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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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에 친중주의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가령 어느 정신 나간 지식인은 "중국은 우리에게 5천 년 우방, 미국은 50년 우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수·당의 역사와 병자호란, 6·25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런 영향 탓인지 미국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둥 G2 시대가 펼쳐졌다는 둥 아우성이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그리고 진실을 호도하고 가공한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어떤 수치도 중국이 미국과 동급이 됐다거나 미국의 턱밑까지 도달했다는 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증거만 넘쳐날 뿐이다.

세계에서 국가 GDP와 1인당 GDP 순위가 모두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경제규모 2~5등 국가들(중국, 일본, 독일, 영국)의 1인당 GDP 순위를 보라. 전부 15위권 밖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018년 기준 미국의 국가 GDP는 20조 달러가 넘었다. 단연 부동의 1위이다. 2위 중국과 무려 7조 달러 이상 차이가 난다. 1인당 GDP는 6만 2천 달러로 7위에 링크되었다. 두 가지 순위가 동시에 높다는 것은 많은 걸 함의한다. 경제규모가 크고 인구도 많으면서 국민들은 평균적으로 잘 산다는 의미다.

미국은 인구가 3억이 넘으면서 1인당 GDP가 6만 불이 넘는 괴물 국가다. 근래에는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패권국에까지 등극해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있다. 최소 30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석유와 가스가 미국 땅 깊은 곳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채굴 가능한 에너지의 양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기술력, 군사력, 문화력은 덤이다. 그 힘과 자신감으로 최근에는 무역(관세) 전쟁을 통해 중국에 꿀밤을 주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 기업 'ZTE'는 부도 직전이고 '화웨이'는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다. 미국을 어떻게 중국과 체급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질서를 규정한 소위 '브레튼우즈 체제'는 서서히 종말하고 있다. 미국이 더 이상 경찰국가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식량과 에너지 문제에서 미국은 완전히 자급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고립주의로 점차 돌아서고 있다. 그에 따라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이럴 때 줄을 잘못 서면 피곤해진다. 미국 손 꽉 잡고 있기도 버거울 마당에 친중이 웬 말인가. 제발 줄 좀 잘 서라. 병자호란의 치욕은 결코 옛이야기가 아니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이 2월 말 베트남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베트남은 수십 년 전 미국과 참혹한 전쟁을 치렀지만 최근에는 중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미국에 줄을 서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 중 북한과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국의 우방이거나 동맹국 들이다. 독일이 통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는 미국의 지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극렬한 반대를 강력한 힘으로 잠재운 건 미국의 권위였다. 터키는 미국에 짓까불다가 경제가 작살났고 베네수엘라는 줄 잘못 섰다가 망국이 됐다. 심지어 북한조차도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줄을 서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피터 자이한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은 소중한 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국제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미국은 더 강해지지만 세계는 더 무질서해진다. 미국의 新 패권이 지정학적 조건과 맞물려 기존의 동맹 체제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G2는 없다. 제발 정신 차리고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자. 줄 좀 잘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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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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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완독하기 힘든 소설

2013년 7월 뉴욕 브루클린의 북 라이엇(Book Riot)은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 속이는 책」이라는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828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조지 오웰의 『1984』 등의 거작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왜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을 할까 생각했지만 독서라는 행위에 내재된 기묘한 지적 우월의식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허세와 위선은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조사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단연 상위에 링크되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내 주변에서 소설 『전쟁과 평화』를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손에 꼽을 정도다. 책 제목은 워낙 유명해서 대부분 알거나 들어본 적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다. 과거 네이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북 카페 책모임을 운영했을 때에도 30명이 넘는 회원들 중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다시피 나는 책 읽기를 취미로 하고 관련 분야의 파워블로거다. 이런 내 주변에 고전 『전쟁과 평화』를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소설이 재미없거나, 혹은 읽기에 힘들거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소설이 너무 길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길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관중의 『삼국지』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과 같은 시리즈가 있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장르 자체가 다를뿐더러 문학사적 의의와 무게, 순문학적 가치와 심원성 면에서 견주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2,3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559명에 달하는 등장인물과 한 사람당 대여섯 개의 별칭(애칭)을 가진 러시아의 호칭 관습을 감안할 때 1권부터 바로 시험에 드는 소설이다. 내용과 주제는 차치하고 수많은 등장인물과 어마어마한 분량에 압도되어 시작부터 쫄게 되는 소설이 바로 『전쟁과 평화』인 것이다. 

 

