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문학, 환상문학, 추리문학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장르문학 도서는 바로 읽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게 장땡이다. 장르문학 도서는 다른 분야의 책에 비해 수명이 짧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낮은 책은 독자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절판되는 안타까운 운명을 맞는다. 장르문학 도서를 구입하고 즐겨 읽는 독자층이 형성되어도 상업 출판사의 수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만큼 장르문학 도서는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만 찾는다. 절판본을 재출간해달라는 독자의 요청이 많아도 막상 그들이 구입한다는 가정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저조한 수익률이 나온다. 장르문학 도서를 펴내는 출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내면 비장해진다. 책을 더 찍고 싶어도 안 팔린다는 슬픈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수록 출판업자들은 장르문학의 가치를 폭넓은 연령층 독자들에게 알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책을 만들어도 재고를 남지 않는 방향으로 장르문학을 소개하는 타개책을 세우기도 한다. 마음껏 만들어서 덜 팔리더라도 재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책, 그것이 바로 전자책이다. 종이책으로 단 한 번도 선보인 적이 없는 외국 장르문학 작품을 전자책으로 출간하는 출판사가 있다. 페가나북스는 1인 전자책 출판사로 주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미권과 일본의 고전 장르문학 작품을 출간하고 있다. 페가나북스가 지금까지 펴낸 전자책의 수는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장르문학 팬덤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 있다. 로드 던세이니의 환상문학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로드 던세이니는 아일랜드 귀족 가문 출생으로 1878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드워드 존 모턴 드랙스 플렁킷(Edward John Moreton Drax Plunkett), 줄여서 에드워드 플렁킷이라고 하는데 남작 작위를 받은 뒤에 만들어진 필명인 로드 던세이니(우리말로 풀이하면 ‘던세이니 경’이다)가 널리 알려졌다. 부유한 삶을 살았던 던세이니는 꿈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늘날에는 던세이니의 명성이 거의 잊혔지만, 그의 독특한 상상력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 보르헤스 그리고 크툴루 신화를 만든 러브크래프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던세이니의 초창기 작품을 읽으면 한 편의 고대 전승 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의 신화를 구축한 톨킨과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 문학의 젖줄은 던세이니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던세이니가 러브크래프트에게 끼친 문학적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로는 에세이 《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이 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가 던세이니의 작품을 공포문학에 포함한 점에 대해선 동의하기는 어렵다. 러브크래트프 본인도 던세이니 작품의 핵심을 공포가 아닌 아름다움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판타지 문학에서 흔히 양대 산맥을 꼽으라면 톨킨과 러브크래프트가 거론된다. 톨킨의 판타지가 빛이라고 한다면,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는 암흑이다. 그런데 이 빛과 어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판타지를 던세이니는 이미 성공했다.

 

로드 던세이니는 수정처럼 맑고 노래하는 듯한 산문을 창조하는 마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서, 다채로운 이국적 상상력으로 화려하고 나른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뛰어나다. (《공포 문학의 매혹》 중에서, 135쪽)


귀족 출신답게 던세이니의 문장은 이국적 정취가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러브크래프트는 던세이니의 작품에 반해 그와 비슷한 표현력으로 습작을 했다. 여기까지가 던세이니라는 문학의 나무를 본 것이다. 이제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보자. 던세이니가 창조한 거대한 세계는 켈트족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러브크래프는 빛과 어둠의 조화를 이루는 던세이니의 판타지에서 전통적인 코스믹 호러의 향취를 맡았다. 

 

 

 

 

 

 

 

 

 

 

 

 

 

 

 

 

러브크래트트가 맡은 코스믹 호러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던세이니의 작품으로는 처녀작이자 단편집 《페가나의 신들》(The Gods of Pegāna, 1905)이다. 이 소설은 페가나라는 태초의 세계와 그곳에 거주하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단편 형식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나-유드-수샤이와 북 치는 스카르

 

 

 

페가나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은 마나-유드-수샤이(Mana-Yood-Sushai)다. 신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마나-유드-수샤이는 영원히 잠들어 있는데 그가 깨어나면 페가나와 나머지 신들이 모조리 파괴되는 종말에 이른다. 새로운 세상과 신들을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마나-유드-수샤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면 스카르(Skarl)가 북치기를 멈추지 않으면 된다.

 

 

 

 

 

시간의 신 시쉬

 

 

페가나의 신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올륌포스의 신들처럼 각자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이 있다. 죽음의 신 뭉(Mung), 시간의 신 시쉬(Sish), 바다의 신 슬리드(Slid), 환희와 음유시인의 신 림팜-통(Limpang-Tung) 등 수많은 신들이 나온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교하면 던세이니의 신들은 대체로 정적이고 음울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페가나의 신들》 삽화를 담당한 시드니 허버트 사임은 던세이니의 서정시풍 문장을 그림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던세이니는 페가나를 신들이 마음껏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아르카디아처럼 묘사했다.

