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자칫하면 고대의 책,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책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래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좋기 때문에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되어 읽혀지는 작품이다. 고전에서 새로운 가치와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발견하기 때문에 늘 고전을 펼쳐든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고전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전은 ‘어른들조차 잘 읽지 않고 그저 이름만 아는 책’이랄 수 있다. 이런 실정인데도 청소년들에게는 꼭 읽어야 한다는 ‘지시’만 반복된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읽고 싶어도 고전을 읽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펴낸 고전을 찾아볼 수 없고, 성인독자를 위한 번역본들이 대부분 성인들에게도 만만찮은 분량과 내용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전의 심오한 내용을 교과서에 언급된 한두 줄만으로 익히고 넘어가게 된다.

 

대입 논술고사에서 고전 관련 제시문이 나오는데 교양의 폭과 생각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는 고전 지문이 가장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와는 연관성이 떨어진다. 대입 논술은 읽기 평가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독해능력과 지적 지구력을 요구한다. 교양을 쌓기 위해서 고전 읽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고전을 읽도록 만든다. 단기간에 논술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입문서에 의지하게 되는데 입문서와 요약서는 종종 혼동된다. 고전 요약본들은 군살만 찌우는 패스트푸드와 같다. 이런 책들로는 논술에 별 도움 안 되는 단편 지식만을 얻을 뿐이다. 제대로 된 입문서를 읽던가 아니면 고전을 직접 읽는 방법 밖에 없다.

 

대학교나 교육단체에서 고전 도서목록을 만들어 공개한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고전에 대한 호기심을 북돋아주기 위한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입시대비용 느낌이 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시위주 교육이 고전 읽기를 유도하는데 적잖이 방해가 된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책보다는 수능 문제집과 교과서에 익숙하다. 게다가 전자 매체의 범람은 독서를 멀리하게 만든다. 이렇듯 나름 많은 시도를 하고 있으나 고전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2015년부터 고등학교에 ‘고전’ 과목이 신설된다. 청소년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고전을 아예 교과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고전을 공부를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를 넘어서 사고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맞추는 의도가 있겠으나 읽어야 할 고전을 공부하는 과목으로 변화를 준 제도가 과연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아이들이 만족스러워할지 본격적으로 도입한 이후에 지켜봐야할 것 같다. 고전 읽기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높이면 고전 과목 도입이 성공했다고 본다. 다만 고착화된 성적과 평가 위주의 교육 방식을 답습한다면 고전은 입시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고전의 본래 의미를 더욱 퇴색시킬 수 있는 단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고전 과목 신설 발표 이후에 창비에서 『고전은 나의 힘』 시리즈를 출간했다. 한 세트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 읽기’ 29편, ‘역사 읽기’ 24편, ‘철학 읽기’ 28편 등으로 총 81편의 고전을 수록했다. 내년에 고등학생이 될 청소년이 읽어야 할 고전 작품으로 선별되어 있다. 세 권에 수록된 고전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사회 읽기

 

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슬픈 열대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학교와 계급 재생산 - 폴 윌리스
나 홀로 볼링 - 로버트 D. 퍼트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 조지 리처
진보와 빈곤 - 헨리 조지
유한계급론 - 소스타인 베블런
경제학-철학 수고 - 카를 마르크스
아테네 전사자를 위한 추도 연설 - 페리클레스
군주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
사회 계약론 - 장자크 루소
통치론 - 존 로크
여권의 옹호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나는 고발한다 - 에밀 졸라
자살론 - 에밀 뒤르켐
고독한 군중 - 데이비드 리스먼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성 정치학 - 케이트 밀렛
상상의 공동체 - 베니딕트 앤더슨
사회학적 상상력 - C. 라이트 밀스
위험 사회 - 울리히 벡
권력 이동 - 앨빈 토플러
자유로서의 발전 - 아마티아 센
작은 것이 아름답다 - E. F. 슈마허
링크 - A. L. 바라바시

 


* 역사 읽기

 

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역사. 헤로도토스
역사 철학 강의. 게오르크 헤겔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H. 카
사기. 사마천
삼국유사. 일연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에마뉘엘 J. 시에예스
상식. 토머스 페인
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제국주의론. 존 A. 홉슨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 혁명 선언. 신채호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블랙 아테나. 마틴 버널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B. 비숍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M. 블로트
고양이 대학살. 로버트 단턴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Z. 데이비스
역사 앞에서. 김성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젱킨스

 


* 철학 읽기

 