⑴ 너무 재미있는 소설

사실 『전쟁과 평화』는 너무 재미있는 소설이다. 많은 등장인물과 긴 분량이 작품의 본연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겁부터 주는 오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나폴레옹 전쟁(조국 전쟁)이라는 19세기 초 가장 뜨거운 유럽사의 정중앙을 다루었는데 재미없을 리 있겠는가. 더욱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 고통과 상처, 신앙과 성장 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한없이 부풀어 오르게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의 인물 수와 분량만큼이나 거대하고 방대한 작품이다. 요컨대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 과정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은 재미있고 웅대한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원한 숙적인 영국을 침공한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대패한다. 이후 '대륙봉쇄령'이라는 독특하고 기괴한 아이디어로 영국을 옥죄며 압박한다. 시선을 동부(내륙)로 향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유럽의 국경선을 놓고 한 판 크게 붙는데 그게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면서 제국의 영토를 점점 더 확대해나간다. 패전한 러시아는 황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지휘 하에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고 잠시 평화스러운 시기를 맞이한다. 바로 이 시기에 러시아 대귀족들이 사교계를 열어 교제를 나누는 장면으로부터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의 첫 장면부터 작가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교계 문화를 전면에 배치했다. 황태후의 여성 관리이자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실력자인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아네트)가 개최한 사교모임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이 모임에 안드레이와 피예르를 위시한 주요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 귀족의 사교클럽이 여론과 정보를 공유하는 담론의 장이었다는 점을 전제하는 동시에 소설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독자에게 차분히 소개하는 안내적 기능의 역할을 한다. 소설은 크게 베주호프 가문, 로스토프 가문, 볼콘스키 가문. 이렇게 세 가문에 속한 주요 인물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⑵ 등장인물, 그리고 나타샤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일방적인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흔히 안드레이, 피예르, 나타샤를 『전쟁과 평화』의 세 주인공이라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일관된 개성과 진솔한 인간미를 올곧게 표출한 니콜라이를 왜 주인공에 넣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어느 누구도 독보적인 화자가 되어 작품을 지배하지 않는다. 사상의 전달과 성숙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피예르가 작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평가되는데 그마저도 작품 자체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인물이 소설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각 인물이 가진 개별성의 합이 소설을 형성해간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톨스토이는 세 여자(마리야, 나타샤, 소냐)의 매력을 독립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마치 세 인물에 대한 자신의 긍정을 독자에게 밀어붙이듯이 전달한다. '마리야'는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보잘것없는 여인으로 묘사되지만 끝내 자신이 사랑한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나타샤'는 시종일관 '밝고 건강한 생명력'이라는 마력을 발산하는 인물로서 여러 상실의 아픔을 겪고 종국적으로 피예르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소냐'는 니콜라이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일편단심의 여인으로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고 포기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세 여인은 각자의 독립된 개성과 존재감으로 소설을 밝게 비춘다.

 

나는 세 여자를 '사랑의 삼원성(三原性)'이라는 측면에서 탐구했다. 마리야는 지성과 이성이라는 여성의 지혜의 힘, 나타샤는 생기와 활력이라는 생명적 차원, 소냐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아가페적 측면을 표상한다고 생각해본 것이다. 이는 각 여성이 갖는 매력이 전부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톨스토이는 이를 부각하기를 원하는 듯 세 여성의 개별성을 자못 도드라지게 묘사했다. 아버지의 꼰대 기질과 유별난 구박을 잘 이겨내고 끝내 니콜라이의 사랑을 쟁취한 마리야는 순결하고 지혜로운 여성의 표본이다. 또한 단 한 남자(니콜라이)만을 사랑하고 기다리며 인내했지만 결국 그 남자(와 집안 전체)의 행복을 위해 온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소냐의 희생은 절대적인 사랑 아가페를 웅변한다. 마지막으로 나타샤가 남는데 그녀는 다른 두 여성과는 다른 힘으로 소설과 독자를 압도한다. 나타샤야말로 우뚝 솟은 단 한 명의 주인공이다.

 

나타샤의 매력은 소설 전체를 포괄하고 압도하며 흘러내린다. 『전쟁과 평화』의 단 한 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타샤를 선택하겠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나타샤의 생명력은 과히 밝고 순수하고 활발하기 그지없어 작품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다른 주인공의 개성과 인간성을 담는 그릇의 역할까지 감당한다. 마치 모든 인물이 그녀를 통해 존재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남자가 없을 정도다. 『전쟁과 평화』의 세 남자, 즉 안드레이, 피예르, 니콜라이(나타샤의 친오빠)는 모두 나타샤를 사랑했다. 보리스는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아나톨은 그녀가 잠시 일탈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나타샤의 매력은 소설 말미에 가서 그 성격과 본질의 화학적 변화 과정을 통과한 뒤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톨스토이가 결혼 후의 나타샤를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자.

"이제는 얼굴과 몸이 보일 뿐이고,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다산의 암컷이 보였다. 아주 드물게 예전 같은 불꽃이 타오를 때도 있었다. ..... 중략..... 성숙한 아름다운 몸에 예전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런 드문 순간에는 전보다 한결 더 매력적이었다."

