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문화권력 3인방 - 백낙청·리영희·조정래 비판
조우석 지음 / 백년동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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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탄핵 이후 한국 보수는 피폐했다. 멸망 수준까지 망가졌다. 과거에는 보수정권이 아무리 헛발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35% 전후의 고정 팬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끄러웠던 '최순실 게이트'는 절대 부동의 35% 팬심을 와해시켰고 한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문재인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집권 4년 차인데도 여전히 실력(성과)보다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고 있다. 국회도 넉넉히 과반수를 넘겼다. 법원도 기울었다. 언론도 바뀌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보수는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나는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북한과 분단의 영향으로 우익(右翼, right)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공산주의 자체가 풍기는 썩은 냄새가 역겨울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꾸준히 헛짓거리를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최소 30%의 국민은 고정된 보수·우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한국 사회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상당히 왼쪽으로 기운 운동장이었다. 한반도 상황에서의 자연스러운 반공 정서만 생각했지 문화와 지식 권력에 스며든 단단한 진보·좌익적 세계관을 낮게 평가한 것이다.


조우석의 『좌파 문화권력 3인방』은 이러한 나의 뒤늦은 인식에 적절한 말미를 제공해 준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우뚝 서 있는 문화·지식 권력의 좌경화를 신랄하게 꼬집고 고발한다. 큰 틀에서 지식인 세 명을 대놓고 두들겨까는데 그 논증과 문체가 흥미롭다. 출판사 '창비'의 설립자이자 발행인 백낙청, 진보 계열 인사들이 사상의 은사로 모셔온 리영희, 『태백산맥』의 저자 소설가 조정래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대부분이 그들을 향한 비판과 분노로 가득하다. 탄탄한 증거와 일관된 맥락이 뒷받침하고 있어 책 자체는 어설프거나 조악하지 않다.


저자의 첫 타깃은 백낙청이다. 백낙청이 누구인가. 1966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해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아닌가. 저자는 그 영향이 절대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창비」와 백낙청은 한국 문단을 구조적으로 좌편향하여 본질적 수준에서 황폐화시킨 주범이다. 그 방식이 상당히 악질적인데 선호하는 작가를 전진 배치해 문학사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선호하지 않은 작가를 뒤로 밀쳐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띄운 작가가 대표적으로 시인 김수영이다. 저자는 상당히 많은 지면으로 김수영과 그의 작품을 비판한다. 또한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과 시인 고은의 성추행 사건 때 백낙청이 보여준 이중적 태도를 위선적이고 치졸하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고 리영희 교수를 '종북 지식인 1호'로 명명한다. 리영희가 1970년대에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전방위적인 것이었다고 질타한다. 사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이 리영희의 명저로 꼽히는데 세 권을 모두 읽어본 나로서도 이 책들이 왜 좋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가. 어설픈 반미와 조악한 반 대한민국 내용으로 일관하는 쓰레기 같은 내용이다. 더욱이 모택동과 현대 중국의 찬양과 숭배는 과히 못 봐줄 수준이다. 훗날 전향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시선만 바꿨을 뿐이다. 끝까지 비겁한 지식인으로 남은 리영희는 백낙청보다 더 나쁜 숙주다.


소설가 조정래는 저자에 의해 '남로당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규정된다.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포괄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 즉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낱권 기준 1,550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많이 팔린 만큼 대중의 한국 근현대사 통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저자는 조정래의 소설은 '문학의 옷을 걸친 반역 소설'이라고 기각한다. 이를 논증할 만한 소설 속 여러 장면과 상황을 소개하는데 충분히 고개가 주억거린다.


오래전 『태백산맥』을 완독한 내 감상도 저자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태백산맥』이란 작품은 순수 문학적 관점에서 수준 높은 소설로 평가하기 힘들다. 소설은 캐릭터와 우연성을 다루는 장르이다. 『태백산맥』 속 캐릭터는 작가에 짓눌려 작품 속에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빨치산을 낭만적 전사로 그린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주인공들의 매력과 생명력은 만화 캐릭터처럼 굳어 있다. 더욱이 역사소설은 사실의 명백한 토막 사이에 작가적 상상력을 붙여야 한다. 그러나 자주 발견되는 역사적 오류는 큰 흠이다. 박경리의 『토지』보다 한참 못하다.


