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날의 우리 문단을 구성하는 거대한 여류작가, 박완서님의 기억을 쫓아 책을 들었다. 개성 박적골에서의 어린시절과 서울 상경후의 이야기가 작가의 따뜻한 시선 속에 잔잔하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성장소설이랄까...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해방과 전쟁 전후의 모습들이 글속에 겹쳐진다. 실개울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이나 종로거리에서 우마차를 피해 팔자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 물지게를 지고 언덕위의 판잣집으로 오르는 아저씨의 모습들이 나의 기억이라도 되는 양 정겹게 다가온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3~40년대의 수묵화 같은 이야기라 내가 기억하는 7~80년대의 흑백영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박완서님과 내가 이심전심이 된다.

특히, 어린 완서의 눈에 비친 세상과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골에서 생활하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서 겪는 새로운 생활이나 외롭다곤 하지만 오히려 이를 즐기고 음미하는 모습, 책과 친구,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교육을 통해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인생관과 그런 어머니의 이중성을 꼬집는 위트가 글의 맛을 더한다.
정말이지 “박완서만의 탁월한 기억력과 감수성으로 꿈결처럼 다가오는 유년의 공간을 우리 소설 문학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그려 내고 있다.”는 띠지의 소개처럼 전쟁이라는 공황상태마저도 훈훈하게 다가온다.

1.4후퇴 전후의 공동화된 서울을 두리번거리며 밀가루 몇 줌이라도 남아있을까 남의 집 대문을 빠끔히 열어보듯 박완서님의 유년시절을 잔잔하게 둘러봤다.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에서 그려나가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했다. 해방이나 전쟁과 같이 우리역사의 중심축을 지날 때면 지나치게 고지식해지면서 무조건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식적 무거움에서 벗어나 일상을 사는 서민들의 소소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그런 점이 역사를 더 생생하게 보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햇살이 포근한 오후, 창가에 앉아 옛 기억을 더듬는다. 피부를 훑으며 올라오는 따신 기운처럼 뽀얗게 윤색되는 느낌에 흐뭇해진다.
어젠 한 인터넷을 통해 박완서님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약간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눈가에 스며있는 웃음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책에서 봤던 앙칼진 보드라움이 고스란히 와 닿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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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술잔
현기영 지음 / 화남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검푸른 제주바다를 닮은 표지를 넘긴다.
먼 곳을 응시한 작가의 사진은 바다의 심연을 헤집고 깊이 잠들어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하다. 몇 장의 간지를 더 넘기자 흰 여백의 모퉁이에 <바다와 술잔>이라는 흘림글이 보인다.
어쩌면 바다는 현기영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하는 비밀상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제주 바다에서 한모금의 술로 지난날과 오늘을 어우른다.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다와 술잔>은 “한 소설 작품을 끝낸 후, 남은 자투리들로 마음 편하게 에세이를 엮는 일”이라 얘기했듯 현기영님의 자전적 소설적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못 다한 잔 얘기가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간과 대지]에서는 제주라는 천해의 환경에서 태어난 현기영의 유년시절을 얘기한다. 하지만 그 기억 대부분은 4.3사태의 검은 잿더미와 산업화의 회색 콘크리트에 의해 매몰되어 버렸다. 제주는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동심이 없어진 저자는 용두암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우리들로 인해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대지(지구)에 대해 <녹색평론>의 글을 빌어 개탄한다. 물리적인 쓰레기와 함께 정신적인 공해까지도 점차 우리를 죄어온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이라는 화두는 어디에도 변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질문일 것인데...
또한 세상 속에 휩쓸리며 치고 박고 싸우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는 관조의 자세, 오늘날의 각박함과 살벌함을 벗어날 수 있는 아웃사이더의 ‘변방정신’도 얘기한다.

[입새 하나 이야기]에는 소설 형식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잔잔하면서 조금은 서글픈 듯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세월은 물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게 만든다. 산문집 속에 들어있는 소설 같은 산문, 산문 같은 소설이라는 모호함에 색다른 재미를 느낀다.

