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확실히 아는 것부터 적는다.
자신이 적은 번호중 제일 적게 나온 번호를 찾는다.
나머지 문제는 다 그 번호로 때린다.

학교에서 모의고사가 있어 감독을 들어간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끝나길 무섭게 엎어진다. 쓰러져가는 전사들을 일으켜 세우며 '겐또 잘 때리는 법'을 강의한다.
"5지선다형일 경우 20%로 확실하진 않지만 대부분의 시험은 객관식의 비율이 비슷하다... 오랜 경험상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 방식은..."

찍는 유형을 보면 그날의 행운번호를 골라 일렬로 찍는 학생이 있는 반면 하트모양이나 다이아몬드, 심지어 마시마로까지 그 모양으로 작품을 만드는 학생들까지 다양하다.

조금만 시간과 관심을 투자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텐데... 아쉽다.
확실하게 맞출 수 있는 문제나 겐또를 때려 맞추는 문제를 하나씩 늘려가는 재미. 그 맛에 공부를 하는 게 아닐까.

('겐또'는 일본인들이 한자로 見當(견당)이라고 쓰고 '겐토오'라고 읽는다. 의미는 ‘표적, 목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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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교육학
정영근 지음 / 문음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딱딱하고 어려운 교육학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교사와 교육을 새롭게 되돌아본다.
<홀랜드 오퍼스>, <죽은 시인의 사회>, <여고괴담>과 <짱>, <벽(The Wall)>등 총 다섯 편의 영화마다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영화 속에 나타난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교육과 그 현실에 대해 쉽고 편하게 이야기한다. 또한 영화 속 한 주제를 통해 교사나 학생, 학교를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깊이 있게 접근한다.

비록 영화라는 화려한 영상으로 교육을 들여다본다지만 현실과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학생과 마주하는 영화 속 선생님들을 보자니 하루하루를 핑계와 눈치로 적당히 넘기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그래, 이거야. 조금만 더 하자!”며 의욕적으로 시작하지만 늘 한 뼘의 실천과 끈기가 부족해 현실에 안주한다. 또한 교육에 대한 사회적 여건과 몰이해를 탓하면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에 타협해버린다.

하지만 책(영화)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도 엄연한 게 사실이다. 책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지만 책장을 덮은 현실에선 영화처럼 정직하고 화려한 결말이 준비돼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투철한 교육관이나 사명감 같은 격식은 벗어 놓고서라도 우선은 두 눈을 멀뚱멀뚱 거리며 주변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내 눈 앞에 있기에...
영화처럼 근사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조금은 더 나은, 아니 더 다양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심안을 열어주고 싶다. 더 준비하고 더 사랑하자. 부족하기만한 나를 되돌아보며 새롭게 다그친다.

마지막으로 영화와 교육학이라는 상이한 장르(?)를 결합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교육학을 쉽게 접해 볼 수 있도록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로 표현하려는 ‘크로스오버’의 노력이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닐까한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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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광수생각
박광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박광수.
세간에선 처자식을 버리고 젊은 여자와 놀아난 나쁜 놈이라 불렀다...

이혼과 재혼에서 오는 사회적 비판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것인지 자신의 야사시한 생각이 사회에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인지 제목부터가 ‘나쁜’ 책이다.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문구처럼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글과 삽화로 가득하다. 물론 간간히 기발하고 의미심장한 글이 보이지만 그저 그런 십 원짜리 농담따먹기에 가려 빛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화장실용 책이랄까.
좌변기에 앉아 멍하게 힘(?)만 쓰기 뭣할 때 훑어볼만하지만 다른 식구들이 볼까 변기 뒤에 그대로 두고 나오기도 뭣한 책 or 편의점에서 사서 보기엔 조금 비싼 책...

# 1
“너무 어려운 책만 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친구의 말과 함께 선물 받은 책이라 너무 혹평을 하는 건 아닌지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광수씨가 말했듯이 ‘나쁜’ 책이 아니던가. 그도 아마 이런 나쁜(?) 생각들을 이해하리라....

# 2
이것도 일종의 ‘문화사대주의’일까?
이름 있는 작가의 양장본 책에서는 뭔가 그럴듯한 의미와 주제를 찾으려 하면서도 이런 비주류의 책에선 “뭐, 이런 책들이야 뻔-하지”라며 스스로 담을 쌓으며 은근히 무시하는 건 아닐까......

# 3
욕! 너무 많이 남발하는 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삐-] [삐-]같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욕! 적당히 합시다! [삐...]