저자는 세 지식인 외에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몇몇 아류의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철학자 김용옥(도올), 소설가 한강,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 등이다. 개신교·천주교 등의 일부 종교권의 좌익 현상과 현 집권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심각한 좌경화 역사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끼친 한국 사회의 해악에 대해 분노에 찬 필치로 서술한다. 반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할 참 지식인을 소개한다. 저자가 추천한 참 지성 2인은 소설가 복거일과 교수 양동안이다. 그들의 저작과 일갈을 인용하며 한국 지식계가 마냥 죽은 건 아니라고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부정과 긍정이 분명하기 때문에 읽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비판 대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파고들어 공격한다. 얄짤없다. 시원시원하다. 언론인이며 문화평론가인 저자의 필력은 돋보인다. 사실관계의 정확한 편재 위에서 자기 주관을 덧붙이니 문장에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물론 진영적으로 다분히 오른쪽에 있는 저자의 이념 지도를 모르지 않는다. 평소 저자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게 평가해오고 관련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력이 저자의 논리를 기각하지는 못한다. 사실은 사실이고 주관은 주관이며 입장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할애하여 거침없고 일관되게 쏟아내는 저자의 좌파 비판은 충분한 힘과 논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보수·우익이란 게 서글퍼졌다. 보수라 하면 마치 똥 쳐다보듯이 한다. 적어도 한국에선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나라 대부분이 보수의 세상이 됐다고 떠들썩한데 한국의 보수는 거의 파멸 직전이다. 사실관계도 먹히지 않는 것 같다. 개인과 가족을 강조하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능력과 효율을 언급하면 물질만능주의자가 된다.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파묻혀 악한 것이 되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얘기하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며 비웃는다. 반미, 페미니즘, 동성애는 세련됨의 아이콘이 됐다. 운동장은 기울어진 게 아니라 뒤집어졌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나. 우리의 선배 세대가 쌓아올린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디 갔나. 그 원인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연장선상에 이 책이 놓여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스며든 좌익적 세계관의 뿌리를 천착한다는 차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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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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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픈 사람은 달라진다. 아파본 사람은 삶의 깊이를 밀도 있게 천착한다. 죽도록 아파본 사람은 삶과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인지를 웅숭깊게 깨닫는다. 아픔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새삼 강렬히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성숙해졌다. 현명해졌다. 겸손해졌다. 글에 살기가 덜하다. 분노와 비난은 절제되었고 자기주장은 정제되었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조롱도 사그라들었다. 타인과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함양됐다. 방송인 허지웅 얘기다.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가 암 투병을 극복하고 쓴 첫 번째 에세이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그를 평소 얼마나 싫어하고 비판해왔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거 서평에서 그의 두 권의 에세이(2014 『버티는 삶에 대하여』, 2016 『나의 친애하는 적』)를 매우 신랄하게 기각한 바 있다. 내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간단하다. 선배 세대를 향한 조롱과 기존 권위를 경멸하는 그의 싸가지 없음 때문이다. 어설픈 지식 몇 토막으로 선배 세대가 힘겹게 쌓아올린 공()과 업적을 불인정하고 조롱하는 그의 언행은 과히 역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간에서는 그의 그런 기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농담』은 저자의 에세이 중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향한 분노와 시기의 칼날이 보이지 않는 텍스트다. 암 투병이라는 삶의 극한의 '바닥'에서 정신의 단련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는 성숙한 젊은 방송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 곳곳에 자기 자신에 관한 객관적 성찰, 과거 자신의 부적절하고 온당치 않은 언행의 후회, 삶의 여러 맥락에 관한 진지한 감사 등이 고백됐다. 허지웅이 맞나.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지. 그의 바뀐 태도 때문인지 문체까지 온화하게 다가와 책 곳곳을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내려갔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곳곳에 철학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니체를 다시 읽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의 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와 기독교를 사멸시키려 한 서양 근대 철학자가 어색한 조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힘에의 의지'ㅡ저자는 '권력의지'로 표현했다ㅡ를 제외한 채 '운명애'와 '영원회귀'만을 떼어내 자기 삶의 긍정의 모멘텀으로 치환하는 건 어색하다. 니체적 삶의 희망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힘에의 의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맹목적인 것인데 비해 니체는 '힘(권력)에의 의지'를 통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 우리 삶을 충만하게 넘쳐흐르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딴죽을 걸자는 게 아니다. 저자의 바뀐 태도를 긍정하며 진심으로 응원하기 위해 덧붙여보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을 인용한 건 저자의 바뀐 태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p. 191)라는 니부어의 기도문은 소위 '평정심(평온)의 기도문'으로 불리는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과 씨름하며 살아갈 때 '현실-기적' 사이의 아이러니를 가장 합리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명문장이다. 이를 오스카 와일드의 소송 이야기와 니체 철학의 '위버멘쉬'와 연결 짓는 건 다소 어색했지만 저자가 결국 "신에게 매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는 니부어의 입장에서까지 추출해낸 대목은 흥미롭다. 아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자기 자신의 모순과 한계의 발견, 그리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충만한 감사가 저자의 삶에 흘러내린 것이니라.


바뀐 저자의 태도 때문인지 책은 술술 잘 익힌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자기 삶을 긍정해내려는 방송인 허지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응원한다. 저자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과거 저자에게 무조건적인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었던 기성세대는 '가면을 써서라도 웃어야 할 존재'로 바뀌었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쓸 줄 아는 건 소중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준에 이르렀다. "가면을 벗고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해야 한다"는 조언도 첨가한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권위와 기존 질서의 틀은 분노와 투쟁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악의적인 게 아니라면 웃음과 설득, 소통과 여유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가 바뀐 만큼 세상도 바뀔 것이다.


