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리뷰에 미처 쓰지 못한 내용을 여기 페이퍼에 따로 쓰게 됐다. 책에 고쳐야 할 (사소한) 부분이 있어서 쓴 글이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데카르트는 『명상록』(Meditation, 1641) 전반에서 “이 신체는 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실제로 그의 철학에서 신체는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의지가 그 지배의 대상으로 고려하는, 시계와 다를 바 없는 일련의 물질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다.

 

(황성원 옮김, 207쪽)

 

 

《캘리번과 마녀》의 번역자는 두 명이다. 본문의 1~2장은 김민철 씨, 3~5장은 황성원 씨가 번역했다. 내가 인용한 문장은 3장에 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책세상, 2018)

* 르네 데카르트 《성찰》(문예출판사, 1997)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카르트(Descartes)가 쓴 저서 ‘Meditation’은 ‘명상록’보다는 ‘성찰’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 Meditation은 명상과 성찰,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의 원제는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다. 책은 여러 번 판이 바뀌면서 부제를 포함한 제목이 조금씩 변경되었지만,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이라는 큰 제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한 철학자이다.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되던 신의 존재 자체도 의심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부정한다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딱 하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게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 이렇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을 때까지 계속 의심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참된 자기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가 추구한 ‘성찰’이요, 철학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현대지성, 201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도서출판 숲, 2005)

 

 

 

 

 

 

 

 

 

 

 

 

 

 

 

 

 

* 에픽테토스 원작, 샤론 르벨 엮음 《새벽 3시》(싱긋, 2015)

* 에픽테토스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서광사, 2013)

 

 

 

‘명상록’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제는 ‘Tōn eis heauton diblia’, 우리말로 풀이하면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 된다. 이 황제는 내면적인 삶의 가치를 강조하고 마음을 닦음으로써 내면의 행복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하는 스토아학파(Stoicism)의 영향을 받았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성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스토아학파 철학자는 에픽테토스(Epictetos)이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로마 노예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헛된 생각을 버리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현실에 뜻을 맞추라는 것이다. 완벽한 신체, 재산, 신분, 명성 등은 내 능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생각, 감정, 의지 등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내적인 삶에 있어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보살핌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다.

 

 

 

 

 

 

《캘리번과 마녀》 270쪽 왼쪽 상단에 작은 도판이 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인쇄된 『죽음의 춤』 시리즈 중 하나이다. ‘죽음의 춤’은 중세에 생겨난 죽음을 주제로 한 도상이다. 이 도상에서 죽음은 의인화된 해골의 모습으로 등장해 춤을 추면서 망자들을 데려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책 270쪽에 있는 도판 설명에 ‘영거(Hans Holbein the Younger)의 <죽음의 춤>’이라고 적혀 있다. <죽음의 춤>을 ‘영거’라는 화가가 그렸다는 뜻이 되는데, '영거(younger)'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한스 홀바인 디 영거’를 ‘영거’로 잘못 표기되는 바람에 엉뚱한 문장이 나왔다. 문장을 ‘한스 홀바인의 <죽음의 춤>’으로 고쳐야 한다.

 

‘The Younger’는 성(姓)과 이름이 같은 부자(父子)나 형제 중에 아랫사람을 가리킬 때, 그 사람의 이름 뒤에 쓴다. 영거의 반대말, 즉 아버지와 큰형의 이름 뒤에 붙는 단어는 ‘The Old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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