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 - 젠더불평등을 만든 처녀막의 무의미성
조너선 앨런.크리스티나 산토스.아드리아나 슈파르 지음, 이혜경 옮김 / 책세상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주로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하면 ‘리비도(Libido)’라든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같은 것을 많이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남근 선망(penis envy)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 즉 성적 충동이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아기와 유년기에 일어난 사건이 평생을 좌우하며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성욕을, 여자아이는 남근 선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근 선망’은 다음 세대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프로이트의 ‘남근 선망’은 여자의 성적 만족이 남자에 의존한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여자는 클리토리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클리토리스의 중요성을 축소했다. 클리토리스를 무시한 프로이트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들은 클리토리스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 즉 자위하는 여성은 ‘남근을 가진’ 남성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불감증 환자로 간주해 왔다. 클리토리스가 여성 쾌락의 중심으로 우뚝 서면 성적 파트너로서의 남성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클리토리스는 남근 중심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신화와 결부되어 드러난다.

 

남성들은 지난 수천 년간 여성성을 둘러싼 각종 금기를 설파하느라 무수한 말을 쏟아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월경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금기와 터부 문화가 남아 있다. 여성이 생리를 하면서 나오는 피는 불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처녀와 처녀 아닌 여성을 구분하게 만드는 처녀성(처녀막, 처녀 혈)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처녀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는 처녀성에 둘러싼 ‘문화적 환상’들을 분석한 8편의 논문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처녀 선망(Virgin Envy)이다. 대부분 남성은 순결한 처녀를 애정의 대상으로 원한다. 또 어떤 여성은 좋은 남성과의 첫날밤을 위해서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처녀성, 처녀막 없이 살면 안 되는가? 그게 꼭 있어야 할까? 이 말에 처녀 선망에 사로잡힌 남성과 여성들은 놀라움과 의심이 반반 섞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처녀막이 없는 여자는 ‘섹스를 밝히는 여자’, ‘헤픈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처녀막 존재 여부는 ‘처녀 감별법’ 또는 ‘헤픈 여자 감별법’의 기준이 된다. 처녀성과 처녀막에 대한 편견을 믿는 사람들은 이성과의 첫 성 경험, 신혼여행의 첫날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여성에게 남성이 페니스를 집어넣으면 질 입구에 있는 처녀막이 찢어지게 되는데 그때 나오는 피가 여성이 처녀임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보수적인 성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들은 여성이 결혼 전까지 반드시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만약 처녀성을 상실하면 결혼의 결격 사유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처녀 선망은 남근 선망 못지않게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환상’이다.

 

이 책의 1부에 속한 첫 번째 논문과 두 번째 논문은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처녀성 검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처녀성이 귀한 대접을 받은 시기는 중세 유럽이다. 이 시기에 나온 로맨스 문학 작품들에서 처녀성은 여성의 으뜸 덕목으로 언급된다. 남성 작가들이 묘사한 처녀성 검사는 남성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주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재생산된다. 문학에서만 표현 가능한 처녀 선망과 그에 따른 문화적 환상은 오늘날 서구 로맨스 문학의 한 장르인 ‘오리엔탈 셰이크 로맨스 소설(Orientalist Sheikh romance novel)로 이어진다. ‘셰이크’는 이슬람 사회에서 지위나 명망이 높은 남성을 일컫는 호칭이다. 오리엔탈 셰이크 로맨스 소설에 중동의 귀족이나 왕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서양의 여주인공이 꼭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중동의 처녀성 검사를 받게 되는 일종의 시련을 경험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중동 남자를 위해 스스로 처녀성을 바친다. 처녀성을 상실한 여주인공은 ‘아내’,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첫 번째 논문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틀 안으로 구겨 넣은 현대 로맨스 문학작품의 처녀성이 ‘문화적 환상’이라는 점을 밝힌다.