『전쟁과 평화』 4권 - 에필로그 1부, 문학동네

불편한 독자가 더러 있겠다. '암컷'이라는 제법 센 표현이 사용되었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를 여성을 향한 긍정과 찬양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결혼을 해서 네 아이를 낳고 자기 자신을 가꿀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육아에 매진하고 있는 나타샤를 '암컷'이라는 상징적 단어로 찬양하며 처녀 때의 생기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에 있음을 강조한다. 요컨대 가장 높은 수준의 여성미를 외모와 생기가 아닌 모성으로서의 책임의식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에 톨스토이의 고루한 묘사에 누가 감격하겠냐마는 적어도 나는 이 대목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톨스토이가 사용한 '암컷'이라는 단어는 동물적이고 번식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엄마가 된 나타샤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인 성숙을 이뤘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성숙'이라는 웅장한 테마와 직결되는데 처녀시절의 나타샤가 삶의 주연(나 혼자만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빛났다면,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된 나타샤는 인생의 조연(남편과 자식의 조연)이라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한층 더 심화된 주연으로 승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전의 단선적 자아에서 결혼과 가정이라는 숭고한 의식을 관통한 후 전혀 다른 차원의 자아의 진본에 이른 여성성의 찬탄스러움을 격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여성성을 모성에 귀속(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극도의 경기를 일으켜왔다. '엄마가 된 나'를 기존의 '단독자로서의 나'와 구별하며 자유의 범위와 이상(理想)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현존이 초라하다고 인식하며 서글픈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인생이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삶"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사람의 인생이란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삶 사이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긴장관계의 연속이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없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을 인식하고 구분하며 실천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어른 됨의 본질이다. 인생은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장엄한 깨달음에 고독히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타샤의 달라진 매력(성숙)은 전보다 한결 아름답고 숭고하다.

세 여자의 대척점으로서 엘렌은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여성이다. 엘렌은 등장인물 중 가장 유려한 외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피예르의 첫째 부인이 되지만 수많은 남자들을 자기의 사교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남자가 있고 교태가 있고 위선이 있다. 남편 피예르와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는 결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랑은 집중력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피예르의 재력을 보고 아버지 바실리 공작이 계획적으로 추진한 결혼이었다. 엘렌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성의 비극적 외연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에 소설 초반부에 사교계의 큰 손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뒤로 갈수록 등장 빈도가 줄어들고 끝내 뒷부분에서는 '죽었다'라는 단선적 문장으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세 여자의 선한 영향력에 견주어 엘렌의 부정적 여성상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다.

⑶ 톨스토이 장광설

서평을 준비하면서 온라인상의 많은 후기를 탐색했다. 톨스토이의 장광설이 힘들었다고 평가하는 독자가 유독 많았다.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의 후속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비해 작가가 작품에 개입해서 이러쿵저러쿵 설교하는 대목이 꽤 많은 소설이다. 특히 3권부터 심해지는데 나는 그걸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톨스토이의 장광론 자체가 작품과 완전히 동떨어져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설교가 아니라 작품의 포괄적 관점에서 다른 디테일들과 잘 어우러져 유연하게 호흡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톨스토이의 설교가 부담된다면 이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있다. 소설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3권부터의 짤막한 형식의 작가적 개입은 피할 길이 없다. 자연스럽게 플롯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 말미를 장식하는 「에필로그 2부」는 웬만한 인내력 없이는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데 만약 부담된다면 그냥 패스해도 좋다. 소설은 「에필로그 1부」로 완전히 종결된다. 「에필로그 2부」는 지금까지 오래 참았다는 걸 한탄이라도 하듯이 톨스토이가 자신의 역사철학을 12장에 걸쳐 작정하고 강론하는 장이다. 굳이 읽지 않아도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비단 톨스토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독자로부터 비슷한 불만을 제기 받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비하면 훨씬 깔끔하고 세련됐다. 위고의 장광설은 사실 뜬금없는 면이 있다. 1권을 펼쳐들면 주인공 장발장은 나오지 않고 미리엘 주교 이야기가 90쪽이 넘도록 설명된다. 이를 어렵게 견디면 100쪽에 걸쳐 워털루 전투가 묘사되고, 결말을 기대할 즘이면 파리의 하수도 묘사가 80쪽이나 나와 독서 의지를 시험한다. 여기에 19세기 유럽 역사에 대한 작가 위고의 현학적인 강의는 끊임없이 끼어들며 독자의 호흡을 방해한다. 인간에 대한 심리묘사도 단선적이고 빈약하다. 이런 점 때문에 산만하다는 불평도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다르다. 앞서 언급한 「에필로그 2부」만 견뎌낸다면 어렵지 않게 산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 여러 번의 개정 작업을 통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자르고 수정했다. 특히 일련의 '군사적, 역사적, 철학적 고찰'을 과감히 들어내고 삭제했다. 그나마 톨스토이가 많이 참은 것이다. 오히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톨스토이의 개입이 작품의 광활한 서사와 문학적 상상력 앞에 용해된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작품과 연합해 있다. 그렇게 흉내 내고 싶어도 흉내 내기 힘든 작품이다. 모방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작가의 훈계는 어색하지 않고 작품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한 작가의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평화』가 『레미제라블』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작 바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세계가 스스로 글을 쓴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

⑷ 톨스토이 vs 도스토옙스키

나는 이미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자주 비교했다. 두 작가는 동시대 러시아 작가라는 유사성이 있음에도 뼛속까지 다른 특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톨스토이의 글은 몸에 좋은 약을 먹는 것 같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마약과 같은 중독성 느낌이 강하다. 톨스토이의 문장은 아름답고 유려하여 책을 읽다 잠시 접어두고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싶게 만드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묘사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날카로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끝까지 한달음에 넘기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는 묘사의 관점에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내부에서 우주로 확장해가는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세계에서 인간의 심연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톨스토이의 인간 묘사가 주변의 넉넉한 여백을 포용하는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마치 관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숨 막힘을 옹호한다고나 할까.