# 4
섹스를 얘기한다면 솔직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솔직하다고 모두가 섹스만 얘기하진 않는다...

성만생각. END.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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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human RED 001
살바도르 달리 지음, 이은진 옮김 / 이마고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을 여행할 때 흐르는 시계그림으로 장식된 달리(Dali) 전시회의 문양이 기억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달리의 한국전시회를 앞두고 이 책을 샀다. 단순히 초현실주의화가 정도로만 알았기에 이번 전시회도 찾을 겸 그에 대해 약간의 예습을 한다. www.freeism.net)

“또라이 아냐?”
그와의 첫만남은 마치 정신분열증을 다룬 의학서적에 첨부된 예화를 보는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 주변의 이목을 끌려는 듯 떼쓰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엉뚱한 행동에서 오는 특별함(남들의 이목만)을 위해 높은 곳에서 넘어진다거나, 친구를 계단 아래로 밀쳐버린다. 이렇게 비정상적인(달리도 인정했듯) 모습들은 세월을 타고 달리 전체를 이끈다.

그래서 얻어진 결론은... 싸. 이. 코.
이런 선입견 때문인지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가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황당하고 엽기적인 ‘만행’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달리, 당신은 싸이코요? 아니면 당신이 말 한대로 정말 천재란 말이요?”
희미하다. 가까이 잡으려 한 그의 모습은 더욱 멀어져버린 느낌이다.

단지 왕립학교의 초기의 무던한 모습(달리에게는)은 멋지게 보인다.
물론 이런 정상적인(?) 생활은 감옥행과 퇴학으로 마감하게 되지만 그림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만하리만치 당당한 모습들이 인상 깊다.

혹시 달리가 세상을 조롱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 그림을 봐. 난 천재라구! 늬들이 이걸 이해할 수 있어?’ 하면서 열광하는 대중을 향해 조소 띤 미소를 보내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찬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평생 ‘천재’와 ‘광기’라는 무대에서 쇼를 보인 건 아닐까 라고 말하면 지나친 음모론인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W’자로 말아 올린 엽기적인 콧수염만큼이나 현란한 자서전이다.
그의 그림이나 인생의 의미보다는 삶 중반에 자서전을 내놓으며 "엽기적이지만 나름대로 천재적 재능을 깨우기 위해 열심히 살았소!"라 외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
어쩌면 달리의 작품이 비싼 이유가 그 ‘용기’에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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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바람이 불고 있다. 다빈치의 후폭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출판사의 광고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선전효과가 더해져 올 여름을 휘어잡고 있다.
대부분 신간코너에서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한 철 지나버린 책들만 보다 모처럼 최신 유행의 책을 집어 들었다. 가끔은 ‘베스트셀러’ 목록 속의 세태 흐름에 무작정 동참해 보는 것도 남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미디어와 군중심리에 의해 조작된 ‘반짝스타’도 상당하지만 말이다.)

작년 여름, 프랑스에서 폭염을 피해 마신 하이네켄의 알싸한 취기로 루브르박물관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미로같이 다가왔던 긴 회랑과 높은 벽의 궁전, 그곳을 가득 매우고 있던 명장의 작품과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박물관의 기억과 함께 <다빈치 코드>를 읽는다.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찾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책장 속을 걸어간다. 순간 한국의 골방이 아니라 루브르박물관 중앙, <승리의 날개> 밑에 서 있는 듯 하다.

짧게 이어지는 단락과 빠른 전개는 이야기의 긴박함,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데?” 라며 친구의 응답을 다그치듯 책장을 넘긴다.
랭던(기호학자)과 소피(소니에르의 손녀)는 살해된 소니에르(루브르박물관장)가 남긴 이상한 메시지를 아나그램(철자의 위치를 바꿔서 새 단어를 만드는 것)을 통해 하나씩 풀어나간다. 곧, 이 메시지가 다빈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그림 속에 숨겨진 은유와 상징, 기독교의 역사와 성배의 진실을 향해 위험한 길을 간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장면들은 두 뼘 남짓한 책을 와이드스크린에서 보는 서스펜스 영화처럼 느끼게 한다. 나는 결정적인 순간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천천히 마지막 장을 펼친다.
미로와 같은 수수께끼의 터널을 지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한 랭던과 소피.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와 성배의 정체!

소설이긴 하지만 <다빈치 코드>는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논리적이고 탄탄한 구성으로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닌 실재했던 역사를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저 댄 브라운(저자)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과 가설, 그리고 상상력을 조합하여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리 인류를 창조한 ‘그’처럼 느껴진다.

“다빈치와 함께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비밀의 공모자가 된 기분”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가슴속의 보물하나를 넣어둔 기분이다.
어서 이 보물, <다빈치 코드>를 친구들에게 떠벌리며(?), 선물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PS:
이 글을 적고 다른 사람의 <다빈치 코드>에 대한 느낌을 찾아본다.
좋았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다는 사람이 극과 극을 달린다.
전자는 빠른 전개와 논리적인 구성에 점수를 줬을 테고,
후자는 베스트셀러 통속성과 할리우드 영화식의 가벼움에 비중을 뒀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다’라는 부분만은 대부분 인정한다.
그렇다면 나는 책 표면의 재미로 그 통속성과 가벼움을 놓쳐버렸단 말인가?
^^;
이런 오락가락하는 모호한 생각들 때문에 느낌을 쓰고, 느낌을 읽는 게 아닐까...


(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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