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불운했지만, 유쾌했던 르네상스인

 

 

 

 

 

 

 

 

 

 

 

 

 

 

 

 

정치판을 둘러싼 음모와 야욕, 배신 따위를 말할 때 우리는 곧잘 마키아벨리를 들먹이곤 한다. 마치 ‘권모술수의 화신’ 이라도 되는 양 그는 주로 이렇게 비쳐져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 일개 서기관에 불과했던 그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남긴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보는 것이 곧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평생을 보냈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기는 르네상스를 둘러싼 전후시기였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때였기에 그에 맞는 정치사상이 태어날 수 있었다. 도시국가 중심의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넘보는 프랑스, 에스파냐와 같은 외부세력간의 힘겨루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갈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등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만약에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군주론』과 같은 작품은 아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너무나 즐겁게 수행했다. 『군주론』은 복직을 위해 피렌체의 명문가였던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키아벨리는 일개 서기관 보다는 정치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엉뚱했고 불운했지만 늘 유쾌한 남자였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서기관 이라는 자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였다. 자리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매우 많아서 모든 정보는 자연히 그에게로 집중되는 자리였다.

 

그는 용병제가 판을 치던 당시에 국민개병제를 주창했다.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채 돈만 써서는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이상주의자로 비쳐졌던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엔 당연시 여기는 현실이 되어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의 위세가 아직 등등해서 정치를 윤리와 동일시하던 때였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정치현실을 꿰뚫어 본 정치사상을 내놓았으니 당시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권모술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해놓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바친 『군주론』을 메디치가에서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반 메디치가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의 복직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남긴 책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권모술수의 달인쯤으로나 생각하게 만들어놨으니 그는 불행한 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Scene #2   현실주의적 단호함을 택한 마키아벨리

 

그를 향한 세상의 낙인은 죽은 뒤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주론』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오늘날 상식이 된 ‘사악한 마키아벨리’라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시기에 교황과 교회가 자신들과 대립했던 군주들이 저지른 잔악 행위들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는 1495년 피렌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제정치를 하던 메디치가가 추방당하고 공화국이 복구되면서 자유를 보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기에 반란 지도자는 상당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공화정을 위한 강력한 단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반란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는 인내와 선량함만 있으면 적절한 보상을 통해 유혈 사태 없이 사악한 파벌들을 근절하고, 왕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잔당들의 야망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의 우려대로, 이러한 소데리니의 순진한 예상과 달리 1512년 피렌체가 카를5세 군대에 정복된 뒤 살아남은 왕정의 잔당들은 소데리니를 제거하고 다시 전제정을 복원하고 만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도시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양심에 굴복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잔혹한 조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점만이 부각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이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그가 사태에 관한 뛰어난 현실주의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뛰어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하는 체사레 보르자는 피렌체 국경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위협적인 군사적 강자였다.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추기경이 되었으나, 성직자 신분을 버리고 칼을 잡아 속세의 군주가 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1502년 12월 로마냐 통치를 담당하던 보르자의 부하 레미로 데 오르코의 강압적인 통치에 로마냐 시민들이 분노를 폭발시키자 보르자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오르코의 잔인한 폭정 때문에 눈 덩이처럼 불어난 시민들의 증오심은 로마냐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르자는 놀라운 기민함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는 즉시 오크로를 소환했고, 나흘 후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시체는 모든 시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그곳에 계속 방치되었다.

 

이 사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오로지 공과에 따라 부하들을 완벽하게 통제했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재빠르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키아벨리는 음모적이고 신속한 살해 명령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로마냐의 무질서를 효율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Scene #3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냐 아니면 전제군주를 옹호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에 도전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와 루소, 디드로였다.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는 『로마사 논고』이다. 이 책에서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군주론』만 읽은 독자라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군주론』만 읽는다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로마가 성공을 거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면, 피렌체 역시 그런 성공을 또다시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이룩한 업적의 비결을 단 한 줄로 요약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도시국가들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결코 지배와 부를 증진시킬 수 없었다.”

 

우선 고대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정에서 해방된 뒤 100년이 지나는 동안 눈부시게 번영했다. 로마도 왕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얼마나 위대해졌는가?

 

마키아벨리가 자유를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정치적인 예속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는 독재자로부터의 예속으로부터, 국외적으로는 제국의 힘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뜻했다. 이것은 피렌체가 위대해지려면 국내에서 독재를 없애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같은 강대국들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그랬듯이 대중 지배의 지속이 군주제 형태의 정부와 얼마든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체제를 더 선호했다.

 

 

 

 Scene #4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가 “정치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무도덕, 즉 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며 윤리적인 행위나 선악이 가치 기준일 수 없으며, 국가를 존속시키는 수단이라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 때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행하는 모든 잔혹한 조치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정치 행위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그 행위의 효율성과 유용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보았을 때 정당화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목적은 공화정의 건설 및 존속이나 시민 자유의 수호와 같은 가치들이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옹호했던 군주의 테러 조치는 그러한 조치가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원칙적으로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자비심을 베풀어 혼란을 초래하고 약탈과 유혈 사태를 빚게 하기보다는 잔인함을 보여 주어 무질서를 진압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자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살아있다면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폭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주론’의 구절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마키아벨리가 외교관으로서 목격했던 당대 군주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를 둘러싸고 벌였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 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전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통치자들이 내세우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테러적 방법을 ‘미덕’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는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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