감한 곁가지가 됐지만, 또다시 내버려지게 된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곁가지는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비가 내리고 곁가지가 머물게 된 곳은 다행스럽게도 백양나무의 뿌리는 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결국 곁가지는 백양나무가 된 것이다.

   사실 내게도 백양나무와 같은 반전이 찾아왔다. 좌절의 바닥까지 맛본 후, 의외의 곳으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릴적 생각했던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먼훗날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때론 동화 한 편이 어느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현재 지치고 힘들더라도 좌절하지 않기를. 언젠가는 분명 자기 인생의 반전이 찾아올 것이다. 나와 백양나무 곁가지처럼.

2008/10/1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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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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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전일보다는 코난을 좋아한다. 왜? 7세 이상 관람가인 코난과는 달리 12세 이상 관람가인 김전일이 좀 더 잔인하기 때문이다. "명탐정이신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김전일이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에 입버릇처럼 외치는 대사라고 한다. 그 할아버지가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인데, 일본의 국민탐정이란다. 그 긴다이치 코스케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요코미조 세이시로,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의 77편의 작품 속에서 맹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사회ㆍ경제적으로 성공한 한 남자가 죽으며 남긴 유서 한 장이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온다. 아무도 닥쳐올 피바람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 딱 한사람이 그 전조를 눈치채고 긴다이치 코스케의 도움의 편지를 보낸다. 안타깝게도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사람은 독살된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음의 문턱을 넘지만 그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좀처럼 사건의 용의자를 잡아낼 수가 없다. 이 사람인가 싶으면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고, 또 이 사람인가 싶으면 알리바이를 제시하며 달아난다.

   『이누가미 일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끼워맞추기식 해법을 종종 접하게 된다. 열심히 사건을 따라가다가 이런 해법을 만나게 되면 갑자기 이야기의 맥이 풀리면서 시시해져 버린다. 반면 『이누가미 일족』에는 그런 억지스러움이 없다. 처음에는 그저 시선만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탐정과 함께 그 두뇌싸움에 뛰어들게 된다.

   또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면 이내 읽는 호흡을 놓쳐버리게 된다. 게다가 사건을 억지로 끼워맞추다 보면 필요한 개연성을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조작해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누가미 일족』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100% 공감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처음부터 다마요가 자신의 손녀라는 것을 알았던 사헤 옹이 왜 그의 손자와 손녀를 결혼시키려 했던 것일까. 나중에 자신도 사헤 옹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된 시즈마는 그것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야기가 빛을 본지 50여년이 지났지만, 그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아무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을 더 찾아 읽어야 책장을 덮은 후의 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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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
이주향 지음 / 시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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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단어, 내겐 참 낯설게만 느껴진다. 예전에는 소설 속 연인들이 사랑하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 상상에 빠졌었고, 그들이 이별하는 모습에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랑에 대한 책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요즘 내 감정은 너무 메말라 있다고나 할까. 아무리 책을 읽고, 영화를 봐도 예전처럼 감정의 변화가 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려 노력 중이다. 읽다보면 예전처럼 그 감정들이 되살아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한번 읽어버렸던 감정의 감각들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다.

 

   이주향, 예전에 라디오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동안 한편씩 한편씩 들려주던 이야기를 묶어서 책으로 펴냈다. '사랑'이라는 테마로 묶인 그녀의 책을 보면서 내가 아는 '사랑'은 어떤 것들이 있나 한번 생각해 봤다. 세상에서 흔하고 흔한게 사랑 이야기라는데, 또 이렇게 생각해보니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까?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다양하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청춘남녀들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과 어린 처녀, 신과 인간, 아버지와 딸, 꽃과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사랑으로 정의 내리고 들려주는 그녀의 솜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시시하게만 생각했던 이야기는 단순히 청춘남녀들의 사랑에만 한정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난 왜 한가지 모습으로 정형화시켰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직까지의 내 사랑들이 대체로 한가지 모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도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면 어린왕자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장미를 사랑했듯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겠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는 그 감정의 감각들이 되살아 나지는 않았다. 이제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으니, 조만간 찾을 수 있겠지.   

