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매춘부에 관한 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온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19세기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종교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해 은밀하게 만들어진 매체였다. 포르노그래피는 18세기에 이르러 인쇄 문화의 발달로 독자층이 확대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왕족과 성직자, 귀족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묘사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권과 교회를 희화화시키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타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 (알마, 2014)

 

 

 

 

 

 

 

 

 

 

 

 

 

 

* 주명철 《계몽과 쾌락》 (소나무, 2014)

* [절판] 주명철 《서양 금서의 문화사》 (길, 2006)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원리를 제공하고 근대 서구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한 가치다. 그러나 린 헌트, 로버트 단턴 등 역사학자들은 고도로 조직화한 지식 엘리트가 활약했던 계몽주의 시대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다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포르노 팸플릿은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훨씬 많이 읽혔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난잡한 성생활을 풍자한 포르노 팸플릿은 금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금서의 유통은 교묘하다. 아무리 출판사를 단속하거나 유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해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정보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당시 금서들은 ‘철학 서적’이라는 은어로 불렸고, 가격이 저렴해서 노동자들도 사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포르노 팸플릿이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구체제를 무너뜨리게 한 '평등한 포르노'라 할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 시대의 포르노그래피는 치명적인 함정을 깔고 있다. 혁명가들은 왕비의 성적 추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왕권의 권위를 흔들었다. 왕비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대중의 환상은 일종의 성적 판타지이며 대중의 집단적 관음증을 부추겼다. 포르노 팸플릿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부분 남성에 의해 소비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끝나면서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쾌락 자체를 위한 매체로 변질하였다. 포르노그래피가 영화라는 매체와 만나자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더 값싸고 상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숱한 포르노 영화에 ‘강간’ 장면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포르노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줄거리는 전혀 모르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 우연히 서로의 몸을 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성이 처음에는 남성을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성행위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포르노 영화 제작자들은 성폭력이 남성들을 자극하는 성적 판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이 성에 눈뜨는 시절에 포르노를 접한다. 나도 성적 호기심이 솟구치던 사춘기에 포르노를 봤다. 포르노는 호기심에 볼 수 있다. 하지만 포르노 영화에 묘사된 성관계는 ‘가짜’이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왜곡하는 위험한 묘사’다. 포르노가 만든 성적 판타지 때문에 남성들은 단지 성행위 자체에만 집착하는 왜곡된 사고를 하게 된다. 또 포르노는 폭력적인 관계에 무감각해지는 위험성도 있다.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속의 성폭력은 소위 ‘야한 것’이다. 포르노를 즐겨보는 남성들은 ‘성적으로 대상화’시킨 여성의 몸을 눈요깃감으로 바라보면서 감상한다.

 

 

 

 

 

 

 

 

 

 

 

 

 

 

 

 

* 수전 손택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현대미학사, 2004)

* [안 읽었어요!] 조르주 바타유 《눈 이야기》 (비채, 2017)

 

 

 

수전 손택은 포르노가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 《눈 이야기》(비채, 2017)를 옹호한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수록)이라는 글에서 독자에게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킨 포르노그래피의 효과가 저자의 의도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문학적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인 단어로 포르노의 성적 판타지를 축소하거나 미화해선 안 된다. 순진한 관점으로 포르노를 접근하면 포르노가 사회에 끼치는 끔찍한 폭력성을 외면하게 된다.

 

 

 외설적 즐거움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평등한’ 포르노도, 기존의 포르노에 상응하는 여성 포르노도, 반전도 불가능하다. 포르노그래피는 강간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성적으로 접근할 대상으로만 환원하도록 설계된 남성의 발명품이다. 이건이 도덕주의나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관능을 추구하는 일로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포르노가 파는 주된 품목은 언제나 여성의 벌거벗은 몸, 여성의 노출된 가슴과 성기일 수밖에 없다.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617쪽)

 

 

포르노와 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작가의 의도와 보는 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이게 포르노이고, 이게 예술이라고 구분하기 어렵다. 예술이 된 포르노 또는 젠더,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정체성 범주를 포용하는 포르노 즉 모든 사람이 수긍하는 ‘평등한 포르노’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 포르노는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했듯이 오늘날의 포르노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또는 성 상품화하여 만들어진 ‘남성을 위한, 남성이 만든 발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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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6 13:38   좋아요 0 | URL
그런데 모든 페미니스트가 포르노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반 포르노 규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그 페미니스트의 책을 아직 안 읽었어요. 곧 읽을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