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예술, 미적 상실의 시대

 

 

 

 

 

 

 

 

 

 

 

 

 

 

 

 

1962년, 앤디 워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화랑에서 캠벨 수프 깡통을 실크 스크린 방식으로 그린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길 건너 경쟁 갤러리는 실제 깡통을 쌓아놓고 “우리는 진짜를 단돈 29센트에 판다”는 문구로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아서 단토는 워홀의 깡통 그림을 웃으면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똑같이 만들어 전시한 워홀에 대해 아서 단토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지성을 가졌다고 말했으니까.

 

 

        

 

 

앤디 워홀  「캠벨 수프 깡통」 1962년 / 「브릴로 상자」 1964년

 

 

진품과 똑같이 여러 개 그린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상자의 모사본을 높이 쌓아서 슈퍼마켓의 창고처럼 전시한 브릴로 상자는 워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예술품이다. 그렇다면 왜 공장 사람들이 만든 캠벨 수프와 브릴로 상자는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단토는 ‘창작자의 의도’를 작품의 한 근거로서 제시한다. 예술가가 제목을 달아 작품으로 전시함으로써 어떤 물리적 대상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의미론적 기능’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주관적 의도나 의미가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관적 의도가 객관적인 맥락 속에서 수용돼야 한다는 점을 단토는 강조한다. 그 ‘객관적 맥락’으로 단토가 지목하는 것이 예술계(예술가, 예술비평가 등), 예술사, 예술이론이다. 그것이 이해될 때, 수프 깡통 같은 평범한 사물이 예술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단토는 예술은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예술의 영역과 정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을 의미한다. 해방된 예술가들은 이제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예술이 끝났다는 의미보다는 예술의 목적이 상실된 것이다. 어떤 양식이 어떤 양식보다 미적으로 낫다는 판단이 무의미해진다.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미술을 시각의 문제가 아닌 철학의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화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다. 자신의 소박성과 고뇌, 철학을 조형언어인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화가들 스스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느꼈던 행복의 20세기는 지났다. 워홀의 선구적인 작업 때문에 이제 무엇이든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 그동안 고고한 예술의 산정에서만 놀던 예술이 일상생활로 하산한 격이다. 기존의 영역에서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치기에는 한계가 왔을 뿐더러, 예술과 상품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가 됐다.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파괴된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로, 무엇이든 작품 대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예술은 죽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1969년

 

 

영국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작년 5월 12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4240만 달러(1528억)에 낙찰됐다. 이 낙찰가는 2012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1990만 달러(1200억)에 팔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의 가격을 갱신한 것이라 한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미술시장의 뉴스는 보통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과연 무엇이 이토록 가격을 폭등시키는 것일까? 영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인 매튜 키이란은 그의 저서 <예술과 그 가치>에서 이러한 질문에 하나의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예술작품이 실현할 수 있는 가치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치들이 미묘하고 복잡한 상호관계를 이루며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원본성, 일품성, 상상력, 독창성, 진실성, 도덕성 따위의 요인들이 예술의 가치를 만드는 다양한 요인들이며 결과적으로 인문학 이론에 정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가 인문학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런던이나 뉴욕에서 전해오는 작품가격의 고공행진 소식을 제대로 납득하기는 힘들다. 오늘날 예술의 가치는 인문학적 혹은 미학적 가치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대부분의 국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된 것처럼 오늘날 현대미술의 현장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경제의 메커니즘이다.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장에 올라온 작품이 비싼 것은 상업적 메커니즘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경매회사라는 거대자본업체의 시스템은 작품에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강력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그림 경매에 나서는 큰손들은 현대미술의 오묘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는 것일까? 그림을 자신의 미적 취향을 위한 컬렉션이 아니라 투자 대상으로 그림을 사들인다. 이들의 미적 기준은 그림 값이 얼마냐 오르느냐 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은 바로 무가치, 무의미, 비의미를 요구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미 무가치한 데도 더욱 열렬하게 무가치를 지향한다. 일종의 반대추론을 이용한 교묘한 속임수다. ‘무가치하다’고 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급스러운 미술관 갤러리의 분위기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포장하는 평론가들이 합세하면 대중은 주눅이 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마저 갖게 된다. 이를 두고 조직적인 전문가 범죄라고 보드리야르는 일갈한다. 실제로 수백억, 수천억의 돈이 오간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꽝인 것,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기에 모호하게 아이러니와 지적 유희를 방패삼아 자기유용성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을 보드리야르는 현대 예술의 운명적 귀착점으로 봤다. 종말의 시작을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등장한 60년대로 잡고 있다. 브릴로 박스는 캠벨 수프 깡통과 더불어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본격적으로 무너뜨린 작업이었다. 한마디로 ‘뭐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선한 예술은 이제는 일률적으로 돼 버린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워홀과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은 모방에 불과할 뿐이며 새롭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을 ‘암세포의 증식’으로 비유함으로서 ‘무가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아서 예술은 죽는 것이다.” (보드리야르)