과거 저자를 비판할 때 저자의 영화 리뷰만은 까지 않았다. 저자의 영화 해설만큼은 대한민국에서 수준급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 장르 전반에 걸친 폭넓은 지식은 물론 각 영화를 풀어내 우리의 삶과 사유에 적용시키는 각론화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일테면 책의 말미 영화 <스타워즈> 리뷰는 높은 통찰을 보여준다. 저자는 <스타워즈>를 "재능 있는 젊은이를 질투하거나 두려워할 것인지, 아니면 축복하고 응원해 줄 것인지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충격이다. 시리즈 전편을 다 본 나에게 영화 <스타워즈>는 그저 화려한 CG로 그려낸 광활한 우주 광경이나 스펙터클한 광선검 격투신이 전부였다. 그것이 축복과 응원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최근 주변에서 능력과 다름에 관한 시기와 반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기에 <스타워즈> 리뷰에 담긴 저자의 달견과 통찰은 시의적절하게 내 마음을 훔쳤다.


책 제목을 생각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제목을 지었는지는 책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살고 싶다는 농담. '살고 싶다'는 게 농담이란 걸 선언하는 것인지, '살고 싶다는 농담'을 툭 던져보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분명한 건 책 곳곳에서 저자의 살고 싶은 의지만큼은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살고 싶다는 건 저자에게 진심이었을 게다. 젊은 나이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까. 결국 저자는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다. "살아라."(p. 274)


서평을 정리하자. 금번 허지웅의 신간은 읽어볼만했다. 좋은 느낌으로 따뜻하게 읽었다. 과거의 악평과는 독립적으로 호평이다. 분명 허지웅은 변했다. 과거의 날선 문체가 아니다. 분노와 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겸허한 소회도 엿보인다. 자기반성이 보인다. 정치 얘기는 일절 없다. 암 투병의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 사유와 마음의 크기가 더 확장된 것 같다. 물론 그만 변한 건 아니다. 동갑내기인 나도 변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슴의 온도가 조금 변한 것 같다. 정서적 무드도 변했다. 40대 중반을 향하니 왜 그리 감사할 게 많은 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으로 보일 정도다. 그렇다.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 변화의 하모니에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이 놓여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삶의 희망을 발견하려는 독자들에게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을 추천한다. 내가 허지웅의 책을 추천할 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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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3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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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은 시대(시간)의 압력을 이겨낸 작품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위대하다. 하지만 고전이 모두 재미있는 건 아니다. 재미와 감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재미가 없어도 감동적인 작품이 있고 재미가 있는 만큼 감동적인 작품도 있다. 특히 정말 재미있는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읽기 속도를 높은 선상으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장을 확인시키게 한다. 종국에 남는 농밀한 감동은 덤이다.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은 재미있는 고전 소설로서 가장 먼저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1876년 출간된 이래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괴물과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작가의 유려하고 맛깔나는 글 솜씨와 매력적인 주인공 '톰 소여'의 활약(?)은 책장을 엄청난 스피드로 넘기게 하는 힘이다.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19세기 중반 미국 미시시피 강 기슭에 자리한 어느 시골 마을로 시공간을 이동한다. 하지만 독자의 시간대가 19세기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그때 그 시절의 향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주인공 톰 소여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냄새가 주인공의 유년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해서 다루지 않겠다.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제목 그대로 '엉뚱하고 모험심이 많은 톰 소여가 이런저런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겪어나가는 모험 이야기'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톰 소여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 주관적인 평가로 톰 소여는 세계 소설사에서 베스트 20 안에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의 유년시절 일부만을 그린다. 오히려 그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톰 소여가 더 완벽한 인물로 독자에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기에 작가 자신도 소설의 「맺는말」에서 "이 연대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 '사내아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마쳐야 한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 '어른'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라는 말을 남겼다. 타인을 압도하는 자유와 생명력, 나름의 정의감까지 갖춘 톰 소여는 그 시절 남자아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롯한 형태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톰 소여의 매력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꼽히는 '나무 울타리에 페인트칠을 하는 부분'이다. 소설에서 톰 소여는 엄마 격인 폴리 이모에게 잘못을 저질러 토요일에 집 울타리 회칠을 하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꾀가 많은 톰 소여는 동네 친구들과의 거래를 통해 노동을 놀이로 전환시킨다. 작가는 이 장면을 굉장히 유쾌하고 상쾌하며 통쾌하게 그리고 있다. 전혀 밉지 않게 톰 소여의 꾀를 묘사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톰 소여의 긍정적 태도는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는데 훗날 여자친구 베키와의 연애와 두 차례의 큰 모험을 통해 삶에 대한 높은 수준의 여유와 긍정의 아우라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톰 소여의 모험』은 동 작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꼽힌다. 왜 미국인이 이 소설에 열광할까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주인공 톰 소여가 미국과 미국인을 대표하는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사(美國史)는 동(東)에서 서(西)로 개척하는 역사였다. 수많은 원주민(인디언)이 희생된 역사였지만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 정신'의 역사이기도 했다.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톰 소여의 모험심과 영웅주의는 보편 미국인의 사상과 역사적 맥락에 근접해 있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하는 인전 조의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용기 있게 법원에서 증언하는 장면은 미국인이 지향하는 도덕주의와 맞닿아 있다. 즉 작가 마크 트웨인은 그 시대를 표상하는 미국인의 전형성을 미국적 시각에서 미국적 글쓰기로 유려하게 녹여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톰 소여와 베키 사이에 감정적 긴장감이 흐르는 부분이다. 이는 자신의 장례식(?)에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연출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된 톰 소여의 명예심과 여자친구 베키에 대한 소유욕이 부딪히는 장면이다. 톰 소여와 베키는 서로 간 허영심으로 다른 친구와 더 친한 것처럼 일부러 과한 행동을 하며 마음을 숨긴다. 작가의 표현대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서로 자기 주변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모른척한다. 언행이 과해지며 결국 각자 상처를 받는다. 작가는 이 대목을 굉장히 현실감 있게 묘사했는데 이는 마치 과거 아내와 내가 어린 시절에 연애할 때 모습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흡사해 소름이 끼쳤다. 두 인물의 감정적 긴장이 후일 톰 소여가 베키를 대신해 선생님으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장면에서 해소된다는 점에서도 내 과거 시절의 연애담과 몹시 유사해 놀랐다. 시대와 문화와 지역을 떠나 이렇게 유년시절에 대한 유치한 감정적 유사성을 떠올리게 한 점은 인상적이다.


