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이성계,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1392년 이성계가 왕좌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8도 도통사 최영과 우왕, 창왕을 제거했을 때 이미 예견됐다. 그의 조선건국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논쟁적인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학자들 중에는 ‘황금을 돌같이 보라’던 최영 장군과 ‘이 몸이 죽고 죽을 때까지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는 정몽주를 죽인 점을 보더라도 이성계는 잔혹한 쿠데타 세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문적으로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칭한다. 쿠데타는 지배자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혁명과 달리 민중의 지지가 없다. 쿠데타는 또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파의 체포. 탄압, 정부요인의 납치, 암살, 군사적 강압 등을 배경으로 한다. 또 언로를 장악하고 대국민 선전에 나선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명백히 쿠데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성계의 건국 과정이 아니라 그의 집권이 대다수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건국과정의 불법과 폭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지배층간의 권력투쟁만 살피는 오류에 빠진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오직 권력투쟁에서 승리했을 뿐인가, 대다수 국민의 삶을 이전보다 나아지게 했는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조선을 건국할 당시 고려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왜구가 날뛰었고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비옥한 땅과 소금 생산, 목축에 유용한 토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조세수입은 줄었고 해로를 통한 운송은 불가능했다. 해안의 조세 창고는 모두 내륙으로 이동했다. 왜구가 날뛰고 있었지만 고려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권문세족의 토지 장악으로 농민의 조세 부담은 도를 넘었고 국가 재정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세금을 낼 수 없는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성계는 권력을 장악한 후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권문세족의 농장을 해체하고 신진사대부에게 고루 토지를 나눠줬다. 문란한 조세제도를 고쳐 농민생활을 안정시켰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지방을 8도로 개편하고 고려 때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역까지 수령을 파견했다. 중앙에서 직접 전국 구석구석을 살피겠다는 의지였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명백히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의 쿠데타가 다수 백성에겐 유익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 이성계가 가장 크게 비판을 받는 부분은 새 왕조 건설이다. 굳이 기존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있는 한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와 국민은 왕과 왕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정부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고려 왕조가 유지돼야 할 이유는 없다.

 

정도전은 ‘임금은 하늘이 만들어 준다’고 했다. 민심이 떠나면 왕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분명히 고려를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의 변명이다. 그러나 ‘민심은 언제든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진리다. 이 진리는 고려뿐만 아니라 어느 왕조에나 똑같이 적용된다.

 

 

 

 Scene #2  두 건국 공신의 엇갈린 운명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한번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 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기게 되리라."

삼봉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의 건국과 치세 이념을 밝힌 대목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자는 천하를 한순간에 잃게 된다는 사실을 건국에 즈음해 만든 법전에 명시해 놓았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그는 역성(易姓)혁명의 당위성을 국민저항권에서 찾았다. 정도전은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라 했다. 임금보다는 나라가 더 위에 있고 나라보다는 백성이 더 상위 개념임을 제시했던 것이다.

 

 

 

왕(王)이란 글자는 본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도끼를 상형한 글자라고 한다. 조선왕의 면복에도 도끼 무늬가 들어 있었다. 정도전과 이방인은 서로 도끼를 쥐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다. (77쪽)

 


이성계의 뜻에 따라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이 아닌 재상이 중심이 되는 입헌군주제를 꿈꿨다. 바로 이러한 재상중심체제와 세자 책봉문제 탓에 정도전은절치부심 비수를 간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살해당한다.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에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개국한 새 왕조 조선이었기에 이방원의 야심은 당연히 왕권에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국권의 조건도 너무나도 달랐다. 어느 왕조에서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다툼은 치열했다. 조선 왕조 초기, 태종과 정도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표방한 왕도정치도 곧 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반면 이방원은 강력한 왕의 권위를 고집했다. 결국 정도전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태종은 역대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정도전이 혼신의 정열을 쏟으며 이루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백성을 근 본에 둔 이상적인 국가였다. 정도전의 천재적인 열정과 천년대계의 꿈은 왕권에 눈먼 이방원 일파에 의해 허망하게 꺾였고 조선조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폄훼되고 소외 됐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혁명정신은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시켰고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Scene #3  부흥의 기지개를 켜다


경도 한성부에 관한 세부적인 설명(92~93쪽), ‘민음 한국사’ 시리즈는 풍부한 도판뿐만 아니라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기존의 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한국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자였던 방석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과 형 방간을 제거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즉위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가장 먼저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래서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사병을 없애 군사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의정부를 두어 재상들이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왕이 크고 작은 나라 일을 결정하고 6조로 하여금 왕명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왕권이 확립되자 호패법을 실시하여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조세 징수와 군역을 활용했다. 대내외적으로 태종은 18년간의 왕위 동안 국가의 모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명·일본·여진 등 주변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다. 특히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병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을 주도했다.


이렇게 태종 때에 확고한 왕권의 안정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의 발판을 다졌다. 이런 태종의 노력으로 세종 때에 조선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태종 시우리가 눈여겨 봐야하고, 이제는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이하 ‘강리도’)이다. 지도 이름인데 너무 길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는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정말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조선 건국 초기에 나온 이 지도도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계의 지리학자들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만들어진 강리도를 보고 놀란다. 유럽도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페인은 금방 식별할 수가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 1492년에 아메리카를 조우하게 될 제노아 사람 콜럼버스가 이 지도를 보았다면, 자신의 고향을 이 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지팡구(일본)와 카타이(중국)가 얼마나 큰 지 놀랐을 것이다.


일본의 모습이 비록 작게 그려져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들은 큐슈와 혼슈의 위치 잡기가 상당히 정확하고, 간토 이북의 묘사도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교기 지도보다 낫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 열도의 위치를 한반도 남쪽에다 그려 넣어 전체구도가 일그러졌고, 위도도 뒤집어져 있지만, 이는 여백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편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대교린의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애써 세계지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에서 가져온 지도를 그냥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자주적으로 세계지도를 그렸다. 국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동수복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태종은 권근과 이회에 일러 우리 시각에 선 세계지도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남쪽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기 때문에 건국 초기 조선은 해외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의 세부 설명 (65쪽)

 

 

이회는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명에서 가져온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성하였고, 일본에도 사람을 두 차례나 보내 지도를 구하고, 실제조사를 하게 하였다. 강리도는 15세기 조선의 지도제작자들이 얼마나 외부의 정보를 가공하고 합성하는데 뛰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그리스의 위대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아랍-페르시아의 지도 제작자, 중국과 일본의 지도 제작자들의 지식이 훌륭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실측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과 조선이 대단히 크게 그려졌고, 일본은 왜소하게 그려졌다. 실제로 중국과 조선의 상대적 크기는 50:1이지만, 지도에서는 5:1로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크기가 10배나 부풀려진 것이다. 한반도보다 2배의 크기를 지닌 일본열도도 지도에서는 1/5 가량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역시 이것도 10배나 부풀려져 있는 셈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 나머지 세계도 대단히 축소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인도 대륙도 해안선에 붙어있어 금방 식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당대 조선의 국제정치적 관심을 보여주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심상지도(心象地圖)인 것은 분명하다.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왕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간다. 너는 태평의 시대를 열어라.”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반을 굳건히 했다. 이런 태종의 노력은 세종 때에 그 결실을 맺게 된다. 건국의 꿈으로 뒤척이던 조선은 이제 부흥의 기지개를 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