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알프레드 상시에 지음, 정진국 옮김 / 곰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Scene #1  이발소에서 흔하게 보는 화가의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년 

 

 

1830년대에 화가들이 화려한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찾았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숲 속 풍경과 농촌 풍경을 진실하게 그리고 싶었다. 이 ‘바르비종파’의 중심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가 있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정착한 그는 시대와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이미지로 농민상을 그렸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은 없을 성 싶다. 밀레의 그림을 볼 때마다 무언가 가슴속에 와 닿는 것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의 밀레는 불행했다. 동시대의 화가들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 화랑들은 팔리지 않는다고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어떤 화가도 시골의 노동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밀레는 농부들에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여했다. 그림 속에 나오는 농촌 풍경은 밀레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농촌 생활의 일부였다. 농촌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일상적인 것에 품위와 무게를 불어넣으려는 그의 예술관을 형성했다.

 

 

 

 

 

 Scene #2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못한 자

 

밀레의 그림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이발소 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밀레가 왜 농민들의 모습을 고집스럽게 그렸는지 잘 모른다. 올해가 밀레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그림이 재평가받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나마 밀레의 그림이 아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기 한 권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밀레의 전기는 1881년에 나왔다. 밀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뒤이다. 전기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알프레드 상시에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를 높이 평가한 인물이다. 밀레 전(傳)은 단순히 밀레의 그림을 홍보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상시에는 밀레가 농촌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그리고 그의 예술관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들까지 삶의 전반적인 모습까지 글로써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화가로 활동하기 전, 도제 시절을 거친 젊은 밀레는 살롱에 인정받는 주류 화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 인근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장학금을 얻어 파리에 진출해 들라로슈의 제자가 됐다. 당시 들라로슈는 고전주의 풍 그림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고상한 분위기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고, 살롱은 그런 취향의 그림을 선호했다. 노동자나 농민은 그려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그림을 그려봤자 쟁쟁한 화가들이 등장하는 살롱에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밀레가 독창적인 화풍과 주제를 선보이기에는 파리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특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란 촌놈은 화려한 불빛이 넘치고, 소란스러운 음악이 연신 들려오는 이 쾌락의 도시가 부담스러웠다. 아웃사이더 밀레의 외로운 마음을 이해해주거나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려는 과감한 도전 정신을 알아주는 이도 많지 않았다. 들라로슈의 화실에서 같이 배우는 동료들은 간혹 스승의 정신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리는 밀레를 무시하기도 했다. 파리 생활에 정착하기 시작한 젊은 밀레는 미생(未生)이었다. 훌륭한 실력을 품은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않았다.

 

 


 Scene #3  바르비종의 화가로 완생하다
 
아무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 예술에 대한 방황이 더욱 길어질수록 밀레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득한 도시에 고립되어만 갔다. 심지어 그를 믿어주는 가족들마저 한 명씩 세상을 떠나면서 실의에 빠진 밀레는 거의 죽어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미생’ 밀레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화가로 완생(完生)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밀레는 아카데미와 살롱이 선호하는 누드화 제작을 포기하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목욕하는 여인을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들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누드를 즐겨 그리는 화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밀레는 아내에게 자신의 포부를 떳떳하게 밝혔다.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겠어. 그러면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당신 고생도 더 심해지겠지만 나는 자유롭게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할 수 있겠지.” (129~130쪽)

 

밀레가 오래전부터 자유롭게 생각했던 그림. 그것은 바로 농촌 예술이었다. 밀레는 어렵고도 큰 결심 했다. 그가 농촌 그림을 그리려고 바르비종으로 이사한 1849년은 예술가들에게 힘든 해였다. 밀레도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시골에 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밀레는 그림 주문을 받았고, 주로 그렸던 그림은 대부분 누드화였다. 자유로운 예술을 원하는 밀레는 도제 시절 때 배운 아카데미 풍 그림과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도전의 장소인 살롱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 예술의 씨앗을 다시 살리기 위해 여생을 바르비종의 흙에 묻기로 했다. 바르비종은 ‘미생’ 밀레를 바르비종파의 기둥으로 우뚝 솟게 만들어 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의 예술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테오도르 루소와 상시에라는 든든한 예술적 동지를 만났다.

 

 


 Scene #4  잊지 말자. 나는 할머니의 자부심이다 

 

밀레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명예를 누리게 되면서 예술가로서 완벽히 다시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밀레는 여전히 경건하고 엄숙한 농촌 그림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농민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농촌은 밀레에 딱 맞는 아틀리에였다. 풍족한 생활은 밀레를 세속의 명리에 쫓는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없었다. 밀레는 순결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매우 착한 심성이었다. 특히 그는 자연을 무척 사랑했다. 이러한 성품이 형성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 무척 컸다. 그에게 할머니는 위대한 종교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엄숙하지 않은 파리에서 생활하는 손자가 못마땅했으나 그가 위대한 화가라고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밀레는 할머니의 자부심이었다.

 

이것이 훌륭한 종교였다. 할머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 그것을 그토록 사랑하는 힘을 주었다. 할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고, 그들의 잘못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돕거나 가엾어했다. (밀레의 일기를 인용함, 23쪽)

 

밀레를 파리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을 때 그를 견디게 해준 원동력은 의외로 예술이 아닌 할머니에게서 배운 세상에 대한 애점이다. 세상이 그를 쌀쌀하게 대해주었어도 밀레 본인은 그런 세상을 저주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 ‘좋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아껴준 할머니를 생각해서 화가 이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못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도 있다. 좋은 사람 하나가 많은 못된 사람에 대한 위안이 된다. 도와주려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구걸하진 않았다.” (102쪽)

 

우리는 밀레를 이발소 그림으로 워낙 낯이 익어 편안한 농촌화가 정도로 여기지만, 상시에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밀레의 삶은 화가로 살아남으려는 파리 미생의 치열한 인생사였다.  그런 모습을 기록으로 보존한 밀레 전은 예술적 고뇌의 산물을 느낄 수 있다.

 

상시에는 파리에 익숙한 도시인마저 자연 앞에서 온화하게 만드는 밀레를 발견했다. 그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밀레를 되살려기 위해서 상시에는 화가의 전기를 써내려갔다. 세상을 사랑스럽게 보는 따뜻한 시선. 밀레는 자신이 사랑하던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사랑했던 것마저도 그림으로 되살려내는 위대한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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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30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4-11-30 22: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어제 에피소드에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