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

 

 


사람의 마음을 짜릿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주던 꽃들도 질 때가 되면 더없이 흉한 몰골이 된다. 꽃망울이 터진 지가 언제인데 꽃들은 벌써 옷매무새를 여미고 있다. 누가 불러 저토록 빨리 지려 하는가. 몇날 며칠 그늘을 깔아 주던 땅 위에 마음껏 꽃잎들을 부려 놓고선 나무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꽃망울이 늦게 핀다고 비닐봉지로 벚나무를 씌우던 광경은 아릿한 추억처럼 선명하게 눈에 밟혀 온다. 이제 가진 것 없이 말쑥하게 꽃잎을 떨어낸 벚나무. 그나마 푸릇푸릇 잎이 올라와 허전함을 달래 주지만 바람 불 때마다 날리는 꽃잎들은 여전히 지난날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겨울 끝자락의 질투를 견디지 못해 모가지 뎅강 꺾어 바닥으로 떨어진 채 슬픈 연가를 부르며 누워 있는 꽃들이 수북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자며 여심처럼 봄날을 만끽하던 벚꽃은 이제 그 때의 추억을 가슴에 묻은 채 아득한 영면에 들어 있다.

 

질 때는 속절없이 져도 그 추억은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나뭇가지에 붙어 한 계절 능히 붉은 열정으로 불태우던 꽃들이기에 그 추억의 향기도 오래 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잔잔한 꽃 물살을 일으킨다. 사람은 한번 가면 오지 않아도 꽃들은 내년 봄이면 다시 핀다. 소리 없이 꽃잎 다 떨군 나무에 슬퍼하지 말고 푸르름 짙은 잎새가 희망처럼 허공을 쑥쑥 밀고 올라오길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