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부처와 내기를 한다. 부처는 난공을 피우다 걸린 손오공에게 “  손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구름을 타고 수만리를 날아간 손오공은 구름 위 다섯 기둥에 ‘손오공 다녀감’이라고 쓴 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부처의 다섯 손가락이었다. 여기서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뉴스 손바닥 안의 손오공’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 포털과 SNS에 올라오는 새로운 소식을 검색한다.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도 중요한 업무회의 시간에도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습관이다. ‘손안에 세상을 펼쳤다’며 흡족해하지만 실은 뉴스에 의해 가공, 편집된 손안의 세상에 갇힌 것이다. 뉴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가까이하자니 그 물량 공세 앞에 자칫 헤매기 쉽고, 떨어져 있자니 시대에 뒤처지지 않나 불안하다.

 

잠시라도 찾지 않으면 미친 듯이 초조해지는 뉴스에 대한 탐닉.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뉴스에 탐닉하는 이유를 불안과 공포를 꼽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와 불안, 동시에 엄청난 재난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괜찮다’는 상대적 안도감을 얻기 위해 뉴스에 몰입한다.

 

이 공포와 불안 아래에서는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시와 통제의 논리’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곳이 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다. 벤담이 고안한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은 규율사회의 특징인 감시와 통제의 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간수는 중앙의 높은 곳에서 언제나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한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되는 감시와 통제는 감옥뿐 아니라 병원, 군대 등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서 규율사회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이러한 판옵티콘의 구조가 바로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근대사회의 판옵티콘에서 보여준 시선이 정보로 대체된다. 정보를 독점한 국가권력이나 기업이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의 방법이 좀 더 비가시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는 권력을 감시해야 할 신문은 신앙이 누리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 대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Scene #2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

 

우리는 단순히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뉴스티콘(Newsticon)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의해 감시받는다. 뉴스티콘에서 뉴스는 피감시자가 된 대중을 볼 수 있지만, 대중은 뉴스 감시자를 볼 수 없다. 뉴스는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낸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에 겁먹고 동요하는 대중을 더욱 자극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대중들로 하여금 뉴스 탐닉을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뉴스는 일상을 통제한다. 아침뉴스로 일어나는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전해주는 종합뉴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뉴스가 시작되는 정각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에 리모컨 컨트롤을 쥔다. 뉴스는 계시를 주고, 선악을 구분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라고 타이른다. 이 모든 의식을 거부한다면 ‘뉴스의 이단’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뉴스를 보지 않는 이단자는 시사 상식에 부족한 자로 낙인찍힌다. 뉴스를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른 기준은 상대방의 지적 수준을 판단한다. 즉, 뉴스를 보는 생활은 교육과정의 연장성이 되기도 한다.

 

 

 

 

 

 

사진출처: 중앙일보의 기획 기사 '정치 수능' (2014년 7월 23일)

 

“우리는 태어나서 고작 18년 남짓 교실에 갇혀 보호받을 뿐, 나머지 l8년은 사실상 어떤 제도권 교육기관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무한정 행사하는 뉴스라는 독립체의 감독 아래에서 보낸다. 일단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끝나면 뉴스가 선생님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18쪽)

 

 

이렇듯, 오늘날의 뉴스는 투명한 감시자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창조하고 감정을 통제한다. 뉴스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그리고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를 알려주며 그러면서 정치적ㆍ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대중은 뉴스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해 판단하며, 그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좌절한다. 바로 이것이 뉴스가 지닌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스 그 자체에 무지하다. ‘인류의 절반이 매일 뉴스에 넋이 나가 있다’라는 보통의 말처럼 우리를 ‘감정 교육’시키려는 뉴스의 이면을 모른다. 언론은 특정한 뉴스들을 폭탄처럼 쏟아냄으로써 오히려 무관심을 선도한다. 정치뉴스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정치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분노하다 결국 허탈해진다. 정치뉴스는 여야 정치인들이 왜 싸우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야의 공방만 비춘다. 어쩌다 저런 비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잡혀가는 정치인의 모습만 비춘다. 결국 우리에게 정치에 대한 냉소만 생기게 한다.

 

민주 정치의 진정한 적은 흔히 보도 통제와 검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검열보다 무서운 것은 냉소다. 독재자라면 통제 대신 닥치는 대로 언론이 뉴스를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끊임없이 쇄도하는 뉴스 기사와 이미지는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긴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쉬」  1963년

 

“재난 뉴스는 불행한 사건을 다루는 뉴스 중에서도 주목도가 높고 대중적인 또 하나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재난 뉴스’ 중에서, 230쪽)

 

 

정치 뉴스에 시큰둥할수록 셀러브러티에 관한 다양한 소식에 집착한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연애 소식 등은 대중적 뉴스감이 되어 각종 포털 사이트 뉴스란에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요즘 재난 뉴스의 내용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지상파 종편 뉴스채널 등은 재난 쇼를 하듯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경쟁을 벌였다.

 

 


 Scene #3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자극적인 범죄 기사에 저절로 눈이 가고, 유명연예인의 열애 소식이나 폭행사건에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대중은 답답한 삶의 도피처로 뉴스티콘을 삼고 있다. 뉴스티콘에 갇힌 대중은 자신들의 감정을 통제하는 뉴스를 어떻게 올바르게 보는지 잘 모른다. 뉴스티콘에서 탈출하여 제대로 된 뉴스를 봐야 한다. 뉴스와 대중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대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좋은 뉴스는 세계와 나, 타자와 나의 만남을 이끄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생생한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동안 뉴스에 탐닉하는 바람에 정말 인간적인 뉴스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뉴스를 많이 접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뉴스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정보의 조각이 모아 만들어진 뉴스에서 감춰져있는 세상의 의미를 끄집어 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 모든 뉴스를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가끔 스마트폰에 진동으로 울리면서 나오는 뉴스 속보를 멀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뉴스로부터 철저하게 도망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보통은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탱크를 몰고 습격하라고 말한다. 사회뿐만 아니라 대중의 감각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만들어낸 불량하고 나쁜 뉴스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말 나쁜 뉴스가 너무나도 많다. 이런 나쁜 뉴스로부터 통제당하면서 생긴 세상에 관한 무관심, 분노로 쌓인 정신적 우울증을 치유하고기 위해서 우리의 신경중추를 자극해온 뉴스티콘을 향해 탱크를 몰아 무너뜨려야 한다. 뉴스티콘을 지배하는 뉴스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 없다. 뉴스티콘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견지해야 할 진짜 목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