가령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레빈이 매를 사냥하는 장면과 『전쟁과 평화』의 쇤그라벤 전투 장면을 읽어보라. 톨스토이 묘사력의 압권을 목도하게 되는데 인간과 배경 사이의 공간감,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입체성, 그리고 각 개인이 서로 간에 부딪히며 꿈틀거리는 생명력 등이 조밀하되 여유 있게, 간결하되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각 인물이 배경과 상황 속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직립해 있는데 이는 작가 톨스토이가 예술적 기량 면에서 최고 수준의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이다.

과거에는 마치 내 옆에서 결함 많고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듯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좋았다. 어둡고 침울하고 병적인 것들 속에서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보다 날카롭게 천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 말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급진성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정신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결국 태초적 신성함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려는 본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에서 좋은 것을 보고 나쁜 것에서 나쁜 것을 보는 것이다.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계를 보는 눈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 건강한 것, 정신적인 것, 평범한 것에서 삶의 절정을 체험하곤 한다. 병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극단적인 것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지향(추구)해야 하는 삶은 '정상적인 것들' 위에 놓여 있다. 톨스토이가 그의 불멸의 작품에서 성실하게 그려냈던 '아름다운 것들'의 본래성은 결국 '평범한 것들'의 다른 이름이다. 결론적으로 톨스토이만큼 인간을 잘 아는 작가도 드문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한낱 감정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⑸ 소설과 역사

소설과 역사는 어떤 관계일까. 소설은 허구를 토대로 만들어지고 역사는 사실을 지향하며 펼쳐진다. 그렇기에 역사소설로 불리는 텍스트는 항시 고밀한 긴장감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시공간적 사실의 장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허구나 치명적인 오류와는 양립할 수 없다. 문학평론가 로쟈 이현우의 말대로 역사와 소설이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사에서 이 경쟁의 장을 본격적으로 연 것이 바로 『전쟁과 평화』다.

물론 『전쟁과 평화』 이전부터 역사소설은 존재해왔다. 굉장히 많은 소설이 역사를 다루었고 역사와 씨름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가 이전의 소설과 다른 점은 가까운 과거의 연대기성 위에서 작가의 역사철학을 숨기지 않고 허구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특히 실제 있었던 근래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뒤따른다. 사실이 틀리면 안 될뿐더러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허구를 보탠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톨스토이가 나폴레옹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자.

"그는 둥그런 배 위에 걸친 하얀 조끼 위에 가슴이 열린 푸른 군복을 입고 짧은 다리의 살찐 허벅지에 꼭 끼는 흰색 사슴가죽 바지를 입고 기병 장화를 신고 있었다. 짧은 머리는 방금 빗은 듯하고, 넓은 이마 한가운데에 머리털 한 줌이 드리워져 있었다. 희고 통통한 목살이 군복의 검정 깃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 뚜렷이 보이고, 몸에서는 오드콜류느 향기가 풍겼다. 아래턱이 튀어나오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살이 찐 얼굴에는 은혜롭고 근엄한 황제다운 환영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전쟁과 평화』 3권 - 1부, 문학동네

 

기막힌 묘사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나폴레옹을 톨스토이는 어떻게 저렇게 자세하고 자신 있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실존 인물에 대한 저런 식의 세밀한 묘사는 사실과 상상력이 작가의 영혼 안에서 치열하게 씨름하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과히 문학적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소설 체계를 창조하고 확립한 것이다.

 

 

『전쟁과 평화』와 유사한 골격구조를 가진 소설은 많다. 전술한 바 있는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위시하여 스탕달의 『적과 흑』,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도 비슷한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소설들이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줄기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운명의 대서사시이다. 하지만 규모와 원조(元祖)라는 면에서 차이가 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원조가 바로 『전쟁과 평화』이다. 즉 『닥터 지바고』는 파스테르나크가 쓴 '전쟁과 평화'이고 『고요한 돈강』은 숄로호프가 쓴 '전쟁과 평화'인 것이다.

⑹ 역사의 동력은 무엇인가 : 역사 vs 영웅

『전쟁과 평화』의 주제를 얘기해보자. 이 소설의 주제의식은 의외로 간명하다. 영웅이 역사를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19세기 중반 당시 역사관의 대세로 자리 잡은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장광설도 대부분 이 주제와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역사의 주체는 몇몇 위인(영웅)들이 아니며 각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자신의 현존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일반 개인들의 총체적 노력의 합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민중사관(民衆史學)과 연결된다. 사실 조국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을 톨스토이가 두둔할 리 없고, 예수의 신인성(神人性)과 부활(실제적 사건으로서의 부활) 자체를 부정한 그가 기독교의 신사관(神史學)을 옹호할 리 없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영웅사관을 작정하고 반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나폴레옹은 우왕좌왕하고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의 리더십도 밀도있게 표현되지 않는다. 또한 황제 알렉산드르 1세도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더욱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지시와 지휘가 군대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역사 앞에서 영웅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강변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작위적이다. 특히 나폴레옹이 러시아 농노 라브루쉬까와 대화하면서 농락당하는 장면은 영웅보다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슬기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진하게 웅변한다.

