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아니 어쩌면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자부했듯이 실제 조선이라는 새 국가 건설의 최고 주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건국 후 7년이 채 못 되어 이성계의 아들이자 정적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그에게는 ‘역적’이라는 불명예가 따랐고 조선의 역사에서 한동안 그의 이름은 지워졌다. 정도전이 조선의 국정방향을 제시한 『조선경국전』에 피력된 정치사상은 그의 비참한 죽음의 단서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총재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총재라는 것은 위로는 군부(君父)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자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크다. 또한 인주에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현명한 이도 있으며, 강력한 이도 있고 유약한 이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총재는 인주의 장점(美)을 살리고  단점(惡)은 고쳐야 하며, 옳은 일은 받들어 봉행하고, 옳지 않은 일은 바꾸도록 해야 한다.” (46쪽)

 

정도전이『조선경국전』에서 밝힌 재상의 역할 부분이다. 군주는 현명함과 무능함의 차이가 있지만 재상은 가장 능력 있는 자가 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재상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1394년에 편찬된 『조선경국전』은 조선 건국의 이념과 통치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책. 훗날 조선의 헌법이 되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되었다.

 

중국 ‘주례(周禮)’에 바탕을 두고 치(治), 부(賦), 예(禮), 정(政), 헌(憲), 공전(工典)의 6전 체제로 정리하였으며, 6전의 앞부분에는 치국의 기본이 되는 정보위(定寶位), 국호, 국본, 세계(世系) 등의 내용을 기술하였다. 6전에서는 능력본위의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 선발,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군현제도와 호적제도의 정비, 언로의 개방, 사대외교의 중요성, 인(仁)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의 지양 등 고려 말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건국한 조선사회가 가야 할 방향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도전은 새로운 조선을 이끌 중심은 왕이 아닌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점, 즉 왕권보다는 재상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확보를 위해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와 연합하여 그녀의 소생인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한다. 태조의 적자 소생의 아들보다는 계비 소생의 어리고 허약한 왕자가 그의 구미에 맞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재상권 강화 시도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된다. 왕자들의 병권약화를 위해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추진하자, 1398년 왕권 강화론의 대표주자 이방원은 그가 지휘한 군사들을 보내 송현(松峴)의 남은의 첩 집에서 방심하고 있던 정도전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재상 중심의 조선을 꿈꿨던 정도전에 대한 왕실의 대반격이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정도전은 단지 시운을 타고난 정치가이자 야심가가 아니라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었던 개혁가이자 국가 경영에 필요한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절세의 경륜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사, 총무, 예산, 의전, 국방, 법무, 건설 부문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각 조항 곳곳에서 느껴지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깊이 느끼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정치가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그가 그린 이상국가의 모습은 수도 서울의 사대문 이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과 종각역에 있는 보신각의 이름을 모두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한다. 숙정문의 정자가 지(智)와 매한가지라 하니 사대문 이름 속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들어있고, 보신각의 신자가 ‘믿을 신’(信)이니 수도 서울을 인의예지신의 본향으로 삼고자 했던 그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민유방본(民惟邦本). 조선시대 부흥을 이끌었던 세종, 정조를 비롯한 대다수 제왕들의 통치이념, 리더십을 관통하는 정치사상이다. '백성이 근본'이라는 정신을 담고 있다. 그 핵심 덕목은 위민(爲民),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경외(敬畏)에 있다.

 

정도전은 백성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낙생(樂生)에 있다 했다. 즉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도자를 부모처럼 따르고 나라를 뒤엎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민유방본에 녹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목표는 민본에 있다. 민본정치를 위해 정치의 틀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적 요구라면 독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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