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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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96] 물에 빠져 죽은 자와 구조 받은 자

 

 

 

 

 

무심한 강물은 하염없이 돌지만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빙하는 표류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착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미끄러져 어린 생명의 숲들을 지우기도 한다.
바다는 풍요로울수록 더욱 탐욕을 내며 싸우고
태양과 별과 행성들은 언제나처럼 자기궤도를 유지하며
지구별 역시 정교한 우주의 이치대로 돌고 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다.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프리모 레비, ‘인생연감’, 『살아남은 자의 아픔』중에서, 123쪽)

 

 

프리모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로 가기 전 레비는 소설을 단 한 줄도 써 본 적 없는 화학자였다. 증언을 하기 위해 문학을 택했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보통 사람이라면 흔적 없이 몽땅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수용소에서으l 고통을 하나하나 되살려낸다. 그토록 힘겨운 증언을 자진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은 자신의 경험으로 끝나야 한다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치열한 사명감에서였다.

 

레비는 수용소를 휘감던 검은 연기처럼, 떨치기 힘든 공포와 절망 속에서 악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쉼 없이 성찰한다. 지옥에서 돌아온 생존자가 기억을 더듬으며 읊조리는 사유의 결이 큰 공감을 불러온다. 그의 글은 의외로 담담하다. 야만적인 학살의 현장을 폭로하고 고발하려는 나치 증언문학과 달리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간명하다. 그래서 울림이 더 크다.

 

극한의 시기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68세에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자신의 처절한 경험과 사유를 시와 소설 등 다양한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던 그가 따로 남긴 유서는 없었다. 시 ‘인생연감’은 결국 그의 유서가 되고 말았다. 레비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서경식은 ‘한없이 거듭되어 증식하는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그토록 집요하게 탐구하고 알리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봤다.

 

전쟁을 경험한 국가들은 ‘종전’을 기념한다. 그러나 레비는 예외였다. 유대 민족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다. 한 곳에 편히 정착하지 못한 채 늘 이방인으로, 떠돌이로 살다가 극우 인종주의에 의해 민족이 말살될 뻔했던 그들의 고달픈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단어가 왜 유대 민족의 아픔을 집약하는지 알 수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와 경제위기에 직면한 독일은 나치가 정권을 잡자마자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나치는 인종우월주의를 조장하며 유대인 소유 기업을 망하게 하고 유대인을 공공기관과 대학 등에서 쫓아내더니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그들을 모두 없애기로 한다. 유대인은 수용소로 보내져 집단적으로 학살된다. 그 때 죽은 유대인이 600만 명 정도 가까이 된다고 하니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유대 민족이 겪은 이런 가슴 아픈 일을 지금 유대 국가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다. 하마스를 궤멸하겠다며 전투기와 탱크로 가자 지구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나섰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희생된 것을 보면 그 어떤 이유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이스라엘을 보면, 이들이 가슴 아픈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비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의 ‘공격적 내셔널리즘’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레비는 40년에 걸친 자신의 증언에 대해 절망적으로 회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역사적 증인의 의무를 갖고 지옥에서 탈출했지만 인간 존재의 위기는 여전했다. 전 세계에서 지탄을 하고 고발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민간인들을 대낮에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야만적 전쟁 범죄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란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은 멍청한 인간들이 세상을 마구 짓밟고 파괴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해방의 순간은 기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보통은 파괴와 대량학살의 비극적 배경 위로 고통의 종이 울렸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낀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그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중에서, 81~82쪽)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겪었던 무렵, 레비는 다시 한 번 나치 학살의 현장과 희생자들의 기록을 처연하게 되짚어간다. 자살하기 1년 전에 집필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이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해방 이후 세상은 아우슈비츠를 망각해왔다고 말한다. 과거의 죄를 망각해가는 세상의 어두운 미래를 고발한다. 원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제목은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에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편집자의 제안에 의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대신 책에 포함된 장의 제목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레비의 공식적인 유작의 이름이 되었다.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현상들을 가해자와 피해자, 가라앉은 자(죽은 자)와 구조된 자(살아남은 자)로 명명했다. 레비는 나치의 폭력성과 죽음의 수용소를 체험한 피해자이지만, 철저한 자기성찰과 비판정신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에게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수용소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있던 세계는 지금도 작동된다. 끔찍한 제도적 폭력에 노출될 때 피해 집단 속 사람들은 한 술 더 떠 동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폭력에 노출된 수용소 포로는 자신보다 더 취약한 사람을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둔다. 룸코프스키의 사례는 인간을 서열화시키는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룸코프스키는 비열한 방법으로 유대인 포로를 관리하는 게토 위원장에 오른다. 그곳에서 게토의 히틀러가 된다. 룸코프스키는 권력과 위신에 쉽게 현혹되는 인간이다. 레비는 그들을 ‘회색인간’이라고 부른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0쪽)

 

레비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나오는 대사처럼 우리는 ‘일시적인 권력의 옷’을 걸치는 순간, ‘바보 같은 광대짓’을 일삼는 ‘회색인간’이 될 수 있다. 권력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독일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은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서로 총을 겨누웠다. 그들은 이미 권력에 눈이 멀어 유대인을 말살시키는 최악의 범죄를 일으켰다.

 

여기서 불편한 진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 중에 다수가 ‘바보 같은 광대짓’을 한 비열한 권력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힘없는 약자는 수용소 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대신 비겁한 이기주의자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수용소로부터의 해방은 자유의 기쁨뿐 아니라 치욕과 죄책감까지 안겼다. 이것이 ‘구조된 자’가 겪는 아픔이자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리는 고통으로 형성된다.

 

가해자들의 변명과 합리화. ‘나는 몰랐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의 표류 속에 잔인한 역사는 점점 희미해진다. 역사에 눈이 먼 세상에 대한 열패감이 레비가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이 될 유작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고한 ‘인생연감’을 쓰는 내내 레비는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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