번역도 훌륭하다. 영미문학 번역의 권위자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유려하고 매끄럽다. 흠잡을 데가 없다. 다만 김 교수는 마지막 「작품 해설」에서 이 소설을 지나치게 어둡고 진지한 관점에서 비평했다. 소설이 갖는 특유의 해학과 상징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작품을 지나치게 해부하여 '남성우월주의'와 '페미니즘'에 대한 분석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 스스로 여성의 인권 문제와 흑인 해방 문제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낸 진보적인 작가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이 쓰인 시대적 상황과 총체적 색깔은 보지 않고 부분적인 장면과 등장인물의 대사 몇 마디로 이런저런 사상을 끌어들여 작품을 해부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굳이 불필요한 작품 해설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학작품 뒤에 부록처럼 달린 '작품 해설'은 없어져야 할 유산이다"라는 기존의 내 소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엉뚱한 감상이지만,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 중 하나는 톰 소여와 같은 아들이 하나 있으면 어떨까, 한 것이다. 두 딸을 즐겁게 키우고 있는 나에게 굳이 아들은 필요 없지만 가끔 소설에서 멋지게 포효하는 남자아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아들이 당기는 마음을 숨기기란 쉽지 않다. 작금의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의 본래적(생래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남자만이 갖는 그 꼴통적 생명력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 여자보다 굵고 단단한 뇌량을 갖지 못한 남자는 대개 단순하고 일방적이다.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때 남자 이하가 되지만 장점으로 작용할 때 남자 이상이 된다. 톰 소여가 가진 독특한 창조성과 유별난 생명력에 매료되어 잠시 아들에 대한 내 감상을 보탰다.


서평을 정리하자. 최근 코로나19로 웃음을 잃은 사회가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의 정서까지 메마르게 하고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이럴 때 마크 트웨인의 재미있는 소설 한 권으로 웃음을 회복해보는 건 어떨까. 죽기 전에 꼭 한 번 읽어야 할 고전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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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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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코로나19와 고전(문학)

중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위험한 행동이 되었다. 아이들의 개학은 거듭 연기되고 바깥출입은 금기시되며 직장인들은 자택에서 근무 중이다. 외국 사정은 더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유럽 일부 국가는 80세 이상 고령 환자들의 치료를 포기했고 물리적인 의료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해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문학이야말로 현실성의 극치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분야이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동시대의 관심과 주제를 껴안는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페스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tvN 독서 예능에서 이 소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영향도 컸다. 주지하다시피 『페스트』는 알제리(프랑스령)의 해안 도시 오랑에서의 전염병 사태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봉쇄된 채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소설에 묘사된 몇몇 장면에서는 현재의 우리 상황과 너무 흡사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역주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간접 공감의 열망들이 반영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에 코로나19 특집으로 카뮈의 『페스트』를 리뷰한다.

 

⑴ 이야기 (스토리 요약)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각 부는 페스트의 양상에 따라 구분된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랑시(市)에 페스트가 발병한다. 전염이 확산되고 사망이 증가한다. 도시는 봉쇄된다. 도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사망자 수는 더욱 증가한다. 자고 나면 수백 명씩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다.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급속히 퍼진다. 페스트균을 죽이겠다며 온 마을에 불을 놓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다. 폭동이 일어난다. 혼란을 틈타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다. 지옥과 같다.

 