나는 두 사관(영웅사관, 민중사관) 모두를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특정 공식에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연역론과 양립할 수 없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다. 인간은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를 돌아보고 총알같이 날아가는 현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하는 논쟁은 시간의 흐름(과거/현재/미래)을 동시간대에서 통합할 수 있는 관점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인간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 수 없고 미래를 현재에 포갤 수 없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볼 수만 있을 뿐이다.

좀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역사는 영웅과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함께 만든다기보다 뒤섞여 있다는 표현이 낫겠다. 나폴레옹의 1812년의 러시아 침공은 나폴레옹의 꿈과 60만 대군의 위엄,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프랑스 민중의 결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이라는 한 지도자의 결단의 크기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류사에서 한 사람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진 주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수없이 기억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고독한 결단이 루비콘 강을 건너게 했고, 스탈린의 독특한 인격과 공포정치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트루먼의 결단으로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반면 수많은 부르주아들의 여망과 의지로 루이 16세의 목이 잘려나갔고, 촛불을 든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지도자가 탄핵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역사에는 영웅과 민중이 뒤섞여 있다. 거기에 공식은 없다.

독실한 기독교도(개신교도)인 내가 역사관과 관련한 특정한 이론에 함몰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소위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내 입장에서 본심은 신사관에 스탠스를 두고 있음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역사는 영웅도 민중도 아닌 오직 신(神)의 섭리와 전능이 이끌어간다고 믿는 입장이다. 그러면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과거 칼빈의 예정론을 공부할 때 수없이 제기되었던 이 논쟁의 핵심은 신과 인간이 동일한 수준의 과학(차원)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시간차가 존재한다. 차원(개념/과학)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면서 동시에 신의 예정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⑺ 제목 '전쟁과 평화'

소설의 제목을 반추하자. 나는 소설의 제목사(題目史)에서도 이 소설은 한 획을 그은, 가장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전쟁'과 '평화'는 마치 상치된 의미로서의 등가 언어로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자 박형규 교수는 「해설」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은 전쟁에 대립되는 상태로서의 평화, 인간적 공동성으로서의 평화, 세계로서의 평화를 다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 나는 보다 더 깊은 함의가 있다는 걸 포착했다. 평화를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의 문제로 풀이했다. 조국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참혹한 '전쟁'과 이를 겪어내며 성취한 인간들의 정신적인 '평화'를 함축한다는 걸 느꼈다. 즉 전쟁의 대척점 혹은 결락됨으로써의 평화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인간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평화를 해석한 것이다.

소설에서 전쟁은 참혹할 정도의 비극으로 묘사된다. 톨스토이는 전쟁의 참상을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이 가진 야만성과 비인간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개별 인간의 희망 섞인 분투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안드레이가 나폴레옹과 높은 하늘을 오버랩해 바라보며 무언가를 깊게 깨닫는 장면, 피예르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다 농민 플라톤을 만나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과정, 그리고 나타샤가 여러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며 끝내 피예르와 결혼해 행복의 원형에 도달하는 결론 등은 제목이 암시한 인간의 정신적 성숙, 즉 영혼의 평화를 그대로 방증하는 장면들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궁극의 감동은 바로 인간의 삶을 진하게 긍정한 톨스토이의 지혜에 있다. 그의 후기작 『안나 카레니나』는 죽음을 맹렬히 탐구함으로써 삶을 천착한 작품이다. 예컨대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불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작가는 안나와 다른 삶을 산 레빈의 존재(사랑, 가정, 행복)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는 다르다. 그녀는 약혼자 안드레이를 배반하고 잠시 불륜의 유혹에 빠져 깊은 절망에 함몰된다. 그러나 다시 구원할 기회를 얻어 훗날 안드레이와 재회하게 되고 그를 극진히 간호하며 진정한 용서를 받는다. 이후 안드레이는 죽고 나타샤는 종국 피예르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인간 삶의 구원의 맥락을 복잡하게 돌리지 않고 정면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데 소설 『전쟁과 평화』의 깊은 감동이 숨겨져 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대략 80년 남짓한 우리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물질을 조금 더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변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예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과 같이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이 말하는 '진정한 평화'였던 것이다.

* 에필로그 : 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

굉장히 긴 서평이 되었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서평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할 얘기가 많아졌다. 장황하고 만연하기 그지없는 형편없는 리뷰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쯤에서 서평을 정리하겠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이 소설 한 편으로 세계의 모든 소설들이 덮이고 커버된다. 소설을 보편을 초과하고 소설의 끝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다시 쓰여지기 힘들다. 흉내 내기도 힘들다. 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인 방대한 스케일과 심원한 주제는 결국 '인간의 삶(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웅대한 축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감히 외치겠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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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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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지식(정보)의 홍수시대다. 인류 역사에서 이토록 많은 지식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저토록 빠른 속도로 공유된 시기는 없었다. 지식인으로서 최고의 수준은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난해한 것을 쉽게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란 자기 내부의 거대한 지력을 외부로 세련되게 발산(output)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최고 레벨의 지성이다. 그다음 수준은 어려운 것을 그저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지식 안에 고착된 사람으로서 사람 간의 지식의 유동성에 무지하거나 전달할 역량이 부재한 경우다. 무엇보다 최악의 수준은 쉬운 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들을 지식인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 제법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시민과 동시대를 산다는 건 즐겁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에 있어 그는 한국 대중 지식인 중 단연 으뜸이다. 최소한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나는 과거 여러 서평과 논설을 통해 유시민의 세련된 언변과 정제된 지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선사해왔다. 현실 정치를 접고 전업작가로 데뷔한 이래 그의 지성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하는 지식은 무의미하다. 자기 안에 고착된 정보는 힘이 없다. 자아를 기꺼이 벗어나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식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정치적·사상적으로 보수적인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제법 진보적인 그의 말과 글을 주목하는 이유다.