 

 

 

 

사람들은 죽어서 페가나로 올라와 신들과 함께 고통 없는 기쁨 속에서 살리라. 그리고 페가나는 산봉우리의 눈 덮인 곳에 있고 그 봉우리마다 신이 하나씩 있도다. (《페가나의 신들》 2권 중에서, 38쪽)

페가나에 깊이 들어가면 ‘중앙해’에서 신들이 끌어올린 은빛 분수가 있어, 물은 하늘높이 솟아올라 페가나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트레하고볼 위에서 반짝이는 안개로 변한 뒤, 페가나의 정상을 뒤덮고 마나-유드-수샤이의 침실을 커튼처럼 가려주느니라. (《페가나의 신들》 2권 중에서, 40쪽)

 

그렇지만 신들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세계도 언젠가는 무(無)로 향하게 되는 거대한 꿈일 뿐이다. 마나-유드-수샤이가 깨어나면 페가나의 신들은 무력하게 페가나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로 이어진다.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그린 크툴루

 

 

러브크래프트의 판타지에 주로 언급되는 그레이트 올드원(Great Old Ones)은 초월적인 힘은 마나-유드-수샤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레이드 올드원은 하나의 신만 지칭하는 것이 아닌 복수(複數)의 고대 신들이다. 세계를 주무르고 파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레이트 올드원의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크툴루다. 크툴루의 마력은 다른 그레이트 올드 원들의 보호해준다. 남태평양에 가라앉은 가공의 도시 리에(R'lyeh, 르리에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지배자로, 깨어남과 함께 세계에 재앙이 생긴다.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들에게 알려진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공저자인 어거스트 덜레스와 그 후대의 작가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므로 러브크래프트가 생각했던 기존 크툴루의 묘사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세상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고대 신의 위엄은 《크툴루의 부름》(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에 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공의 책 ‘네크로노미콘’의 2행으로 된 문장이 인용되는데 크툴루의 존재감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영원히 누워 있을 죽음이 아니며,
기이한 영겁 속에서 죽음은 죽음마저 소멸시킨다.

 

(《크툴루의 부름》 중에서, 158쪽)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에 입문하기 전에 로드 던세이니 판타지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두 작가의 판타지를 같이 읽거나 비교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페가나북스에서 번역한 던세이니의 단편집은 한 권당 1000원~2000원의 가격이니 던세이니 판타지로 향하는 입장료는 비싸지 않다.

 

 

 

 

 

 

 

 

 

 

 

 

 

 

 

 

 

 

 

 

 

 

 

 

 

 

 

 

 

 

 

 

 

 

 

 

 

 

 

 

 

 

 

*《페가나의 신들》(전 2권, 1905년 작)


*《시간과 신들》(Time and the Gods, 전 2권, 1906년 작, 《페가나의 신들》 속편)

*《웰러란의 검》(The Sword of Welleran and Other Stories, 1908년 작, 원본에 수록된 총 12편의 작품들 중 6편만 소개)


*《몽상가의 이야기》(A Dreamer's Tales, 1910년 작, 원본에 수록된 총 16편의 작품들 중 6편 수록,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18권 :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에 실린 일부 단편은 《A Dreamer's Tales》에서 뽑은 것인데 페가나북스 전자책과 겹치는 작품은  ‘검과 우상’과 ‘거지들’이다)

 

*《판의 죽음》(Fifty-One Tales, 1915년 작, 51편의 짤막한 이야기 중 26편만 수록)

 

 

 

 

 

 

던세이니의 단편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故 정태원이 번역한 단편 앤솔러지 《한밤의 지하철》(동승동, 1993 / 절판)이다. 소설 제목은 ‘두 병의 소오스’이다. 《세계 호러 걸작 베스트》(북타임, 2010)에 ‘계곡의 유령’이라는 소설이 수록되었다. 던세이니의 유일한 단편 선집(희곡 1편 수록)이 《바벨의 도서관 18권 :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바다출판사, 2011)이다. 최근에 나온 러브크래프트 전집 외전 6권에 던세이니의 작품으로 ‘노상강도’가 소개되었다.

 

던세이니는 장편소설도 많이 남겼는데 과연 종이책으로 국내에 선보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비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환상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만큼 재평가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던세이니 판타지도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처럼 일단 음울한 분위기에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국내 독자들의 밝은 정서(?)를 생각한다면 너무 어두운 이야기는 잘 팔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장편소설을 선보인다고 해도 소수의 팬덤만 생길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던세이니의 작품은 종이책으로 나오기에는 좀 애매한 입장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세이니 판타지를 절대로 외면해선 안 된다. 특히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라면. 러브크래프트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크툴루 신화가 또 하나의 새로운 서브 컬처로 각광받을수록 던세이니 판타지 일부를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로 편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러브크래프트 판타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될 수 있고 던세이니 판타지의 영향력이 잊힐 우려가 있다. 러브크래프트 판타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던세이니 판타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가나북스의 외로운 출판 행보를 지지해두고 알아주는 장르문학 팬덤들이 많아져야 한다. 장르문학을 좋아한다면 이제 종이책이나 절판본만 찾아서는 안 된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수많은 전자책들 속에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걸작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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