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 여이연이론 17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지음, 문현아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세계화의 하인들이다.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세계화의 하인들》, 32쪽)

 

 

 

필리핀인을 가사도우미로 불법 고용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명희에 대한 영장이 어제 기각됐다. 법원은 범죄혐의 내용과 수사 진행 경과를 볼 때, 구속 수사할 사유나 필요성, 상당성을 모두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어제 불거진 조재현에 대한 성폭행 의혹 소식에 가려 이명희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관심이 조금 묻힌 감이 있었다. 물론, 이 두 개의 사건 모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규명해야 하며 특히 페미니스트라면 유심히 살펴보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합법화하면 부부 맞벌이가 쉬워져, 여성 경력단절이 해결되고 출산율도 높아질 거라는 주장이 나온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가사도우미 수요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불법으로 막혀 있으면 가격이 음지에서 형성돼 수요자들의 부담만 가중된다. 정부의 규제가 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규제하면 오히려 더 교묘히 법망을 피하거나 음지에서 불법 활동 및 범죄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간다. 강남을 비롯해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이 만연하고 있다.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은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법이 도입된다면 우리나라 경제에 이득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자리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는 난민을 생산하는 기제다. 자본이 확대 재생산되고, 축적되는 것처럼 인적 자원의 이동 또한 막을 수 없다. 난민 또는 이주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가슴속에 품은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들은 어떤 직업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교육 수준에 맞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이지만 고국에 있는 가족만 바라보며 기피 업종에 뛰어든다. 우리나라에서의 이주노동자의 여성 비율은 국제결혼 추세에 따라 증가하고 있다.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 및 원인은 다르지만, 여성 이주가 증가하는 것은 다른 대륙 국가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특히 싱가포르와 대만, 홍콩에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는 시기상조다.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떠받치는 ‘하인’이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일은 ‘하인’을 고용하는 것과 같다. 《세계화의 하인들》(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여성 가사노동자가 수입’되는 과정을 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필리핀인이다. 저자는 필리핀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이탈리아 로마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그녀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 딸, 며느리가 되면 ‘정상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보육, 요리, 청소 등의 가사노동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별 분업 체계에서 ‘여성적’ 일의 본질은 가족 및 타인을 보살피는 ‘무급 가사노동’ 또는 ‘돌봄 노동’으로 규정된다. 과거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던 가사노동 및 돌봄 노동은 세계노동력 시장에서 상품화되면서 특권계급 여성이 구매할 수 있는 ‘저임금 서비스’가 된다. 저자는 저임금 서비스 노동에 대한 요구가 급증함에 따라 가난한 이주 여성이 가사노동을 떠맡는 존재, 즉 ‘하인’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선진국의 특권계급 여성, 즉 여성 고용주는 ‘힘들고 더러운’ 집안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가사노동을 가난한 이주 여성에게 떠넘긴다. 이렇게 되면 ‘남성적’ 일과는 구분되는 ‘여성적’ 일이 ‘돌봄의 연쇄(care chain)라는 방식으로 강화된다. 외국인 여성이 이주하면 그녀가 해야 할 가사노동은 또 다른 가난한 여성이 떠맡게 된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성별 노동 분업이 가난한 국가로부터의 여성 이주를 통해 지속한다.

 

필리핀은 전체인구의 10%가 해외에 나가 일한다. 해외 취업자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필리핀 여성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점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동, 아시아 등 곳곳에서 가사도우미, 보모 등으로 인기가 있다. 여성의 해외 취업이 늘면서 ‘재생산 노동(가사노동, 돌봄 노동)의 국제적 분업’은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노동이민의 새로운 추세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가 지속하면 이주 여성은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저임금 노동만 해야 하는 빈곤하고도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이주 여성과 고향에 남겨진 아이들의 정서적 불안정도 생각하면 이주 여성 문제는 간단치 않다. 따라서 외국인 가사도우미 합법화 논의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로 내가 터득하게 된 것은 모든 여성고용주들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부는 자신의 이중일과의 부담에 도움을 받기 위해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안일이라는 더러운 일을 회피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과시적 소비의 징후로서 가사노동이라는 재화가 포함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14쪽, 한국어판 서문)

 

 

오랜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은 독립된 주체가 아닌 남성의 소유물이나 부차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던 당시 여성들에게 교육, 기술보다 아내,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이 더 중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성별화된 노동 분할 전략으로 여성의 빈곤화를 심화한다. 《세계화의 하인들》은 특권계급 여성이 이주 여성 노동자들을 어떻게 ‘차별’하며 불평등을 초래하는 위계적인 구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만 봐도 이명희가 얼마나 잘못한 일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명희는 ‘더러운 집안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불법 가사도우미를 고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는 법이 생기면 걸레 드는 것을 싫어하는 잘 사는 마나님들이 엄청나게 좋아하겠는 걸?

 

 

 

 

 

* Trivia

 

1. 목차의 1장 제목과 본문 1장 제목이 다르다. 목차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라고 표기되어 있고, 본문에는 로마와 로스엔젤리스의 필리핀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목차의 1장 제목에 ‘여성’이 빠졌다.

 

2. 284~285쪽에 ‘흐몽인’, ‘흐몽 난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베트남, 중국, 라오스 등지에 사는 묘족(苗族)의 베트남어 이름이다. ‘흐몽’이 아니라 ‘몽(Hmông)’이라고 불러야 한다. ‘H’는 비음(鼻音)이므로 소리가 날 듯 안 날 듯 발음해야 하기 때문이다. 묘족을 설명한 대부분 인터넷 백과사전 항목에서는 ‘몽족’이라고 언급하지 ‘흐몽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 [이민 없는 한국]⑨이자스민 “맞벌이 늘어나는 韓…필리핀 가사도우미 허용 목소리↑』 이데일리, 2018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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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22 15:59   좋아요 1 | URL
네. 페미니즘은 ‘정치적 올바름’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학문입니다. 페미니즘이 여성 문제에 접근하려면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