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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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으세요, 웃으면서 일하세요!

 

“일곱 살짜리 애를 업고서 눈길을 헤쳐 가며 공장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했어요. 아이는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했죠. 애가 기계 옆에 서서 일하는 동안 제가 꿇어앉아 음식을 떠먹인 적도 많았어요. 아이가 기계 옆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기계를 멈출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 아이는, 증기기관에 석탄과 물을 공급하듯 일하는 동안 식사를 공급받는 ‘노동의 도구’였다. 벽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아이의 어머니가 1863년 영국 아동고용위원회에 제출한 증언을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본론>이 출간된 지 백여 년이 지난 뒤 미국 델타 항공의 승무원 연수센터 강당이다. “여러분, 근무할 때는 진심을 담아 웃어야 합니다. 미소는 여러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나가서 그 자산을 활용하세요. 웃으세요. 진심을 담아서 웃는 겁니다. 진심으로 활짝 웃으세요.” 강의를 하는 조종사는 미소를 승무원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19세기의 어린이와 20세기의 승무원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는 아주 큰 것 같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지 못한 공통점에 이르게 된다. 승무원의 경우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감정 상태도 서비스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항상 웃으면서 일을 해야 된다.

 

 

 

 

 ♣ 정신을 병들게 만드는 감정노동

 

미국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미국 항공회사의 승무원과 추심원을 대상으로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타인의 기분을 좋게 하는 승무원이나 타인을 불쾌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추심원이 하는 일을 똑같이 상대방의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노동이라고 보았다. 항공 승무원과 추심원으로 대표되는 감정노동의 양극단을 묘사한 이유는, 이 두 극단 사이에 놓인 직업들에서 요구하는 감정적인 업무의 엄청난 다양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전체 노동자 중 3분의 1 이상이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받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며, 고용주들이 업무상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고려한 적도 거의 없다시피 한 업무 차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감정노동자 덕분에 공적 생활 속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완전히 모르거나 또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믿고 즐겁게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실드는 기업의 세계에 전면과 후면이 있다고 본다. 전면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후면은 그 서비스의 내용을 추심한다. 사회복지사, 주간 탁아 보모, 의사, 변호사는 비공식적인 직업 규범과 고객의 기대를 고려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노동을 감독한다. 감정노동에도 성별 차이가 있다. 남성이 종사하는 직업 중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은 4분의 1 정도이지만,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지속적인 감정의 억제, 감정 관리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된 자아를 지속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혹실드는 자아도취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남성에게 더 큰 위험이라면, 이타주의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은 여성에게 더 큰 위험이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의 대가로 기업은 이윤을 거둬들이지만, 상업적 목적을 위해 내면의 실제 감정과 달리 특정한 감정을 표출하는 업무를 오래도록 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기 소원, 소외, 진정성 상실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 감정노동자, 함부로 대하지 말자

 

과잉 친철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다. 대형마트에 들어서면 여성 점원은 예의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라며 허리를 90도로 꺾는다. 일순간 고객은 혹시 아는 사람인지 눈길을 주게 된다. 인사와 말투는 깍듯하고, 미소 역시 안면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얼굴에서 지워질 줄 모른다. 처음 어리둥절했던 심사는 이내 어색하고 불편함으로 바뀐다. 고객과 점원 사이,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충돌과 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의 감정적·정서적 소진은 일차적으로 대기업들의 고객제일주의 탓이다. ‘고객은 왕’이란 슬로건에 맞추자면 접객 종사자들은 노예 아닌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상품의 질로 승부하는 고도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러한 웃음과 친절 마케팅은 시대착오적인 게 분명한데, 여전히 상품의 조악함과 경영진의 무능을 엄폐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는 서글픈 현실이다.고객은 또 어떠한가. 정말로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가. 종업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듯, 고압적인 자세로 억지를 부리고 함부로 하대를 하며 스스로 못난 꼴을 보인 ‘진상’ 손님은 아니었는지, 반성은 하되 아니라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기업주와 함께, 우리 모두가 감정노동자의 노동강도를 참을 수 없는 수위로 높인 주범인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어린아이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부모 또는 자식으로서 감정 관리를 하고 기본예절을 지킬 때 화목한 가정이 유지된다. 물론 감정노동자와 고객의 관계는 경제적 거래 관계라는 조건이 있지만, 거래에 합당한 만큼 주고받는 것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돈을 준다 한들 거기에 욕설을 듣고 뺨 맞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 터. 둘러보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중에도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감정노동과 그 치유에도 관심을 가져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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