의사 리유(리외)와 동료 타루 등은 민간 보건대를 만들어 페스트와 싸운다. 도시 밖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불법까지 동원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한 신문기자 랑베르도 리유와 타루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느끼고 보건대에 합류한다. 그러던 중 실험 중인 페스트 백신 혈청을 맞은 어린아이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의 주검 앞에서 의사 리유가 교회의 신부 파늘루에게 묻는다. "페스트가 신이 내린 형벌이라면 이 아이의 죄는 무엇입니까?" 페스트가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던 파늘루 신부는 리유에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후 신부의 설교는 조금 바뀐다. 얼마 뒤 신부도 페스트―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는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고 1년이 흐른다.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던 페스트균의 매서운 기세도 점차 꺾이기 시작한다. 백신 혈청이 효능을 보인다. 혈청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복되기 시작한다. 도시에서 사라졌던 쥐가 다시 나타나고 길고양이의 모습도 포착된다. 페스트가 종식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리유와 함께 최전선에서 페스트와 싸운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리유의 동료 그랑은 페스트에 걸렸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다. 도시 봉쇄가 풀어지고 사람들은 그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동료를 재회한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기차 플랫폼에서 아내를 만나 포옹한다. 리유는 도시 밖에서 지병을 치료해온 아내가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⑵ 인물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페스트를 최전선에서 치료하는 의사 리유(리외),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한 타루, 외지에서 건너와 페스트 종식을 위해 함께 싸우기로 한 신문기자 랑베르, 소설의 서술자로부터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시의 하급 공무원 그랑, 페스트 확산 과정에서 가장 큰 내적 변화를 겪는 가톨릭 신부 파늘루, 전염병 사태를 즐기며 그 와중에 범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코타르 정도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되겠다. 소설은 서술자의 관점과 등장인물 타루의 기록을 주축으로 뻗어나가는데 소설 말미에 서술자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몇몇 인물에 대해 간략히 리뷰하고자 한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페스트』는 유독 다양한 인간상에 밑줄을 긋는다. 이 소설의 구조가 "무서운 질병으로 인한 참혹하고 극단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몇 가지 인간 군으로 그려낸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역경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사람(저항형), 역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방관하는 사람(방관·회피형), 신의 뜻으로 생각하며 절대자에 의지하는 사람(종교형), 범법을 자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악인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염병의 예기치 않은 심화과정을 통해 일부 인물은 큰 내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다.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은 단연 리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유의 경험과 생각이 소설의 주된 재료가 된다. 서술자는 유독 리유의 사유와 행동에 집중하는데 그 외의 인물들이 모두 리유를 중심으로 얽혀있기에 그렇다. 처음으로 죽은 쥐를 발견하고 감염자의 초기 증상을 검토하여 페스트의 발병을 최초로 짐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종일관 페스트에 맞서 싸운다. 그의 열심과 사명의식은 기자 랑베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 랑베르의 회심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랑베르는 "자신과 페스트는 본래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랑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굳건하게 감당하는 의사 리우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결국 랑베르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리유 일행과 함께 페스트와 싸우고 타인을 돕는다.

 

타루와 그랑도 리유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이 세 명이 페스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사들, 소위 '저항형'의 대표자들이다. 타루는 아버지를 차장검사로 둔 금수저 출신인데 과거 아버지가 참여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 과정을 목격한 뒤 사형 반대론자가 되었다. 그는 민간 보건대 창설을 주도하며 초반부터 불군의 투지를 표출한다. 리유와 두터운 우정과 신뢰의 관계를 쌓기도 하는데 페스트의 최절정기에 함께 바다에 입수해 수영하는 장면은 굉장히 감동적이다. 자신의 수첩에 일상의 기록을 남기고 그 메모를 소설의 서술자는 자주 인용한다. 서술자의 해설과 타루의 기록은 소설을 끌고 가는 두 개의 축이다. 하지만 타루는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서술자는 그랑을 매우 훌륭한 인간상으로 평가한다. '보건대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자'로 상찬해 마지않는데 선하고 모범적인 보편 시민을 상징하려는 것 같다. 하는 일이 소소하고 눈에 띄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랑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선의를 가지고 페스트와 싸워가는 인물이다. 극한의 대재앙 앞에서 한 명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랑은 잘 대표한다. 리유의 감사 표시에 대해 그랑이 한 다음 답변은 이 소설의 주제를 웅숭깊게 관통한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신부 파늘루는 종교성을 대표한다. 페스트 발현 초기에는 "페스트는 신의 재앙이지만 신이 원한 게 아니다. 세상이 악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라고 거침없이 설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페스트의 발병을 초월적 차원의 문제로 끌어올리며 신(하느님)에게 회개해야만 함을 촉구한다. 그러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파늘루는 동요한다. 그 이후 설교에서 '여러분'이라고 부른 회중을 '우리는'으로 바꾸어 부른다. 설교자로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신문기자 랑베르와 함께 페스트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큰 심경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페스트를 초월적 관점으로 본 그도 끝내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파늘루의 변화와 그가 강조한 종교적(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⑶ 종교]편에서 구체적으로 후술하겠다.

 