   『역사의 역사』는 유시민의 최신 비블리오그래피다. 출간된 지는 조금 됐으나 아직까지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역사의 '역사'를 다루었다.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서와 그 책을 집필한 역사가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서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라는 항목에 이 책을 넣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학의 역사'가 아닌 '역사 서술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에 더 가깝다고 부언한다. 그러면서 역사학과 역사 서술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역사학은 학술 연구 활동이지만 역사 서술은 문학적 창작 행위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성격이 후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전제는 독자에게 무언가 양해를 구하려는 취지로 이해된다. 이 책을 역사학 책으로 보지 말고 좀 더 유연하고 캐주얼하게 역사 르포나 문학 정도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자의 전공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전공과 무관하게 지금까지 그는 역사와 관련한 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한국 사회에서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인 '현대사'를 주제로 책을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신간 『역사의 역사』가 그의 전작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인류사를 빛낸 역사 관련 찬란한 고전들을 정면으로 소개하며 리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전공 분야인 역사를 본격적으로 관통하려 했던 저자의 부담이 이해될 만하다. 저자의 바람대로 유연하고 넓은 마음으로 책장을 연다.

   역사서의 시조를 얘기할 때 항시 거론되는 두 명의 역사학자가 있다. 그들은 바로 헤로도토스(Herodotos)와 투키디데스(Thukydides)다. 저자도 두 역사학자를 책의 최전방에 소개했다. 키케로로부터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린 헤로도토스와 랑케로부터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 지목받은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보는 관점과 글을 서술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이야기'를 중시한 반면 후자는 '사실(실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분명한 역사서이면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텍스트다. 저자는 두 역사가의 차이를 조밀하게 포착하면서 그들이 훗날의 역사가들 즉 랑케, 토인비, 다이아몬드, 하라리 등에게 어떠한 영감을 주었는지를 풀이한다.

   저자는 동·서양의 다양한 역사가들을 선택했다. 그중 규모와 실증 면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업적을 남긴 사마천(司馬遷)을 건너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헤도로토스와 투키디데스 다음 순번으로 사마천을 배치했다. 저자는 사마천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책 속에는 사마천과 그의 대작 『사기(史記)』에 대한 찬사가 아낌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서구 역사가들이 『사기』를 잘 모르기(몰랐기) 때문에 세계적인 차원에서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저자는 사마천 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고,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선택한 역사학자들의 리스트는 녹록지 않다. 과학과 역사를 처음으로 조우시킨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oun),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지향한 실증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랑케(Leopold von Ranke), 유물론과 변증법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그리고 슈펭글러(Spengler, Oswald)부터 하라리(Yuval Noah Harari)까지의 현대 역사가들도 폭넓게 다루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도 놓치지 않는데 민족주의 역사학의 계보라 할 수 있는 박은식-신채호-백남운 등도 자상하게 소개했다. 동·서양의 배분, 이슬람권의 반영, 현대 사학계의 폭넓은 할애, 대한민국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소개 등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저자의 배분이 돋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저자의 모든 저작들을 탐독했다. 그가 쓴 책 중 읽지 않은 게 없다. 그의 전작 중 나는 『청춘의 독서』를 최고로 꼽아왔다. 큰 아픔을 겪은 후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고독과 의지가 『청춘의 독서』에서 진정성 있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거기에 한 권 더 보탤 수 있게 됐다. 『역사의 역사』도 그가 쓴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잘 쓴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다. 내가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작가로서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저자의 절제력과 차분함에 있다. 여러 맥락에서 다분히 진보적인 저자의 색채를 절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고민한 흔적이 인상적이다.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를 저자 특유의 쉽고 맛깔나는 필치로 차분하게 서술한 점도 돋보인다. 역사에 관한 특별한 배경지식 없이도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다.

   유시민은 이제 완전한 작가가 된 듯하다. 최근 그의 외연에서 정치인의 색채는 거의 다 빠졌다는 것을 느낀다. 최근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정계 복귀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세간의 의심 섞인 목소리가 들리곤 한다. 나도 그의 정치 복귀를 지지하지 않는다. 유시민은 정치보다 '썰전'이나 '알쓸신잡'이 더 잘 어울린다. '작가'는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글 쓰고 강연하는 게 지식인 유시민의 가장 적확한 아우라가 아닐까 한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소신과 신념만으로 정치가 가능했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그는 모 인터뷰에서 다음 책은 여행 에세이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기대된다. 독자로서의 나의 소박하고 순수한 기대가 정치라는 이유로 배반당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완전한 작가로 발돋움한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를 인문학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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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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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읽자 읽자 했던 계획이 2년이나 연기되어 이제서야 읽는다. 1권을 끝내고 2권 첫 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읽은 이 방대한 소설을 다시 집어 든 이유는 '거대한 정신적 크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성숙은 인간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세상과 씨름하지 않는다. 내면의 크기가 큰 사람은 세상의 여러 고단함과 비루함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사람'은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서사시다.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주인공들(안드레이, 피에로, 나타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지 톨스토이는 유려한 문체와 거대한 서사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톨스토이 특유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안드레이와 피에르가 친구 같고 나타샤가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잔잔하고 명징한 영혼의 발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한없이 찬란하다.