[상황과 발언]에선 사소하지만 일상에서 음미해 봐야할 모습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영화라든가 TV, 신문과 같은 미디어로부터 폭력과 전쟁, 테러와 같은 문제까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얘기한다.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작가의 폭넓은 시선이 돋보인다.
그래서 조금은 논설조의 글도 보인다. 4.3과 같은 암울한 격동기를 몸으로 느낀 작가이니만큼 오늘날의 부조리를 매우 위태롭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그치고 설득하고 애원한다한들 고착화된 우리사회의 바이러스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말의 정신]을 통해 자신의 글에 대해 주로 얘기한다. 그의 글이 4.3이라는 비극을 묻고 있는 제주도에 너무 얽매여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그 내력에는 타지인의 무지와 외면 외에도 슬픈 역사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울분이 숨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멋모르던 시절의 의구심과 나이가 들어가며 알아가게 되는 ‘제주도’의 의미가 작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꼬집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점점 동떨어져 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변경인 캐리커쳐]에서는 검은 목탄으로 대강의 윤곽을 잡아 날쌔게 그린 캐리커쳐처럼 작가의 지인들을 투박하게 그려놓았는데 거친 질감 속에 숨겨진 정겨움이 인상 깊다. 문화와 예술을 넘나들며 선배와 후배, 친구로서 만나고 이야기하며 술잔을 돌린다. 그 거나하고 왁자한 분위기에 괜한 입맛을 다셔본다.


술잔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조금은 애잔하고 씁쓸하다. 비워버린 술잔에 이런저런 상념을 풀어놓으며 또다시 한잔을 들이킨다. 붉게 격앙된 취기어린 목소리도 들리지만 어쨌든 그 속에는 바다라는 넉넉함과 따스함이 숨어있다.
오래전에 둘러봤던 용두암과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가 다시금 생각난다. 그곳에서 한잔 술로 바다에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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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금빛대지의 검은 우물
외줄로 흘러넘친 상념의 줄기는
하얀 바다를 만나 사랑을 전한다.




- 2004/11/22
  만년필을 선물 받다.
  펜촉의 유연함과 은은한 잉크냄새에 금방 반하다.

  하지만, “오리지널은 복원이 불가능한가?”
  무심결의 낙서가 맘에 들어 깔끔하게 옮겨보지만
  처음의 거칠고 투박한 맛이 살아나질 않는다.
  결국 ‘무삭제판’을 스캔받아 조심스레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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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콘텐츠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책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도움 없이는 도구로서 올바른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역설을 진리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도 조화로워지려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알맞은 배합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컴퓨터와의 접속을 자주 끊고, 책을 읽으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여야 하겠다. 컴퓨터를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를 함양해 주는 것이 바로 책인 것이다. 책은 반성적, 비판적 기능을 통하여 주체적 자아를 형성해 준다."
(현기영님의 <바다와 술잔> 중 '터미네이터를 이기기 위하여'에서 발취)

좋은 말인 것 같아 옮겨본다.
하지만... "컴퓨터와의 접속을 끊어라..."는 말에 괜한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결국 이곳의 접속도 끊어란 말이 아니던가! ^^
컴퓨터를 '섹스'로, 책을 '사랑'으로 바꿔놓고 봐도 그런 대로 괜찮은 글이 되는 것 같아 과감히 올려본다.

"양질의 섹스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섹스사랑의 도움 없이는 도구로서 올바른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역설을 진리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도 조화로워지려면 섹스사랑의 알맞은 배합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친구들에게 섹스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사랑에 대해 느껴 보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여야 하겠다. 섹스를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를 함양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반성적, 비판적 기능을 통하여 주체적 자아를 형성해 준다."
(현진영님의 <바다와 술잔>, '터미네이터를 이기기 위하여'에서 발취한 내용에 건전하게 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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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2004-11-02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말을 바꾸니 의미 전달이 훨씬 쉽군요...원래가 섹스와 사랑이었는데 컴퓨터와 책으로 바꾼 모양입니다.
 

LP를 기억함


LP long playing recordn. (pl.~s, ~'s) (레코드의) 엘피판

온 시내를 돌며 어렵게 구해온 LP 한 장, 얇은 비닐포장의 한 쪽을 자른 다음 까칠까칠하게 인쇄된 재킷을 꺼내듭니다. 넓은 표면을 한번 쓰다듬고서는 그 속을 살포시 들여다봅니다. 속지에 둘러싸인 검은 레코드판과 깨알 같은 해설지가 보이거든요. 조용히 눈을 감고 재킷 속, LP의 검은 향을 깊이 음미해봅니다.
“알아요? 좋은 음반에서는 초콜릿 향이 난다는 거?”

헤드폰을 오디오에 꼽고 볼륨을 약간 높입니다. LP를 턴테이블의 고무판에 놓고 바늘을 살짝 올립니다. ‘티- 틱’, 두 번의 가벼운 기지개와 함께 음악으로의 산보가 시작됩니다.

오래된 LP의 비오는 소리 알죠? 마치 비오는 날에 산보하는 푸근한 느낌이랍니다.


-2004/10/05
  어느 날 문득, 턴테이블에 LP 한 장을 올렸다.
  하지만 퓨즈가 나가버린 오디오에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가... 한동안 잊고 지내온 LP 소리가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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