거대한 재앙 앞에 선하고 사명감 있는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혼란과 공포를 역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코타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상시에 자살을 기도할 만큼 무기력하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해 도시가 혼돈에 빠졌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누린다.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법을 일삼고 밀수와 같은 악의적인 행동을 벌인다. 페스트가 수그러들고 도시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니 또다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결국 소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다. 흥미로운 건 작가 카뮈가 코타르를 묘사함에 있어 상황과 인물에 대해서만 담담히 전할 뿐 절대로 선악의 가치판단을 독자에게 주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⑶ 종교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논쟁이 될 만한) 부분은 신부 파늘루의 설교 장면이다. 파늘루의 설교는 소설에서 총 두 번 소개되는데 첫 설교와 다음 설교 사이에 묘한 온도차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첫 번째 설교는 거침없이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2부 중반에 자리한 파늘루의 첫 설교는 꽤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는 "페스트는 인간 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과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제의 입장에서는 마땅한 설교였다. 교회 내부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세상 어떤 것도 신의 의지 밖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 아담과 하와 이래 이 땅의 교회가 세상과 격렬히 씨름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와 씨름하다 죽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합해 있는데 파늘루는 "주님, 이 아이를 구해주소서!"라며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아이는 죽는다. 혈청 주사 영향인지 오히려 더욱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 모습을 보고 리유는 "페스트가 신이 원하지 않는 불행이었다면, 이 어린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파늘루에게 강변한다. 파늘루는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한다. 결국 그도 페스트로 죽는다. 사실 이런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이 있다. 교회 사제라는 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기독교를 공격해온 논리에 대해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후퇴하는 듯한 모습은 현실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카뮈가 분명한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딱 그것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 선한 자가 고통을 받고 악한 자가 성공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의 죽음(부재/비존재)을 주장하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논거도 이 부분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포이어바흐가 그랬고 러셀이 그랬다.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이 부분은 코로나19로 인한 한국의 현재상과도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천지 집단감염 사태와 주일예배를 강행한 일부 교회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끊이질 않는다. 절체절명의 대재앙 앞에서 종교(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신에게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문제 군상으로 묶어 조롱하는 형국이다. 신을 믿는 한 성도로서 서글프다.

 

솔직히 말해 기독교 바깥에서 지적하는 '기독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안에서밖에 해결(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신의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 사이의 인식 괴리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인데, 신은 전염병과 전쟁 같은 재앙으로 인간을 심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기도 했다. 신의 섭리란 공의와 사랑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데 바로 이 부분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비극을 발생시킨다. 기독교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소화되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즉 안팎 간의 극한의 아이로니컬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현실 기독교인으로서 갖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자 도전임을 고백한다.

 

 기독교에 대한 카뮈의 부정적인 묘사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부조리의 문제를 종교가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앞서 묘사한 카뮈의 설정은 충분히 논리적이지만 기독교의 절반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전혀 다른 관점이자 차원이다. 믿음(신앙)의 영역은 그 전제 자체가 부조리하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게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이 아닐까. 카뮈식 무신론에 대한 내 입장이다.

 

⑷ 카뮈와 부조리

카뮈의 작품세계를 흔히 '부조리 문학'이라고 부른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y)'는 카뮈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데 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카뮈 전집을 가까이 두고 탐독할 만큼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지만 부조리에 대해 설명할 역량은 부족하다. 철학 전공자를 위시하여 주변의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과 밤을 새우며 깊은 대화를 나눠봐도 부조리를 명확하고 시원하게 해설하는 걸 보진 못했다. 의미의 외연 자체가 상당히 러프할 뿐만 아니라 용어를 사용하는 자의 의도된 모호성까지 추가하면 더없이 난해한 개념이다. '부조리'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소설 『페스트』를 통해 긍정을 다루고 싶었음을 밝힌다. 반면 『이방인』은 부정(否定)을 다룬 소설이며 『페스트』와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고 말한다. 『이방인』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 「오해」이며, 『페스트』의 편에 서있는 작품이 『반항적 인간』,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다. 카뮈는 부정은 먼저 말했고 그다음 긍정을 말했다. 이러한 시간 순서는 소설 『페스트』의 철학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준다. 그것은 외연적으로는 부정과 반항을 다루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명징한 긍정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든 걸 잡아먹을 것 같은 페스트의 세력이 약화되고 지옥 같던 오랑시가 점차 일상으로 회복되는 모습은 카뮈가 말한 부정에서의 긍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맥락이다.

 

이 소설은 1947년에 발표됐다.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심히 전후 재건사업에 열을 올리는 시기였다. 동시에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지옥 같은 전쟁이 남긴 후유증을 치유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의성 측면에서 '페스트'는 하나의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 시기의 페스트는 곧 전쟁이었다. 6년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쓴 '전쟁 페스트'의 발병은 인류에게 가장 현실적인 지옥의 쓴맛을 맛보게 했다. 다양한 인간상이 있었고 여러 형태의 역설이 존재했다. 현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았다. 부조리했다. 카뮈의 말대로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뮈의 작품을 읽으면서 항시 느끼는 건 그의 소설이 철학과 소설 사이의 적당한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완벽한 소설이면서 철학을 오롯이 담아내고, 하나의 철학서이면서 소설의 구조를 포용한다. 이 기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힘이야말로 카뮈 문학이 가진 마력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카뮈가 진정 위대한 것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극단적인 단정(결론)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데 있다. 올바른 철학자의 태도는 "내 말이 무조건 옳다"라는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평생의 라이벌 사르트르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카뮈는 이 중용적 지성을 지켜냈기 때문에 당시 다수 지식인들이 혹했던 유행병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문체 얘기를 해보자. 카뮈의 문체는 역시 담담하다. 전염병 창궐의 재앙을 묘사하면서도 그 어떤 절규도 명령도 없다. 작가 스스로 서술자임을 거부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 건네줄 정도로 객관적이고 냉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카뮈의 인물들은 작가와 완벽히 독립적이다. 카뮈 소설의 화자적 특징은 담담하고 묵묵하고 객관적이다. 사실만 건조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카뮈식 문체는 불필요한 감정과 비본질적인 사색을 제외한 채 담백하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소설 『페스트』가 극한의 상황을 그리면서도 자극적이지 않게 읽히는 이유다. 독자는 다른 정서적 낭비 없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페스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천착하게 된다.

