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파인더 - 인류 최초의 지혜로 미래를 구하다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과학기술과 진보를 향한 숭배에 내재하는 만인을 위한 단일한 문명이라는 이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지고 불구가 된다. 세계관 하나가 소멸할 때마다, 문화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옥타비오 파스, 『웨이파인더』 중에서, 178쪽)

 

 

 

 

 Scene #1  오만한 문명    

 

“그는 몹시 불편해했다. 바지를 입는 일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윗도리의 소매로 말미암아 어깨와 팔 안쪽에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는 부분을 몇 군데 넓혀 주었는데, 그는 점차 자신의 신체를 의복에 길들여갔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중에서)

 

프라이데이를 처음 본 로빈슨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백주대낮을 활보했으니 말이다. 신앙심 빵빵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인 옷 입히기'를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이 고고학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3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실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문명이라는 사회단계의 개념화가 진행됐고, 문명 단계로의 이행을 가져온 다양한 요인에 대한 검토가 이뤄졌다.

 

'문명' 개념은 인류는 발전한다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믿음 속에서 탄생했다. 인류학자 헨리 루이스 모건은 '발전'의 개념을 도입해 인류가 야만과 미개가 단계를 거쳐 오늘의 문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당시 유럽에선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듯 인종이나 사회도 거친 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발전한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졌고, 자기 문화권과 다른 사회는 야만으로 규정해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정신문명을 압도하는 오늘날, 기술과 자본이 개입되지 않은 삶의 모습은 이질적이고 비문명적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옷을 입지 않고 산다거나 피부에 무수한 상처를 남기는 고통스런 통과의례 등은 흔히 야만적인 풍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인식이 상대 문화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명은 오만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 제국은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시선처럼 원주민 문화는 야만스러운 것일까?

 

 

 

 Scene #2  인류학자, 문명과 야만 사이로 직접 뛰어들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지 수 백만 년이 지났지만 서로 긴밀한 교류를 시작한 건 채 수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보편적 경로를 밟기도 했으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왔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물질문명의 단선적인 흐름을 근거 삼아 진보를 주장하는 서구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한다. 그가 쓴『웨이파인더』는 단순한 서구 탐험가의 오지 탐험기가 아니다. 전 세계 토착 부족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문명인의 눈에는 미개하게 느껴지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토착 부족민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뛰어난 지혜다.

 

폴리네시아인은 지도와 나침반이 없어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바람, 파도, 구름, 별, 해 등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이 항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부표다. 예를 들어 달무리가 생기면 다음 날에 비가 온다는 징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는데 오래전에 폴리네시아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밖에 달무리 안에 보이는 별의 개수를 통해 폭풍의 강도를 예측할 수 있고, 구름이 떠있는 형태나 움직이는 정도로 대기 상태나 바람의 세기 및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항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항해 과정 중에 보고, 겪은 자연현상들도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이것을 지도 삼아 직접 눈으로 바닷길을 찾는 그들은 바닷길잡이(wayfinder)인 셈이다. 기억으로 축적된 폴리네시아인의 추측항법은 오늘날의 천문학, 해양학으로 증명된 지식들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들은 추측항법을 따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음 후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다행히 폴리네시아의 추측항법은 보존되고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콜롬비아의 바라사나 족의 우주론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들은 거대한 지구를 구성하는 자연에 각각의 생명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영적 기운으로 살아 숨 쉰다고 말한다. 인간, 동식물 모두는 하나의 우주적 기원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서로 관계 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는 통합체로 인식한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생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커다란 생명체로 본다. 그러나 바라사나 족은 열린 눈과 마음으로 온갖 생물, 무생물을 보듬어 안은 인류의 지혜를 살아 있는 자의 의무로 봤다. 바라사나 족뿐만 아니라 일부 토착 부족도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대한 공공 재산이자 영적 기운이 들어있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한다.

 

 

 

 Scene #3  “우리가 어떻게 자연을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자랑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야만의 역사가 성장해왔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기차게 울려왔다. 그 목소리의 중심에는 우리가 '야만'과 '미개'라는 단어를 붙였던 토착 부족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내는 진실 되고 간절한 목소리 앞에 귀를 막아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과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또 다른 세상 보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때론 편견과 오만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을 느낀다.

 

1854년, 북미 대륙에서 잔혹하게 인디언을 몰아낸 백인들이 내민 계약서 앞에 시애틀 추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웨이드 데이비스도 시애틀 추장처럼 인류학적 근거를 들어 자연과 공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강조한다. 자연을 개발하고 소유하는 인식은 미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과 하나로 연결된 채 살아가는 토착 부족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자연개발론자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에 자연을 이윤 획득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오랫동안 한 곳의 터전에서 살면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 토착 부족을 집단학살(genocide)하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생활방식을 말살하는 문화학살(ethnocide)도 일어난다. '진보'의 불도저를 앞세운 문화학살은 우리가 보존해야 할 최고(最古)의 언어, 문화 그리고 내일을 내다보게 만드는 삶의 지혜마저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희귀종의 멸종이나 서식지 파괴와 같이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과 언어 및 문화 다양성은 무관하지 않다. 자연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수세기를 살아온 인간의 언어들 속에는, 자연에 대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거는 방법이 무척 다양했다. 그래서 특정 언어가 사라지면 특정 생물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생물종의 상실을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버금가는 손실 즉, '인종권'(ethnosphere)이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방관하고 있다. '인종권'이란 인간의 지성과 의식이 함축된 인류를 총칭하는 문화적 재산으로 정의된다.

 

과학 기술의 지속적 발명과 개발과 발전이란 명목 하에 진행되는 인류에 의한 자연 정복이 이대로 계속될 때 틀림없이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은 지구의 황폐, 생태계의 파멸, 인류 종말 및 모든 생명체의 멸종이다.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지구는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병에서 회복될 수 없어 사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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