   이제 갓 2권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작품 전체의 총평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범우사 번역(역자 동일 : 박형규 교수)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디테일을 모두 잊었다. 약간의 감상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독서를 제쳐두고 굳이 이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마당에 최대한 느리고 세밀하게 읽고자 했다. 어휘 하나 쉼표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력 있게 탐독 중이다. 완독 후 서평을 남기겠다. 과거 『안나 카레니나』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진지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특별한 서평으로 이웃들과 공유하겠다. 이 글은 훗날 서평의 프롤로그 정도로 이해해주면 되겠다.

   『전쟁과 평화』와 같은 대작을 완독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계획(다짐)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독서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사실 2년 전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역자 박형규 교수의 신번역 완간이 늦춰진 측면이 컸다. 또한 당시 회사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건강 문제가 겹쳐 수술 후 병상에서 한 달간 휴가를 보낼 때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잡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과거 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에 대해 가볍게 언급한 바 있는데, 솔직히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해 '나와 더 잘 맞는다'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물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매우 훌륭한 소설이며 그 작품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로 내 심연에 다가왔다.

   『전쟁과 평화』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내용은 물론 인물, 개성, 문체, 관점, 철학, 향기, 소재, 지향 등 모든 것이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인 것이다.

   사실 근래에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삶은 크게 세 개의 동선으로 구분된다. 가정과 회사, 그리고 교회. 최근 세 곳 모두에서 모두 인간성의 한계와 회복에 관한 웅대한 주제를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닌 타자의 문제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의 문제로 전이됐고 폭발됐다. 나이 마흔에 지나치게 진지 타령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가 점점 더 깊고 많아지는 현상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훗날 내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를 상상한다. 나의 전 일생을 하나의 점으로 축약하여 반추할 기회가 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삶의 번민 중 대부분이 사람 사이의 문제이며 그것들 중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크기의 문제'에 연원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이 세계는 어떤 측면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적 의지는 내밀한 형태로 가려져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각자의 자아를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는 상치, 오해, 태만, 격차 등이 발생하고 이로써 인간은 고통받고 상처받는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 웅변했지만 그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지나가버린 시간(과거)으로서만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논증이다. 나는 '마음의 크기'의 내실을 믿는다. 그저 단순한 웅장함이 아닌 실질적인 힘과 내용을 가진 마음의 크기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성장의 새로운 단층을 발견할 때마다 내 실존은 웃음을 짓고 긍정적 미래를 희망한다. 반면 '아직도 멀었다'는 탄식 또한 내 현존을 억누른다. 나는 좋은 남편일까. 좋은 아빠일까. 좋은 성도일까.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나는 '큰 사람'일까. 내 사위(四圍)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디테일들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속 항아리는 충분하게 클까. 아니라면 훗날이라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양한 질문과 사유가 용솟음친다. 이 현상의 동기 선상에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가 놓여 있다.

   문학작품으로서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나와 타인, 삶과 세계에 대해 탐구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세한 서평은 완독 후 특별판으로 남기겠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후기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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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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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공지영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해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 최상단에 올랐다. 불매 운동, 평점 테러 등의 좋지 않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발간 이틀 만에 초판 6만 부가 매진되었다. 최근 모 정치인 스캔들 관련 발언이나 SNS 활동 등이 이슈가 되어 여러 매체에 작가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어 왔다. 더욱이 이번 소설의 소재 때문에 '아군에 칼을 겨눴다'며 정치적, 이념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에 그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거부한 채 작가 공지영이 『높고 푸른 사다리』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장편소설 『해리』에 깊이 침잠한다.

   『해리』는 인터넷신문 기자 '한이나'가 여러 경험을 통해 의문의 사건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악이 실제는 집단의 악을 구성하거나 대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근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한 신부의 법적, 도덕적 일탈 하나조차 처리하지 못한 채 조직의 권위와 이미지를 덮기 위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가톨릭 교구의 추악한 단면을 꼬집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헌신하는 듯하지만 실상 온갖 비리와 부패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활동가와 정치인들의 추한 모습도 담았다. 겉으로는 선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내밀한 곳에서는 여러 형태의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와 시민(복지) 단체를 고발함으로써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냉정하게 조명해야 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소설은 10년 전 출간된 장편소설 『도가니』와 연결되어 있다. 『도가니』의 배경이 된 안개의 도시 ‘무진’이 또다시 소설의 시공간이 됐다. 『도가니』의 주인공 '서유진'도 재등장하여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가니』의 주요인물 장 경사가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온갖 불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점도 비슷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작가는 선의를 위협하는 악의 카르텔이 얼마나 간사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우리들 가까이에서 안개처럼 스며들어 있는지를 소설로 형상화한다. 