 

⑸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소설 『페스트』는 영웅주의와 거리를 둔다. 카뮈 스스로 영웅이라면 질색을 했던 작가다. 주제와 묘사 방식도 거대한 역경을 헤치며 분투하는 인간상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고 인간 승리의 위대한 드라마도 없다. 그런 통쾌한 이야기를 원해서 이 소설을 들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 차단하기 어려운 불가항력적 사태에 맞서는 나름의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소설 『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소설의 서술자가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상으로 묘사한 그랑이라는 인물에게서 찾았다. 페스트에 대항해 그랑이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서 늘어난 서류 작업과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것뿐이었다. 전과 달라진 건 근무시간이 늘어나 야근한 것뿐이다.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인데 그 열심에 리유는 감복하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렇다. 자기 위치에서 사명감을 갖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에 닥친 모든 인간들이 해야 할 유일한 책무인 것이다.

 

그랑의 모습은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소설 속 오랑시의 모습은 지금 현재 우리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다. 확인되지 않은 괴소문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혼란한 상황을 틈타 마스크를 불법 유통하려다 적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정치인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둔다. 기회주의가 흘러넘친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냉정히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교사는 교사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의사는 의사의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 아이를 살피고, 아이는 아이의 위치에서 부모의 통제를 받으면 된다. 영웅은 없다. 각자 본분을 잊지 말고 자기 일에 전심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올 가능성을 전제한다. 인간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나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궁극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반항하고 저항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반항마저도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제한 건 아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반항하는 것이다. 인간 한계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은 결국 겸손의 문제로 환원된다. 위기일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인간성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페스트가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어 우리의 영혼을 좀먹기 때문이다. 이 경고야말로 카뮈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 에필로그 : 중소기업 영업사원이 맞이한 '코로나19'라는 페스트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오랜 연차의 중소기업 영업사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몇몇 일상을 기록한 글에 종종 내 직업과 이력을 소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전산용품과 모바일 액세서리를 전문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중소기업이다. 거의 대부분의 품목을 중국으로부터 수입(OEM)한다. 할인점을 위시하여 다양한 채널에 공급 판매한다. 1/4분기는 전통적인 시장 성수기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오프라인 채널은 고객이 없어 매출이 급감했고, 중국에서 건너와야 할 품목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 품절 대란이 지속됐다. 매출실적은 곤두박질쳤고 지난 3월에는 목표 대비 70%밖에 채우지 못했다. 편차야 있겠지만 당분간 이런 기조는 계속될 것이다. 실적이 곧 인격인 영업사원으로서 존재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일이다.

 

최근 팀장님 주관으로 매출목표 수정회의를 진행했다. 나를 비롯한 전 영업사원들은 원안을 고수하기로 했다. 전대미문의 국제적 전염병 사태를 맞이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매출 목표로 조정(인하)하는 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카뮈의 말을 인용했듯이 현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다. 비합리야말로 현실을 이끌어가는 코드다. 매출목표 조정회의를 준비하면서 나는 카뮈가 『페스트』를 통해 던진 메시지에 주목했다. 부조리한 현 상황을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저항해보기로. 부조리한 내 현실의 '페스트' 앞에서 작정하고 반항할 것을 용단했다. 모험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현실은 항시 불합리와 섞여 있는 것이기에 담담히 그것을 인정하고 용기 내서 부딪혀보려는 것이다. 영업사원이라는 내 위치에서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도전한 것이다. 소설에서 리유와 그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결단이 비단 나만의 선언은 아닐 것이다. 수능 시험에 지장 있는 고3 수험생부터 학원업계 관계자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대표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힘겨워 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힘을 내 이 난국을 잘 견디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모든 재앙은 결말이 있었다. 코로나19도 반드시 지나간다. 이를 견디는 힘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공감과 연대의식에 있다. 우리 모두 이 지독한 2020년의 '페스트'를 잘 견뎌내자! 바로 그것이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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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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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은 모두 다른데 텍스트적 관점에서 크게 두 개로 나누면,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있고 산문―소설도 산문의 한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수필(에세이) 정도의 소개념으로 산문을 칭함―을 잘 쓰는 작가가 있다. 시는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제외하자. 산문가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지만 소설가는 가끔 산문을 쓴다. 그중 소설과 산문 모두 잘 쓰는 부류가 있다. 하루키나 김훈과 같은 작가는 소설과 산문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소설보다 산문을 더 잘 쓰는 작가도 있다. 김연수를 꼽을 수 있겠다. 반면 소설가일 수밖에 없는 작가도 있다. 오직 소설가일 때 빛나는 작가 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렇다. 공지영은 천상 소설가다. 나는 그녀의 모든 소설에 감동했고 그녀의 모든 산문에 무감했다. 소설은 훌륭했고 산문은 별로였다. 그녀의 소설은 한결같이 읽기 쉽고 대중적이다. 쓸데없이 무겁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는 솔직함으로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어두운 곳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약자들의 처절한 삶과 힘(권력) 있는 자들의 고약한 위선에 대해 추적하고 고발했다. 문학에 대해 '꼭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한 소설가 조정래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지영은 문학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증명해가고 있는 작가이다. 그래서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공지영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평생 먹을 욕을 최근 몇 년 동안 다 먹고 있는 느낌이다. 조국 사태 후 그녀가 쏟아낸 진영 논리식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것 같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투표 잘합시다'라는 글을 게시하여 한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녀의 삶을 저리도 요란하게 만들었을까 우려하지만 작가는 우선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그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은 어렵지 않게 추스를 수 있었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이 고통과 허무를 통해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걸까. 공지영의 신작 소설 『먼 바다』는 정말이지 끝내주는 작품이다. 소설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인 '첫사랑'을 그린다. 발군의 감성적 묘사와 유려한 문체는 이 소설을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다르게 읽히게 하는 동력이다. 소설은 현재의 미국과 40년 전의 한국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두 주인공의 기억을 소환하고 조합한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의 진실이 들추어지며 긴장감이 누적되는 흐름은 땀이 날 정도다. 결국 두 인물의 희미하고 불분명한 기억은 소설적 절정을 통과하며 명징해진다. 결국 소설의 끝에 도달했을 때 긴장은 종결되고 독자는 농밀한 감동을 선사받는다.

