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프로젝트 - 4할 타자 미스터리에 집단 지성이 도전하다
정재승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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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말을 아는가. ‘요시(よし)’는 ‘좋다’는 뜻의 일본어다. ‘그란도 시즌(グランド シ―ズン)’은 ‘그랜드 시즌(grand season)’이란 영어의 일본식 발음이다.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원하는 것을 얻게 됐을 때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감탄사를 쓰면 적절하다. 비슷한 말로 '라지에타가 터졌어'가 있다. 꼭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뭔가 인상적이고 강렬한 일이 터졌을 때 두루 쓸 수 있는 감탄사다.

 

 

               

 

인터넷에 '백인천 요시'라고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백 전 감독의 '요시, 그란도 시즌' 동영상  

 

이 표현의 특별한 의미는 야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잘 알 것이다. 2008년 일본 센트럴리그에 소속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던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때렸을 때 TV 해설을 하던 백인천 전 야구감독이 흥분하면서 뱉은 표현에서 유래했다. 당시 이승엽 선수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09일 만에 터진 첫 안타가 시즌 1호 홈런이었던 것.

 

이승엽 선수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자 백인천 전 감독은 흥분 상태에서 “요시, 아~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아주 그냥” 등의 말을 쏟아냈다. 백 전 감독은 일본 생활을 오래 해 평소 일본식 표현을 쓸 때가 많다. ‘그란도 시즌’은 만루 홈런을 뜻하는 ‘그랜드 슬램’과 시즌 1호 홈런을 실수로 합쳐 말했다는 설과 이승엽 선수에게 ‘좋은 시즌’이 시작됐다는 의미로 말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후 ‘요시, 그란도 시즌!’과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는 일본식 표현이 주는 묘하게 입에 붙는 느낌과 이승엽에 대한 야구팬들의 관심 등이 어우러져 네티즌 사이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해설 음성은 인터넷에 이승엽 선수 관련 이미지를 올릴 때 꼭 함께 쓰이는 합성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이승엽이 슬럼프 끝에 안타나 홈런을 치게 되면 네티즌들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라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Scene #2  4할 타자는 왜 사라졌는가?

 

뜻하지 않은 감탄사 한 마디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어 해설위원으로서의 백 전 감독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선수 시절에 남겼던 개인 성적이 ‘백인천’이라는 이름 석 자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다.

 

한국 프로야구 30년사에서 최고의 타율기록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MBC청룡에서 뛰었던 백 전 감독이 기록한 0.412(4할1푼2리). 그 이후로 4할대의 타자는 아직껏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야구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서도 요즘 4할 타자를 보기가 쉽지 않다. 1941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가 0.406을 기록한 이후로 메이저리그에서 4할의 타율은 자취를 감췄고, 일본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작년 60개로 일본 한 시즌 최다 홈런과 동시에 아시아 리그 최다 홈런을 기록(종전 기록이 이승엽의 56개)하여 일본 리그를 평정한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시즌 타율은 0.330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아주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명 백인천 프로젝트. 한국 프로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없어졌는지 그 이유를 밝히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트위터를 통해서 이 작업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았다. 자료를 모을 사람, 통계 처리를 할 사람, 자료 분석을 담당할 사람, 홈페이지를 만들 사람, 논문을 작성할 사람 등이 집단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중에 과학자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시민들이다. 참가자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통계 전문가, 야구 데이터 수집가, 직장인, 대학생, 야구광... 연구자의 눈으로 보면 오합지졸일 수도 있는 참석자들이 각기 움직이며 질문도 답도 스스로 찾아내서 연구를 한 끝에 드디어 작년에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사실 4할 타자의 멸종에 관한 궁금증은 야구팬들의 수다거리로만 여겼던 주제였다. 그러다가 진화생물학자이자 골수 야구광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최초로 과학의 연구 주제로 끌고 들어왔다. 진화론자답게 굴드는 4할 타자 실종을 시스템의 진화적 안정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이저리그는 정착화 되고 팀이 이길 수 있는 다양한 전략들이 등장한다. 이렇다보니 점점 최고 타율의 선수와 최저 타율 선수 사이의 차이가 줄어든다. ‘신계’에 가까운 뛰어난 실력을 가진 테드 윌리엄스 같은 특출한 선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대표적 진화이론인 ‘외부의 유입이 없는 닫힌 계에서는 진화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돌연변이 확률이 떨어진다’는 내용을 야구에 적용한 것으로, 메이저리그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굴드의 가설 이외에도 야구계에서는 ‘타자의 기량 약화’, ‘투수의 전문화와 기량 향상’, ‘타자에게 불리한 룰과 심리적 압박감’. ‘경기장의 변화’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여러 가지 가설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프로야구는 타율 향상 폭이 연평균 0.3리가, 출루율은 연평균 0.6리가, 장타율은 연평균 1.1리가 각각 상승하는 등 기존 야구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타자의 기량 약화'가 아닌 타고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투수 지표는 평균자책점(ERA),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 9이닝당 삼진수(K/9)를 분석한 결과 기록 하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투저’ 현상을 확인됐다. 이러한 ‘투저타고’(투수는 성적이 낮고, 타자는 성적이 좋음) 현상의 입증을 통해서 ‘타자의 기량이 떨어져 4할 타자가 사라졌다’, ‘투수 성적이 높아져 사라졌다’는 속설도 틀린 셈이다. 결국 굴드의 가설이 4할 타자의 실종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타당성이 증명되었고, 한국 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동안 선수들 사이의 기량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튀는 선수가 사라지고, 4할 타자가 나타날 확률도 그만큼 낮아졌다.

 

 

 

 Scene #3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이미 입증된 결론을 검증한 연구 결과가 다소 허무할 수도 있겠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기량이 점점 떨어지는 이 슬픈(?) 사실을 알게 된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맥이 풀렸을지도.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4할에 가까운 성적을 달성했던 선수들이 있었다. 앞으로도 4할 타자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전설의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말을 잊지 말자. 한 시즌 끝났다고 해서 야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드디어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지 않은가. 제2의 백인천의 등장을 기대하면서 앞으로도 특별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확보된 데이터는 한국 야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야구학의 측면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무려 58명의 아마추어 과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해 외국 잡지에 제출할 만한 논문을 완성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넘어 ‘과학의 대중적 참여’가 가능한지를 탐색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 덕분에 야구를 몸으로 직접 뛰며 하는 동호인이나 데이터를 분석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마니아 모두 야구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것이다. 일단 시동이 걸린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디까지 진화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 같다. 마음에 품고 있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라지에타처럼 지금 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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