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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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그 모든 불의들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며 적당히 자신만의 안락한 성채를 쌓는 이들이 있을 터다. 알면서도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테다. 반대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분노는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 및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 결과 생기는 정서이다. 자신보다 강자라 하더라도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두려움은 크게 줄어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집단적 분노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나 불평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에 분노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악한 자들을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해가 지날수록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크게 한 건씩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과거에 세상을 향한 분노는 아무나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를 삭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유교적 사고가 만연해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것이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분노하면 ‘너나 잘하라’는 까칠한 답변을 듣기 마련이다. 분발 없는 분노란 그저 불온에 지나지 않는 시정잡배의 것이라 교육받았다.

 

‘너나 잘하라’는 말에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사람이 만든 제도이지, 한없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해 세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리지 않고 읽히는 분노란 자기 위안이나 만족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책은 분량이 짧아 단박에 읽을 수 있지만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묵직하다. 분노는 소중한 일이며 분노의 힘은 참여의 기회를 가져온다고,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를 보고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다.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맞서 싸우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하릴없이 스마트폰 화면에만 시선이 향하는 요즘 젊은이에게 과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의 사회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진 금권, 극빈층과 부유층,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 등을 세상을 위협하는 불의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분노하라고 외치는 프랑스 사회의 병폐들은 우리 사회의 병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도덕적 해이를 넘어 불법과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관료제의 병폐가 그것이다. 또한 권력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일부 언론 등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분노가 전국 도처에서 들끓고 있다. 그의 호소가 먼 땅에 사는 한국 사회의 가슴을 데우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이상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해 어떻게 분노할 지 가장 중요한 화두를 적절한 시기에 던져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년째 되는 지금 이 순간도 에셀의 메시지는 유효하다. 분노가 필요할 시점이다.

 

현 정권과 유착된 일부 보수 언론이나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우리 사회의 분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좌파 세력의 선동질이라고 비난하고 평가 절하한다. 그들은 분노가 사회의 잠재된 폭력성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이나 그 질서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대중에 대해 증오하고 적개심을 품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책 제목이 ‘분노하라’이지 ‘폭력하라’가 아니다. 분노는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한 단순하고 원시적인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비폭력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그것을 바꿔나가는 변혁의 자세이다. 에셀이 말하는 분노란 저항을 품은 분노, 생산적인 분노, 창조적인 분노이다. 따라서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란 불의의 대상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체제다. 권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권력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자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다. 평화롭게 저항하는 분노는 불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지지하고, 적극적인 투표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 문제는 불쑥 우리 곁에 나타나고, 또 대중은 그 문제의 개선을 요구한다.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는 지식인층도 중요하지만 젊은이들로부터 나타나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좀 더 나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자신에게 당면한 개인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은 ‘나 혼자로 되겠어?’, ‘일단 나 하나 잘 살고 보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장래 걱정하느라 대학생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무원시험에 집중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보궐선거에 나가는 지역구 후보에 누가 나가고, 그들이 내건 공약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국회에서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의 무능함을 이유로 정치에 냉소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속박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을 이렇게 강요하고 부추긴 세상 속에는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얼마든지 많다. 인권과 생태, 환경, 빈부 격차 문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의 문제 등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태, 환경 문제에 귀 기울이는 일 역시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사회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한순간의 성난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비판과 함께 체계화된 절차를 거쳐 우리 생활을 침식하는 불의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목적지향적이어야 한다.

 

분노는 개인의 안위를 떠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아가야 한다.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에 맞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냉소적인 자세로 내 것만 챙기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고통스럽게 인내하면서 무관심한 척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화내며 끼어들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그래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학습돼 점점 무관심의 늪에 빠져 죽어간다. 그 사이 세상은 악한 자들이 쥐고 흔든다. 결국 그 부조리의 칼은 우리의 삶을 향할 것이고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현실을 보면 분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고 분노할 마음조차 억압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놓아버리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정의가 영영 사라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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