 

미국에서 의자 사업을 하는 '그' 요셉과 안식년으로 미국 여행을 온 독어독문학과 교수 '그녀' 미호는 첫사랑의 기억을 추적해가는 두 주인공이다. 작가는 3인칭 시점으로 둘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적으로 추적한다. 4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을 연결해 준 매개는 '페이스북'이라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40년 전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판하고, 광장에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고,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멸했던 '그'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의자 사업가가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괴리를 작가는 유심히 포착한다. 다만 포착할 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것과 애써 싸우지 않는다. 하나의 소설적 배경으로 지긋이 물러나 있을 뿐이다. 이제 작가도 운동권 담론에 매몰된 과거 순진한 시절의 공지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종 두 인물의 기억을 추적한다. 둘의 기억은 조각나 있다. '그'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했던 것을 잃어버렸고, '그녀'는 '그'가 가장 강렬해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이었다. 이는 소설의 제목과 웅숭깊게 연결된다. 소설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난다. 소설의 앞과 뒤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먼 바다'는 두 인물이 함께 공유한 공간적 배경이자 잃어버렸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었던 추억을 회복한 초월적 상징이다. 그렇기에 바다는 멀어야 했다. '먼 바다'여야만 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확인한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멀고 길어야 했다.

 

결국 이 소설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은 절대 우주의 시간을 전복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시간의 일차월성과 무관하게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영장으로서의 인간적 생명력은 그 절반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잊힌 것은 잊힌 대로 의미가 있고 잊힌 것이 다시 복기될 때는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다. 두 주인공이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보게 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는 사람의 다음 시구절은 이러한 내 사유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재청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처음이라는 것과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있다. 처음이라는 건 '사실'의 세계이고 기억된다는 건 '이상(理想)'의 영역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다는 사실은 한 인간으로서 삶의 종국에 이를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운 기억' 정도로 갈음하는 건 적절치 않은 정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꿈이 있고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이상이 있기에, 그리고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와 현실을 더욱 냉정히 성찰할 수 있기에 말이다. 즉 첫사랑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타자에 대비된 나를 천착하는 아름다운 소환이요, 이후 사랑의 가장 순수한 시금석이 되는 경이로운 추억의 숙성이다. 이러한 첫사랑의 생명력을 아름답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소설 『먼 바다』는 훌륭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추신'으로 붙인 문장이 자못 이색적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라는 추신을 남겼다. 소설의 정의가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라는 점을 주지한다면 소설의 생명은 당연히 '허구(fiction)'에 있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불필요하게 저런 끝맺음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난 잠시 생각했다. 혹 지난 몇 년 간 작가 자신이 진실과 관련하여 지난한 싸움을 했다고 반추하며 스스로 지쳐있어 그런 건 아닐까. 즉 극한의 자존적 외로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감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작가에게 조언하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몽매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추가로 작가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제언하겠다. 소설로 말하는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할 때마다 문학적 생명력은 소멸된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동시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가가 광장에 나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87년 체제는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절대로 과거 독재 정권 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진영 구도가 남았을 뿐이다. 여기에 선악을 대입하고 '옳고 그름'을 외치는 순간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는 점증되고 서로 간 신뢰는 결핍된다. 그 선봉에 소설가 공지영의 이름이 없기를 바란다. 부디.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소개보다 작가를 향한 잔소리가 많은 조잡한 글이 됐다. 정말 잘 쓴 훌륭한 소설인데 그만큼 객관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솔직한 내 심정을 보태느라 글이 장황해졌다. 정리하자면 신작 『먼 바다』는 정말 잘 쓴 소설이다. 그 자리에서 한달음에 완독했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첫사랑은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다는 것을 소설가 공지영은 이 한 권의 소설로 아름답게 들려준다. 최근 읽은 한국소설 중 최고다. 오래간만에 읽은 수작이다. 읽지 않은 사람은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기 바란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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