 

 

 

 Scene #3  예술가들은 우릴 보고 비웃지

 

 

 

 

 

 

 

 

 

 

 

 

 

 

 

현대미술의 무가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몰래카메라 실험 하나 소개하겠다. 두 마리의 침팬지가 물감으로 마음대로 그리도록 한다. 침팬지가 마구 그린 그림 두 점을 가지고 부자 동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이름은 <제3세계에서 온 미개인전>. 그림의 화가가 침팬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림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재미있게도 관객들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봤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명망 있는 어느 주간지의 미술평론가는 ‘유럽 화가, 특히 말레비치와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들을 감상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몰래카메라의 실험 결과를 통해서 우리, 심지어 미술평론가마저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현대미술에 대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미술평론가들의 모습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나체의 임금님이 착한 사람만 보이는 멋진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신하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술평론가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머 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 이러한 평론과 알 수 없는 현대 예술들을 두고 통렬한 비판과 풍자를 던진다.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천문학적인 작품가격과 알 수 없는 평론으로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평론가들의 권위와 미술품시장에 많은 부분 좌우되는 현대미술의 기만성을 비판한다. 현재에 와서 현대 미술에서는 시선을 끌기 위한 의미 없는 기획들이 재생산될 뿐, 아름다움이란 도무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지속된 그의 현대미술 비판들을 통해서 그는 많은 ‘대중’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많은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예술 이해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예술을 모르는 속물’ 취급을 받아야 했다.

 

다시 몰래카메라 이야기를 들자면, 침팬지의 그림에 대해 ‘나는 저 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비평가들이나 미술을 좀 안다는 고고한 사람들에게는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하겠지만, 실상 지극히 당연한 생각인 것이다.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현대예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겁에 질려서 “나는 전혀,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외칠 뿐이다.

 

책의 제목인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피카소가 자신의 유언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비웃었다는 가정에서 나왔다. 키숀에 따르면, 실제로 재능으로 충만했던 피카소는 대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저 뭔가 자극을 원하는 시대와 영합했을 뿐이고, 이 유언장에서 그러한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피카소,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중에서)

 

이 모호한 유언장을 피카소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현재 피카소가 스스로 기대했던 것 그 이상, 혹은 뭔가 다른 것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그림값과 이름값으로 재벌과 미술평론가들에 의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Scene #4  예술의 종말이 곧 예술의 민주주의?

 

이들이 공유하는 예술 개념과 예술 이론에 의해 작품이 해석되어지고 예술작품으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경계하게 되는 것은, 예술이 부와 고상함, 그리고 학식을 상징하는 차별화에 이용됨으로써 특정 집단, 특정 계급의 전유물로 독점화된 채 머무르는 것이다.

 

 

 

 

 

 

 

 

 

 

 

 

 

 

 

 

서평가 로쟈는 단토의 ‘예술의 종말’을 소개하는 글(‘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한겨레, 2008. 5.27)을 일상적인 사물이 예술작품이 되는 이 종말의 시기를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의미, 곧 예술의 완성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컨템퍼러리 미술이 워홀과 뒤샹 이후로 여전히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되고 있을 정도로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나 현대미술을 여전히 어렵게 생각하는 우리가 예술창작자가 되어서 ‘예술계’의 수용 범위로 진입되기에는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즉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민주주의 그리고 예술의 완성으로 이르지 못했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울지 몰라도 관객 또는 예비 예술창작자가 되기 위한 일반인들은 예술계가 만든 그들의 경계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오늘날의 예술은 완성되었다기보다는 예술가, 전문가 그리고 예술을 아는 척하는 엘리트들만 향유하는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모독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리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직도 입을 열 엄두를 못하고 있는 이른바 교양을 지닌 식자층이다. (에프라임 키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169쪽)

 

단순히 미술작품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의 예술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간의 삶과 정서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점점 더 알 수 없다고 느끼며 전문가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단지 수십억을 호가하고 저명한 언론으로부터 극찬 받은 작품에 딱히 감동 받지 않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부족한 문화적 소양 탓을 할 필요는 없다. 진짜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미술에 ‘미’자도 모르면서 돈으로 그림을 사들이는 재벌과 뭣도 모르면서 현학적인 문장만 늘어놓은 전문가들이다. 우리가 동시대의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예술의 종말’이다. 예술이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뻥이라서 예술은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