 

두 번째 논문은 중세 로맨스 문학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처녀막 환상’과 처음으로 성 경험을 한 여성이 직접 기록한 ‘처녀성 상실 고백 장르’의 처녀성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문학작품 속 여주인공은 처녀성을 상실하는 순간, 처음으로 쾌락에 눈을 뜬다. 그러나 현실의 여성은 그렇지 않다. 첫 경험을 한 여성들은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느낀다. 문학작품 속 처녀성은 ‘쾌락의 세계로 초대하는 문’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실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하는 데 전혀 관련 없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세 번째 논문은 영화로도 유명한 뱀파이어 로맨스 소설 《트와일라잇(Twilight)에서 구현된 처녀성과 그것에 관해 가치를 부여해온 미국 특유의 금욕주의적 성 문화를 분석한 글이다. 이 논문을 쓴 글쓴이는 《트와일라잇》에 ‘처녀성 상실’을 ‘혼외 성관계의 위험성’으로 보는 보수적인 성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논문은 텔레비전 시리즈 <트루 블러드(True Blood)>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제시카 햄비(Jessica Hamby)의 ‘재생하는 처녀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글쓴이는 ‘뱀파이어 여성’의 재생하는 처녀성 역시 남성을 위해 종속되는 ‘생물학적 여성’의 처녀성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책 3부에 속한 두 편의 논문은 ‘퀴어 이론(queer theory)’의 관점으로 분석한 처녀성을 주제로 한 글이다. 처녀성은 ‘생물학적 여성’의 섹슈얼리티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젠더(cisgender) 남성, 동성애자, ftm(female-to-male) 트랜스 남성도 처녀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3부 제목은 ‘남자도 처녀다, 퀴어 남성의 처녀성’이다. 이 책의 집필진들은 퀴어 이론적 관점으로 젠더퀴어(genderqueer, LGBT)의 처녀성 경험을 분석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즈비언이나 mtf(male to female) 트랜스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내 퀴어 연구가,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주제이다.

 

《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는 처녀성 신화에 대한 편견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미디어에 의해 생산 · 유통되어 온 처녀성 신화가 문학이나 예술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처녀성은 ‘처녀막’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처녀성과 처녀막은 처녀를 감별하는 기준이나 근거가 아니다. ‘처녀막’은 여성의 몸을 설명하는 남성 중심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이름이다. 처녀막 대신에 ‘질 막’, 또는 ‘질 둘레 막’으로 써야 한다. 사실 바뀌어야 할 것은 여성의 몸 또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사회의 규정이다. 처녀성 신화는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 경험을 설명하는 서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회, 특히 일부 남성들은 ‘처녀성 없는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처녀막이 상실되지 않은 여성이 ‘처녀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처녀성 신화 자체가 남녀 모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애인이나 배우자의 처녀성 상실을 의심하는 남자들, 그런 남자들의 의심이 두려워서 ‘이쁜이 수술(처녀막 재생 수술)’을 하는 여자들. ‘실체가 없는 것’ 하나 때문에 서로서로 눈치 보는 관계가 계속되는 한, 남녀는 파국의 종착점을 향해 달린다. 이 파국을 피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처녀성 신화를 폐기하는 일이다.

 

 

 

 

 

※ Trivia

 

 

* 책 19쪽에 글쓴이의 이름인 크리스티나 산토스(Christina Santos)의 영어 철자가 잘못 인쇄되었다. ‘h’가 빠진 ‘Cristina’로 적혀 있다.

 

 

* 역사 속 성인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언어를 참조하여, 저먼은 세바스티안의 이야기를 재창조한 후 그를 종교적 금욕에 몰두한 인물로 변형시킨다. (22쪽)

 

‘성인을’로 고쳐야 한다.

 

 

* 제시카의 영원한 뱀파이어 처녀성은 ‘바람직한’ 여성이란 주로 외적으로 규제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강화면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 경험 혹은 욕망을 자유분방하고 솔직하게 표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123쪽)

 

‘강화하면서’의 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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