 유토피아 - 토머스 모어
 맹자 - 맹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삶 - 에피쿠로스
 불법? 자살이 위법인가 - 버트런드 러셀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
 노년에 관하여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 - 시몬 드 보부아르
 방법 서설 - 르네 데카르트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장폴 사르트르
 성리자의 - 진순
 논어 - 공자
 리바이어던 - 토머스 홉스
 사회 계약론 - 장자크 루소
 공리의 원칙에 대하여 - 제러미 벤담
 맹자 - 맹자
 도덕경 - 노자
 역사 철학 강의 - 헤겔
 전론: 다 같이 잘사는 길 - 정약용
 순자 - 순자
 통치론 - 존 로크
 공산당 선언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향연 - 플라톤
 도덕 감정론 - 애덤 스미스
 삶의 괴로움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정념에 관하여 - 데이비드 흄
 사단 칠정을 논함 - 이황

 


책 내용 구성으로 보면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고전을 쉽게 설명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돋보인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고전 작품을 직접 읽고 엮었다. 그리고 작품의 발췌분량을 논술고사의 지문보다 호흡을 길게 해 글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태클을 걸자면,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고전’의 범주에 넣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것도 있다. ‘사회 읽기 편’ 수록된 작품 목록을 보면 50년 전에 출판된 것도 있고, 거의 최근에 나온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레비스트로스, 마빈 해리스, 로버트 퍼트넘, 울리히 벡, 앨빈 토플러 등이 있다. 여기서 제일 최근에 나온 책의 작가는 장 지글러다. ‘오래된 책’이라는 고전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을 추천하고 소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고전의 범주를 크게 넓힌다면 오히려 학생들의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

 

 

 

 

 

 

 

 

 

 

 

 

 

 

 

 

고전의 범주를 확대해버리는 경향은 예전에 대학교나 교육기관 추천 고전 목록이 나올 때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독으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는 오히려 그런 경향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다카시가 생각하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이란 적어도 500년에서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 검증을 받은 작품을 말한다. 여기서 다카시가 언급한 연도 횟수는 단순히 오래된 출판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널리 읽혀지고 많은 전문가나 지식인들에게 독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책을 말한다. 즉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층을 유지한 책이야말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레비스트로스나 장 지글러의 책은 지금으로서는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으나 다음 미래 세대의 시간까지 널리 읽혀지고 검증받을 수 있을지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의외로 책의 생명 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전문가로부터 인정받은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뒤인 100년, 1000년 뒤에 그 명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먼 미래의 일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나 토머스 페인의 『상식』 같은 책은 각각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이 발발하던 시기에 인기를 얻은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완독하는 독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읽겠지만,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우리는 이 책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권의 책을 생소하게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말하기에는 의미가 혼란스러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독서할 가치가 높은 책이 고전이라고 했다.

 

제 아무리 유명한 사상가들이 쓴 책도 안심할 수 없다.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어도 점점 읽으려는 독자층이 적어진다면 2100년 고전 목록에 제외될 수 있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이나 고등학교 윤리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리주의를 교과서에서 읽고 배울 뿐이지 사상의 정수가 담겨진 원전을 읽지 않는다.

 

다카시는 고전을 단순히 ‘꼭 읽어야 할 책’의 의미가 아니라 역사가와 평론가들만을 위한 책과 시대를 초월하여 일반인들이 읽은 책 그리고 역사책에 제목만 남아 있고 평론가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읽지 않는 책으로 구별되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는 그의 예측에 동의한다. 사실 세상에 나오는 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세상은 전문가만 읽는 책과 전문가, 일반인들이 읽는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가 고전 읽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고전이 ‘지식인들로부터 인정받은 책’ 혹은 ‘지식인들만 즐겨 읽는 책’이라는 일종의 엘리트 문화적 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식인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도서목록을 만들지만, 그 지식의 범위라는 것이 독자에게는 광대한 크기의 대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일반 독자는 ‘고전’이라는 지적 대륙에 발을 딛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기피하는 것이다.

 

다카시는 고전 읽기에만 충실하기보다는 최신 과학 정보를 소개한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너무 옛 것만 고집해도 그리 좋다고 볼 수 없다. 자고 나면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 최신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 고전 도서목록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전 읽기만이 독서의 전부가 아니다. 추천 도서, 권장 도서, 필독 독서에 연령별, 수준별, 교과별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고전 도서목록은 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을 옥죄게 할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고전이 ‘모두가 읽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책’이 될 것이다. 고전은 ‘모두가 읽는 책’이 아니라 ‘읽고 싶어지는 책’이 되어야 한다. 즉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책이 진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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