   작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작정한 듯 소설 속 악의 양대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이해리'와 '백진우'의 악행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악녀 이해리는 선함을 가장하고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쓰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이다. 가톨릭 신부 백진우는 진보와 신앙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해리를 배후조종하며 악행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야만인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개인의 엽기적인 악행의 퍼포먼스와 이를 구조적으로 보완하고 피드백하는 공동체적 악의 카르텔의 모습에 구토가 나올 정도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악행들이 선의 이름으로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최전선에서 정의와 진리를 부르짖어온 가톨릭, 인권단체, 기자를 지독한 악행의 실재로 묘사했다. 물론 이러한 작가적 허구(설정)가 완전히 백지에서 펼쳐진 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실화를 기초로 했다. 예컨대 천주교계의 비리와 성폭행 사건, 인권 유린 논란이 불거졌던 대구 희망원 사건, 불법 시술과 아동 학대 혐의가 제기됐던 전주 목사 봉침 사건 등의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통속적으로 선과 진보, 정의와 민주주의의 편에 서있다고 수렴되어온 세력을 구조적 악행이 날 것으로 야만화된 모델로 치환했을까. 그것은 바로 악의 '성질'에 있다.

   과거 진보를 표방한 자들의 반대에 있던 세력의 악행이란 대개 단순하고 가시화된 것들이라고 작가는 규정(전제)한다. 악의 형태와 물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이 존재하는 화학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즉 저들의 악이 쉽고 명확한 그 무엇이라면 이들의 악은 어렵고 복잡하게 엉켜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편'이라는 이념적, 공동체적, 암묵적 카르텔에 함몰되어 그것을 포착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특정 세력에 대한 비판 내지는 고발로 수렴하지 않는다. 보다 넓은 천착에서 가능성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문제 제기가 소설의 소재가 된 가톨릭과 장애인 단체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선과 정의를 외치는 모든 개인과 공동체에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류사의 무수한 악행들은 그 사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불행한 역사는 용기 없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사상과 이념, 종교와 이해관계를 떠나 잘못은 오직 잘못으로만 풀이되어야 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은 선악(善惡)을 인식함에 있어 현상이 본질을 전복하고 각색이 내용을 압도하는 불편한 현실과 그것을 굳이 끄집어내기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의 구조적 위선에 대해 경각을 던지려 했을지 모른다. 난 이 소설을 그렇게 이해한다.

   소설에서 간간이 포착되는 작가의 실험적 장치가 인상적이다. 최근의 SNS 시대를 십분 반영하여 페이스북 디자인을 그림 형태로 표현했다. 악의 두 모델 이해리와 백진우의 SNS 발언을 페이스북의 시각적 외관 그대로 소설에 구현한 것이다. 두 인물의 위선에 찬 거짓말을 주로 페이스북 형태로 차용한 것은 SNS의 악의적 기능, 즉 가짜뉴스와 거짓정보의 재생산 기능과 확산 능력을 비웃고자 하는 작가적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주요 연도와 사건,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세월호', '이명박근혜', '최순실', '대통령 탄핵' 등의 단어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은 허구로 쓰여진 이야기지만 강렬하게 현실과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작가의 의도된 동시대적 의지로 풀이된다. 즉 소설 『해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 한 편의 소설로서의 한계와 아쉬움을 지적한다. 과연 2권짜리로 늘어져 쓰일 만큼의 서사였는지 의문이다. 소설의 얼개는 단순하다. 주인공 이나가 해리와 진우의 악행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기본 뼈대다.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현재적 위기를 이나의 과거 상처에 겹치기 위해 회상 신이 자주 등장하지만 소설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일차원적 시간의 흐름에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 소설의 분량은 반드시 무게와 넓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작품이 지닌 사유의 무게와 서사의 질량을 받쳐내지 못하는 분량은 독자를 힘들고 짜증나게 하기 때문이다. 앞부분은 흥미진진하지만 뒤로 갈수록 서사가 늘어지는 느낌이다. 특히 주인공 이나가 소설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갑자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회복의 동기를 찾는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작가가 긴 분량을 감당하지 못한 채 급하게 이야기를 마치며 독자에게 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작품 바깥의 얘기를 해보자. 최근 공지영 작가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녹록지 않은 것 같다. 대개 이념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는, 즉 같은 편이라 여겼던 사람들에 의한 비판인 듯싶다. 반면 보수적 스탠스에 있는 몇몇 지식인들은 공지영이 드디어 혼돈에서 벗어났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우스운 광경이 벌어진 데에는 공지영 자신의 책임이 크다. 나만의 개인적 신념인지는 모르겠으되, 나는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본질과 무관한 언행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이 문학의 해석(수용)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소설가로서 공지영이 보여준 여러 발언과 행동, SNS상의 흔적 등은 낯뜨겁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작가로서의 정제와 절제가 아쉽다. 아끼기에 하는 말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평과 함께 작가를 향한 애정이 뒤섞여 산만한 글이 되었다. 소설 『해리』는 문제작이다. 각 파편들은 실화를 기초로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실화라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긴장감을 전제하고 있는 소설이다. 중요한 건 메시지다.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고매하거나 심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차분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순전히 작가 공지영의 역량이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에 구조적으로 악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소설 『해리』는 읽어볼 가치가 있다. 종교, 정치, 이념과 무관하게 누구나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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