 

2008/10/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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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열광] 서평단 알림
매혹과 열광 - 어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
한스 U. 굼브레히트 지음, 한창호 옮김 / 돌베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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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이나 선수에 대한 자서전과 기자들의 취재기 외에는 스포츠와 관련된 책이 별로 없는 요즘 같은 때, '어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이라는 부제는 나처럼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의 흥미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스포츠와 관련된 인문학적 글쓰기라 하면 움베르토 에코의 축구 예찬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에코 자신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열광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아주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다. 가끔 너무 비판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이라고 해서 에코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래서인지 에코의 글처럼 날카로움을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애초에 인문학자가 스포츠에 대한 글쓰기를 한 것이 잘못일까? 솔직히 재미도 없었고, 인문학자의 날카로움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올림픽을 보며 열광하고 월드컵을 보며 흥분하는 것처럼, 스포츠는 그저 즐길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그 스포츠를 두고 인문학적 글쓰기를 시도하다니, 그 시도는 신선했지만 아무래도 잘못된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전혀 읽어볼 가치가 없다거나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과거의 스포츠 스타나 사건이 등장해서 흥미로웠다. 또 스포츠의 폭력성에 관한 부분은 저자의 생각이 상당 부분 나와 일치해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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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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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권의 책이 도착했다. 투명한 비닐로 싸여진 책, 그리고 19세 이상만 구입 가능하다는 빨간색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난 왜 이렇게 뒷북만 치는지 모르겠다. 그 경고(!) 문구를 그제서야 본 것이다. 책을 고를 때 봤더라면, 그 선택이 달라졌을까?

   사실 지금까지 많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19세 이상만 볼 수 있다는 책은 딱 한 권 뿐이었다. 바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멋진 제목 때문에 도전한 책이었지만, 그 후 누군가 내게 하루키를 이야기하면 난 류를 이야기했다.

   첫번째 만남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에 진작에 알았더라도 난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명성만 들어왔던 마광수 교수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 아닌가. '즐거운 사라'는 모르지만, '발랄한 라라'는 알고 싶었다.

   『발랄한 라라』는 마광수 교수가 1966년부터 2006년까지 쓴 서른편의 단편들을 엮은 것이다. 어떻게 서른편의 단편들을 한권으로 묶을 수 있지? 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의 단편은 원고지 20매 내외의 아주 짧은 이야기도 있고, 100매 분량의 긴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서른편의 짧고 긴 단편들을 읽으면서 한가지를 발견했다. 그의 작품들이 금기시 될만큼 야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연애 소설에서도 읽을 수 있고,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표현, 그러니까 단어 선택에 있다. 여느 작가들은 우리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들어하는 단어들을 영어로 표현하며 고상을 떤다. 그런데 그는 그 단어들을 스스럼없이 내뿜는다. 아마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에 속할 것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거북스러웠던 부분이 여럿 있었으니까.

   그가 서른편의 단편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다. 성(姓)적 자유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 자유다.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라면, 한가지 주제로 통일한 것도 괜찮으리라. 일단 이야기는 재미가 생명이니까. 그런데 이 작품들은 재밌지도, 즐겁지도 않다. 오히려 거북스러운 점이 더 많았다고나 할까.

   그는 왜 이토록 한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쓰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난이리라. 나처럼 고상 떠는 독자 혹은 작가들을 향한 비난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쓴다고. 사실은 궁금하면서, 말하고 싶으면서도 주위를 의식해 책 한권 읽는 것도 눈치보는 우리와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게 아닐까.

   그래도 거북한 건 여전하다. 그 거북함을 무릅쓰고 읽을 수 있을만큼 주제면에서 좀 더 발전한 그녀를 만나고 싶다. 사라, 로라, 라라... 다음의 그녀는 어떤 이름일까.



08-100.『발랄한 라라』 2008/10/0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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