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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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34]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

 

 

 

 

 

  Scene #1  자유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레비는 태어났다

 

 


소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폴 엘뤼아르, ‘자유’ 중에서)

 

 


1947년 1월 27일. 프리모 레비는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다시 태어났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지 9년 뒤, 회복된 삶의 건강 위에 그리고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2년 동안 잊힌 자유의 빈자리를 회상한다. 그 책이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였다. 레비의 글은 자유 그 자체만 소개하지 않는다. 자유를 억압받는 대상의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대상들까지 묘사함으로써 ‘자유’의 의미가 잃어버린 ‘소망 없는 부재’의 시대를 보여준다.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유가 제한된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집단 수용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바로 남자라면 가게 되는 군대라는 곳이다. 그러나 자유가 아예 없는 삶과 자유가 제한된 삶은 확연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흰 종이 위에’(엘뤼아르의 ‘자유’) 등 그 아무 곳에나 자유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안식처라고 할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이 자취를 감출 때 자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유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고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용소 생활을 실감나게 다룬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같은 책을 볼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수용소의 생활은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간수 몰래 아리아를 틀어놓는 낭만적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곳도 아니다. 

 

 


 Scene #2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를 기억하기 위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레비의 증언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폭력적인 현대 역사를 가슴에 새겨 두길 바랐으며, 그래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악한 본능은 단순히 인간의 하나뿐인 삶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자유마저 강탈한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쪽)

 

 

자유는 산소와 같다. 산소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오는 것과 비슷하다. 간수와 군인들은 이미 자유의 호흡이 가쁜 수용소 유대인들의 이름마저 빼앗으려고 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을 쓸 수 없고, 부를 수도 없다. 레비의 표현대로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35쪽)이다.

 

자유가 없는 감정의 빈자리에는 끝이 없는 절망과 공포감이 채워진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과 긍정의 힘은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좌절감만 깊어져 몸과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자유가 박탈된 숨이 턱턱 막히는 수용소를 탈출을 하려면 담대한 용기와 운이 따라줘야 한다. 소중한 자유의 공기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탈출을 감행하다간 영원히 공기의 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으려면 숨이 가쁘고 답답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자유 그리고 삶의 희망이 자취를 감춰버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레비는 자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리고 고민한다. 자유가 박탈된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 될까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할까. 결국 레비는 전자의 삶을 선택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수용소 간수와 군인들의 폭력을 참고 견뎌내고, 그 고통을 잠시라도 피할 수 없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옥의 형벌에 적응해나간다.

 

그러나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일수록 동등한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대감 또한 잃어버리고 만다. 레비는 생애 마지막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의 모습을 목격한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정치범들은 자유가 상실된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 내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수용소 생활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결투이기도 하다. 내 몸 온전히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에 나보다 약하거나 병든 동료까지 지켜주는 것이 귀찮고 버거운 일이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병이 들어 죽어간다거나 간부의 군화에 죽도록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만다. 나보다 약한 동료는 지옥의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런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익사하고 만다. 간신히 구조된 자는 익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야 한다.

 

 


 Scene #3  자유라는 이름을 써도 채울 수 없는 수용소의 기억 

 

끔찍했던 죽음의 수용소가 붕괴되어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 1956년, 레비는 노트 위에 마음껏 ‘자유’라는 이름을 쓰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자유란 그토록 간절했던 소중한 삶의 반이였기에 이런 날을 무척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자유’를 10번, 100번을 쓰더라도 수용소 10개월 생활에 잃어버린 그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살아도 허전함은 여전했다. 그 때 그 기억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가 박탈되어 절단된 그의 삶에 환상사지 같은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무엇이 레비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일까?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비록 수용소가 완전히 사라졌더라도 그 곳에서 탄생된 잘못된 인식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유령처럼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수용소의 유령은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오늘날의 극우파로 옮겨 붙었다. 과거 수용소와 독일 나치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종차별적인 도그마는 지금도 평화와 화합의 건강을 위협하는 잠복성 전염병과 같다. 그러한 인식의 산물은 수용소에 살아남은 레비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자유의 빈자리에 생긴 상처를 쿡쿡 찔러대면서 고통을 안겨 줬다.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하여 유대인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로 다시 태어났지만 수용소 생활에 의한 끔찍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 결정적인 주범이 바로 수용소의 도그마였다.

 

비록 레비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비록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의 기억을 상기시켜 그 위에 ‘자유’라는 건강하고 신성한 이름으로 지우려고 노력했다. 레비의 기록문학은 화생방 건물과 같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읽음으로써 자유가 없는 숨 막히는 세상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 입과 코에 드나드는 산소처럼 자유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참으로 안락하게 살면서도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유.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언어로 말하고, 눈으로 세상을 보고, 푹 쉴 수 있는 안식처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자유의 대상을 너무 광범위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레비가 살았던 시대, 아니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마저 박탈된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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