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의 탄생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지만 고도의 지능과 욕구를 가진 까닭에 다른 동물 세계와 비교해 수준 높은 사회와 문화를 이루며 이를 무대로 삶을 살아간다. 무엇을 얻을지,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 인간 욕구가 지적 활동을 이끌어 낸다. 이 결과로 얻은 지식·정보가 수단과 방법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는 시작과 더불어 욕구 실현은 물론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를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인 지식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인간 사회는 무엇 때문에 책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먼저 책을 보면 단순하게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다. 하지만 책에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면 종이 여러 장이 묶인 물건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은 인간과 주변 사물에 대해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또 관찰과 측정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정리한 지식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지식과 정보는 인간의 욕구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회와 문화를 이루고 발전시켰다. 책을 읽고 독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문명사회에서 책 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지식에의 목마름 때문이든지, 교양을 향한 딜레당트적 취향 때문이든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든지, 우리를 책으로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책을 향해 뻗는 손길은 아름답다고 상찬된다. 목적을 따지지 않은 독서를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 지식과 진실의 보고(寶庫)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증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 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모욕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이익과 모욕을 피하려고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마치 읽은 것처럼 거짓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뜻밖에 많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일생을 책 읽기에 바친다 해도 우리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신성한 것이고, 어떤 책을 읽지 않거나 대충 읽는 것은 눈 밖에 나는 일이다.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눈총받기에 십상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저자나 작품은 자칫 잘못 엮이면 빈곤하고 천박한 당신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짐짓 얼마나 선호하는지 숨기기도 한다.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어떤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드는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지적대로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책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다. 오히려 습득한 정보를 남들에게 과시용으로 비평하기 위한 총구가 있는 ‘무기’가 되었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혹은 지식)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러면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정통하고, 일가견이 있는 지식인 대접을 받게 된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4~1596년

 

지식이나 정보라는 게 이토록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 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21~22쪽)

 

 

사사키 아타루는 ‘비평가’란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자크 라캉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신을 ‘똑똑한 만능인(지식인)’이 되는 ‘향락’에 빠지게 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외모에 스스로 반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결국, 똑똑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비평가에게 책은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일 뿐이다. 이러한 비평가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마냥 우쭐대거나 악의에 찬 지적질을 할 것이다. ‘지식의 우월함’을 앞세워 자신보다 부족한 상대방의 기를 억눌리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복종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자칭’ 비평가들이 넘쳐 난다. 우리 주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소아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비평적 판단력이나 감식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 텍스트나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앞세운 발언을 일삼는 등 여러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읽고, 고쳐 읽고, 쓰며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읽은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사키 아타루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저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가차 없는 제목을 단 사사키 아타루의 생각은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이었는지를 제목만큼 호기롭게 들려준다.

 

책은 비평가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지식의 무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수준을 비교하거나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무기를 많이 보유하는 나라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느껴진다. 최근에 우리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통계조사 결과, 우리 대학생들이 한 해 평균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도서가 아홉 권 남짓 된다는 것인데, 이 요령부득의 지표를 놓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통계에서는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들이 이른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지만, 서울대 학생들조차 베스트셀러 위주의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성질의 독서를 하고 있음이 밝혀진 적도 있다. 이런 사실을 들어 사람들은 학생들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바라보는 책의 미래는 암울하다. 대학생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무조건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그들과 같이 지적 수준이 동등해질까?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 된다는 일방적인 독서 인식이 문제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으로 대학생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는가도 의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것과 쓰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한다. 읽고, 고쳐 읽고, 쓰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우리가 모두 읽는 일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은 ‘책은 읽어서 뭐하나’라는 냉소에 맞설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동적인 독자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텍스트를 외우거나 그 내용을 전부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서를 피하는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지 않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 사회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통찰력이 없는 ‘비평가’ 좀비들의 서식지로 전락한다. 오로지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괴물답고 심지어 폭력적인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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