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  「시인의 사랑」제 13곡

'나는 꿈 속에서 울고 있었네' (Ich hab' im Traum geweinet)

 

 

 

 

 

시인의 사랑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가정법의 세계는 슬프다. 특히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가장 슬프다. 가정법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상상이며 위로이며 서글픈 자위다. 어떤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실패의 흔적을 상상으로 메우려는 슬픔에 찬 몸부림들. 가정법은 그래서 슬프다.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를 계속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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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식어서 상대가 웬수처럼 보일 때의 가정법도 있죠.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cyrus 2013-05-16 21: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사랑 후의 가정법을 생각하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